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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38 해외봉사활동 후기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진짜진짜 마지막으로 쇼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진짜를 두 번을 적었는데, 조금 뒤 세 번을 적게 되는 시간이 올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 적고 있지만, 사고 싶은 마음은 한국에 택배 보낸 지 오래였기 때문에, 예쁜 물건이나 많이 보자 라는 생각으로 가게들만 기웃기웃 했다. 정기연 군이 여자친구 원피스를 사준다기에 따라가기도 하고, 이창선 군이 돈이 모자라다 길래, 돈을 빌려주기도 하면서 빈둥빈둥했다. 이제 공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차를 타기 위해, 다시 마마스 식당 앞에 모였을 때, 거의 다들 폴로 종이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가격 비교 우위가 무서운 것이군생각하면서, 한마디 내 뱉었다.

‘YES. WE POLO!’ 원래 우리 팀 구호가 ‘YES, WE CAN’ 이었는데, 나를 포함해서 다들 폴로를 하나씩 구매했기에, ‘YES, WE POLO!’

공항으로 향하는 길은 어두웠다. 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었지만, 아무리 내 눈에 불을 켜도 볼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다. 몸은 피곤했고, 아침부터 입고 있었던 옷은 땀 냄새가 날랑 말랑 하였다.

피곤한 것은 한국에서 피곤해도 되니까, 조금만 더 여기 있다가 갔으면 좋겠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투정을 부려보았다. 공항에 오니 실감이 났다. 작년 라오스에서 한국에 돌아올 때는, 울었다. 그때는 낮이어서 눈물을 숨길 수도 없었다. 공항까지 같이 와주셨던 지구촌 공생회 라오스 지부 지부장님과 휘하 직원들, 그리고 통역을 담당했던 벨까지 공항에서 와서 손을 흔들어주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라오스에서는 눈물이 났지만, 이번 발리 봉사활동은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있는 힘껏 즐거웠다. 더 피곤해져도 되니까 더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항에 와서 이렇게 이야기 해본들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언론의 자유!는 있으니까.

오후부터 와 있었을 짐과 상봉을 하고, 주섬주섬 짐을 다시 챙겼다. 없어진 물건이 있는가 다른 단원들의 물건은 다들 괜찮은가를 살피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공항 카트를 정렬해 놓았다. 현지 운전기사분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다.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눴던 운전 기사의 손도 두꺼웠다. 아버지인가보다. ‘뜨리 마카시더 많은 수식어를 붙여서 고마웠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짧은 영어에, 몇 개 단어만 외우고 있는 인도네시아어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환한 미소와 함께고마웠습니다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어는 과거 시제와 미래 시제가 없다. 다른 운전 기사분은 브라딴 호수에서 싱아라자로 오늘 차에서 운전을 하셨던 분이었고, 손지혜 양에게 앞자리를 빼앗겨 차를 옮겨야 했지만, 뛰어난 운전실력을 갖추신 분이었다. 바비 굴링을 먹으러 가는 길에, 코카콜라의 트럭이 지나가자, 경적을 울렸고, 가까이 다가가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는 사람들입니까?’라는 질문에, 자신은 10년 동안 코카콜라에서 일을 했었다는 대답. 웃음이 선했던 운전기사 분이다. 이날에도 에피소드를 하나 만들어 주셨는데, 부두굴에 점심을 먹기 위해 도착을 했을 때였다. 나에게 다가와, ‘너랑 자리 바꿔서,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여학생, 너무 잘 잔다.’ 그렇다. 손지혜 양은 너무 잠을 잘 잤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나에게 와서 들려주는 운전기사의 순수함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눴다. 역시 손이 두꺼웠다.

 

 

공항으로 들어오니, 국적의 전시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서는 일본어가, 또 다른 곳에서는 중국어, 그리고 우리는 한국어를 쓰고 있었고, 옆에 단체 신혼 여행 팀인 듯, 예전 게임 중에 같은 모양의 벽돌을 두 개 모으면 그 둘은 사라지면서 벽이 낮아지는 게임이 있었는데, 다들 같은 모양의 벽돌과 같이 커플 룩을 하고 있었다. 사라질까?

단원들에게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공항에서의 주의점을 알려주었고 단원들은 순간 긴장했다가 자신들이 해당되는 사항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자유방임 상태로 돌아갔다. 2번의 보안검색을 하였는데, 첫 보안검색은 큰 의미가 없었다. 물이 든 물병을 그대로 들고 들어가도 제재가 없어, 공항에 있으면서도 물은 편하게 마셨다. 면세점에 들어가기 전의 보안검색은 다른 공항과 같이 엄격히 진행되었으므로, 장난은 허용되지 않았다. 짐을 붙이고, 좌석을 받았다. 54A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한다라고 적는 이유는, 한국에 돌아온 뒤, 기숙사 방을 옮기면서 좌석이 적혀 있는 항공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창가 자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하얗거나 검거나 빛나거나, 아니면 내가 자고 있거나 이 중에 하나라는 것이 내가 가진 생각이었기 때문에 가장 좋은 자리는 다리를 펼 수 있는 비상문 앞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이제 공항 면세점 안으로 들어갔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을 들어가자, 어찌나 면세점 느낌이 나는지. 일본, 대만, 필리핀, 라오스, 인도네시아, 태국의 면세점을 돌아다녀 봤지만, 태국의 면세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똑 같은 모습의 면세점 일색이었다. 진하게 풍겨오는 향수 냄새며, 나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명품의 가게들.

또 단원들은 게이트 앞에서 몇 시까지 모이라는 지령을 받자 마자, 쇼핑을 하러 나섰다. 이때, 진짜진짜진짜 마지막으로 몇몇의 단원들은 폴로 쇼핑을 하게 된다. 생각보다 꽤 넓었던 면세점은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상점은 열려 있었고, 다들 아쉬워하는 표정들이 역력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기 위한 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몇몇 단원들과 같이 다녔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 조용히 걷고 있길래 좋아라하고 걸어 다녔다. 유심히 하나하나 살펴보고, 막다른 길에 다다라 혼자서 부끄러워도 해보고, 일본사람하고 부딪혀서 스미마셍이라며 오랜만에 일본어도 써보고, 향수도 뿌려 보면서 다녔다. 폴로 매장과 폴로 랄프 로렌 매장이 있길래, 살 의지는 전혀 없으면서 입어도 보고 벗어도 보았다. 점원은 싸다고, 싸다고 사라고 했지만 나는 비싸다고 비싸다고 안산다고 했다. 우연히 지나가시던 이미숙 선생님을 만나 같이 게이트로 향했다.

 

그때, 작은 사이즈 보라색 폴로 찾았니?’

아니요.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처음 르기안에서 폴로 매장에 갔을 때, 마음에 드는 색깔이 있어서, 내게 맞는 사이즈가 있는가 해서 물어보니 없었던 옷이 있었다. 한 치수 큰 사이즈의 옷을 입어보면서 거울을 보고 있으니, 먼저 물건을 사시고 밖에서 기다리시던 이미숙 선생님께서 물을 열어젖히시며, ‘그 색깔 어울린다!’라고 외치시기에 깜짝 놀랐다. ‘늦었으니 빨리 가자라는 말을 기대했지만, 전혀 다른 말씀으로 나를 당황하게 하셨다. ‘보라색 사이즈 맞는 폴로 티 찾기 놀이는 남은 일정 동안 계속 되었지만,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 언젠가는 만나겠지.

 

 

게이트 앞에는 몇몇 단원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시간으로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다들 피곤해 보였다. 다들 모였는지를 확인을 하고, 여권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그런데! 전재하 군이 여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재하 군은 여권이 금방까지 있었고, 여권을 내려놓거나 한적이 없었다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다시 천천히 한번 찾아보라고 시간을 주었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에, 쓰레기를 버렸는데 혹시 같이 버려진 것인가 해서 쓰레기통을 뒤져보니 여권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쓰레기를 버렸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여권을 쓰레기통에 그냥 버려둔 채, 여권을 찾지 못했다면 다친 사람 없이, 잃어버린 물건도 없이 잘 끝날 이번 봉사활동이, 전재하 군의 불행으로 슬퍼질 뻔 했다. 찾아서 다행이라며, 처음 도착해서 정윤성 군이 여권을 비행기에 선물로 주고 올 뻔한 사건을 기억해내며, 처음과 끝이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비행기표를 승무원에게 보여주고, 좌석을 찾아 갔다. 좌석을 찾아가니, 게이트 앞에서 같이 기다리던 국적을 알 수 없는 어깨 넓은 남자가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 이거 고생 좀 하겠구나라고 생각을 하면서, 혹시 자리가 남는 것이 있을지 승무원에게 물어보자, ‘아직 탑승이 끝나지 않았으니, 잠시 기다리시면 탑승이 완료되는 대로 자리를 찾아 보겠다.’ 라고 유수연 승무원이 알려주었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잠시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상냥했고 또 아름다웠기 때문에 기억을 하고 있다. 물 한잔을 부탁하기에 미안했다 랄까.

발리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는 자리가 많이 비었다. 좌석번호 50번이 넘는 단원은 나 뿐이었던지,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 가서 앉아도 되냐고 묻자 편하게 앉으시라고 하였다. 정기연 군과 이창선 군이 앉아 있는 창가 자리 뒤에 두 자리가 비었길래 거기 앉았다. 2자리가 모두 빈자리였으므로, 의자 위에서 가로로 눕기도 하고 다리를 뻗기도 하면서 7시간을 날아 왔다. 한국 시간으로 6시 정도에 잠이 깨어, 창 밖을 보면서 지금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구름이 맑네 하면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한국 시간으로 9시 반 정도에 비행기는 활주로에 바퀴를 대었고, 이리저리 수화물을 찾고 입국 수속을 받고 하다 보니 10시 반 정도에 모든 단원이 자신의 짐을 가지고 공항으로 나와 있었다. 영화처럼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환영합니다등등의 의미를 담은 플래카드나 꽃다발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만나기 위해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뭔가 섭섭하기도 하였다. 물론 올 사람도 없었다. 정윤성 군의 아리따우신 여자친구분은 정윤성 아저씨라고 적혀 있는 종이를 들고, 수줍은 듯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우리는 정윤성 군에게 인사를 강요했다. 손지혜 양의 다비드 상을 닮았다는 남자친구는 울산에서 올라와 있었고, 이날 생일이었던 윤희의 남자친구는 우리가 떠난 직후에 공항에 도착했다고 하나 사실 진위를 판별하기는 어렵다. 강민혜 양의 남자친구는, 발리에 출국하기 전 응원 연습을 도와주기 위해 잠시 연습하는 곳에 방문했었지만, 이날은 부끄러운지 저 멀리서 앉아서 강민혜 양을 기다렸다.

다들 무사히 도착했으므로, 이제 정말 긴장을 풀었다. 사실 해외에 나가면 긴장을 하기 마련이다. 또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팀으로 이동하고 행동하는 곳에서는 항상 누군가는 긴장을 하고 있어야 사고가 나지 않는다. 과도한 긴장은 본인에게 힘들지만, 작년 라오스의 경험, 또 약 1년 간의 일본에서의 교환학생 경험이 나에게 나는 긴장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항상 조심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했었다. 그렇기에 이번 발리에서도 다른 단원들이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 이 글을 적는 시점에 다른 단원들의 사후 보고서를 보고 있으면, 나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부분들이 적혀 있다. 딱히 내 마음에 드는 이미지는 하나도 없다. 내가 괜히 무리해서 다른 단원들의 행동 반경을 제한했거나,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요구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좋은 이미지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무서운 사람이나 군기반장의 이미지는 원해서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님을 여기서 밝혀두고 싶다. 원해서 이런 이미지가 된 것은 아니지만, 앞서 계급제에 대해서 설명하면서도 술회하였지만, 편안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이성은 계급제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 제도가 가진 효율성과 의견이 일치를 이끌어 내는 것에 대해서 용이함을 느꼈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단체 사진을 찍었다. 공항에서 사진을 찍으면 항상 어둡게 나왔는데, 이번에는 우연히 조명이 좋은 곳에 우리들이 서 있었기에 단체사진이 따뜻한 느낌을 가지고 나왔다. 진짜 마지막으로 찍는 단체 사진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기연 군과 나는 데자뷰 놀이를 잠시 하였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서울에 당도할 수 있었다. 여전히 서울은 번잡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높은 목소리로 말했으며, 자동차의 경적은 학대 받고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발리보다 한국이 더 덥다는 사실을, 한국에 와서 알았고 이제 땀냄새는 나도 느껴질 만큼 났다.

11시 반 정도에 건국대학교 학군단 앞에 있는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내렸고, 점심을 먹고 가자고 내가 꼬셔 냉면을 먹으러 갔다. 오승식, 전재하, 이창선 그리고 내가 냉면을 먹었다. 박규병 군은 일이 있다며 먼저 떠났는데, 냉면을 먹으러 가는 횡단보도에서 어떤 여성분 한 분과 말 그대로 뻘줌하게 서 있기에, ‘뭐지?’ 했는데, 오승식 군이 같이 식사하러 가시죠?’라며 웃은 낯으로 이야기 하고 난 뒤에야, 박규병 군의 여자친구 인 줄 알았다. 부러웠다. 그래도 정윤성 군이 더 부러운.

길고 긴 기행문, 버스를 내리고 난 뒤까지가 실제 기행문이라고 한다면, 그 끝이 여자친구 있는 단원이 부러웠다라니 참 결론이 이상하다. 9 10일이라는 기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첫 날에 오후 2시에 모여 6시 비행기로 발리에 갔으니 하루가 빠지고, 돌아오는 날 밤을 공항에서 보내고 새벽 1시 비행기로 왔으니 또 하루가 빠진다. 실질적으로는 8일 정도의 일정으로 발리에서 시간을 보낸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더 길었으면 지루했을 것이고, 짧았으면 아쉬웠을 것 같은 아주 딱 좋은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계속 작년의 라오스와 비교하게 되는데, 13 14일의 일정이었고, 휴양을 위한 날이 마지막 하루뿐이었다는 것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상당히 짧은 시간이면서 여유로운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라오스에서는 거의 하루하루 전투와 같은 생활을 보냈다. 오전에는 도서관을 짓고, 오후에는 아이들을 위한 국제 교육과 유치원 교육을 진행하였고, 밤에는 야학을 열거나 라오스어를 배우는 등, 하루 일과가 마치고 벽이 뚫려 있는 집에 돌아오면, 얼굴만 내어 놓고 침낭에 들어가 머리를 붙이자 마자 잠들었던 기억이, 압축적으로 남아있다. 이와 비교해 보았을 때, 발리는 천국이었다. 하지만 기약된 천국은 기약 없는 현실보다 더욱 괴롭다. 돌아오니 그 일상생활이 주는 수많은 의무들이란.

