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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12.03 시멘트 핫도그
  2. 2016.03.28 천안함 6주기
2016. 12. 3. 11:02 내 생각

‘시멘트 핫도그’ 20161203

 


2009 1,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위앙짠)의 근교, 어느 한 초등학교에서 2주간의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 유스클립(Youth CLIP)이라는 대학생국제교류단체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였고, 보건복지부의 후원으로 진행하게 된 봉사활동이었다. 2주간 내가 맡았던 업무는 다름 아닌 도서관 짓기였다. 그곳의 초등학교는 교사(校舍)와 화장실 건물만이 있는 곳이었기에 도서관을 세울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당시 현지에서 활동중이던 시민단체로부터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라오스에 가기 이전까지 내가 손에 벽돌을 잡아본 적은, 2006년 아동양육시설에서 공익근무를 할당시 식당을 증축할 때 뿐이었으므로 완전 초짜였다. 현지의 인부-라고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지역 주민들이었다와 협력하며 도서관의 바닥이 될 곳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학교의 정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오른쪽에 널찍한 공간이 형성된 뒤, 본격적으로 벽돌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평소 한국에서 길을 걷다가 집이나 건물을 새로 짓는 공사장을 지나가며 보았던 대로, 현지 인부들이 쌓아놓은 벽돌 첫 줄 위에 잘 게운 시멘트를 얇게 발랐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벽돌 줄을 만들기 위해 벽돌을 올려놓는 일이 반복되었다. 집중해서 몇 장 째 올리고 있었는데, 현지인 인부이자 2주간 봉사활동 끝에 친구가 된 뎅(빨갛다는 의미의 이름)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사래를 쳤다. 뎅이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라는 건 확실했다. 이어 뎅은, 자신이 들고 있던 망치로 내가 쌓아 올린 벽돌을 가볍게 툭 하고 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하며 놀라기도 전에 벽돌은 힘없이 툭 하고 쓰러졌다. 나는 당황했다. 분명 벽돌은 세워져 있는 듯 보였다. 몇 장의 벽돌이 아주 보기 좋게 줄지어 서 있었고, 그것은 내가 익히 보던 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뎅은, 그렇게 해서는 벽돌이 제대로 붙어있지 못한다며 직접 시범을 보였다. 잘 게운 시멘트를 한 움큼, 손에 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판자에 덜어내더니 그것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꽤 두꺼운 핫도그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세워져 있던 벽돌 위에 툭 하고 올려놓았다. 그럼 벽돌 위로 핫도그 모양의 시멘트 덩어리의 반 정도가 드러나 보였다. 나머지 반은 아래 벽돌과 접착되어 있었다. 드러난 반 정도의 시멘트 핫도그 위에 새 벽돌을 올리자 새 벽돌의 무게에 의해 시멘트 핫도그는 납작 눌려졌고,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들이 삐죽하며 묻어 나왔다. 그것을 시멘트 칼로 긁어내자, 그때야 비로소 내가 흔히 보던 모습의 벽이 드러났다. 이어 뎅은 다시 망치를 들어, 처음에 내가 세웠던 벽돌을 넘어뜨리던 강도와 비슷해 보이는 강도로 그 벽돌을 툭 하고 쳤다. 벽돌은 움직이지 않았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가 잘 접착되어 있었기에 벽돌은 큰 흔들림이 없었다.

 

방법을 알게 된 나는, 2주간의 시간 동안 벽돌 쌓기에 나름의 조예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실제 공사장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우스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여타 봉사자들보다는 빠르고 바르게 벽돌을 쌓아 올렸다는 것은 확실했다. 덕분에 내 손과 얼굴은 거칠어져 갔지만 말이다.

 

라오스에 가기 전까지 벽을 보면, 보기만 좋은 그 평평한 모습만 생각했다. 벽돌은 아주 얇게 바른 시멘트로도 충분히 붙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벽돌을 서로 붙이기 위해서는 보이는 양보다 보이지 않는 꽤 많은 양의 시멘트가 필요했다. 그것들이 끈끈히 붙어 무너지지 않는 벽이 되었고, 건물이 되었고 라오스에서는 도서관이 되었다.


 


