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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7.01.23 칭찬은 고맙지만, 고맙지 않네요.
  2. 2017.01.18 일상에 산다
  3. 2017.01.18 노화방지
  4. 2017.01.18 산중턱이었다.
  5. 2017.01.04 우리 모두, 수수하지만 굉장해
2017. 1. 23. 20:03 내 생각

"칭찬은 고맙지만, 고맙지 않네요." 2017.01.23.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 중 가장 자신의 아이를 망치는 것이 무엇인가, 를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요.”

 

?

 

아이는 부모의 저 말을 듣고, 기뻤을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왜냐하면 머리가 좋다는 말은 분명 칭찬이고 부모로부터 인정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노력을 안한다는 이 말. 노력이야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당장은 칭찬 받은 것에 좋은 감정만을 느끼기로 한다. 물론 아주 특수한 경우이지만,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아이는 노력을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주변에 잘 보이지는 않는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책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다. 책 내용의 핵심이란, 수족관의 돌고래나 고래를 훈련을 시킬 때 곡예의 난이도를 높여가며 그것을 성공시킬 때 마다 먹이를 주면 돌고래나 고래가 좋아하더라, 하는 내용이다. 읽은 지 오래되어 자세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맥락은 틀리지 않았으리라. 내 생각은,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한다. 왜냐하면 돌고래나 고래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안타깝게도 몇 가지 곡예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만약, 잘생긴 연예인, 예를 들어 장동건이나 원빈이나 공유 등등 하도 많아 일일이 언급하기도 힘든 잘생긴 남자연예인들에게 잘생겼어요!’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자신도 모르는 바 아니었을 것이고, 처음 듣는 내용 아닐 것이며, 앞으로도 들을 말이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고맙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칭찬은 고맙지만, 고맙지 않네요.

 

칭찬은 분명 고마운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들어도 기분 좋은 말 중에 사랑해, 좋아해, 월급 들어왔다만큼 잘했네!’라는 말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고마운 일이 아닌 경우가 있다.

 

앞서 말한 이야기에서, 아이들에게 머리가 좋다라거나, 잘생긴 남자연예인에게 잘생겼다고 하거나, 마찬가지로 예쁜 여자연예인에게 예뻐요라는 말들, 마냥 고맙기만 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연예인을 예로 들긴 했지만, 우리 일상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수학을 잘하는 학생한테, ‘수학을 참 잘하는구나라는 첫 칭찬은 분명 그 학생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칭찬을 평소에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학생들이 수두룩할 터인데, 한 번의 칭찬은 분명 그 학생의 운명을 바꿀 만큼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할 것이다. 근데, 만약, 수학을 잘하는 학생에게 계속 수학을 잘한다는 칭찬을 해도 그 학생은 자신이 처음 느꼈던 어떤 보람이나 기쁜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칭찬에도 면역이 생기거나 점점 더 강한 자극적인 칭찬을 바라지 않을까?

 

칭찬은 고맙지만, 다른 칭찬을 해줘요.

 

가능하다면, 칭찬을 할 때 새로운 분야를 칭찬해주는 것은 어떨까? 새로운 분야란, 같은 수학이라도 내용이나 진도에 따라 다르게 칭찬을 해주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수학이 아닌 새로운 과목에 대한 칭찬을 해줄 수도 있다. 학생의 예를 들어 유치해 보일 수 있으니 어른의 이야기로 옮겨보자.

 

뭐 별 다른 거 있겠나. 성인이라고.

 

어른이든 청소년이든 아이든, 다만, 한 가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있지 않을까 하고. 칭찬을 받았다고 머무르지 말자. 칭찬은 기쁜 것이지만, 칭찬에도 단계가 있고 발전이 있고 또 성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도전,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서 칭찬을 받을 수도 있지만, 분명 비판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칭찬 받으며 또 동시에 비판 받으며 성장한다.

