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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근무요원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처음 아동양육시설(고아원)이 공익근무요원으로서의 근무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으레 동사무소나 시청에서처럼 공익 같은 공익(?)의 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잡무를 하거나 개인적 시간이 많은 그런 공익생활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동들의 학습 지도, 병원에 차로 데려다 주는 것, 식자재 구입에서 부터 증개축을 할 때에는 건설현장 인부 같은 일까지 하였고 소집 해제 직전 몇 개월 동안은 요리를 담당해 직접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일이 힘들었겠다 싶겠지만 사실 가장 힘든 것은, 아동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 부모가 어디에 사는지 알지만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맡겨진 아이들 등 살아오면서 직접적으로 마주할.. 더보기
벗고 싶어질 때가 있을 걸 ‘벗고 싶어질 때가 있을 걸.’ 2016.12.02. 대부분의 친구들은, 졸업을 할 초등학교 인근의 중학교를 갔다. 하지만 나는 형이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체학급에서 단 10명 만이 진학을 했던 마산중학교에 지원했고 어렵지 않게 입학이 결정되었다. 굳이 형이 다니고 있다는 이유가 아니었어도, 유일하게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는 것도 큰 결정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중학교 진학이 결정되고 난 뒤, 내가 처음 한 일은 머리카락을 짧은 스포츠로 깎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두발자유화는 꿈 같은 소리였다. 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나는 스포츠 머리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되려 어색한 머리가 되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졸업앨범에는 정말 이상한 모습으로 찍힌 사진이 떡 하니 남았다. .. 더보기
현우의500자_101 ‪#‎현우의500자‬ _101 2005년 3월 공익근무요원이 되기 전 훈련소에 들어갔다. 4주의 짧은 훈련이었고, 훈련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다시 중대 건물로 돌아가기 위해 식사 전 대기하는 연병장을 지나려는 찰나였다. 내가 있는 곳의 반대편에 반가운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걷는 척 뛰어가서 외쳤다. 형! 대학 한 해 선배였다. 군휴학 이후 처음 다시 보는 얼굴이었다. 형도 반가웠는지, 신기하다를 연신 내뱉었다. 서울의 선배를 그곳에서 보리라고는 나 역시도 상상하지 못했다. 서로에게 훈련 열심히 받자는 격려를 남기고 다시 막사로 돌아왔다. 몇 일이 지난 뒤였다. 형과 내가 다시 식당 근처에서 우연히 만났다. 형은 다른 중대원들과 함께였다. .. 더보기
현우의500자_88 ‪#‎현우의500자‬ _88 공익근무요원이었다. 해군에 입대하고 나서야 내 시력이 군대를 갈 수 없을 만큼의 시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합병원에서 병사용 진단서를 떼어 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공익요원 판정을 받고 4주 간의 훈련 이후 내가 배치된 곳은 아동양육시설이었다. 부모가 버린 아이들이나 학대 받던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차량 운행 및 관리, 학습 지도 그리고 식사 준비가 내 업무 중 하나였다. 그날은 마늘 쫑대 볶음이 반찬으로 나가는 날이었다. 마늘 쫑대를 물에 데쳐 그것을 한 번 씻어 내고, 다시 볶아야 하는 음식이다. 마늘 쫑대를 물에 데치고 그것을 옮기려는데 손잡이 부분이 갑자기 헐거워졌다. 뜨거운 물이 내 왼쪽 허벅지 쪽으로 쏟아진다. 데친 마늘 쫑대를 버리지 않으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