이제 일정표를 보면서 적어야 하는 것은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이창선 군이 일정표를 간단히 만들어 주어, 그것에 내 기억을 덧대는 방식으로 글을 적고 있었다. 일정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이 기행문을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을 적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8 29일이고 지금 시간은 오후 4 50분이다. 끝을 내야지 내야지 하지만, 퇴고를 하고 나서 또 바뀌게 될 내용들을, 마치 어미개가 자신의 새끼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인 느낌으로, 내가 적은 글을, 물론 내가 다시 보는 것이지만, 고쳐지기 전에 많이 적어두고 싶은 욕심이 있다.

신나게 일하고 신나게 놀았다. 일할 때는 열심히 일했고, 놀 때는 미친 듯이 놀았다. 발리에서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본다면, 앞서 적은 몇 가지 일들 때문에 스스로가 미워졌던 것 빼고는 아무런 후회는 없다. 이제 내일(830) 2학기 개강을 앞두고 여유를 부리면서 글을 적고 있지만, 26살 여름, 학교에 숨어 있던 뛰어난 사람들과 함께 발리에서 즐거운 10일을 보냈노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

본격적인 고시 공부를 하기 전에, 지원서를 작성해서 합격을 해 놓았던 제 10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지원서를 적는 순간, 여름방학의 10일은 확보해 두었다. 연속성이 보장되어야만 하는 고시 공부의 특성상 10일이라는 긴 시간은, 기억 속에 많은 내용들을 수장시켜 버리는 효과를 나타내었지만, 그래도 긴 고시생의 수험 기간을 시작하면서 넓은 바다와 세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회상의 가치와 추억의 가치가 이번 10일을 통해서 다시 새로운 옷을 갈아 입게 되었다.

나는 발리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없다. 잃은 것을 따질 수 없듯이, 얻은 것을 따질 수도 없다. 다른 단원들의 글 들에는 사람을 얻었다라고 하지만, ‘사람을 얻는 것은 발리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발리에서 같이 봉사활동을 했던 단원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발리에서 내가 얻은 것은 없다. 오히려 얻은 것을 찾으라고 한다면 지금 내가 적고 있는 이 글일 수 있겠다. 10일 전체를 기억하려 했지만, 기억할 수 없었고, 그 감정 하나하나를 담아내려 했지만 담아 낼 수 없는 이 글. 10일이라는 기간의 봉사활동과 17일이라는 기간을 사용해서 적고 있는 이 기행문이 내가 발리에서 얻은 것이라 할 것이다.

좋은 이야기만 적는 것이 아름다운 기행문의 끝일 수 있으나, 이번 발리 해외 봉사활동을 겪으면서 생각했던 문제점을 적으면서 기행문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교내에서 진행되는 해외봉사활동이므로, 지원자는 학교 학생이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문제점이 생기는데, 일반 기업이나 사회단체에서 시행하는 해외봉사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서 적은 지원서, 1차 합격 이후 모의 면접까지 해가며 면접을 준비해서 뽑힌 봉사단원들은, 자신이 이 봉사단에 뽑힌 것에 대해서 매우 감사하게 여긴다. 자신의 경력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과정을 겪고 뽑힌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계관이나 봉사정신은 다시 자신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라는 데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교내 해외봉사활동은 선발된 사람들은 자신이 선발된 것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뽑힌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이거나, 학교에 딱히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을 더욱 확신시켜 주는 것이 참가비 40만원의 역할인데, 내가 이곳에 오는데 돈을 내었다는 명분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돈을 내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 정도는 즐길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한다. ‘봉사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남을 위한 행위라고 한다면, 사전 연습이나 단체 활동이라고 인식되는 것을 할 경우에는 그것에 참여하는 것 자체도, 해비타트를 통해서 집을 지어주는 것만이 봉사가 아니라, 다른 단원들을 배려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봉사이다.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해야 할 때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만 해, 개성을 확보해야 할 때의 구분을 성신의 해외봉사단은 시작부터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안한다면, 사회봉사 1,2를 의무적으로 들은 학생들을 선발하거나, 교내 활동에 기여한 학생을 우선 선발, 혹은 봉사단체의 추천서를 받은 학생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고, 또 선발 절차를 다층적으로 만들어, 쉽게 뽑히지 않았다 라는 인식을 스스로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인도네시아나 필리핀이나 어디를 가든, ‘나는 우선 나를 대표하기 이전에, 건국대학교를 대표하는 사람이다라는 인식을 명확히 가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주최하는 해외봉사는 국가성을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개발도상국에 가서 선진국민 대한민국이 당신들에게 베푸는 은혜라는 인상을 심어주도록 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를 자유롭게 대표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아무리 건국대학교 재해복구봉사단 조끼를 입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방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나는 뽑혀서 갔다 왔으니, 더 어렵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학우들의 등록금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해외봉사단 예산에 건국대학교의 이름을 빛내는 사람들이 되도록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로, 예산 집행의 타의성이다. ‘타의성이라는 것이 다른 이의 의견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의미라면, 성신의 해외봉사단은 학생복지팀이라는 다른 이의 의견이 봉사에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 한다. 특히 예산과 관련한 부분에서 제한된 예산을 사용하여, 학생들의 자율성을 막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물론 현지 해비타트와의 연계 필요성 때문에 학생들이 창의성을 발휘해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적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고정된 일정, 제한된 예산, 학생들의 참신성 발휘 기회 상실성신의 해외봉사단의 틀로 굳어진다면 다른 장소에서 같은 추억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해외봉사단이 될 것이다. ‘해외 봉사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최근에는, 건물을 짓는다거나, 벽화를 그리기, 의료 봉사 등 봉사활동의 내용 측면에서는 이미 관례화 된 것 이상의 참신성을 발휘하기 어렵고, ‘문화공연이라는 틀 내에서는 태권도, 난타, , 합창, 사물놀이에 국한되어 버린, 다시 말해 가서 무엇을 할지는 항상 정해져 있는 해외 봉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해비타트나 의료봉사 등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봉사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의료봉사 의 경우 전문 인력이 필요하지만, 해비타트나 벽화 등은 전문 인력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 노동에 가깝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의 발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봉사활동의 범위를 한정해 버리는 결과가 초래한다. 문화 공연에서도 학생들의 의견을 다양하게 넣어, 시도하지 못했던 것을 시도해보는 등의 새로운 도전이 더욱 내용이 풍부해지는 해외봉사가 될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예산 부분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하다.

세 번째는, 숙소의 문제이다. 숙소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문제는 숙소가 지나치게 좋았다는 것이다. 해외봉사를 가기 전 항상 고민해야 하는 것이, 이 해외봉사를 가기 위해서 사용되는 자금을 우리리 그곳에 가서 봉사를 하는 대신에, 그곳 현지 법인이나 단체에 그 돈을 기탁하는 것이 더욱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굳이 발리까지 가서 해비타트를 해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는 일손이 필요했다는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목적으로는 우리가 직접 해외에 나가서 더 넓은 세계를 보고,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식견과 안목을 길러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과 같은 시선의 높이에서 현지의 삶을 바라봐야 하고, 그들과 공감하기를 노력해야 한다. 신분제가 남아 있어, 평생 노동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과 낮에는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돌아와서는 휴양을 즐기러 온 서양 사람들과 함께 일류 호텔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부자의 아량에 지나지 않는다. 일이 힘이 들고, 기후가 맞지 않는 외국에 갔기 때문에 잠을 자는 곳은 좋은 곳에서 자는 것이 좋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바로 우리가 우리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그들과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그들과 같은 밥을 먹으면서 보내야만 한다고 대답해 줄 수 있다. 너무 좋았던 호텔에서의 잠은 꿀 같이 달콤했으나, 그 달콤한 잠은 한국에서도 자지 못했던 잠이었다. ‘홈 스테이까지는 아니라도, 우리의 살갗에 인도네시아 발리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의 향기라도 느껴질 수 있는 곳에서 잠을 자는 것은 어떨까.

네 번째는, 사전 참여에서의 강제성 부재이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발리에 출국하기 전에 모여서 공연 준비와 여러 회의들을 하였다. 하지만 이때 전원이 참석한 적이 없다고 기술한 바 있다. 이는 첫 번째 문제점과 결부되어 있는 문제로 내가 기여하지 않아도 나는 발리에 간다.’라는 것이 불변의 사실이기 때문에, ‘가서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연습에 빠지는 단원들이 있었다. 연습을 하는 것이 실력을 높여서, 전문 가수나 댄서의 수준으로 올라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 팀원들이 사전에 많이 모여서 서로를 알아가고, 그를 통해 각국에 가서도 원활한 의사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고 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습 일정 및 시간을 사전에 정해놓고, 스케줄 내에서 참석이 불가능한 경우 사유서를 제출토록 하고, 사유서를 내었다고 무조건적인 결석이 허가되는 것이 아니라, 검토를 거쳐 인정되는 것과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인정되지 않는 결석이 일정 횟수 이상이 되었을 경우, 경고를 부여하고, 경고의 수준을 넘은 경우 몇몇이 되었든 남은 사람만 간다는 철저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규칙은 강제적인 성향을 가진 것이어서 사람들의 자율성을 해치지만, 단원수가 많지 않은 성신의 해외봉사단 같은 경우에서는 한 명의 결석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형태이므로 상호간에 조율을 통해 적절히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이다. 본인도 장학금 연수입네, 귀향입네 하면서 결석이 잦았던 것에 대해서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기 해외봉사단원들의 더욱 알찬 봉사활동을 위해서 이런 제언을 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원들 내부의 문제인 카메라 수의 제한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가는 것은 자유에 맡길 상황이다. 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일을 하는 도중에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을 담당하기로 한 단원이 사진을 전담해서 찍고 다른 사람들은 사진을 찍지 않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단원들은 자신의 카메라로 자신을 일하는 모습을 찍는 등, 전체적인 규율에 벗어나는 행위를 하였다. ‘여행 갔다 오면, 남는 것은 사진 뿐이더라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여행일 때 이야기이다. 우리는 봉사활동을 간 것이었고, 또 몇 일되지 않는 봉사시간 중에 자신의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행위라고 판단된다. 사진을 찍으러 봉사활동을 가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인식시키고, 사진을 찍느라 일의 효율성에 피해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스스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문제점에 적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이상으로 내가 생각한 문제점이었다. 쉽게 바뀔 수 있는 문제도 있고, 많은 논의와 절차의 변경을 통해서 바꿔야 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학생들의 경험 폭의 확장과 전인적 교육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성신의 해외봉사단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 생각된다. 위에 서술한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패스트 푸드의 상호를 연호하는 행위, 학생답지 않은 소비 행위 등은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되어 적지 않았다. 문제점을 적었지만, 성신의 해외봉사단의 발전을 위한 제안이자 제언이지, 그 가치를 깎아 내리거나 폄하하는 의도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문제점에 대한 의견 제시에 따른 책임은 내가 지겠다.

가볍게 시작한 글이, 문제점을 열거하고 나니 갑자기 무거워진 느낌이다. 발리는 지상의 마지막 낙원이었다.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며, 신혼여행으로는 가지 않겠지만, 꼭 다시 한번 더 가서 꾸따 해변에서 서핑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다.

처음에 많이 들었다. ‘발리에 무슨 봉사활동을 하러 가냐’. 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미국이든, 우리나라 안이든 발리든 가야 한다.’ 라고. 나는 발리에 봉사활동을 갔다 왔고, 그곳에서 비와 바람을 막아줄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곳에서 살 사람들의 터전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발리에서 이번 여름,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보았으며 가장 좋은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가장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자연의 광대함과 사람의 따뜻함과 봉사의 숭고함을 알게 해준 건국대학교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나는, 신나게 일하고 신나게 놀았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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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37 해외봉사활동 후기

태어나서 이렇게 긴 글을 적기는 처음인 듯하고, 또 중간중간 생각들을 적어 넣으면서 글을 적느라 밥 먹었다. 어디 갔다. 뭐 했다식의 글을 적는 것보다는 체력 소모가 꽤 큰 듯 하다. 읽을 때는 한번에 주욱 읽을 수 있는 분량(?)인지는 모르겠으나, 발리를 갔다 오고 난 뒤, 바로 그 다음날(13)부터 적기 시작해 오늘(27)까지 적어도 이틀 분량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놀랍다.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 역사가들이나, 언제나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이름을 적는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 등을 전쟁 중에 담담한 문체와 뛰어난 필체로 적어 낼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을 담아 낼 수 있는 명민함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마냥 부러워지는 시점이다. 사람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는 대화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지만, 나의 경험과 지식이 다음 세대가 혹시 걸어갈지 모르는 길을 내가 먼저 걸어간 것이라면, 나는 글로써 그 길에 발자국 하나를 남기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난스럽게 적는 듯하면서도, 발리에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을 솔직하게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무지의 소산으로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소에서 사진만 찍고 오기도 하고, 역사가 오래된 사원에 가서도 이 사원이 언제 세워진 것인지에 대한 관심보다 마냥 좋아 망둥이 마냥 뛰어 놀았던 적도 있지만, 부끄럽지만 이런 것들도 하나의 반성문이자 나를 모르는 타인이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담겨 있는 것이라 생각해주길 바란다. 아직 글 적을게 많이 있다. 끝까지 쉬지 마시고, 읽어봐 주신다면 진심으로 고맙겠습니다. 꾸벅.

이날 밤에는 다들 방 하나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다면 길었고, 생각하기에 따라 짧을 수도 있는 일정 속에서, 각자는 다른 추억을 만들었고 또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초석을 다졌다. 빙 둘러 앉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몇 분 가량 했는데, 나는 뭐 딱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팀장도 아니고, 부팀장도 아니고, 총무도 아니다.’ 그렇다. 나는 단원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를 남이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수동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는 분위기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팀장 정윤성 군의 목소리보다, 부팀장 오승식 군의 목소리보다, 그리고 가장 나이가 많았던 김영한 군의 목소리보다 내 목소리가 가장 많이 발리에서 들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조금씩 도우면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누구나 팀장과 같은 마음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기를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서 조정자가 되려고 했다.’라고 내가 하고 싶었던 역할을 이야기 했다. 누군가는 처음의 이미지를 의지를 가지고 바꾸고자 노력하였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미지가 악화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구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누가 기분 좋게 봉사활동하고 와서 자신의 이미지가 좋지 않게 비치기를 바라겠는가. 하지만 나는 내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며, 내가 성신의 해외봉사단에 뽑혀서 우리 학교로부터 다른 학우들이 낸 등록금으로 이곳에 와 있다는 것은, 내가 이곳에서 내 모든 것을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강박 관념 속에서 매우 편하게 스스로를 드러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몇몇 단원의 눈물이 나로 인해 힘들어서 슬펐던 것이라면, 이 지면을 빌어서 심심한 사과의 말을 올린다.

