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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6.03.31 37점
  2. 2015.12.31 "행복하세요?"
  3. 2015.04.12 나에게 바란다_5 (1)
  4. 2014.11.14 고마운 일
2016. 3. 31. 18:53 내 생각

“37점”


이제부터 여러분이 읽게 될 이야기는,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나 중에서 자신이 어디까지 나아질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나 그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본어를 내 나이 또래가 흔히 접하던 계기로 접한 것은 아니었다. 내 또래가 ‘흔히 접하던 계기’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을 통해 일본어에 흥미를 갖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일본어를 배우게 된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을 ‘오타쿠’라고 불렀는데, 최근에는 ‘덕후’라 부르는 듯 하다.


나는 ‘러브레터’라는 영화를 보고, 일본어에 흥미를 갖게 된 후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만’이라는 뜻의 ‘케도’라는 발음이 재밌었다. 그렇게 배운 일본어를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꾸준히 배웠다.


어떤 목적이 있어 배운 것이 아니었기에, 일본어능력시험을 치를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저 일본어를 배워 일본인과 말이 통한다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낀 것이 다였다. 일본어능력시험을 처음으로 치게 된 시기는 일본 교환학생이 끝날 무렵이었으니, 일본어를 접하고 거의 10년이 흐른 다음이었다.


일본어를 재미로 배우고 말하고 있던 대학교 1학년 2학기의 어느 날 일본 교환학생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다시 들어온 대학이었고 열정과 의지가 가득 찼던 시간이었다. 교환학생 모집 공고에는 ‘일본어능력시험 2급 이상 소지자와 그에 준하는 일본어회화실력을 가진 자’라고 되어 있었다. 자신만만하게도 회화실력 하나만을 믿고 지원을 했고, 덜컥 합격을 해버렸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일본 사이타마현의 한 대학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외국인 학생을 위한 일본어교실이 있었고, 그것은 교환학생이라면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었다. 수업을 듣기 전 반편성 고사를 치렀다. 그때 받은 점수가


37점.


기억에도 어렴풋이 남아있는 ‘매우 낮은’ 점수였다. 물론 100점 만점이다. 나는 내가 최하위반에 가겠구나- 생각을 했고, 일본어교실을 담당하고 계시던 교수님과의 면담에 들어갔다. 여자 교수님이셨는데, 보랏빛이 도는 여성용 정장을 깔끔히 입고 계셨다. 나는 자리에 앉았고, 교수님께서 내게 한 가지 질문을 하셨다.


‘시험지에 나온 글을 읽었지요?’


시험지에 나온 글을 읽었냐니.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그 뉘앙스가 묘했다. 읽다 읽지 않다의 ‘읽다’가 아니라, ‘읽어내다’의 읽다 였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다음 날 나는 내가 일본어교실 중 가장 높은 반에 편성이 된 것을 알았다. 그 반에는 일본어능력시험 자격은 물론, 일본어한자시험인지 뭔지 나는 알지도 못하는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쉽게 말해, 나보다 모두 일본어능력이 뛰어났다.


정말 힘들었다. 교환학생이라도, 아니 교환학생이므로 일반 일본인 학생들이 듣는 대학 수업도 들어야 했고 또 일본어 수업도 들어야했다. 오전에는 일본어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일반 수업을 듣었는데 내가 느끼는 난이도는 일본어 수업이 더 힘들었다.


말이 좋아 일본어교실이지, 일본의 역사나 일본 뇌사의 역사, 일본의 여러 이야기 등을 읽고 적고 쓰고 또 매주 시험을 치르기까지.. 힘들다는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일주일일주일이 빠르게 흘러갔다.


역시나 점수는 꼴등.


한 단계 아래의 반으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한 단계 아래로 가면 다음 학기에도 다시 최상급 반의 일본어수업을 들어야했고 그럼 이 고생을 다시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개겨 보기로 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또 한 달이 지나갈 즈음. 그러니까 한 학기가 한 달이 남은 즈음 점수가 갑자기 올랐다.


