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발" 20161124
어머니. 제목을 보시고 놀라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적고 싶은 글은 제목과 관련된 글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누군가를 비난하지도 해코지도 하지 않는 글입니다.
당분간 내년의 시험 준비 때문에 글을 적는 것을 멈추려했던 저에게, 아들의 글을 읽는 재미가 있으셨다는 말씀에 다시 하얀 화면을 마주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의 겨울이었습니다. 연도로 따지면 2000년이겠네요. 중학교 3학년이 되기 전, 저는 학교에서 꽤나 싸움을 많이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싸움의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이 저에게 '개새끼'라고 부르면 저는 무조건 싸움을 했습니다. 개새끼라는 것이 저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욕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개새끼'라는 욕을 들으면, 저는 으레 '우리 엄마아빠가 개가?'라 하며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리곤 했습니다. 제가 개새끼라는 말에 이런 반응을 한다는 것을 안 친구들은, 저에게 부러 시비를 걸기도 했습니다.
매번 이런 식이어서는, 학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어머니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엄마, 학교에서 친구들이 내한테 개새끼라고 한다. 우쨰야 되노?" 어머니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그런 욕은 듣는 사람 잘못이 아니고, 하는 사람이 잘못이다. 니가 잘못한 게 없으면, 그런 욕 들어도 신경쓰지마라. 니가 나쁜게 아니니까." 저는 어머니의 그 말씀에 마음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선 당부하셨습니다. "니가 욕을 안하면 된다." 그랬습니다. 저 스스로 나쁜 말을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개새끼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제목의 '씨발'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욕에 대한 문제들이 지나고, 중학교 3학년의 겨울이었습니다. 개새끼라 부르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나름의 논리를 가졌으나, 씨발은 아무리 찾아봐도 논리나 의미나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의 친구들은, 씨발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저 강해보이려 하거나 또는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썼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습관과 환경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도, 그렇다고 실질적인 효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거의 모든 친구들이 쓰는 씨발이라는 욕을 쓰지 않는 것이 어색해져갔습니다.
저는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씨발이라는 욕을 해도 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말입니다. 고민의 과정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기간을 정해 씨발이라는 욕을 마음껏 써보기도 하고, 또 어떤 기간에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지내보기도 하였습니다. 욕을 하지 않는 기간에도 습관적으로 내뱉어지는 욕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욕을 하는 기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욕을 하는 순간의 마음을 잘 살폈습니다. 그때 저는 제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이건, 강해보이기 위해서이건 욕을 내뱉으면 그 누구보다 먼저 내가 먼저 듣게 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제 마음에 울적함과 미안함을 안겼습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을 것이 분명했을 친구들이 안쓰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친구들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을테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런저런의 고민의 결과로, 욕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너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욕을 안하네." 무슨 말인지, 순간 못알아들었다가도 '아, 내가 욕을 잘하게 생긴 얼굴이구나.' 하는 사실을 가끔 거울을 보다 깨닫곤 합니다. 농담입니다. 그래도 평소 욕을 잘 하지 않습니다. 욕이 정말 목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화가 나거나 울분에 차거나 묘한 쾌감을 느끼고 싶을 때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외치곤 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해결이 되었구나, 싶으시겠지만 아직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욕을 하지 않아도, 친구들은 끊임없이 욕을 했습니다. 정말 끊임이 없었습니다. '아, 밥 잘먹었다. 씨발.', '날씨 드럽게 춥네, 씨발.' 등등이었습니다. 듣는 제 마음도 불편해지고 또 친구들 역시도 딱히 그렇게 기분 좋아 하며 욕을 하지는 않아보였습니다. 이런 친구들이야 웃으며 넘기거나 '욕하지 마라' 핀잔을 주고 넘기면 될 일이었지만, 또 다른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란, 바로 정말 저에게 진심을 담아 욕을 하는 경우였습니다. 감정이 맞지 않거나 서로의 인신공격 끝에 하는 그런 욕 말입니다. 이럴 때의 씨발은, 정말 씨발 같았습니다.