이날 저녁에는 술을 좀 많이 마셨다. 사놓은 맥주를 다 마시고, 각 방의 냉장고에 들어있는 맥주를 다 마시고, 다시 룸 서비스를 이용해서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2시 반쯤 되었을까. 기분이 딱 좋아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야지 마음 먹고 조용히 일어나서 가려 했다. 같이 방을 썼던 정기연 군과 함께 방에 갔지만, 내가 방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창선 군이 우리 방으로 전화를 걸어 나와 통화를 하고자 하였고, 쉬고 싶던 나에게 김영한 형님과의 전화 통화를 친히연결해주어, ‘다시 방으로 가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한 뒤, 나는 양치를 다하고 속옷만 입고 있었지만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고 다들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어찌나 이창선 군에게 고맙던지.

내가 그 방에 가자 마자, 사람들은 하늘에 별을 볼 것이라며, 다들 방에서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내 손에는 새 맥주 병이 쥐어져 있었고, 돌고래가 좌뇌는 자고 있어도 우뇌는 깨어 있듯이, 나는 우뇌는 자고 있고, 맥주를 쥐고 있고 감성을 담당하는 좌뇌는 깨어 있었던 듯 하다. 별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다들 해변으로 나갈 때, 나는 조용히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 옆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이창선 군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얘는 왜 여기서 자고 있나? 기연이는 어디서 잔거지?’라고 잠시 생각을 했고, 빨리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훠이훠이.

모든 짐을 챙겼다. 처음 발리에 들어올 때 들고 왔던 가방보다 부피가 많이 늘어나 있었다. 옷이 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산타클로스처럼 선물을 가득 안고 돌아가야 하기 때문일까. 가방을 나누어 짐을 채워 넣고, 내 손에 든 가방은 옆으로 매는 것 하나와 카메라 가방 하나만을 들었다. 트럭으로 붙인 짐은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공항에 돌아왔을 때 다시 상봉할 예정이었다. 

다시 차에 올랐다. 일터로 가는 마지막 탑승이었다. 우리들의 옷은 일을 하는 복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옷들이었다. 한껏 멋을 부린 모습들이, 어제의 그 초췌한 모습들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이날은 평소에 가던 길과는 다른 길을 통해서 일터로 향했는데, 간선도로를 타지 않고 시내를 가로질러 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싱아라자 지역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마음에 담자 생각하고 창 밖을 유심히 보았다. 사람들의 표정, 중앙선을 넘나드는 수많은 자동차들, 도처에서 울려 퍼지는 경적소리, 광복 65주년을 알리는 여러 현수막들과 함께, 국기의 색깔인 붉은 색과 흰색의 천 들이 수없이 많이 보였다. 이럴 때면, 시내의 사진을 찍을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조금 아쉽게 생각된다. 마음에 담으려는 노력을 하기는 했지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되는 것을, 사진이 좀 더 연장을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말이다.

한참을 창 밖을 바라보면서 또 언제 이곳을 다시 볼까라는, 마치 전쟁이 발발하여 고향을 뒤로 한 채 떠나는 피난민과 같은 마음으로 발리의 하나 하나를 살펴 보았다. 그러던 중, 건물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2층 벽 부분에 창문이 있는 집은 거의 없고, 무엇인가 통일된 듯한 크기와 형태를 하고 있지만, 가운데 부분만은 그 어느 집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 특이한 문양들을 보았다. 10분 간 수없이 많은 집들이 있었지만, 내가 머리가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가운데의 문양들은 다들 달랐다. 어느 집은 부처님의 형상이 돌출되어 새겨져 있었고, 어떤 집에는 코끼리 또는 알 수 없는 동물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의미일까. 나는 왜 저러한 문양을 이제 마지막 일터로 가는 곳에서야 보게 되었던 것 일까. 사진을 찍어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30분 가량을 달려, 마지막으로 일터에 왔다. 우리가 일을 하러 오든 오지 않든, 현지 인부들을 일을 하고 있었다. 이날은 공식적인 일정으로 헌정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 우리가 기여한 집이 완성이 되면, 그것을 집 주인 아저씨께 드리는 것이 원래의 의미이나, 우리는 지붕도 올리지 못한 채 일에서 손을 떼어야 했으므로, 의미에 부합하지는 못했다. 조금 더 우리가 노력했더라면 완성할 수 있었을까 자문해 보아도, 시멘트의 양생 문제 등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발리에 있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완성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발리에 다시 와야 하는 3번째 이유가 생긴다. 우리가 주인 아저씨께 노래 선물을 해 드리고, 문화 공연에서 인기가 가장 좋았다는 태권도와 인기 3위였던 여자 댄스를 보여 드렸다. 이때는 현지 인부들도 같이 공연을 지켜 보았고, 그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있었다. 우리의 차례가 끝나고, 주인 아저씨께 마이크가 넘어갔다. 아저씨께서 이야기 하셨다. ‘라기’, 다시 오라고. 발리에 다시 와서, 학생들이 기여했던 이 집이 어떻게 지어졌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 다시 발리에 꼭 오라고 하셨다. 이게 내가 발리에 다시 와야 하는 세 번째 이유다. 내가 팠던 화장실 정화조 구덩이를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주인 아저씨의 가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시설이 될 것이었고, 내가 쌓았던 한 쪽 벽이 주인의 가족이 비바람에 고생하지 않는, 또 아이들이 낙서를 할 수도 있고, 자신들의 꿈을 적을 수도 있는 벽이 될 이곳에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작년 라오스에서도 도서관을 지었다. 그때 완성을 하지 못했던 도서관이 시간이 지난 뒤, 내가 속해 있는 시민단체와 함께 해외봉사를 진행했던 지구촌 공생회의 홈페이지에서 완성된 도서관의 사진을 보면서, 울컥 했었던 적이 있다. 시민단체 후배님들이 그 도서관에 채울 도서를 마련하기 위한 바자회도 열었다니 다시 한번 감격이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다시 라오스 비엔티안에 가서 그 도서관을 꼭 보리라 하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마음을 발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인가 다시 돌아올 여지를 부러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곳에 있을 때는, 일이 힘들거나 생활이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하다거나 빨리 익숙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한국에 돌아온 뒤 일상 속에 복귀한 내 모습 속에서, 상념 없이 남을 위한 시간을 보냈고, 또 온전히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던 다양한 시간들이, 이유 없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지도를 펼쳐 놓고 보아도, 멀고 먼 발리와 라오스는, 내 진짜 고향은 경남 마산, 2의 고향은 서울이지만, 25살 시절의 마음의 고향은 라오스며, 26세 더운 여름, 마음의 고향은 발리가 되었다.

주인 아저씨와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악수를 했는데, 손이 두꺼웠다. 우리 아버지의 손과 비슷했다. 아버지가 되면 손이 두꺼워 지나 보다. 아들로 보이는 남자 아이는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운지, 어머니 앞에 선 채 우리 쪽으로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 지어주고 가지는 못하지만, 새 집이 생기면 건강하게 크렴이라고 마음으로 말했다. 전해졌으리라.

다시 차에 올랐다. 후련한 마음보다는, 어떤 마음인지 형용할 수 없는 마음 상태가 되어 있었다. 즐거웠던 추억의 마지막 행사를 마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시 손에 장갑을 끼고 땀을 흘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인지, 다시 온다고 다짐은 하지만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무심히 차는 다시 발리 남부로 향했다.

마을을 떠난 이후로, 차에서 내렸다 탔다 를 반복했다. 기념품을 사기 위해 기념품 전문점에 들르기도 하였고, ‘코피 루왁을 만드는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였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공장과 같은 곳에서 기념품을 팔았고, 커피를 만들어 파는 곳에서는 매우 간소하게 커피의 제조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내 추측인데 커피 원두를 만드는 것을 본 사람은 나 밖에 없으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길에 할머니 한 분께서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조용히 무엇인가를 하고 게셨고, 다행히 내 옆에 영어를 잘하는 현지 운전기사가 있었기에, 하나하나 공정에 관련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발리에서는 내가 항상 마지막으로 이동했으니, 앞서 지나간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보지 못했다. 붉은 색 커피 원두가 나무에 열려 있는 것도 이때 처음 보았고, ‘루왁이라고 불리는 사향 고양이는 거북이섬에 이어서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지만, 확실히 이때 본 루왁이 성장한 모습인 듯하였다. 배설한다고 피곤한지 자고 있었다. 루왁의 존재도, 내가 마지막에 가면서 현지 운전기사가 저기 자고 있는 동물이 다 큰 루왁이라고 이야기해 주었기에 알았다. 내가 다시 단원들에게 저기 루왁이 있다라고 말하자 단원들은 관심을 가졌다.

커피 공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적자. 생산된 제품을 파는 건물 앞에는 손님들이 오면 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도록 서비스 해주었는데, 원두 커피 가루에다가 바로 물을 부어서 그것을 그냥 마시는 것이 발리 스타일이라고 했다. 전체 인도네시아 스타일인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커피 가루가 씹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설탕을 넣지 않고 마셨을 때, 원두의 진함이란. 그리고 누군가가 코피 루왁을 주문하여 마셨고, 마시지 못한 다른 단원들에게 맛을 보도록 해주었는데, 나도 한 모금 하였다. 커피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무엇이 다를까 하고 한참을 생각해도,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코피 루왁은 억지로 사향 고양이에게 커피를 먹여서 발효된 원두를 만드는 것과, 우연히 야생 루왁을 만나, 그 루왁의 배설물 속에서 커피를 추출해내서 만드는 자연산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먹는 코피 루왁이 양식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커피 맛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니, 큰 의미의 차이는 없는 듯하다. 양식 회나 자연산 회나, 회 모르는 사람이 먹으면 그냥 회이듯이.

 

시간은 어느덧 점심이 되었고, 이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서 이동했다. 부두굴 지역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하였고, 무엇인가 익숙한 귀의 반응과 또 딸기라고 적혀 있는 팻말들이 많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산중턱에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고도가 높아 습한 날씨를 유지하고 있는 부두굴은 딸기가 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기서 또 재미난 이야기가 있는데, 이곳에 딸기가 유명한 것은 맛이 있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발리 섬 안에서 여기서만 나기 때문에 유명하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에서 일본어를 내가 가장 잘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2 명뿐이었고, 그 중에 내가 잘하는 것이 진실인 느낌과 비슷하였다. 딸기가 맛이 없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해보았기 때문에 사서 먹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운전기사님들이 식당을 찾지 못해 잠시 배회했고, 찾아간 식당은 식당이라기 보다는 놀이 동산 느낌이었다. ‘놀이동산의 뉘앙스가 잘 살지 않을 듯해 부가 설명을 덧붙이면, 말 그대로 놀 수 있는 언덕(동산)’이었다. 각자가 먹을 음식을 주문하였다. 주문을 한 뒤, 단원들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여러 놀이 기구에 매달려서 하하호호 하였다. 나는 그러지는 않고, 날씨가 좋았으므로 사진을 찍으면서 돌아다녔다. 단원들의 맑은 모습들이 보기에 좋았다.

각자가 주문한 메뉴가 나왔고, 나는 베이컨 햄버거를 주문을 하였기 때문에 내심 기대는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시를 받자 마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짐한 양은 양이로거니와 맛도 있었다. 다른 단원들의 음식을 뺏어 먹기도 하고, 또 내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햄버거가 햄버거 같지 않은, 맛있는 요리였다. 언제 또.. ..

점심을 먹고, 그 주위에 있는 재래시장처럼 보이는 관광객 대상 시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분명, 겉에서 볼 때는 일반 재래시장처럼 보여서, 발리의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초입에 들어가자 마자 원 달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놀라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일터에 갈 때, 건물 2층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재래시장처럼 보였지만 그러지 않았던 곳에서 또 다른 발견을 하였다. 처음 발리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할 때, 길가에서 커피를 파는 가게들이 보였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전국체인 유통망을 가진 커피와 비슷한 느낌 정도의 커피가게였다. 물 관련 문제 때문에 커피를 사서 먹지는 않았지만, 커피의 브랜드 명이 인상적이었던 것도 있었고, 간판의 모습이 과히 특이하다고 할 만하여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이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 할 수 있지만, 간판에 연예계에 종사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사람들의 사진들이 똑 같은 포즈로, 똑 같은 커피잔을 쥐고 있는 사진들이었다. 사람만 변했지 그 간판의 모습이나 색깔 등은 변하지 않았다. ‘신기하다라고 89일 동안 생각을 했고, 돌아가기 전날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재래시장같아 보였던 그 곳의 입구에도 그 커피 가게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근데, 가만히 보니 위에 커피를 들고 웃고 있는 사람이 밑에서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집을 보니, 간판에는 차도르를 두른 여자가 커피잔을 들고 있었는데, 가게 안을 유심히 살펴보니, 그 여자가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별거 아닌 발견일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사진을 간판에 내 걸고, 커피를 팔고 있는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 특이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스타벅스에 갔는데, 인어 같은 사람이 커피를 팔고 있거나, 맥도날드에 갔는데, 이상한 삐에로가 주문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재미는 한층 더 했다. 이 커피의 브랜드는 학점의 마지노선의 표현인 것처럼 ABC였다. 발리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여행할 기회가 있으시면, 간판의 얼굴을 보고 가게 안에서 같은 얼굴 찾기 놀이를 하시는 것도 재미가 있을 듯 하다.

다른 단원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공예품 쇼핑에 분주히 돌아 다녔고, 나는 딱히 사고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카메라로 소일하고 있었다. 계속 날씨가 좋았으므로 사진은 찍는 족족 잘 나오는 듯 하였다. 사진실력과 상관없이 자연이 주는 출사 기회였다고나 할까.

특기할 사항은 없었던, 유일하게 하나 있다면 분위기가 정말 좋았고 음식도 맛있었던 식당을 뒤로 한 채 다시 차에 올랐다. 가던 중에 환전소를 하나 발견했는데, 차를 타고 지나가던 중이어서 선명하게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인상 깊어 찍어두었다. ‘허가 받은 환전소쯤 될까. 영어로 적혀 있었는데, 누가 봐도 한눈에 보기에는 정말 허가를 받은 곳인가를 의심하게 되는 환전소였다. 다 지워져 가는 글씨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환전만으로는 생계를 꾸려가기가 힘든 것인지 다른 물건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이런 장면들이 별 의미 없이 지나치고 가면, ‘낡은 환전소정도로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허가 받은이라는 공식성을 띄고 있는 표현이 지닌 이미지와 낙후된이라는 느낌이 어울리지 않아 나는 즐거웠던 것이다. 예를 들면, ‘최신 스마트 폰을 파는 가게라고 적혀 있는데, 그 글씨가 붓글씨로 적혀있다거나, 현판으로 걸려 있다고 생각하면, 잔잔한 웃음은 줄 수 있는 느낌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고 붓글씨현판이 낙후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2시 정도에 부두굴에 있는 식당으로부터 더 남쪽으로 내려왔다. 40분 가량을 차에서 보내고 도착한 곳은 창고와 같은 기념품 판매점이었다. 기념품 판매점에 도착하기 전에, 4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차 안에서 운전기사분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다른 단원들과 영화와 미국의 드라마에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지 운전 기사들을 이끄는 운전기사 분의 차를 타게 되었는데, 그분과 이야기를 하면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게 되었다. 커피 공장에 가서도, 나에게 커피 제조 과정을 알려주기도 했고, 차에 있을 때에는 간판에 적혀 있는 인도네시아어를 내가 물으면,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는 고유한 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인도네시아는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의 영향으로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게 되었고, 고유 문자라고 불리는 것도 사실은 태국어와 비슷한 것으로써, 일부 지역에만 통용되는 것을 국가가 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알게 된 기억에 남는 인도네시아어는, OLEH-OLEH 즉 기념품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도 한 통신회사가 올레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광고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와 발음이 동일해 신기하게 생각했던 참에, 뜻을 알게 되니, 우리가 들렀던 곳들에서 자주 보였던 저 말이 기념품이라는 뜻이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남부로 가는 길이었을까, 아니면 커피 공장으로 가는 길이었을까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와 운전기사분과의 대화를 잠시 옮기겠다.