90점 대를 받기도 하고, 또 때론 두 개 이상 틀리지 않기도 했다. 놀란 것은 나 만이 아니었다. 우리를 가르치시던 일본인 선생님들께서도 놀라셨다. 하루는, 중년의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권 군의 실력이 급격하게 오른 게 화제입니다.


그만큼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멍청하게 보이는 것도 싫었고, 또 내가 어느 정도까지 나아질 수 있는지 궁금했기에 그 좋다는 교환학생, 그렇게 놀거 다 논다는 교환학생의 1학기를 일본어 공부와 학과 공부를 하며 보냈다. 물론 공부 밖에 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저녁에 피곤한 상태에서는 공부가 잘 되지 않자 새벽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일본어 단어와 문장을 외우기도 했고, 학과 수업은 내용 이해를 위해 매 시간 녹음을 해서 들었다.


일본어가 늘었다.


원했던 결과였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이룰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다. (힘든 일은 그 당시에는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결과가 좋든 좋지 않든 간에.) 내 일본어 실력은 엄밀히 말하면, 나의 노력이 일부 들어가 있는 내 주변 환경의 영향이었다. 쉽게 말하면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과 경쟁하고 힘쓰는 환경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겸손’이라는 가치로 자신의 가능성을 쉽게 낮춘다. 하지만 무엇인가 배우려는 사람은 겸손하되 겸손하면 안된다. 겸손이 필요한 순간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내가 아직 부족하구나’라는 것을 느낄 때이며 겸손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은, '나도 저렇게 잘 할 수 있어' 라는 욕심을 가져야 하는 순간이다.


앞서 이야기를 했듯이, 여러분이 읽은 이야기는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을 할 수 없는 여건인 사람도 있고 또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아주 충분히 힘든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지금 있는 곳 - 그곳이 학교여도 좋고, 직장이라도 좋고, 그 어디라도 좋다-에서 자신이 발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더 나은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다소 무리’라고 생각되는 범위나 ‘절대 무리’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자신의 몸을 움직여 보아도 될 듯 하다. 사람은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한다. 적응을 위한 초기에는 분명 힘들지만 어느 샌가 성장하고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일본어교실을 담당하시던 교수님께서는, 문제는 틀렸지만 그것을 ‘읽어낸’ 나를 평가하셨다. 다시 말하면, 나아지길 원하는 나의-학생의 욕심을 알아차리신 셈이다. 이런 교수나 선생님 혹은 선배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좋은 선생님과 함께 있다. 바로 자기 자신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누구나에게나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 중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고 그 배움을 통해서 더욱 나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글이, 하나의 방법이 되었으면 한다. 자신의 한계는 자신은 결코 모른다.


그러니 한 번 한계 너머로 자신을 던져보시길. 만약 너무 힘들어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한 번 더 참아보고, 그래도 정말 힘들면 그래도 한 번 더 참아보고 정말 죽을 듯이 힘들면 그때 돌아와도 된다. 그래도 당신은 그 전보다 성장해 있을 것이고, 그런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확신, 아니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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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31. 18:01 내 생각

행복하세요?”

 

나 뿐만 아니다. 내 옆사람 뿐만 아니라,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나 행복을 느끼고자 하는 것을 헌법에 명시해놓고 있을 정도다.

 