 

새로운이라는 말에, 기존의 것들을 모두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더욱 잘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노력으로 단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새롭지 아니할까.

 

추신 같지 않은 추신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칭찬을 하려거든, 이보세요, 칭찬하시려는 분들. 칭찬을 하시려거든 말입니다. 관심을 깊게 그리고 오래 가지셔야 되요. 순간순간의 칭찬은 순간순간 소비되고 맙니다. 하지만 칭찬을 해줄 대상이나, 마찬가지로 비판을 할 대상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세요. 쉽게 칭찬해준 사람은 쉽게 비난 하더라구요. 비판 말고, 비난이요.

 

타인을 깊이 있게 칭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도 성장하는 계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화(感化)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칭찬은 고맙지만, 더욱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시고 그때 칭찬해 주세요. 그리고 혹시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거나,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불성실하다면 따끔히 비판해주세요. 여러분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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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8. 11:24 내 생각

일상에 산다

 

사당의 한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일이 있었고, 몇 일이 지났다. 시비 자체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할 것은 없다. 그저 어리고 안타까운 영혼들이 술이라는 악마의 피를 마시고, 괜한 사람에게 자신의 더러움을 퍼부은 것. 그 정도의 술회를 갖고 있다.

 

내 입장에서는 억울할 일도, 화날 일도 없다. 어이가 없을 뿐. 그러나 몇 가지 느낀 바 있다.

 

더러움은 묻지 않았다. 내가 티 없이 깨끗하였다면 더러움 묻었을 것이나 그렇게 깨끗하지 않아 술집에서의 시비정도, 묻어도 묻은 티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양아치들과 같은 삶을 살았던 것 아니다. 살면서 몇 가지 잘못을 했고 그것을 반성하며 살고 있다. 누구, 잘못하지 않은 자 돌을 던져라. 순수하지 않기에 더욱 더러워지지 않고, 더더욱 상처받지 않는다.

 

그리고 일상.

 

더러운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복귀할 일상이 있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건 더러운 일 뿐 만은 아니다. 슬픈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일상이 있다는 건 소중한 일이다. 화나는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일상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나아가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쁜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일상이 있다는 건 필요한 일이다. 순간의 감정 변화가 삶 전체를 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감정의 충동은 일시적이라도 삶의, 일상의 주인은 나여야 한다는 것. 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참는 것이 아니다. 이기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삶 전체에 티끌 하나, 그것이 그림 전체를 망치게 두지 않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닌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새 그림을 그릴 수는 없고, 포기할 수도 없으나 뭐, 아직 그릴 공간이 남았고 그 그림 그리는 일상.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

 

언젠가 적었지만.

 

비가 내려도 바다는 여전히 짜다. 파도가 쳐도 바다는 여전히 짜다. 시련은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 시련이지도 않은 것들은 하물며. 헛헛, 웃으며 일상에 있다. 일상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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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8. 11:22 내 생각

노화 방지

 