 

: ‘발리는 참 아름다운 섬인 듯합니다.’

운전 기사 : ‘발리는 아름답지요. 외국인이 보기에는 아름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기내 방송으로 지상 마지막 낙원, 발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와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운전 기사 : ‘, 발리는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같이 발리에서 사는 사람들은 크게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잠시 쉬는 곳과 살아가야 할 터전인 곳은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지요.’

: ‘그렇군요. 그렇다면 운전기사님은 발리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운전 기사 : ‘아실지 모르겠지만, 발리는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힌두교가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섬입니다. 제가 발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힌두교의 섬이라서가 아니라, 힌두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마음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마을에 정착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처음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그 사람을 도와주면서, 빨리 정착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마음들이 요즘에는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발리는 사람들의 착한 마음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 ‘, 그렇군요. 지난 번에 일터에서 돌아오는데, 마을의 신전에서 행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그 표정들이 그렇게 밝았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일 수 있겠네요. 또 다른 발리 사람들만의 특징은 없습니까?’

운전기사 : ‘있어요. 발리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은 오늘을 살고 있지만, 마음은 희망 찬 내일 속에서 살고 있어요. ‘내일은 더 나은 날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아요.

 

내가 마지막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같은 차에 타고 있던 다른 단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 혼자서 묵묵히 저 말을 음미하다가 다시 다른 대화 주제로 넘어갔다.

 

: ‘그럼 운전 기사님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으시겠어요. 운전을 하시면서 말이죠.’

운전 기사 : ‘, 하지만 이렇게 단체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나라는 정해져 있어요. 한국이나 일본에서 단체 여행객이 많이 오기 때문에, 주로 그들과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일본은 규모가 작은데, 한국사람들은 항상 단체로 와서 단체로 가지요. 반면에 유럽인들이나 호주 사람들은 두세명 씩 와서 오토바이를 빌려, 그들끼리 여행하는 것을 즐깁니다.’

: ‘한국사람은 뭐든 단체로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하하.’

 

사실이 그랬다. 발리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은 2명이 오토바이를 하나 빌려서 발리를 돌아다니거나, 큰 가방을 메고 자유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반면에 한국인들을 울루와뚜 사원이나 폴로 매장에서 만나게 되면, 항상 큰 버스에 다같이 와서 단체 관광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의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배낭여행이나 자유여행이 보편화 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패키지 여행이나 정해진 루트를 순회하는 정도의 여행에 만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릴 적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고, 그것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그리고 나서 직접 가서,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것을 자신은 느끼겠다는 여행 습관이 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는 자유여행은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자신이 갔었던 나라에 대해서 회상할 때, 유명한 관광지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세계 지도가 아니라, 한 도시의 지도를 펼쳐 놓고 그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곳을 이야기 하면서 이 곳에서 나는 빵의 향기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라던지, ‘내가 이 곳에서 가져 오고 싶었던 것은 그 할아버지의 미소였어.’라는 식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것도 나름 여행의 깊이를 깊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한다.

다시 기념품 매장으로 돌아오면, 나는 숨겨져 있는 보물찾기 놀이를 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좋은 가격에, 발리를 대표할 수 있는 물건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매장을 빙글빙글 돌았지만,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 하나 찾은 것이 있긴 하였는데, 진주목걸이 소녀를 카피한 그림이 마음에 들었지만, 크기가 너무 크고, 또 가격이 싼 가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지 못했다.

다들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복귀했고, 다른 단원들의 손에는 꾸러미꾸러미 무엇인가 들려 있었다. ‘나는 선물도 사지 않는 냉혈한인가하고 1초 생각했지만, ‘이미 사놓은 것이 많군하고 스스로 위로했다.

이제 해는 저물고 있었다. 이번 일정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발리의 석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닷가를 가기 위해 차에 올랐고, 지는 해와 함께 나의 마지막 발리의 장막도 내려가는 듯 하였다. 우리가 간 바닷가는 꾸타 해변이었다. 발리의 대표적 관광지로 손 꼽히는 곳이고, 많은 사람들이 서핑을 즐기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는 서핑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노란 머리와 푸른 눈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새로운 파도를 만들었다가도 파도는 다시 바다 속으로 사라졌고, 그 파도를 찍느라 석양을 찍느라 내 셔터는 바삐 움직였다. ‘왜 이렇게 좋은 곳을 가는 날 저녁이 되어서야 왔을까대답을 들을 수도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였다. 구름 속에 태양이 완전히 가리고, 사진을 찍어도 얼굴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던 바람과 그 파도, 그리고 여유롭게 해변가에 앉아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편안한 마음 속에 나도 어느 샌가 경계를 풀어 놓았다.

 이제 진짜 돌아가야 하는 밤이구나.’

왜 이제야 왔냐며 투덜투덜 대면서, 마지막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이동했다. 저녁을 먹은 곳은 우리가 휴양하던 토,일요일을 보냈던 하모니 호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니, 타임 머신을 타고 토요일로 돌아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식당의 이름은 마마스 레스토랑우리말로 표현하면, ‘엄마 식당쯤 될까. 독일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이 식당은 테라스가 있고, 음악이 있고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 마지막 르기안의 모습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니, 영락없는 관광지의 모습이었지만 언제 다시 볼까 하는 생각에 조명이 살짝 흔들렸다. 저녁식사는 스테이크류를 먹었다. 충분히 배부르게, 행복하게 먹었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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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35 해외봉사활동 후기

풍선 아트와 관련해서, 한 가지를 더 이야기 하고 싶다. 나는 풍선 아트를 전문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실력이 없다 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아이들에게 다양한 모양의 풍선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미안한 심정은 라오스와 발리 모두에서 느낀 감정이다. 그럼 나는 풍선 아트를 언제 어디서 배운 것일까? 초등학교 6학년 시절, 풍선 아트가 잠시 유행했었던 적이 있다. 학교 앞에서 다양한 풍선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와서, 아이들에게 풍선을 만들어 주면서, 홍보를 하거나 아니면 풍선을 팔기도 하였다. 그때, 초등학생 때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었고, 놀다가 지치면 공부를 하던 생활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다. 그때 풍선을 많이 사서, 풍선 아트 연습을 하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이니, 13살 때 잠시 배웠던 기술, 기술이랄 것까지도 없지만, 을 사용해서 다른 나라의 아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도 신기한 경험이 되었다. 처음 풍선아트를 시작하였을 때, ‘13년 뒤에, 발리에서 아이들을 위해서 풍선을 만들테니 연습을 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배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풍선 아트뿐만 아니라, 다른 경험들을 통해서도 이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신기한 감정이라는 표현보다는 자기 예언적 경험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확적한 표현일 것이다. 처음 새로운 일을 시작을 할 때나 접하지 못했던 취미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이 일(취미)을 시작을 하지만 이게 내게 언제 큰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특별한 기술을, 의지를 가지고 배우는 사람은 직업적 전문성이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새로움이 주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위험 감수는 무모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말 그대로 조금씩 배워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사용할 시간이 도래하였을 때, 십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내 경험 중 또 다른 경험을 하나 들어보겠다. 나는 작년(2009) 1,2학기를 일본에서 교환학생의 신분으로 사이타마 독협대학에서 약 1년간 수학했다. 늦은 나이(24)에 대학을 들어 온 뒤로, 많은 대외 활동을 해 왔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직업(외교관)을 갖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본인이었지만,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교환학생이었고, 해보고자 마음을 먹게 되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교환학생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있었지, 교환학생에 선발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 요건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독협대학의 교환학생 파견 공지를 보고 난 뒤에야, 학점과 어학성적 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어학성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충분히 좌절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괄호열고, 일본어능력시험2급 이상의 회화 실력을 면접 시 질문에서 해 내면 된다는 조건이 있는 것이었다. 일본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고, 일본 사람과의 대화를 하기 위해 회화에만 집중해서 공부를 하고 있던 나에게는 천우신조였다. 2009년의 교환학생의 경험을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도 평소에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새로운 공부, 취미 생활로 해왔던 것이 큰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장 선상에서 언제 쓰게 될지는 모르지만,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내가 세운 법칙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준비하는 자에게는 기회가 온다.’

 

풍선 아트 하나에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군. 혼잣말이었다.

아이들에게 풍선을 만들어 주었고, 약 한달 간 삐질삐질 땀을 흘려가며 준비했던 문화공연을 시작하는 순간이 왔다.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준비했던 문화공연이기에 그곳의 무대 사정, 음향 사정 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공연을 하게 되었던 교실은 한눈에 봐도 무대의 느낌은 전혀 나지 않았다. 잠시 좌절 했을까. 알고 보니, 그 교실이 가운데 부분이 나눠져 있는 큰 교실의 반이었고, 장막을 치우자 그럴 듯 하게 무대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학생다운 표현으로 하면, 중간고사를 망치고, 기말 고사를 공부했던 것 보다 잘 적어내어서, A학점을 기대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성적 확인을 해보니 C가 떠 있었고, 좌절을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실수하셨다며 B로 올려주셨을 때 그런 기쁨과 비교할 수 있을까. 오승식 군의 영어 사회로 공연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2시간의 공연을 예상했었는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 귀가해야 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고학년 학생들도 우리가 돌아가야 다음 수업을 진행한다고 하기에, 빠르게 진행했다. 정신 없이 지나갔다. 태권도를 남자 단원, 여자 단원이 힘을 합쳐 태극 4장을 하고, 남자 단원이 태극 7장을 하고, 혼자 태극을 했다. 그리고 여자 댄스, 남자 댄스를 췄고, 다같이 응원을 하였다. 응원은 동작이 크고 발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 관계로 군화를 신고 태권도와 남자댄스를 해야만 했던 남자 단원들은, 군화를 갈아 신을 시간이 필요했지만, 시간 문제로 군화를 운동화로 갈아 신지 못했고, 군화를 신은 채로 응원을 했다. 하지만 왠걸, 군화를 신고 응원을 하니, 군화의 무게가 있어서 발의 회전이 빠르고, 그 움직임이 자못 섬세하게 변했다. 나 혼자만은 평소보다 더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 가지 실패했던 것은, 천장이 낮아 손을 힘 있게, 그리고 높게 펼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합창을 할 때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현지 초등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도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불렀던 노래가, 대중 가요나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노래라기 보다는, 유치원생들이 배우는 노래라고 현지 운전기사가 이야기 해주었다. ‘내가 유치원 시절 불렀던 노래다공식의견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로 따지면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정도의 노래일까?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내며, 합창까지 마치고 나자 아이들은 집에 갈 차비를 했고, 우리도 이에 질 세랴 빠르게 마무리 정리를 했다. 아이들과의 마지막 악수를 나누고, 사탕을 하나씩 주었다. 우리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모두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때 웃고 있던 그 얼굴은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타고 왔던 차가 점심 도시락을 가지러, 잠시 멀리 떠나가 있어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 이야기? 인도네시아의 어린이들과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었냐고? 전술 했지만 나는 합창 연습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합창곡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공연에 필요한 의상을 챙길 때, 자료집 뒤에 합창곡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자료집을 들고 왔었다. 역시 전술 했지만, 다른 단원들이 합창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뒤에서 박수 치고 있었다. ‘책 괜히 들고 왔나?’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을 때, ‘, 자료집에 간단한 인도네시아어도 적혀 있었지!’ 라고 생각했고, 자료집을 꺼내니 역시! 있었다. 내가 서투른 발음으로 인도네시아어를 하자, 아이들은 신기한 듯이 나의 발음을 따라 했다.

슬라맛 빠기 빠기이아침인사를 하고,

슬라맛 시앙  시아앙점심인사를 하고,

슬라맛 소레  소레에저녁인사를 했다.

슬라맛을 붙이고 인사를 하면, 뒷부분만으로 대답을 하는 것이 일상회화인 듯하였다. ‘화장실은 어디니라고 물었고, 아이들 한참 토론을 하더니, 학교 쪽을 가리키길래 뜨리 마카시(고마워)’라고 하자, ‘사마사마(뭘요, 천만에요)’라고 대답했다. 한참을 그렇게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고, 아이들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라기라는 말이 다시라는 뜻이라는 것을, 휴양 이후의 영어를 잘했던 운전기사에게 물어서 알게 되었고, 아이들의 말 속에 라기라는 표현이 계속 있었던 것으로 봐서, ‘다시 발리에 오세요정도의 지극히 자의적 해석을 하였다. 다시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갈 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했다.

삼빠이 버르뜨무 라기’, 다시 만날 때가지 안녕히 계세요. 여기서도 라기’.

후다닥 지나갔던 공연을 마치고,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 매번 점심을 먹었던 곳으로 와서, 점심을 먹었다. 무엇인가 돌아갈 때가 다가온다라는 사실을 다들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마지막으로 일을 할 것이었고, 이 일이 마치고 나면, 다시 발리에서 목장갑을 끼는 일은 없으리라. 천천히 점심을 먹은 뒤, 초등학교 아이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고, 남자 단원들은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견 교환을 하였다. 결론은 지혜로운 여자로 합의가 되는 듯 했다. 손지혜 양의 지혜와는 다른 지혜일까.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전후 처리를 하는 군인들이 이런 모습일까. 몸은 이리저리 움직였으나, 그 내실은 없었다. 일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둥을 세우기 위한 시멘트를 남자 단원들은 계속 만들어야 했고, 벽돌을 날라야 했고, 또 쉬어야 했다. 상대적으로 시멘트를 섞는 곳에 사람이 많았던 것인지, 아니면 편하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남자 단원 거의 대부분이 건물을 짓는 곳에 있지 않고, 모래와 시멘트 가루가 있는 곳에 옹기 종기 모여 있었다. 나도 확실히 이날은 쉬었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은 있었지만, 땀이 났다가도 다시 마를 때까지 쉬고 나서 다시 일을 했다. 오후 일은 현지 시간으로 3시 반까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날은 3시까지 열심히 일하고 30분 동안 쉬자는 생각을 몇몇 단원들은 했고, 20분을 일하고 20분을 쉬는, 공평한 작업을 하였다. 계속 쉬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워낙 시멘트를 섞는 일이 힘이 들고, 한번에 많은 양을 섞었으므로, 남자 단원들이 번갈아 가면서 해야 했기에, ‘마냥 논 것 아니냐라는 비난은 삼가 주시라.