헌법 제10,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하지만, 때론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은 사뭇 불편하게 다가온다. ‘행복하다라 대답하기에는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들과 생계유지를 위한 돈벌이가 떠오르고, ‘행복하지 않다라고 대답하기에도 나를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과 여행을 가서 느꼈던 기분 좋았던 추억들이 입가의 미소와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묘답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그 답이란 바로, 행복할 때도 있고 행복하지 않을 때도 있다, 가 그것이다. 너무 싱거운 대답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언제나 행복할 수도 없고, 또 쉬지 않고 불행할 수도 없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는 그날 따라 인력거를 타겠다는 사람이 많았기에 행복했던 김 첨지가, 집으로 돌아가자 죽어 있는 아내를 발견한 이후 불행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덤덤하기에 그지없는 문체에는 행복과 불행이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문자 그대로의 행복추구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행복의 비중을 늘리고 불행의 비중을 줄이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누구를 만날 때, 어떤 생각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지를 우선 명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이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가진 병폐의 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행복이라는 것이 우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을 가고, 쉽게 먹지 못하는 것을 먹는 행위가 되어 버린 탓이다.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비교하도록 강요당하는 이상, 자신의 행복은 상대적으로 불행한 것으로 쉽게 여겨진다. ‘행복의 절대성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이런 상황은, “내가 느끼는 기분 좋음은, 행복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저런 멋진 것들이 행복의 조건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절대적인행복을 전제해버린 탓에 자신의 소소하거나 일상적 행복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넓은 숲을 가진 사람과 조그마한 텃밭을 가진 사람을 비교하면 넓은 숲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듯 보이지만, 조그마한 텃밭에서 기르는 작물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숲 따위 어찌됐든 좋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행복의 비중을 늘리기 위한 첫단추로써, 타인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비교하지 않는 것을 들 수 있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감정이라 표현하기는 했지만, ‘기분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대부분의 사람은 앞서 언급했던 대로 자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성인기를 맞이한다. 오로지 공부만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학창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었더라도 또 다시 설정된 외부의 목표에 의해, 행복 따위 느낄 겨를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소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안정적이라는 것을 방증하는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신이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용기에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뒤따른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자신이 무엇에 기분 좋음을 느끼는지를 성공한다면 하나의 행복을 찾은 것이겠지만, 실패할 수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다음 시도에 있서 첫 시도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도에 임할 수 있다.

 

이런 수많은 시도들을 통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나 익숙해진 습관이 형성된다면 그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찾으려고 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행복을 느낀다.

 

용기라고 적었다고, 지레 겁먹거나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지는 마시라.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도 느끼는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 나 이거 하니까 행복하네.’라고 느끼려는 시도와 노력으로도 용기는 생기기 마련이다. 용기란, 맹자에 따르면 누구나 갖고 있지만 발현하지 못한 그 어떤 성분에 지나지 않으니 한 번 속는 셈치고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행복을 느끼는 법에 대해 장황하게 적었지만, 정작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듯 보이는 불행을 줄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해답은 같다. 불행을 줄이는 방법 역시 같다고? 그렇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때에 불행을 느끼는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 우선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불편하거나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꾸역꾸역 그 사람을 다시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만남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만나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불행을 피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예를 들면 또라이상사나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가족 등을 만나며 살고 있다. 아니, 살아야 한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퇴사를 하거나 가출을 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하면, 퇴사를 하고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당신이 그러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테니, 현실적인 불행의 비중을 줄이는 방법을 알려주려한다.

 




불행과 불편을 구분하는 것.

 

불행과 불편을 구분한다면 또라이직장상사와 나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는가족으로부터 불행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불편은, 존재를 부정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것 혹은 그 사람이 내 주변에 있기에 느끼는 짜증남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었을 때, 발이 아프다고 느낀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단지 불편함을 느낄 뿐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불편함을 불행으로 느낀다. 직장상사의 잔소리와 감정적 대응을 듣는 것은 분명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을 들었다고 해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행과 불편을 구분 짓는 것만으로, 삶이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가족의 잔소리와 상사의 핀잔은 불편하지만 그것이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내 삶의 근간을 흔든다면 그것은 결국 불행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편과 불행을 구분지어야 하는 이유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주는 대상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서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사의 감정적 대응에 대해, ‘과장님, 그런 발언은 저를 불편하게 만듭니다.’라고 대응한다면 상사는 되려 화를 낼 것이지만, 어떤 것이 불편하지를 되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과장님, 그런 발언은 저를 불행하게 만듭니다.’라 대응하면 상사는 어떻게 대답할까? 모르긴 몰라도, ‘그래서 어쩌라고?’ 정도의 반응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행복과 불행은, 삶의 근간을 이루는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권리로서 인정받는 것이고, 불행과 불편을 구분하며 불편을 해소하고 불행의 가능성 자체를 줄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불행을 줄이는 방법에는 또 다른 것이 있는데,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많은 것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것이다. 불행을 느끼는 바탕에는,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어.”라는 일종의 포기가 내포되어 있다. 자신의 노력이나 시도를 통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은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력의 정도를 높이더라도 그것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불행을 줄이는 하나의 방법이다. 앞서 언급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시도나 해외에서 일어나는 각종 이슈에 대해서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등은 분명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해외에서 발생하는 테러에 대해서 무관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픔에 공감하되 나도 저기서 죽을 수도 있었겠다하는 불필요한 감정이입이나 세상은 정의롭지 않아라고 단정지어버리는 등의 태도는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행복하세요?”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다만 저는 행복을 늘리기 위해 살고 있고 불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장 적확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루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대답이라 생각한다. 또 대부분의 시간이란 행복도 불행도 아닌, 기억에도 남지 않는 일상들의 연속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행복의 절대성을 버리고, 자신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의 요소를 찾아야 한다. 또 불편을 불행으로 손쉽게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의지와 자신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과의 과감한 관계 끊기가 가능하다면, ‘추구할가치가 있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나날들이었지만, 오늘은 행복을 많이 느꼈다며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지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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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2. 01:32 내 생각