흐른 만큼 충분히 흐른 시간.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20대가 접어들자 마자 죽어갔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은, 역사책에서나 잠시 등장할 뿐이다. 수명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20대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게 된 것은, 10대 이전부터 받기 시작한 노화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지금의 시점에서의 노화란, 20대가 된 후부터 다시 8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그 시작이었다. 실제로 노화가 진행되지도 않은 시점에서부터 노화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된 것은 반어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10대를 지나며, 20대 이후부터의 삶이 나머지 80년을 좌우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이 20대 이후 죽어버린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별다른 건 없었다. 그저 10대가 된 순간부터 앞으로 남은 10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내고 또 알차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 숭고하고도 또 긍정적인 고민이 결국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80대 노인을 발견한 이가 있었다. 많은 신문과 방송에서는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 발표했고, 이제 갓 10대가 넘은 전문가들은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 분석을 시작했다. 그 결과로 그 노인이 어린 시절 뽀로로의 노는 게 제일 좋아라는 부분을 보지 않았고, 터닝 메카드의 과학적인 변신 장면을 보지 못했던 것이라는 매우 심각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노인을 직접 인터뷰한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죽음을 얼마 남지 않은 17세 여자였다-는 노인과의 만남을 이렇게 술회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 80대 노인은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10대 때에도, 20대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별 생각도 그리고 감정도 갖지 않았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데 집중했을 뿐이었다. 많은 10대의 사람들 그리고 10대를 준비하는 10살 미만의 어른들은 그 노인의 삶에 공포와 경의를 동시에 느꼈다. 삶을 살아가는데, 그리고 저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감정과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가능한 것이라는 놀라움과 저 때까지도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공포.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30대의 삶을 그는 겪었던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는 끈질기게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노인의 피에 특별한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경찰청은 조사팀을 꾸려 그 노인을 체포했고, 혈액 검사를 실시했다. 노인의 혈액을 검사해 본 경력 10, 19세의 의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상 없음.”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자, 다시 방송과 신문에는 그 노인의 전혀 특별하지 않은 것이 특별한 것이라며 특종을 방송했다. 혈액형은 O, 특징적인 것은 낙천적. 이 정도가 특징이었다. 이 노인에 대한 종합적인 소견을 발표하는 경찰청장, 나이 20, 곧 사망 예정은 이 남자가 특별한 위험성은 없으나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위험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노인처럼 별 일 없이, 별 탈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감정 없이, 아무 계획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알게 되면 그들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불안이 위험했던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문구는 이 사회에서는, 금기어가 된 것처럼 청춘의 시기는 아프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노인은 아프지도 않았고 그 아픔의 원인이 되었던 고민, 갈등, 성장 등에 대한 걱정들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경찰청장은 검찰에 공식적으로 기소 의견으로 수사를 의뢰했다. 검찰은 이미 이 노인에 대해서 명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 명확한 정보란 앞서 말한 아무런 생각 없음이다, 사형 구형 의견으로 법원에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마치 검찰의 기소를 기다린 것처럼 기소 의견을 받자 마자 판결했다. ‘사형.’ 판사(19, 경력 12, 7세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나 매우 늦은 나이에 합격한 것으로 유명, 평균 사법고시 합격 나이 5.)는 선고문에 이렇게 밝혔다. “고민이 없이 사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10대의 고민은 평생을 좌우한다. 이 노인이 태어났을 당시, 2010년대에는 10대의 고민을 통해 20대에 일반적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30대에 결혼했을지 모르나 이런 사례는 매우 평범하고 또 몰지각하며 또한 지나치게 평범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화되었고, 10대 이전의 고민을 통해 10대에 무엇인가를 이루지 않으면 그 인간은 쓸모 없는 인간이다. 따라서 이 노인은(노인이라는 표현 역시 사회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으므로, 이 판결 이후 모든 사회에서 노인이라는 표현은 불가토록 한다.) 사회에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고, 이미 지난 60년 간 그 죄를 저질렀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본 법원은 이 피의자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이 선고되고 나자 그 재판정에 있었던 10대 방청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고민 없이 사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당장 사형에 처하라! 라며 외치기 시작했고, 재판정 안은 무법지대처럼 변했다. 젊음은 혼란을 뜻한다는 이 시대의 직언에 매우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다 10대의 방청객들 중 8명이 노인에게 뛰어 들어 몰래 숨겨 들고 왔던 칼로 노인의 등과 배와 목과 허벅지와 팔목과 눈과 그리고 발등을 찍었다. 수 십 차례 난자가 이뤄지고 난 뒤 노인은 목숨을 잃었다. 그 목숨을 잃게 되는 눈 앞에 노인이 알아본 유일한 이가 있었으니, 노인을 살해한 한 19세 국회의원이었다. 나라를 운영하는데 자신의 노후를 다 바치고 있었던 그 국회의원은, 노인의 목을 찔렀고 그것이 노인의 죽음에 주효했다. 하지만 이 국회의원, 이 노인의 후손이었다. 자신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낳은 아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후손은 노인은 이렇게 말을 하며 죽었다. “브루투스, 너마저.” 노인의 후손의 이름은 브루투스, 19세 국회의원이었고 그는 이 말을 듣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 내가 행한 이 행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야겠다. 그것이 내가 살아갈 길이다.” 그리고 이 브루투스는 20세가 되어서도 죽지 않았다. 멍하니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감정 없는 표정으로, 눈물샘은 스스로 말려버렸으며 그 어떤 이와도 생각을 나눌 수 없게 깊은 산 속, 자신의 손으로 죽인 노인이 숨어 살 던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평생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다 2010년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죽었던 나이 100살이 되어서야,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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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8. 11:19 내 생각