욕을 들어가며 푸닥거리 같은 싸움을 한 판 하고 난 뒤가 사실 더 어색했습니다. 어색했던 이유는, 제게 욕을 했던 친구와 저는 서로 사과를 하고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반 친구이거나 같은 학교 친구이거나 때론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얼굴을 치고 박고, 욕지거리를 단전 끝에서부터 올려 서로에게 내뱉던 적과 같은 친구와 다시 친해질 수 있을까,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며 지나가던 시간 중에, 다시 친구로 남아 거친 우정을 나눈 친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학교 복도에서 지나치며 얼굴을 보면서도 모른 척하고 인사조차 하지 않는, 쉽게 말해 절교를 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욕을 듣고 하는 것보다 더욱 불편한 마음이 남았습니다.
2016년 지금, 저는 다시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51.6%의 이야기입니다. 51.6%는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받았던 투표율입니다. 어머니께서도 아시다시피 투표자의 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은 우리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투표 당시에는 51.6%였고, 이후 고정지지층은 35%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은 고정지지층 마저도 사라진 5%의 지지율을 3주째 유지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51.6%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왜 할까 싶기도 하실 겁니다.
씨발, 이라고 욕을 하고 싶은 심정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만, 전 욕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욕을 듣고 하던 어렸을 당시보다 저는 지금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때문은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해온 이후, 국민은 누구나 선거권을 가지고 만 19세 이상이 되면 투표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투표권은 재산의 정도와 사는 지역에 관계없이 단 한 표 씩 국민에게 주어집니다.
저와 어머니는, 그런 민주주의의 선물이자 권리인 투표권을 가지고 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던 51.6%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되기 전에는 35%의 고정지지층과 함께 살아야 했고, 지금은 아직도 남은 5%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지지층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을 수 있도록 도운 여당과 그에 속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지금은 한 목소리로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는 그 사람들은, 과거 자신이 얼마나 박근혜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지를 과시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 날리고, 싸움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으로서 절교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어져야 하고, 어머니와 제가 사랑하는 주혁이와 혜빈이가 우리나라에서 꿈을 꾸고 수학여행을 가고,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라의 상황을 지금의 상황으로 만든 사람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정치인이라는 이름으로 티비에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마음껏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지요. 저는 그저 그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조용히 살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만, 그것 역시 쉽지는 않습니다.
어머니, 저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중학교 3학년 당시, 씨발이라는 욕을 할까 말까라는 고민을 했던 것보다 더욱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와 싸움을 하고 절교를 했던 친구를 다시 만날 일은 생길지도 모르지만,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만든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지는 않더라도 그들이 다시 권력을 잡고, 국민들을 괴롭힐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용서해야만 할까요? 제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누군가의 투표에 그 책임을 묻고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긴 할까요? 51.6%의 국민들은 편향된 언론과 부정선거에 버금가는 국정원 선거개입 등으로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정이 지금의 상황이 될 때까지 방관했고 오히려 그것을 도왔던 사람들을 저는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이번의 계기를 통해서, 반성할 사람은 반성을 하고 각성할 사람은 각성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야 한 걸음이라도, 아니 반걸음이라도 나아지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머니, 제가 소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3일 때는, 친구들 누구나가 쓰는 욕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저는 욕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고민의 결과에 답은 있을까요? 가볍게 생각하고, 법이 알아서 하겠지 라거나 똑똑한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넘어가면 저와 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고민을 떠넘기는 것이 아닐지 걱정도 됩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선거권,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국가가 상처를 받는 일이란 참으로 어색하고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도 듭니다만.
어머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욕은 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듣는 욕에 대한 불편함은 있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뒤부터 합리적 의견개진과 토론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합리성이나 정의 보다는 편가르기와 말 바꾸기 등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저는,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배 속의 똥처럼 품고 있다가 싸버려야 할 어떤 나쁜 것인지, 아니면 ‘암세포도 몸의 세포이니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어떤 미친 듯 보이는 드라마의 대사처럼 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욕과는 다르게, 이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 해나가야 할 듯 합니다. 어머니께, 넋두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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