완연히 오후가 되었고, 내 전투화는 3시부터 깨끗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깨끗하군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고생했지만 내 전투화도 많이 고생 했겠군 하며, ‘쉬시게라고 말했다. 그때 내 전투화는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옆의 다른 전투화들도 목욕재개를 마쳤거나, 마무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 일이 끝났다. 다음날 수요일 오전의 환송 파티 때, 가끔씩 붉은 입술을 하고 우리를 놀래 켰던 주인 아저씨와의 간단한 행사를 마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발리의 공기 들이 마시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었다. 이날은 일을 비중 있게 한 날도 아니었지만, 오전의 공연의 여파로 피곤함이 배가 되었다.

다른 날과는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이날, 우리가 일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노라면, 우리가 집을 짓고 있는 동네의 다른 주민들이 옷을 차려 입고, 머리에는 과일을 가득 이고, 통 돼지 구이도 한 마리 구워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지 운전 기사에게 오늘이 특별한 날인가 라고 물었고, 운전기사는 오늘이 아마 이 마을의 신에게 축복을 비는 날일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머리에는 과일을 가득 이고라는 표현을 좀 더 설명을 해야 할 듯한데, 과일을 어떤 틀에 끼워서 높게 만들어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으로, 높이는 약 80센티 미터 정도가 될 듯했다. 앞서서 남자가 통 돼지 구이를 들고 갔고, 나이가 많이 든 여자가 과일이 높이 쌓인 쟁반을 머리에 이고 갔고, 행렬의 마지막에 그냥 봐도 어려 보이는 여자들이 높지 않은 과일 쟁반을 이고 갔다. 행렬은 한번에 모든 사람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었고, 마을의 사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원에서 기도가 마치는 순서대로, 과일을 이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차를 타고도 10분 정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곳까지 가서야 큰 사원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우리가 일하는 곳까지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과일 쟁반을 이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도, 돼지 통구이를 들고 있는 남자들의 얼굴에도, 그리고 졸랑졸랑 따라 다니는 어린이들의 얼굴 어느 누구의 얼굴에도 찡그림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신들의 섬발리.

호텔에 도착하자 마자, 언제나 그렇듯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뛰어 들었다. 보통 4시 정도에 호텔에 도착했으니,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는 여유롭게 수영을 할 수 있었다. 이 날은 마지막 수영이라는 사실이 더욱 더 수영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영을 하고 있으면, 해변 쪽에는 항상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이들은 액세서리나 천 등을 팔았다. 수영장과 해변의 경계는 수영장의 물 안이냐, 밖이냐의 차이뿐이었다. 손을 뻗어 보아도 아무런 것도 잡히지 않았고 내가 그들과 소통하지 못할 그 어떠한 장벽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내가 호텔 옆에서 물건을 파는 이에 대한 선입견에 사로 잡혀서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본다. 하지만 아침 7시에 밥을 먹으러 호텔 식당에 가도, 우리와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입으로 숫자를 중얼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밥을 먹고 있으면, ‘저들은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일 거야. 내가 사주지 않아도 저들은 삶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명확한 판단은 서지 않았다. 두 가지 다 틀린 상황 판단일 수 있지만, 무엇이 현실이었는지, 또 내가 어떻게 판단을 하는 것이 나의 통찰력에 도움이 되는지는 정답은 없는 것이리라.

빈곤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절대적인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개인과 시장이 노력하고, 정부가 어느 일방이 지속적인 손해를 감수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다면 절대적인 수준의 간극은 메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은 내가 지구 상의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부유한 사람들의 비교는 과욕일 수 있고, 통사(通史) 안에서 혁명의 원인이 되어 왔지만, ‘빈곤한 사람들 사이의 비교는 심장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다. 지금 내가 해결할 방안은 이것이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 구분되는 그들’, ‘개발도상국선진국’, 그리고 가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간극은 생각해 볼만한 문제임과 동시에, 반드시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발리에서 참 생각이 많았나 보다. 또 혼잣말.

수영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전에 발리에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하디스 마켓에 갔다. 전날 공연을 위한 옷을, 사람수에 맞춰서 샀는데, 그 중에 꽤 예쁜 옷이 있었던지 남자 단원, 여자 단원 그리고 나도, 다시 가서 쇼핑을 하고 싶다는 주문을 외워, 또 하디스에 갔다. 나는 딱히 뭐 살 것이 없었다. 저녁에 마실 맥주를 사 놓았다고 하니, 맥주를 살 필요도 없었고, 시간도 그렇게 많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의류를 판매하는 2층에 올라가서 혼자서 조용히 구경이나 하자고 생각했다. 이리 저리 둘러보니, 괜찮은 옷들이 제법 많았다. 영어로 발리발리라고 적혀 있는 분홍색 티를 하나 일단 발리 기념품 느낌으로 하나 샀고, 다시 또 옷을 찾기 시작했다.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멀리서 ‘50%’라고 적혀 있는 팻말이 보였다. 뭐지? 가까이 가서 보니, 다양한 브랜드의 옷이 진열되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세계 각국 의류의 공장이 있다는 사실은, 르기안 지역에서 싸디 싼 폴로를 보면서 알고 있었지만, 폴로뿐만 아니라, 퀵 실버, 나이키, 버버리 등의 브랜드의 옷도 생산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반바지를 하나 샀고, 버버리 문양이 박혀 있는 카라 티를 하나 샀다. 버버리 문양이 박혀 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진품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 하지만, 굳이 진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티 자체의 디자인과 재질이 매우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샀기 때문이었다. 바지와 함께 색깔 맞춰 입으면 젊은 영국 신사의 느낌이 들었다. 환전했던 거의 모든 루피아를 사용했고, 나머지 루피아는 기념으로 가져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옷을 사서 돌아오니,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보이는 옷을 싸게 샀다는 것을 살짝 자랑하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호텔 근처의 해변가 식당이었는데, 주말에 휴양할 때 보다는 조용한 분위기였고, 음식은 그냥 뷔페였지만, 음식의 질이 좋았고, 우리만의 식당인 것처럼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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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34 해외봉사활동 후기

마지막 일정을 보낸 호텔인 만큼 정이 간 것도 사실인데, 시설이 너무 좋아서 정이 더더욱 들게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배정 된 방은 205호였는데, 공교롭게도 방이 호텔 전체에서 가장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서, 우리가 입구를 찾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고, 아마 아침에 우리를 누군가 깨우러 꽤 고생을 할 것을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바닷가로 향한 방이 아니었고, 입구 쪽은 호텔 뒤를 흐르는 작은 하천이 있었고, 야자수들이 높게 서 있었다. 그리고 철조망이 쳐져 있어, 감옥이라는 느낌이 살짝 들기도 하였다.

객실 내부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필요 없을 정도로 좋았다. 널찍널찍한 침대 두 개와 넓은 창, 그리고 깨끗하게 정리된 방은, 오전과 오후에 일을 하고 돌아와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었다.

여기서 자는 것 만으로도 발리에 온 의미가 있다.”

이날 저녁은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낸 뒤, 호텔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고, 화요일의 공연을 위한 연습을 했다. 이날은 내가 다소 피곤했었는지, 힘이 그다지 나지 않아 연습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는데, 처음으로 태권도 부분에서 혼자 품세를 하게 된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을 처음으로 단원들에게 보여주었다. 품세라는 것이 흐느적흐느적대는 것이 품세가 아니고, 온 몸에 힘을 주고, 그 각을 살려 가면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앞서 서술했지만, 몸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있는 힘껏이라는 표현에 어울리게 품세를 보여주었다. 다른 단원들의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품세를 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봐 주었고, 품세가 마치고 난 뒤, 박수를 보내주어 한편으로는 쑥스러우면서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몇 마디 말 중에 손지혜 양이 나에게 , 태권도 품세는 원래 그렇게 하는 거에요?’라고 물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연습을 마치고,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잠시 쉰 뒤, 다시 모여서 술을 마시기로 했었던 듯 한데 나와 정기연 군은 방에서 들어가서 아침까지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정기연 군이 가지고 있는 카메라에 관련된 지식을 나는 배우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이 때를 기준으로 본인이 생각할 때는 사진을 찍는 것이 조금 변했다고 생각이 되는데, 정기연 군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DSLR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무섭기까지 했다. 아무리 좋은 장비가 있고,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모른 채, ‘구색 맞추기위해 들고 다니는 것은 자신의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좋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이유는 일반 디지털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을 담기 위해서이며, 남과는 다른 시각을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정기연 군의 가르침으로부터 알게 되었고,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에 따라서 사진은 큰 차이를 낸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비단 사진기만이 이런 이야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 차를 타면서, 그 차를 왜 타냐고 물어보면, ‘남들이 타길래라던지 외관이 예뻐서라는 대답도 대답의 선택항에 들어 갈 수는 있으나, ‘자동차라는 특성을 대표하는 대답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국가라는 정체(政體)를 가지고 있는 여러 국가들에게, ‘당신은 왜 민주주의를 정치 제도로 채택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다른 나라가 민주주의를 하길래라던지 민주주의라는 것이 주는 대외적 인지도가 높기 때문에라는 대답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DSLR이라는 좋은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그 안에 들어가는 메모리 카드도 좋은 것을 써야 하고, 렌즈도 좋은 것을 장착해야 하고, 또 가장 중요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것의 기능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이 되어야만 그 가치가 발휘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라는 좋은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면 이 제도를 최상의 조건으로 만들기 위해, 좋은 선거제도를 구축해야 하고, 또 그에 맞는 정당제도 역시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인데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국민들이 그것을 백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배우고, 그것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그것을 개선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퇴화하고 말 것이다. 카메라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서 더 발전하는데, 삶을 결정 짓는 민주주의가 카메라의 발전 속도와 비교해도 늦은 속도로 발전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까.

발리 일정 중에 가장 평범한 날이었고,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를 끝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월요일이 되었다. 특별한 것 전혀 없이, 아침은 늦게 일어나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일어나보니 7 45분이었던 지라 서둘러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지금 아침을 먹고 다시 방에 돌아와 옷을 갈아 입으면 집합 시간인 8시 반을 맞추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와 정기연 군은 옷을 다 갈아입고 완전한 복장을 갖추고 아침을 먹으로 갔다. 그리고 아침을 여유롭게 먹고, 마치 아침에 늦게 일어나도 시간에 맞춰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 양, 어슬렁어슬렁 호텔 로비로 갔다. 조금 늦게 로비에 갔지만, 늦잠을 잤으니 많이 잘 수 있었고, 아침을 여유롭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일도라며 서로에게 눈 신호를 보냈다.

오전 오후, 모두 일을 하는 날은 월요일이 마지막이었으므로,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놀지 말자라는 눈빛을 보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건물을 짓는 곳의 옆에 있는 밭과 같아 보이는(밭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곳의 흙을 건물의 토대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옮기는 것이 일이었다. 월요일 이전까지는, 팀을 나눠서 일을 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던 우리들이 이날은, 우연히 일을 하는 팀이 나눠져 한 팀이 일을 하고 있으면, 다른 팀은 쉬고 있고, 다른 팀이 일을 하면 우리가 쉬었다. 워낙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강했고, 쉬지 않고 일을 한다면 누군가는 무리를 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적절한 방법이었다고 생각 된다. , 팀을 나눠 놓으니 미묘한 경쟁 관계가 형성 되어서, 서로 일을 한 양이 눈에 바로바로 보이니, 노력을 하지 않을래야 안 할 수 없고, 사투리로 농땡이를 부릴래야 부릴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팀 간의 전력(戰力)차이는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일을 재미있게 만들었던 요소는 아닐까 한다.

앞서 벽돌을 쌓는 법에 대해서, 살짝 흥분해 길게 적었던 기억이 난다. 다 적고 나서 왜 그랬을까 하고 후회는 하였지만, 지금은 또 곡괭이질에 대해서 길게 적을 생각을 하니, 후회했었다는 그 말은 거짓말이었나 보다. 곡괭이는 다들 상상하는 그대로 굳어 있는 흙을 날카로운 부분으로 내리 찍어 흙을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하는 연장이다. 옆에서 본 모습을 그림을 그리면 우산처럼 보이기도 하는 곡괭이는, 무겁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요령이 없는 사람이 들면 꽤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연장이다. 태어나서 곡괭이라는 것을 처음 들어보는 여자 단원들이 곡괭이 질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웠다. . 왠지 이 바로 앞 문장 적었던 기억이 난다. 설마 곡괭이 질을 하는 것도 적었을까? 적지 않았다고 믿고 계속 적어 나가보자. 곡괭이는 긴 나무 자루를 잡고 그것을 높이 들어 아래로 내리 찍으면서 그 용도를 다한다. 곡괭이의 머리 부분 자체가 쇠로 만들어져 있어서 방향만 제대로 잡고 내리기만 해도 꽤 땅에 박히는 힘이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작업이 큰 진척을 보이지 않는다. 땅 속에 곡괭이 날을 깊게 박히게 하고, 그 힘으로 흙을 많이 파 내기 위해서는 자루를 쥘 때 오른손은 자루 밑을 잡고, 왼손은 머리 부분 가까이에서 번쩍 들어 내릴 때 힘을 실어서 손을 모아 주어야, ‘있는 힘껏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힘이 들어가게 된다.

곡괭이의 쇠머리를 땅 속에 박아 넣고 나서도, 그것을 그냥 들면 안되고,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서 몸의 바깥 쪽, 그러니까 몸의 반대로 밀어주어야 흙이 많이 들리게 된다. 그렇게 어려운 요령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우리에게, 그들의 일은 힘들었지만, 외부 효과로 우리에게는 즐거움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왜 곡괭이 질에 흥분해서 이렇게 길게 적었는지, , 다음에 혹시 해비타트나 땅을 파는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생길지 모르니, 정보 제공의 의미에서 적었다. .. 라고 하면 거짓말처럼 보일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분량 늘리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팀으로 일을 돌렸던 탓에, 꽤 빠른 속도로 일은 진행되었다. 흙은 분명히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 건물 바닥은 왜 그렇게 차지 않는 것인지. 월요일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흙 파는데 보냈다. 오후에는 아마, 벽돌을 조금 던졌던 것 같은데, 벽돌 던지기의 드림팀 오승식, 권현우, 박규병이 있었기에 딱히 힘들었던 기억으로는 남아있지 않다.