"산중턱이었다."


산중턱이었다. 어린 시절이었으므로 오르긴 힘들었지만, 한 번 오르고 나면 높은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탁트임과 그로 인한 청량감이 들었다. 할머니의 집(할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므로, 주말마다 방문하는 곳은 자연스레 할머니의 집이 되었다, 그리고 정식명칭은 할매집이다.)은 산을 뒤로 세워진 단독주택이었다. 넓다거나 크다고는 하지 못했지만, 형과 내가 뛰어 놀 만큼의 공간은 충분했다. 그리고 결코 한 번도 빠져보진 못하겠지만 마산의 명치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합포만은 또 그만큼의 상상력을 제공해주었다.

 

할머니집에서 가까운 곳에는 우물이 있었다. 할머니의 집 바로 앞 아래쪽에는 200평 남짓 되는 밭이 있었고 그 밭과 아랫집 사이에 흙길이 있었다. 그 흙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바로 그 우물이 있었다. 생각하는 그런 우물은 아니다. 물을 길어 쓰는 우물이 아니라 물이 넘쳐 흐르는 우물이었다. 무학산 줄기에서 흐른 물이 지하로 타고 흘러 마침 그곳에서 솟아 올랐고 그 물을 사용하기 위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시멘트로 만든 우물이었다. 우물 주위에는 이끼나 고사리 같은 것이 푸르름을 더하고 있었고, 가끔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보라색 조그만 꽃들도 보였다. 그리고 아주머니들.

 

빨랫감을 들고 나와 빨래를 하는 아주머니들. 그들의 손에도 조그마한 꽃들이 피었다. 보라색은 아닌, 붉은 꽃. 그 꽃은 사람 손과 꼭 같았다. 붉게도 피었지만 손목에 붙어 부지런히 빨래에 묻은 삶의 때와 먼지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크지 않은 동네였으므로, 내가 그 옆을 지나갈 참이면 그 꽃들은 내 손을 잡고 내 볼을 꼬집었다. ‘해누, 왔나~.’ 인사를 꾸벅, 하긴 하지만 누군지 알지 못하는 아주머니들이다. 그저 매주 얼굴을 보고, 성씨를 붙이거나 출신지역을 붙인 ‘~으로만 불리는 아주머니들이다. (참고로 우리 할머니는 뒷길댁으로 불렸다. 길 뒷편에 살았기 때문이리라.) 꽃과 같은 손, 손과 같은 꽃들이 빨래를 하고 있는 그곳은 매주 할머지집에 갈 때마다 꼭 한 번씩 들렀다. 여름이면 거기서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웃통을 벗고 등목을 하기도 했고, 어머니를 따라 빨래를 하러 가선 이끼나 풀잎들을 뜯어다가 흘러가는 물에 슬며시 올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우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내가 성장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이 흘러 할머니께서 이사를 하셨다. 혼자 사시기엔 큰 집이기도 했고 또 그만큼 융통할 수 있는 돈이 궁색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또 다른 할머니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다 몇 해 전, 우연히 그 우물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바짝 마른 우물, 그리고 더 이상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그 공간.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았고 누가 보아도 그저 둔덕이었다. 빨래를 하는 손 빨간 아주머니도 없었고, 나를 불러 세우는 이도 없었다. 나는 그 사이, 그곳을 오르는 데 힘을 들이지 않았고, 가능하면 차를 타고 가거나 할머니집 바로 뒤에 생긴 산복도로에서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그저 그랬다.