"오늘도 한 걸음을 열심히 걸었다."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이면 자신이 하는 공부나 향후 합격 이후의 삶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나누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신림동에서 만난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험 공부를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인 양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 합격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상상하고 기대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자기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좋은 태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합격이라는 지상명제를 얻기 이전까지 고시생은 고시생에 불과합니다. 고시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곧 구성원이 될 것이라 믿는 정부나 법조계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은 오히려 공부할 때에 가져야 하는 비판의식이나 문제의식을 쉽게 잠식해 버리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위험성 뿐만 아니라, 만약 자신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을 경우 가질 수 밖에 없는 박탈감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주변 고시생들의 합격 소식을 듣기라도 한다면 축하의 마음보다, 자책과 후회의 마음이 더욱 크게 들기 마련입니다.

과연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만 그럴까요?

최근에는 취업을 준비하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가야겠다, 마음 먹은 순간부터 자신은 이미 대기업에 속한 사람이 된 양 행동합니다. 예비창업자들 역시도 창업을 위한 준비도 채 하기도 전에 창업 이후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를 낙관적으로 예상합니다.

취업 준비생, 예비창업자 역시 취업과 창업 전 가장 필요한 생각들(예를 들면, 이 직업과 자신의 가치관이 부합하는지, 이 사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은 쉽게 무시하게 됩니다.

고시든, 취업이든, 창업이든 무엇 하나 쉽지 않다 보니 준비하는 시점에서 요구되는 생각들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나친 몰입은 합격을 한 이우에는 오히려 가질 수 없는, 자신만의 색깔이나 생각 정립의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있으니 경계해주길 바라는 마음만은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대감과 실망감의 간극에서 느낄 수 있는 자기 훼손입니다. 준비를 하는 순간부터 이미 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패를 하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원하는 것은 남도 원합니다. 고시든, 취업-창업이든 다른 모든 분야에서든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준비한다는 것 만으로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은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과도한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다는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언제나 실망은 기대보다 더욱 크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실망 이후에 찾아오는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자기 훼손입니다.

실패의 원인이 자기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어제의 휴식으로 인한 나태함, 또 때론 신이 자신에게 준 시련과 고난이라며 자기 자신을 한 없이 낮고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훼손은 오히려 나을지 모릅니다. 앞서 말한 자기 훼손은 협의(狹意)의 자기 훼손입니다. 광의(廣意)의 자기 훼손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가족의 경제 상황이나 주변 친구들의 방황, 연인의 존재 등)까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가시키게 됩니다.

협의든, 광의든 자기 훼손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자신이 가졌던 과도한 기대 심리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시나 취업-창업 뿐만 아니라 연인 관계의 파탄의 주요 원인이 되는 '네가 그런 사람일지 몰랐어'라는 표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기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기대감을 낮추면 됩니다. 기대감을 낮춘다는 것은, 시험 합격 이후나 취업 이후, 창업 대박 이후에 대한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낙관적인 기대를 유지하되 당장 그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루 아침에 삶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은, 사고나 생사(生死) 밖에 없습니다.