우리 사회도 그렇다. 어떻게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을까 생각을 해보면, 겉으로 보면 별다른 것 없이 멀끔해 보이지만 사람들 사이 사이에도, 제도 사이 사이에도 두꺼운 핫도그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다. 그것이 개인 간에는 사랑일 수도 있고 가족 안에서는 책임감과 존경일 수도 있고, 사회 전체로 보면 법과 제도든지, 민주주의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겉에서 볼 때는 어떻게 지탱되고 유지되는지 궁금해 할 수 있는 것들이, 어떤 시련이나 고난이 닥치면 결국 이런 끈적임과 접착력이 그것을 지켜준다. 사랑, 가족애, 책임과 의무, 민주주의라고 했지만 그것들 결국 하나로 묶으면 연대(連帶)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아껴 여기고, 누구 하나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함께 손을 잡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너지려 할 때 힘을 모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주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시멘트 핫도그가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겉모습에 신경을 써온 듯 했다. 겉으로 멀끔하면 되니, 부실공사를 한 탓에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붕괴했고, 씨랜드에서는 유치원생과 선생님을 포함한 2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세월호가 가라앉으며 사망자 295명과 실종자 9명이 발생한 것이다. 겉보기에 배는 바다에 침몰하지 않을 듯 보였다. 바다에 빠지더라도 나라가 승객들을 구해낼 것이라는, 국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 사회적 연대는 원활히 진행되지도 않았다. 불필요한 색깔 논쟁과 유가족을 비난하는 글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법적인 책임만이라도 제대로 묻길 바랐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다시 말해 벽 안에 끈끈히 묻어 있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그것은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 필요한 시멘트 핫도그 보다 더욱 중요하다. 글을 적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공교롭게도 우리는 사회적 연대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가 누구를 지킬 것인가. 누가 국가를 지킬 것인가. 지킬 것은 자기 자신 뿐인 세상에 살고자 하는가, 아니면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가. 산업화가 주었던 사회적 연대 배고픔과 민주화가 주었던 사회적 연대 민주주의를 넘어 무엇을 사회적 연대의 목적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해 보인다.

 

일을 마치고 난 뒤 뎅과 술을 마시면, 우리는 서로를 격려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우리가 느꼈던 연대감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난 뒤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애국심 따위가 아니라 우리 친구의 이야기이며,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며, 우리보다 먼저 더 나은 우리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남긴 이야기들이다. 더 튼튼한 벽을 세울 것이다. 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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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28. 18:12 내 생각

“6주기”


천안함 폭침 6주기. 3월 26일은 6년 전 천안함이 두동강나고 바다로 침몰한 날이다. 나는 오늘 여기서, 천안함의 침몰 원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천안함은 내 유년을 지키고자 했던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2011년, 제10회 육군사관학교 안보토론대회에 참가했었다. 학부 시절의 마지막 대외활동으로서 선택했던 것이지만, 나는 우연히 아버지의 추억과 맞딱드리게 된다. 안보토론대회의 일정 중 해군2함대 평택기지에 전시되어 있는 천안함을 방문하는 일정이 그 계기였다.


천안함은 ‘정치’였다.


천안함과 관련된 논쟁에서 한 쪽의 이야기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 믿음에 맞는 데이터를 찾았다. 근거가 된 데이터들은 상대방의 신념이 ‘비합리’나 ‘종북’이라고 매도하는데 활용되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 입장과 태도에 별 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고, 천안함을 방문하기 직전까지도 그랬다.


안보토론대회 둘째 날, 평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맨눈으로 처음 보는 천안함. 형체가 기괴했다. 철판이 저렇게 휘어질 수도 있구나 라는 놀라움과 함께 저 배 안에 타고 있었을 해군장병들에 대한 애도와 측은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코리아 타코마.


천안함 앞에 세워져 있던 철제 입간판에 천안함을 건조한 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코리아 타코마. 익숙한 이름이었다. 아버지께서 다니시던 조선소의 이름이었고, 아버지의 작업복에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지금 저 천안함 전시되어 있는데 와 있습니다. 근데 건조회사가 코리아 타코마네요. 이거 아버지 계실 때 만드신겁니까? 응. 내가 만들었다. 천안함 진수식(처음으로 배를 바다에 띄우는 날)에 천안시장님도 오셨지. 그리고 자판기도 하나 놓아주시고 가셨다. 그날 참 사람들 많이 왔지.


87년에 건조되었다고 적힌 천안함. 내가 85년생이니 내 나이 3살 먹었을 당시 아버지께서는 조선소 노동자로서 천안함을 만들고 계셨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고, 국제정치를 공부하고 있는 아들이 두동강 난 천안함을 다시 만나고 있었다.


정치학을 공부하다 보면, 수많은 ‘결정적 시기’를 만나게 된다. 세계대전의 발발일이나 종전일 뿐만 아니라, 어떤 정치지도자가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친 시기 등, 다양한 시기들을 만난다. 한국정치사에서 결정적 시기라 할 수 있는 ‘천안함 폭침’이 내 삶과 연결되어 있는 경험. 새롭기도 했고, 일종의 감동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럴 것 같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께서 각기 다른 곳에서 고생을 하셨던 것은, 나라의 경제 발전이라는 결정적 시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으셨을 것이다. 또 민주화 시대의 삼촌, 이모들은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결정적 시기를 만들어 내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시대정신이랄까 시대의 대의는 사라져버린 지금,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결정적 시기를 지내며 그 시기에 대한 애정과 노력을 더하고 있는 듯하다.


20대 후반의 아버지께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땀 흘려 만드셨을 천안함을 역시 20대 후반의 아들이 정치학을 공부하며 마주하는 경험. 천안함 이 세 글자를 글이나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정치색이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나에게 있어서 천안함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천안함 6주기. 이날 생을 달리하신 장병 여러분에게 애도의 뜻을 표한다. 사랑 속에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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