일을 마치고, 돌아 왔다. 씻기가 무섭게 수영장에풍덩!’ 약 한 시간을 물 속에서 놀고, 나와서 사진을 조금 찍고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이날의 저녁 메뉴는 돼지 통구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돼지가 구워져서 떡 하니 누워 있고, 그 것을 우리가 잘라 먹는 것은 아니었고, 돼지의 각 부위가 요리 되어 있었고, 그것을 뷔페처럼 가져다 먹는 가게였다. ‘바비 굴링이 그 조리된 돼지들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맛있었다. 메뉴는 말 그대로 돼지 고기가 전부였고, 돼지 고기를 배부르게 먹지 못했던 단원들은 처음의 식사 속도는 꽤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찌나 우리나라의 김치가 생각이 나던지. 우리의 수육과 비슷하게 조리된 음식이 있었는데, 그 음식을 바라보면서 했던 생각은 김치그리고 막걸리였다. 어찌나 어찌나 김치가 먹고 싶던지. 입맛을 돋구어 주는 야채 요리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슬프기는 처음이었다.

몇몇 단원은, 식사를 하고 야시장을 갔고, 나는 피곤해서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온 뒤, 방에서 뒹굴뒹굴 하다가 마지막 연습을 하기 위해 로비의 2층에 있었던 홀로 향했다. 마지막 연습이어서 단원 중 어느 누구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날 변경된 것이 있었는데, 응원 중에 음악은 흐르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때,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라는 의견이 나왔고, 원래는 그 시간에 인간 탑을 쌓는다는 것을 강민혜 양이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다. ‘한번 해보자라는 의견을 내가 내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밑에 깔리는 사람이 될 것인 것을 알았다. 역시 그랬다. 하지만 허리를 완전히 굽혀서 하는 인간 탑이 아니라, 여자 단원이 남자 단원의 허벅지를 밟고 올라가는 형태의 인간 탑이었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응원의 다른 부분은 거의 마무리 되었던 시점이라, 인간 탑의 연습만을 열심히 한 결과 다음날,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멋진 응원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왕, 공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가 어떤 공연을 현지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는지를 적어 보자. 우선 공연 연습에 대해서 조금 적으면, 발리에 가기 전, 한 달 전부터 연습은 시작되었다. 내가 알기론 발리에 가기 전까지 모든 단원이 모여서 연습을 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721일부터 30일까지의 기간 동안은 장학금 연수입네, 귀향입네 등의 이유로 연습에 빠졌었다. 이 지면을 빌어서 연습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술회한다. 크게 나누면, 태권도, 남자 댄스, 여자 댄스, 응원 그리고 합창을 했다. 남자 댄스는 남자 댄스그룹인 2PM이라는 가수 그룹의 노래 Heart Beat를 연습하였고, 여자 댄스는 여자 댄스 그룹인 원더걸스의 노래 Two Different tears를 전성아 양의 애교 섞인지도 아래 연습하여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응원은 가수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그리고 건대 출신 가수인 홍서범의 불놀이야를 이용해 연습 했다. 태권도는 내가 담당이었는데, 여자 단원, 남자 단원들이 다같이 하는 태극 4, 남자 단원만의 태극 7, 그리고 나는 3단의 품세였던 태백을 공연했다.

춤을 연습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춤을 배우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하나의 도전이라고 하니까, 뭔가 멋진 책의 제목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큰 의미는 없이, ‘움직이지 않는 몸, 움직이기정도의 도전이었던 듯 하다. 춤을 연습하면서 느낀 것이, 팀워크나 처음에는 맞춰지지 않았지만, 다들 열심히 연습한 결과 동작들이 맞아 떨어지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데, 물론 전혀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내가 진정으로 느낀 것은 댄스 가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지 않고, 성공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조그만 연습을 해도 땀이 뻘뻘 나는 춤 연습을 매일 해야 하는 댄스 가수들이 존경스럽게 까지 느껴졌다. 그래서 댄스 가수들이 뚱뚱한 사람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자 단원과 남자 단원 몇몇은 여자 댄스그룹 원더걸스의 노래에 맞춰서 연습을 했고, 그 연습 하는 것을 보고 있기만 하는 것이 심심해, 나도 뒤에서 같이 연습했었다. 아이들에게 보여줄 때,여자 단원들 댄스의 뒷부분에 몰래 들어가, 같이 연습했던 것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같이 춤을 추었다. 응원은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아 힘들었지만, 상체와 하체를 따로 연습을 해서 같이 붙여 나가는 순서로 연습을 하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동작들 하나하나를 크게 그리고 박력 있게 해야만 해서 체력 소모가 꽤 격심했다.

땀을 비 오듯흘리고 나면 아이들에게 보여줄 하나의 공연이 마무리 되었다. 합창은 다같이 연습할 때 참여를 하지 않아,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실제 공연에 가서는 다들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뒤에서 박수를 치고만 있었다. ‘으쌰 으쌰

공연 날의 이야기를 적기도 전에, 너무 많은 내용을 적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슬쩍 해본다.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서로서로에 격려를 하면서, 내일 좋은 공연을 하자는 하나 된 말을 하였다. 수영을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던 듯 한데, 그래도 수영을 잠시 했었다. 땀을 흘리고 수영을 하면, 그 상쾌함이 배가 되는 듯 하였다. 수영을 마치고 바로 옆방이었던 206호에서 간단히 맥주를 한잔 했다. 일찍 잠을 자고자 마음 먹었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일찍 잤다. 지금 이 글을 적는데, 잠이 와서 그런지 이라는 단어에 지금 내 몸이 반응하고 있는 듯 하다. . 잠 온다.(이건 뭐 기행문도 아니고 일기도 아니고..)

다시 아침이 되었다. 발리 덴파사 공항에 온 것이, 오늘 새벽 같은데 벌써 공식적인 일정의 마지막인, 공연과 오후의 마지막 노동 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공연과 함께 풍선 아트, 단체 줄넘기, 공기 놀이 등을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준비를 해 갔었다. 나는 풍선 아트를 담당으로 하였다. 긴 풍선을 이리 저리 꼬아서 다양한 모양을 만드는 것이 풍선 아트이다. 내가 실력이 없었던 지라, 다양한 것을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모양이 변해가는 풍선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곤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웃고 있어도 좋고, 울고 있어도 좋고, 까불어도 좋고, 점잖아도 좋다. 내 어릴 적의 모습이 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항상 사고를 치고 다녔다고 했다. 어른들이 현우가 어떻게 크게 될지 궁금하다라고 하실 정도로, 장난꾸러기에다가 위아래도 없는 어린이였다고 하니,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랬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아이들이 장난을 치면서 놀아도, 그냥 귀엽게 보이는 것이다. 작년의 라오스에서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시간이 많았는데, ‘순수한 웃음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오스의 어린 아이들은, 눈물이 날 정도의 웃음을 짓게 했다. 발리의 어린이들 역시 그랬다. 어린이는 언제나 내게 웃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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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33 해외봉사활동 후기

또 하루의 해가 밝았다. 다시 발리 북부로 돌아가는 날이기도 했고, 공식적인 휴양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공식적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이유는, 돌아오기 전날, 다시 말해 8 11일도 객관적이 기준에서 보면 휴양에 속할 수 있을 패션 센스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핑계를 대자면 ‘8 11일은 귀국 준비를 위해서라고 둘러댈 수 있을까.

일요일의 첫 방문지는 폴로 매장이었다. 어제 해산물 요리를 먹고 나서 호텔로 돌아오면서, ‘폴로 못산다, 폴로 못산다노래를 불렀던 단원들이 많았기에, 물론 나도 그랬지만, 내일 관광을 하러 가기 전에 대형 폴로 매장을 방문한다기에 다들 입을 다물었었다. 그래서 처음 들른 곳은 폴로 매장. 폴로 매장을 가는 차 안에서, 이창선 군과 김경희 양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계급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아직도 계급이 나눠져 있는 사회가 이 지구 상 위에 하나의 제도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낮은 계급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기하게 생각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도 1910년 경술국치 이전의 시기에는 신분제라는 제도에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3세대가 지난 시점에서 신분제에 대한 실감을 외국의 관광지에 와서 생각해 본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기 까지 했다. 신분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의 성안동 권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이창선 군과 김경희 양이 안동권가 전국청장년 체육대회의 개최 사실에 꽤 놀라는 듯 하였다. 안동 권가는 매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서 청장년 체육대회를 열고 있다. 나도 2번 참가한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마산창원지역 청장년회 회장을 역임하셨었고, 어릴 적부터 안동 권가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매사에 임할 수 있도록 강제적이지는 않지만 품위를 되도록 유지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던 나는 성씨에 대한 자부심은 갖고 있었지만, 다른 이와의 비교를 통해서 높고 낮음을 겨뤄본 바가 없기에, 이러한 체육대회를 여는 것에 대해서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눈빛을 보내는 다른 단원들의 신기함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폴로 매장에 도착해 입구에 들어가니, 일단 인도네시아의 내수 폴로와 수출용 폴로의 차이점에 대해서 한국인직원이 설명을 해 주었다. ‘한국인이 폴로 매장을 하나의 관광코스로 생각하고 있고, 그에 대한 수요가 이러한 매장을 형성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심지어 다른 현지 직원들도 유창한 한국말을 사용했으니, 한국에서의 폴로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가치가 또 다른 의미의 한글의 세계화를 진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빈정거렸다. 여기서 나는 빨간 티를 하나 샀다. 의류뿐만 아니라, 발리에서 만든 비누나 화장품 등등을 팔고 있었지만, 티 한 장에 무리를 한 나는, 무료로 마실 수 있도록 해준 커피나 마시면서, ‘, 잔 예쁜데?’ 하면서 놀고 있었다. 다들 살 것들 것 많았는지, 양손 가득 종이 가방을 들고 나오는 모습들을 보면서, 싸긴 싼가 보다 하고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가 매장을 나오려 했을 때, 또 다른 한국 관광객들이 입구에서 폴로 상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고, 같은 말투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이야기 하는 직원의 기억력에 놀랐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특정한 그룹에 속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생각해야 한다거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나라이고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내가 왜 뜬금없이 한국인에 대한 서술을 하느냐면,  폴로를 통해 바라본 한국인의 한 단면이 이번 발리 봉사활동 기간 동안 나를 꽤 상념에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앞서도 서술한 바 있지만, 한국에서 폴로 셔츠를 한번 선물로 받아 본 적이 있다. ‘폴로라는 브랜드를 처음 입어 본 것이기도 했지만, 지금 4년 동안 봄가을겨울에 입고 있는데, 셔츠의 상태가 나빠지거나 닳거나 해지지 않았다. 다리미로 다리면 다시 새것과 같이 되는 것에 나름대로 감탄을 느껴 옷의 질이 나쁘지 않은 것도 폴로의 특징인가보다.’하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러한 질에 관련한 배려가 누구에게나 구매의 심리적 바탕에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나 또한 빨간 색 폴로 티를 사면서, 왼쪽 가슴팍에 수 놓여 있는 폴로 상에 일정한 가치를 두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 백화점에 갈 때에는 백화점에 맞는 옷을 입고 가야 굳이백화점에 가서 옷이나 물건을 사는 것에 대한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 한 명을 동등한 지위를 가진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이나 들고 있는 가방’,’액세서리등의 물질에 의거한 판단에서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비싼 옷을 입은 사람은 구매력이 있는 것이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은 그냥 구경만 하고 떠나는 사람이라면,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은, 구경을 하기 위해서 백화점까지 가서 그 굴욕을 받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한국인론으로 다시 돌아오면, ‘사람에 대해서 낮은 가치를 두는 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높은 가치를 둔다. ‘가지고 있는 것속에는 부모도 포함이 되고, 직업이나 다니고 있는 학교 등 다양한 비물질적인 것도 포함된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해서만 집중을 하게 되니, 앞으로 이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지향점을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특히 사람의 가치를 낮게 보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대입이나 취직을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의 기준에 맞춰서 설정하게 되고, 끊임없이 그 기준이 뿜어내는 마약과 같은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폴로라는 브랜드 하나를 가지고, 한국인론(韓國人論)을 이끌어 내는 것이 다소 이상하게 생각될 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가지는 브랜드가 우리의 가치를 매긴다고 한다면, ‘인권을 추구하기 위해서 죽어갔던 수많은 혁명가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명품을 사주면서, ‘당신들이 만들고자 했던 인간의 모습은, 이 옷안에 갇혀 버린 지 오래요.’ 라고 말해 줘야만 할 것이다. 옷만을 이야기 했지만, 비단 옷 뿐이랴. 나 역시 그러하니, 실컷 내 얼굴에 침만 뱉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여행을 가서, 또 다른 한국인의 소비 행태를 보면, 나는 아예 옷을 벗어 던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폴로 매장을 나와, 잠시 은을 직접 세공한 장신구들을 전시하고, 그 세공하는 현장을 구경하는 곳으로 갔다. 사실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지라, 버스 안에서 잠이나 잘까 하고 있었는데, 다들 나가버리고 에어컨을 꺼 버리니 더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나도 결국 은 제품 매장으로 갔다. 가격은 보지 않기로 하고, 하나하나 살펴보니,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가격을 봐도 못 사고, 보지 않아도 못 사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크게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그림들이나 풍경,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들만 한 것을 찾아서 보고 있었는데, 은 세공품들도 그러한 생각을 하도록 하였다. 왜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보고 있는가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을, 아름답지 않은 것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잃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외관의 아름다움도 물론 아름다움이지만,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나, 중고등학생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흙 묻은 손으로 자신보다 더 어린 동생의 얼굴에서 흙을 털어주는 어린이의 모습 등에서도 아름다움은 만날 수 있기에, 내가 이 아름다운 것들을 감정이 삭막해져보지 않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열심히 아름다운 것을 찾아 다니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쇼핑을 마친 우리들은 다시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날씨가 꽤 좋았던 관계로 기분도 좋았다. ‘물 위에 떠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따나 롯사원은 바다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는 사원이 바다 중간에 떠 있는 듯 하여, 사실 떠 있는 것은 아니고 바닷물이 길을 막았을 뿐인데, 이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현지 시간으로 11시 정도에 그 곳에 갔을까. 아니면 더 늦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때는 썰물 때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원의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사원이 있는 곳까지 가서 성수로 손과 얼굴을 씻고, ‘천리향을 오른쪽 귀에 꼽고 흰 쌀을 이마 가운데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썰물이라는 자연 현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썰물을 강조하는 것은, 굳이 썰물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따나 롯 사원이었지만, 바닷물에 들어왔을 때 그 모습이 자못 궁금해서, 썰물이었다는 것에 강조하는 것이다. GWK파크에서 신상이 완성 되었을 때, 다시 오겠다는 다짐이 첫 번째 다짐이었다면, 밀물이 되었을 때, 다시 따나 롯 사원에 오겠다는 것이 두 번째 다짐이 되었다. 3번째 돌아오기 전날이었던, 11일에 하게 된다. 바닷가에 있는 사원인지라, 또 멀리 보아도 섬이 보이지 않아, 바다만 보아도,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웠다. 하늘에는 구름이 구름 같이 떠 있었고, 바다 역시 바다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셔터를 마구 눌러대는 내 손가락이, 더 아름답게 찍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양, 찰칵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원이라는 특성상 소란스럽게 뛰어 다닐 수는 없었으나, 파도는 예외 인양 마음껏 포화를 내뿜으며 사원으로, 사원이 있는 해변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가만히 다른 단원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있는데, 바닷물 속에 어디서 많이 보던 슬리퍼 짝이 보였다. 추측으로는 김성환 군의 신발인 듯 한데,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김성환 군이 신발이 없는 채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왜 그러냐?’ ‘, 바닷가에서 게 보고 있는 데 파도가 덮쳐서 신발을 빼앗아 갔어요.’ ‘ㅋㅋㅋ’ ‘, 저 신발 하나 사 올게요.’ ‘그래라그랬단다. 나머지 한 짝은 보이지도 않았으니, 넓은 인도양을 혼자 유유히 떠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단원들을 이동했다. 이동하는 데, 신기한 것이 눈에 띄어 유심히 살펴 본 것이 있다. ‘HOLY SNA..’ 무엇인가를 영어로 적어 놓았는데, 뒷부분이 지워져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읽어보니 ‘HOLY SNAKE’라고 적혀 있었다. ‘성스런 뱀이라는 의미였는데, 뱀이 있는가 해서 흠칫 놀랐지만, 광주리만 있고 그 안에 뱀은 없었다. 뱀이 있었으면 그 주위에 사람들이 그렇게 여유롭게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 그렇게 많은 쓰레기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한가지 생각한 것이 ‘HOLY’라는 표현을 이 사원에서 보았던 듯 하여, 주위를 빙 둘러 보니, 아까 손과 얼굴을 씻었던 물도 성스러운 물이었고, 또 다른 무엇인가의 표지판에서 성스러운이라는 의미의 영어가 적혀 있었다. 인도를 신의 나라라고 표현한다면, 인도네시아의 발리를 신들의 섬이라고 표현한 글들을 본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중 88퍼센트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지만, 발리만이 유일하게 인구 중 90퍼센트가 힌두교를 믿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힌두의 신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누가 무슨 신을 섬기는 지조차 자기 자신 빼고는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고 할 정도의 많은 신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 힌두교가 발리에만 특별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믿는 이유가 특별한 것이 있는지에 대한 조사는 하지 못 했다. 어디를 가나 짜낭(향과 꽃 등을 담아 놓은 것)과 우리나라의 솟대처럼 집 앞에 서 있는 나무들은 신들의 섬이라는 느낌을 한층 더해 주었다. 이 솟대와 같은 것은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것이라 하고, 그 옆에 꽃과 음식들을 놓아 두는 것은 동물들에 대한 보시의 의미라고 한다. ‘짜낭에 대해서 또 하나 이야기를 하면, 이날 오전에 우리가 들렀던 폴로 매장에서, 공짜 커피를 홀짝거리며 앉아 있을 때였다. 직원 중 한 명이 계산대 옆에 있는짜낭을 새로운 것으로 갈면서, 잠시 기도를 드리는 듯 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더 낮은 노동력을 찾아 인도네시아까지 온 폴로의 공장, 그리고 그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팔고 있는 발리의 매장에서 공짜 커피를 마시면서 힌두교의 간단한 의식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이라. 종교에는 시간의 순서를 매기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임은 충분히 알고 있으나, 폴로 매장 안에서의 짜낭은 뭐랄까. 콘서트 홀 안에 앉아 있는 무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발리 어디를 가나, 짜낭은 매장의 앞이나, 매장 안에 꼭 있었으니, 신기할 바는 아니었으나, 매번 새로웠다.