먼 미래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철저한 준비를 해야합니다.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의 기대란, 자신이 오늘 이룰 수 있는 목표치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소 책을 하루 7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오늘은 책을 10 페이지 읽겠다는 목표를 잡고 그것을 이루고 난 뒤의 기대를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이고, 취업, 창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고 그 단계는 꽤나 사소한 목표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큰 기대를 한 번에 잃었을 때 느끼는 실망감을 느끼기 보다, 작은 기대를 조금씩 쌓아가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는 사랑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투덜대고 잘 챙겨주지도 않던 사람이, 한 번의 큰 이벤트를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과거의 모든 잘못이나 섭섭함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 연인에 대한 사소하지지만 소중한 기대들을 쌓아나가는 과정에서 큰 기대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기나긴 다툼 끝의 다이아몬드 보다 오랫동안 주고 받은 따뜻한 편지 끝에 금 반지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기대는 자기도 모르게 커져만 갑니다. 겉잡을 수 없이 커진 기대감이 자신의 삶을 더욱 가치있게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근거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근거들은 이루어졌을 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실패의 가능성이 '0'이라 단언할 수 없는 상황들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예상해 기대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실패할래야 할 수 없는, 또는 실패를 하더라도 충분히 수긍가능한 기대를 조금씩 하며 쌓아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제의 밥 한 끼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처럼, 조금씩 꾸준히 기대를 채워나가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자기 훼손을 막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태도입니다.

한 걸음입니다.

높은 산을 오르든, 고시를 공부하든, 취업이나 창업을 준비하든 그것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기대는 결과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과정의 산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기대에 대한 성취로 삼으세요.

기대를 버리지 말되 기대의 단계를 나누어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기대에 대한 노력을 다하길, 로마가 하루에 완성되지 않았듯 우리네 삶도, 꿈도, 사랑도 역시 그럴 것이기에 꾸준히 노력하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만이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생각들을 너무 쉽게 '성취' 이후 자신의 모습에 몰입하여 놓치지 말기를, 자기 훼손을 야기할 수 있는 지나친 기대감을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으로 삼지 말길, ‪#‎나에게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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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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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망망 2016.03.07 23:06  Addr  Edit/Del  Reply

    좋은글잘읽었습니다~정말많이깨닫고갑니다.

2014. 11. 14. 02:28 내 생각

고마운 일. 2014.11.14.


# 4
집에 있으면 이유 없이 사람이 퍼졌다. 집에 있으면 행동거지가 자유롭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찌 살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집에 있으면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이 올리는 여러 미담들이 모여 있는 페이스북과 같은 SNS에 있는 것이 편했다. 그러던 생활이 익숙해질 즈음 집을 나가 신촌이나 홍대를 걸으면 사람이 신기했다. 아침에 나가보면 여자들의 갓 한 화장의 냄새가 풍겼고,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가정 전선 수호를 외치고 나가는 전사처럼 보였다.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노동의 숭고함이 보였다. 젊은 연인들의 스킨십에는 어색함과 사랑이 동시에 빛을 발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신기했다. 사람이 사람을 신기하게 여길 정도가 되니 내가 사람이 아닌 듯 느껴지기도 했다. 연극 무대라면 나는 이름조차 붙어 있지 않은 세트의 나무가 된 듯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물건을 살 때 나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고,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은 내 안부를 물어주었다. 내가 적은 글을 읽어주는 사람도 있었으며 나에게 그들의 삶을 담은 이야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집 밖을 무조건 나갔다. 나가서 길을 걸으며 사람 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 내 구경을 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구경했다.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을 구경했다. 카페에 앉아 몇 명이 읽는지도 모르는 장난 같은 글을 적어 올리기도 했고, 그러면서 혼자 킥킥대어 보기도 했다. 결국 글이란 자기 만족이라며 내가 만족했으니 그러니 됐다고 자위하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대중 속의 나를 바라보고 구경을 하니 재미가 있었다. 내가 변해가는 것을 보며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기도 했다. 
오늘 밤은 오랜만에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몇 편의 글을 적는 것은 아니지만, 또 이런 글 몇 편으로 내가 갑자기 변할 일도 없겠지만, 이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다들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고맙다. 살아있다는 것, 오늘 하루도 살아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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