 

10여 년이 지나며 많은 것이 변했다. 할머니집이 있던 동네에는 소방도로가 생겼고, 그 소방도로로라는 주차공간이 생기자 사람들은 차를 타고 동네를 드나들었다. 그 동네에 살던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또 그렇게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 채워지는 새로운 동네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나는 청소년을 지나 성인이 되어 있었고, 메마른 우물 하나 보다 더욱 메말라 있을지도 모를 감성, 감정을 갖게 되었다. 살면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어릴 적의 추억이라기 보다 하루하루, 강하게 내리쬐는 감정 없는 논평과 시선과 그리고 생계, 그런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만약.

 

변하지 않고 만약, 그 우물이 그대로 예전처럼 흐르고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푸른 이끼가 묘한 징그러움을 선사하고 보라색 조그만 꽃과 붉은 손꽃이 나를 반겼다면, 나 역시도 그 당시의 순수한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느낌으로 내가 다시 감정이 흘러넘치는 우물이 되어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길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랑은 모텔에서의 2시간으로만 상징되는 이곳에 한 방울 한 방울 감정을, 떨어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우물이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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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4. 21:25 내 생각

독서는 취미랄 것도 없으니, 굳이 최근에 내가 가진 취미를 말한다면 “일본 드라마 시청” 정도다. 드라마 시청이 취미라니 참 별 것 아닌 취미다 싶기도 하지만, ‘영화 감상’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취미에 속하는 것이 드라마 시청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왜 영화는 감상이고, 드라마는 시청이라 부르는 것일까. 이왕 취미라고 적을 거, 멋드러지게 일본 드라마 감상. 이게 내 취미 되시겠다.


최근이라 해도 작년(2016년)의 일인데, 취미의 일환으로 보았던 두 편의 일본 드라마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 편은 2016년 2분기 드라마 “중쇄를 찍자 (원제 : 重版出来)”이고 또 다른 드라마는 2016년 4분기의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원제 : 地味にスゴイ、校閲ガール河野悦子)”이다. 일본은 1년을 4분기로 나누어 드라마를 제작하고, 큰 변동이 없는 이상 한 편의 드라마는 10화 안팎으로 제작된다. 거의 모든 드라마는 사전제작의 형태로 제작되기에 중간에 스토리를 바꾼다거나 또는 불필요한 설정이 없는 것으로 일본드라마는 유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 드라마가 유명한 점은, 다양한 직업에 대한 소개와 그 직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게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것이 작년의 앞서 소개한 두 편의 드라마가 기억에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두 편의 드라마 모두 출판과 관련이 있다.