 

지금, 나는 어떤 신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일까?’

 

다시 버스를 타고, 북부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디로 갈까하며 궁금해 하고 있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첫날을 덴파사에서 지내고 싱아라자로 이동하는 길에서, 현지 운전기사가 나에게 옆에 보이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고 알려줬던 곳이었다. 그때에도 그다지 날씨가 맑지 못해, 다시 오게 되면 밝은 날에 오고 싶다 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다시 그곳에 찾았을 때에도 날씨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맑은 느낌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그곳은 해발 700미터의 높이에 있는 곳으로, 항상 선선한 날씨를 하고 있다는 것이 관광책자 등의 설명이었지만, 그때 그런 것은 알지 못했다. 부두굴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인 브라딴 호수가 우리가 향한 곳이고, 그 옆에는 울룬다누 사원이 있었다. 해발 700미터라는 것을 발리 남부와 북부를 오가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는데, 차에 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귀가 먹먹하게 되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오긴 올라 왔나 보다 하고 있었지만, 700미터의 해발을 자랑하는 곳인지는 몰랐다. 브라딴 호수는 끝이 보이긴 했으나, 한 눈에 다 보이지는 않을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고, 물은 맑다기 보다는 평범한 물이었다. 살짝 추웠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안개도 많이 끼어 있고, 흙도 축축했다. 발리에서 계속 보이던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고, 현지인들이 많이 보였고,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있었다. 

울룬다누 사원은 사원의 느낌보다는 정원의 느낌이 많이 들었다. 워낙 힌두교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었던 지라, 탑이나 건물 하나의 의미에 대해서 알 수는 없었다. 과거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사찰이나 탑들을 보면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마구 파괴했던 것이나,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분리와 해체를 자행했던 많은 문화 유산들, 이런 문화유산들을 그들은 제대로 알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무지에서 기인하여 힌두교에 대한 사원 앞에서 마구 사진을 찍어 댔을지 모르며, 그들의 신성히 여기는 것에 대한 모욕을 했을지 모른다. 역사 속에 자행되었던 일들과 내가 저질렀을지 모르는 일들이 같기 때문에, 뭐 그럴수도 있었겠다, 라는 것이 결론이 아니라 무지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그러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지금에서야 알게 된다. 부끄럽다.

탑처럼 보이는 것 건물을 유심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멀리서 볼 때는 검은 시멘트와 같은 재료일 줄 알았던 것이 가까이 가서 보니, 짚과 같은 풀로 풍성하게 만든 뒤, 그 밑 선을 깔끔하게 잘라 내어 탑의 모양을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탑 전체가 짚과 같은 재료라는 것이 아니라, 탑의 삿갓 부분만이 그런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거 새로운 것으로 갈 때, 우리나라 초가 지붕 바꾸는 것처럼 할까?

다른 단원들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또 사진사 놀이를 하였지만, 다시 역시 나의 사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옆에 우연히 지나가던 정기연 군에게 사진을 부탁했고, 이때, 나는 재미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공중에 뜬 채 사진을 찍으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진을 위치를 바꿔가면서 계속 뛰어 있는 채 사진을 찍으면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과 같은 느낌의 연속 사진이 완성된다. 브라딴 호수 옆에서 이런 사진을 찍고 있는데, 현지인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이렇게 사진을 찍는 것이 신기했던지, 사진을 다 찍고 나자, 박수를 쳐주어서 심히 놀랐다. 무슨 특별한 일이라고.

 

 

그 이후로는 사진, 사진, 사진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이 특별한 추억을 만드는 수단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가끔 사진이 목적인 양, 다른 주위 풍경을 보기 보다는 사진에 자신의 모습을 담기만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진은 결국 물질로서 남는 것이지만, 자신의 눈과 가슴에 담는 그 곳의 풍경, 공기, 느낌은 사진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사진보다는 오래오래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호수에 가기 전에 점심을 먹었다. 이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 아까 기억해내지 못했는지. 호수를 가기 전에 점심을 먹은 것을 왜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브라딴 호수의 일정을 마지막으로 우리말을 할 줄 아는 현지 가이드와는 헤어졌기 때문이다. 점심을 그와 같이 먹었으니, 점심이 먼저다. 잠시 점심 이야기를 하면, 아침을 하모니 호텔에서 먹고 출발을 하였으니, 꽤 시간은 흘러 있었고, 하모니 호텔의 아침이라는 것이 객실 수와는 다르게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하지 못했고, 있는 밥에 있는 빵,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두부는 있었지만 무엇인가 부족한 식사였다. 그러한 식사를 마치고 약 5시간 후에 점심을 먹으려니 배도 고프기도 고팠고, 점심을 먹은 부두굴의 식당의 음식도 맛있었다. 음식의 맛도 손에 꼽을 수 있으나, 음식뿐만 아니라, 그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었는데, 비가 내리는 동남아시아의 식당, 다시 말해 대나무로 기둥을 짜고 그 위에 짚과 같은 것으로 만든 높은 지붕의 집에서, 떨어지는 비의 소리를 들으며, 안개의 향기를 맡으며 먹는 밥은 일품이었다. 음식이 맛이 없었더라도 그 몽환적 분위기에 취해서라도, 맛있게 먹었으리라. 하얗게 번져 터지는 빗물이 마음도 시원하게 만들었다.

다시 브라딴 호수로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가이드와 인사를 나눈 뒤, 악수를 했다. 웃는 얼굴이 선한 사람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말이 2프로 정도 부족했지만, 좋은 표현을 사용하려 했고, 항상 첫 마디가 대학생 여러분이라는 말로 시작해, 우리들이 대학생임을 깨닫게 해주었던 현지 가이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다시 차를 나눠 탔다. 잠시나마 수학여행과 같았던 시간은 더 이상 없었다. 토요일 일요일 이전에는 도요타 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혼다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전기사도 한 명을 제외하고 바뀌어 있었고, 운전 실력들은 이전의 운전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더 나아져 있었다. 편하게 앉아서 다시 싱아라자 지역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졸다 깨기를 반복했지만, 처음 북부에 갔을 때처럼 멀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지막 숙소인 퓨리 살롱에 도착했다. 단연 시설 면에서 최고로 꼽힐 만 하였다. 시설뿐만 아니라, 수영장 앞의 바다는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 그 곳의 석양을 사진으로 제대로 담아 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 슬프기까지 했다. 마지막 3일간의 방은 정기연 군과 함께 쓰게 되었다. 방을 같이 쓴 단원을 정리하면 처음 하루 동안, 팀장 정윤성 군과 김성환 군이 나와 함께 방을 쓰는 수고를 했었고, 두 번째 발리 타만 호텔에서는 김영한 형님께서 불편하셨겠지만 나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이틀을 머물렀던 하모니 호텔에서는 처음 같이 방을 썼던 김성환 군과 지냈고, 마지막 퓨리 살롱에서는 정기연 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석양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처음 도착한 날의 하늘에는 구름이 흩뿌린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하늘이었다. 정교한 솜씨를 가진 장인이 구름을 한 손 가득 쥐고, 적절한 완력으로 흩뿌려 만든 듯한 하늘이었다. 마침 그때,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붉은 하늘과 주황색을 띄고 있는 구름, 그 구름 사이로 살짝 비치는 햇살은 바다 위에 비쳐 보였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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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32 해외봉사활동 후기

아침이 밝았다. 어제의 꽃 단장을 다시금 정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평소와는 달랐던 것이 이날과 다음 날은 큰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다. 발리에 와서 처음으로 다같이 차를 타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댄스그룹 터보검은 고양이 네로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경주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만큼 즐거웠다는 이야기이다. 즐거웠던 사람은 나뿐 만이 아니었던지, 지난 밤의 과도한 오락으로 인해 버스 뒷좌석에서 잠 드려 노력하고 있었는데, 다른 단원들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길래 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잠시 환전을 하기 위해 환전소에 들렀고, 나도 50불을 환전했다.

공식적으로 관광과 휴식을 위한 날에는, 아무런 생각조차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이 버스는 뒤에도 문이 있을까 부터 시작해, 다양한 질문을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지만, 혼자라도 중얼거렸겠지만, 그 동안의 일에 몸이 지쳤던지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날카로움이 더욱 더 무뎌졌던지 둘 중 하나였다. 처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닷가. 분명히 해변의 이름이 있겠지만, 이때에는 이 해변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누사두아 해변으로 추정되는 해변에 도착을 하니, 과연 관광지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해양 스포츠가 중심적인 관광상품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뭐랄까. 관광지가 아니라 해양 스포츠를 훈련하는 군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먼 바다에서는 스노클링을 하기 위한 일단의 배들이 군집해 있었고, 해변에는 파라세일링’, , 패러글라이딩을 위한 낙하산과 같은 것에 배를 연결해 배의 추진력으로 사람을 공중에 띄우는 놀이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마치 공중 강하를 기다리는 신병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또 저 멀리에서는 바나나를 닮았다고 해서 바나나 보트라고 불리는 것이 보트에 매달린 채, 그 위에 보트보다 더 필사적으로 매달린 사람들을 태우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넓고 아름다운 해변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질서한 듯 하면서 질서 있게 개인의 스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원래 파라세일링과 바닥이 보이는 배 타기, 그리고 바나나보트 타기 이 세 가지가 우리가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스포츠였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바나나 보트를 타고 난, 바닷물이 썰물이 되어 파라세일링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스노클링을 하게 되었다. 바나나 보트는 여러 언론 매체에서 소개가 되어 어떤 방법으로 타고, 어떤 느낌이 들지는 얼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빠른 배의 뒤에 달려 있는 바나나 보트 위에서, 바람이 얼굴과 몸을 가르며, 파도가 솔직하게 바나나 보트와 밀접해 있는 탓에 파도의 반동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예상보다 훨씬 즐거운 사실이었다. 해변은 흰색 모래였지만, 바다 속은 암초도 꽤 있고, 해초 등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바나나 보트를 마지막에 뒤집으면서 느끼는 통쾌함은 느끼지 못 했다.