우선 “중쇄를 찍자”라는 드라마는, 출판업계 중에서도 만화잡지를 만드는 편집하는 부서에서 일어나는 일을 배경으로 한다. 유도선수로서 체육대학을 나왔지만 부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된 신입직원(주인공)이 만화잡지를 만들어 나가고 편집자로서의 역량을 쌓아가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주된 내용은 아니지만 기성 만화가 및 신입 만화가가 느끼는 고충, 잡지를 통해 내어야만 하는 이익과 그와 동시에 담아야만 하는 독창성 간의 미묘한 갈등 그리고 영업사원이 느낄 수 있는 보람 등에 대한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다. 글로 적으니 드라마의 내용이 중구난방인 듯 보이지만, 드라마를 본다면 앞선 내용들이 주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본 드라마는 교훈을 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드라마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만화가와 만화잡지를 편집하는 편집자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만화가보다는 ‘만화잡지 편집자’라는 직업이 가진 어려운 점과 그런 어려운 점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보람을 간접적으로라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만화잡지의 편집자는 결코 우리가 직접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역시 출판업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드라마지만, 여기에서는 편집부서가 아닌 ‘교열’ 부서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로 다룬다는 것이 앞선 드라마와는 차이가 있다. 제목에서 이름이 드러나 있는 주인공, 코노 에츠코는 패션잡지의 편집자가 되기를 원해 ‘케이본샤’라는 출판사에 입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입사 후 알게 된 그녀의 부서는 책의 오탈자나 내용 상의 잘못된 점을 찾아내는 ‘교열부’. 패션잡지라면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보는 그녀이지만, 책을 내기 전에 교열을 한다는 사실 조차 몰랐던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책을 교열해 나가며 교열부의 다른 직원들 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직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책상에 앉아 모든 교열을 했던 직원들이 사실관계 확인이나 지명 확인들을 위해 현장조사를 나가기도 하고, 평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담당하며 팬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교열까지 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단순히 작가가 적은 글을 수동적으로 교열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열의 범위 내에서 교열자로의 의견을 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이런 변화를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이끌어 냈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데 까지가 그 범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열부 혹은 교열담당 직원들은 일반 독자들은 앞선 만화잡지 편집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그 존재를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취미’로써 갖고 있는 일본 드라마 ‘감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과 몇 일 전 새해가 되어 내게 들려온 한 가지 뉴스 때문이다. 그 뉴스란 국회에서 일을 하시는 청소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협력업체 직원의 지위에서 정규직인 국회 직원으로 전환되었다는 뉴스였다. 몇 해 전부터 국회 청소노동자의 지위와 대우에 대하여 국회 안팎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쉽게 사람들의 기억이나 관심에서 잊혀졌고, 그렇게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2016년 작년의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의 여야 구성이 변경되었고, (역시 나는 모르는 사이) 청소노동자의 지위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는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딜 가나 쉽게 청소노동자를 만날 수 있다. 그곳이 도서관일 수도 있고, 빌딩의 로비나 공항 등 어디든지 청소를 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잘 찾으면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나 업무를 보느라 혹은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는 청소노동자의 모습은 쉽게 눈 앞에서 사라진다. 분명 존재하는 사람들이지만, 당연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나 처우는 망각되고 만다. 그리고 깨끗해진 화장실 거울과 비워진 쓰레기통,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건물의 로비를 걸으며 누군가 이곳을 청소를 하고 있겠거니- 정도의 판단만 한다.


나는 이번 국회의 청소노동자들의 정규직 국회직원으로서의 전환에 대하여 찬성의 입장이다. 하지만 국회가 끝은 아니다. 그리고 시작도 아니다. 당연한 것을 그 시작과 끝을 나눌 수 필요는 없다. 우리 사회에는 남들이 하지 않으려 하거나,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중 정확히 몇 퍼센트가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나뉘어져 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갖고 그 보람에 상응하는 직업적 안정성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


그 성과나 결과물에 대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내걸거나 표시를 필요로 하는 직업이란, 사실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그 일 속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있다. 굳이 티를 내어야 할 필요성도 또 그것이 그들의 삶에,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정성과 삶에의 필요성을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더욱 건강하게 되는 또 하나의 필요충분조건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 수수하지만 굉장한 일을 하고 살고 있다. 어떠한 직업이든 자신이 언제 그 굉장한 일을 그만두게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나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면, 그것은 목적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고 직업이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존재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일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든 각자의 생계와 삶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직업을 통해 행복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글을 마무리 한다. 우리 모두, 별 볼일을 하는 듯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굉장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길 바라며. (아, 그리고 소개한 두 편의 드라마는 꽤 재미난 드라마이니 한 번 나와 같은 ‘일본 드라마 감상’을 취미로 가진 분이라면 감상해보시길.)


이미지 출처 : http://channel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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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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