앞서 설명 했듯이, 공교롭게도 바닷물이 바다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선택으로 스노클링을 하러 조금 먼 바다로 나갔다. 스노클링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하면, 스킨 스쿠바 다이빙을 할 때, 일반 수영장에서 쓰는 수경보다는 큰, 눈과 코가 같이 들어가는 수경을 낀다. 그리고 그 옆에 바다 위에 떠 있을 때, 쓸 수 있도록 긴 대롱을 달아 놓는데, 이것을 이용해서 머리는 바닷속에 있으면서 호흡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마우스 피스라는 것을 입에 물고 스노클이라는 것을 차고, 오리발로 바다 속을 저어 다니는 것이 스노클링이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아버지께서 스킨 스쿠바 용품점을 하신 적이 있다. 스킨 스쿠바를 배우기 위해 교육생들이 오면, 나는 아버지, 교육생과 함께 고향 마산 인근의 물이 맑은 도만이라는 곳에 가서 스노클링스노클링인지도 모른 채, 나의 몸에 맞춘 수트를 입고 헤엄을 치고 다녔다. 그 당시, 스노클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즐거웠던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다녔었는데, 물 위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내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스노클링을 하던 모습을 귀여워하셨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바닷가에 놀러 가시면 내 어릴 적 콧노래 하면서 능숙하게 스노클링을 했던 이야기를 하신다. 다시 발리로 돌아와서 이런 추억이 있는 스노클링을 약 13년 만에 하게 된 나로서는 매우 감회가 새로웠다. 누군가 스노클링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겠지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도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바다 중간이라고는 해도 수심이 깊지 않아, 내가 서면 설 수 있을만한 수심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리발을 껴 보고, 처음 스노클을 입에 물어본 사람에게는 꽤 많은 심리적인 부담과 실질적 사용에 있어서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해, 나와 같이 배를 타고 간 사람들에게 내가 스노클링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수경을 낄 때는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라, 머리가 들어가면 수경 안으로 물이 들어온다. 수경에 습기가 낄 때에는 자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유리 부분에 바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시야가 확보가 된다등을 알려 주었다. 분명히 배에서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되는데, 아무도 스노클을 입에 문 채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스노클에 물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숨을 참고 바다에 들어가서 다시 나올 때 짧고 강하게 하고 불어주면, 스노클 안에 찼던 물이 다 빠져 나오기 때문에, 물고기가 된 듯한 기분을 충분히 느껴보라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그러지는 않았던 듯 하다. 바다에 적응이 되지 않은 여자 단원들은 허우적허우적을 계속했지만, 허리를 세우고 발을 앞뒤로 저으라는 이야기를 듣자, 그들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확인하였다. 바다 속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있었다. 배에서 식빵을 주길래, 이게 점심인가 하는 순간의 어이 없는 예상을 조롱하듯, 바다에 들어가면 물고기에게 식빵을 주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뭉치의 식빵을 들고 들어갔지만 물고기가 식빵을 먹기 전에, 식빵은 흩어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난 그냥 다른 단원들 위치를 이탈하지는 않는지를 한참을 살핀 뒤, 다들 적응이 된 것을 확인하고 돌고래가 되어서 놀았다. 오랜만의 바다 수영은 꽤 상쾌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도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혼자 바닷가에 앉아서 바다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적인 일인데, ‘바다라는 것이 때로는 너무 무서워 가까이 다가가기 조차 무서울 때가 있고, 때로는 나와 너무나 가까워, 또 너무나 아름다워 빠져들고 싶을 때가 있다. 발리의 바다는 파도는 꽤 있었지만, 관광지라고는 해도 바다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무서움을 숨겨 놓은 아름다운 바다였다.

처음에는 구명 조끼를 입고 스노클링을 했지만, 바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수영복만 입고 바다 수영을 즐겼다.

다시 우리가 타고 온 배에 승선했다. 여기서 또 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 세상의 배의 종류는 함선, 유조선.. 이런 이야기들이 아니라, 우리가 타고 왔던 배와 다른 배, 즉 남자단원들만이 타고 있던 배가 모양과 달릴 수 있는 속도가 달랐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가 탄 배는 야마하 85마력을 2개를 달고 있었다. 합쳐서 170마력의 힘을 낼 수 있는 배였다. ‘마력이란 hp로 표시되며, ‘말이 끄는 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탄 배는 육지에서 말 170마리가 끌어 당기는 힘으로 바다 위에서 달려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 단원들이 탄 배의 엔진을 아무리 유심히 살펴보아도, 마력이 보이지 않았다. 뚜껑에 도색을 했는지 녹색만이 보였고, 한 눈에 보기에도 큰 마력을 낼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스킨 스쿠바 용품점을 정리하시고, 선박 판매 사업을 내가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시작하셨다. 배 이야기를 하다가 왜 뜬금없이 아버지의 사업 전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느냐. 나도 공식적으로 스킨 스쿠바를 접게 되고, 바다와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들을 찾게 되었고, 새로 찾은 놀이가 바로 배 타기였다. ‘배 타기가 무슨 놀이냐 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선박 판매 및 선박용 엔진 판매를 하시기 위해서는, 손님에게 배를 태워 주거나, 엔진 설치 후 시운전이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거의 주말에는 학교를 마치자 마자, 2시간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의 사업장에 가서, 손님과 함께 배를 타거나 시운전에 참여하는 것이 오락이었다. 특히 선두에 서서 바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마치 타이타닉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난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치는 느낌으로 바다 위를 뛰어 다녔다. 이런 느낌을 발리에서도 받았다. 어느 쪽을 봐도 그림과 같은 풍경 속에서 바다 바람을 가르며 시원한 공기를 마시는 느낌은, 언제나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나 스스로에게 넌 역시 바다 사나이다.’라는 확신이 들 만큼 상쾌했다.

스노클링을 마친 뒤, 수영복 위에 해군 바지를 하나 입은 채, 그대로 거북섬으로 출발했다. 앞서 서술한 좋은 배를 타고 가니, 그 기분 상쾌했다. 우리가 휴양했던 발리 남부의 바다가 그러하다고 생각되는데, 수심이 깊지가 않아 배가 해변 가까이까지 다가가지 못했다. 거북섬으로 향하던 중, 바다 중간에 서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해변과 거리는 꽤 멀어져 있었지만, 사람이 섰을 때 설 수 있을 만큼의 깊이였다. 그래서 우리가 거북섬에 도착했을 때, 섬과 멀찍이서 내려주면서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길래 배에서 내렸다. 보기에는 흰 모래사장이었으나, 바다 안의 상황은 해초도 많았고, 해초가 많은 것은 간질간질하다지만, 돌과 조개의 껍질이 지뢰처럼 우리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생각 같아서는 성큼성큼 바다로 뛰어가고 싶을 만큼 좋은 풍경이었지만, 당장 발 밑에 있는 돌과 조개에 신경을 쓰느라, 주변 풍경을 마음에 담을 때에는 잠시 멈춰 서야만 했다. 다른 단원들에게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지만, 안전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거북섬으로 갔다. 바다 중간에서 내려, 거북섬으로 향하는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으므로, 나도 고통스럽긴 하지만 다른 여러 사람들도 손에 옷자락을 붙잡고 아래만 바라보면서 걸어오던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또 안쓰럽기도 했다.

거북섬은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육지에 올라와서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데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천연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북이가 있었기 때문에 거북섬이라고 불릴 만은 하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뱀도 있고, 사향 고양이도 있고, 심지어 박쥐도 있었는데, ‘뱀섬도 아니고 사향고양이섬도 아닌 것이 별 이유 없이 재미있기도 하였다. 확실히 내가 재미를 느끼는 코드는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른 듯한 것을 발리의 조그만 섬에 와서 느낄 줄이야.

이렇게 가까이서 거북을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거북이를 들어 본 적은 물론 없었기 때문에 거북이가 유유히 헤엄을 치며 놀고 있는 물 속에 들어가 거북이의 등을 들어 나와 사진을 찍도록 하였다. 생각보다 무거웠고 등 껍질은 딱딱하기는 했지만,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딱딱함이었다.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그 안에 거북이의 삶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혈기 때문에 부드럽게 느껴진 것은 아닐까 한다. 거북이 구경을 끝내고, 그곳에 있었던 다른 동물들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쓰면서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계투, 닭싸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돈을 나눈 뒤,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더 이상 판돈이 올라가지 않게 해 놓고, 닭을 발만 잡은 채 상대의 닭에게 가까이 다가가 화를 돋구었다. 닭싸움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의 놀이로서 즐기고 있지만, 진짜 닭싸움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심을 이야기 하자면 닭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 아니라, 거북섬이라는 관광지에 와서, 그것도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종족의 번식을 하기 위해 올라오는 성스러운 섬에서, 사람의 감정을 강제로 대변시켜 닭들에게 싸움을 시키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단지 재미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시기와 장소가 적절하지 않아 보였고, 패배한 닭의 꽁무니를 좇아 가던 닭을 보면서 환호하던 사람과 돈을 잃었다는 것에 잠시 동안 슬퍼하고, 다시 돈을 꺼내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거북이와의 충분한 시간을 보낸 뒤, 뒤편에 마련된 여러 우리들로 향했다. 열대의 섬에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박쥐도 있었고 도 있었고 코피 루왁을 만든다는 사향 고양이도 있었지만 우리가 잠들어 있는 이 동물들의 잠을 깨워서, 우리의 목적, 즉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거북섬에서도 이런 목적을 위해서 아무런 관련 없는 동물들은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리라. 내가 다시 삐딱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동물원에 가서도 가끔씩은 느끼지만, 우리가 우리속에 들어 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느끼는 신기함기쁨이 저 동물들이 자신들의 서식지를 떠나 와서, 자유를 잃은 채 살아가는 것에서 겪어야만 하는 고통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어떤 것이 계량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다. ‘계량적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우나,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해 보고 싶다.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어린이들은 오지 탐험가가 될 꿈을 접게 되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을 잃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어딘가에서, 우리의 안전을 확보함과 동시에 우리 손에 들려 있는 먹이로 그들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괜히 흥분한 것 같다.

여러 동물들과의 사진 촬영을 마치고, 한쪽 구석에 마련된 식당 비스무리한 곳에서, 우리 보다 늦게 거북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사진을 다 찍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발리에서는 더운 날씨였던 만큼, 물을 많이 마셔야 했지만, 생각해보면 물을 마신 비율과 비슷하게 빈탕맥주를 마셨던 듯 하다. 기다리는 동안에 또 한병의 맥주를 마셨고, 언제나 그렇듯이 맥주는 나를 기분 좋게 했다. 김경희 양이 매번 내가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하는 한 구절을 옮기겠다.

오빠한테는 왜 맨날 맥주 빈 병이 와요?’

다른 단원들이 다들 돌아왔길래, 이제 늦은 점심을 하기 위해 다시 우리가 해양 스포츠를 했던 해변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멀고 먼 가시밭길과 같은 해변을 걸어서 배에 당도했고, 돌아갈 때는 배의 위에 서서 바람을 한껏 받으면서 돌아갔다.

해변에 도착을 해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아침보다 더 많은 왁스를 머리에 발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찌르는 머리를 만들었고, 스스로 꽤 만족한 머리 모양을 만들었다. 예전에는 머리나 옷 전체의 스타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나였지만, 최근에 들어서 이미지 변신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꽤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잠시 옆길로 빠져서 이야기를 하면, ‘학생 이미지에 맞는 옷을 입고 머리 스타일을 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늦게 대학을 들어와 26세라는 나이에 대학3학년이지만, 아직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가질 수 있는 자유분방함과 창의적 발상을 을 통해서나 학문을 통해서도 발휘를 해야 하지만,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젊은 내 몸을 가꾸는 것도 큰 기쁨의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대신, 기준을 이것이 유행하니까’.’남들이 이것을 많이 쓰니까가 아니라 나랑 어울리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남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다소 어리석어 보이고 황당해 보이지 않는 범위의 것이라면 충분히 그 개성을 살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젊음의 가치는 남과 같음을 추구하는 곳에 있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면서,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기준을 삼을 수 있을 정도의 과정을 형성하는 것이 개인의 역사속에서 아름다웠던 청춘의 한 장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또 괜히 흥분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점심식사를 하는 곳은 GWK라는, 공원이라기 보다는 힌두신의 흉상이나 구조물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중국 음식이라고는 했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국음식이었던지 우리들의 입맛에는 썩 맞지 않았지만, 배가 고팠던 나는 과일과 더불어 꽤 많은 양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GWK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흉상과 구조물을 보기 위해 나섰다. GWK라는 의미는 GARUDA WISNU KENCANA라는 의미였고, 하나씩 설명을 하면, 가루다는 인도의 전설 속의 새 이름이다. ‘가루다, 가루다, 가루다… ‘ 어디선가 많이 들은 기억이 있다 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몇 단원들은 오고 갈 때 비행편이 대한한공이 아닌 인도네시아 항공을 통해 예약을 한 것이라 했다. 바로 그 인도네시아 항공사 이름이 가루다 항공이었다. 나도 가루다 항공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항공 회사의 이름을 전설 속의 새의 이름으로 지었다라. 150년 전만 해도 하늘에 떠 다니면서 사람들을 싣고 다니는 새가 비행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없었다고 생각되기에, 나름대로 전설 속의 새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듯. 그리고 WISNU는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비쉬뉴인데, 비쉬뉴는 브라마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신이라고 했다. 토르소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흉상이 있었는데, 눈을 감고 있는 듯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눈을 뜨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죄송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으로 KENCANA인데, 정확히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정보의 물결 속에 물어보니, ‘0순위라는 설이 유력하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No.1’ 이런 느낌이나 !’이런 느낌일까. 전체를 붙여서 말하면 가루다와 비쉬뉴는 짱!’ 이런 의미의 테마 공원이다. 검색을 해보니, 원래 이곳은 채석장인데 어느 인도네시아의 부자가 테마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 투자를 하고 있으나, 지속적인 자금 공급이 되지 않아 조금씩 조성을 해 나가고 있다는 글을 읽게 되었다. 가루다와 비쉬뉴 흉상도 지금은 분리되어 있지만, 돈이 더 생기면 최종적으로 합친 것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완성되지 않은 것을 본 나에게 다시 발리에 오도록 만드는 충분한 유인은 제공한 듯하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나에게 발리를 설명하라고 하였을 때, 가장 인상 깊었고 또 다시 가게 된다면 또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이곳!’이라고 대답할, 울루와뚜 사원이었다. 울루와뚜 사원은 절벽 위에 지어져 있는 사원으로, ‘인도양을 바라보는 절경이 좋은 곳이라고 하도 많은 블로그나 여행기에 써 놓아서 그런 줄 알았지, 발리에서 지도를 보면서 관광을 다닌 것이 아니라서 바다 예쁘다가 내 공식 의견이다. 바다 예쁘다는 것이 내 공식 의견이었던 만큼, 내가 얻은 정보에 의해서 울루와뚜 사원을 설명하도록 하자. 원숭이가 많았다. 원숭이의 마리 수가 많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원숭이가 사람을 희롱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인상에 남는다고 하는 편이 더욱 적절한 표현일 수 있겠다. 사람들의 물건, 예를 들면, 안경이나 귀걸이, 목걸이 등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하라는 현지 가이드의 말에 따라 나는 원숭이가 없는 절벽으로 가기 전까지는 안경을 벗고 있었다. 과연 그럴 것이, 울루와뚜 사원에 들어와 바다에 흠뻑 젖어 있을 무렵, 우리 앞을 지나가던 중국인 관광객의 무리 중 여자 한 명의 안경을 원숭이가 빼앗아 가는 것을 보았다. 원숭이가 그 안경을 빼앗아 가서 무엇을 할까 가만히 지켜 보니, 먹는 것이었다. 먹는다기 보다는 입이 심심했던 모양인데, 그것을 잘근잘근 씹어가며 그 상황을 즐기는 듯 하였다. 중국인 관광객이 당황하자, 그 옆에 서 있던 현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봉지에 든 무엇인가를 중국인 관광객에게 구입을 권했고, 그것은 원숭이가 먹을 만한 것이 들어있는 봉지였다. 중국인이 그것에 대한 값을 지불하자, 현지인은 그것을 원숭이에게 주는 듯한 행동과 동시에 원숭이의 침이 흥건히 묻기 시작한 안경을 뺏으려는 준비를 하였다. 원숭이가 봉지를 집으려 할 때, 순간적으로 안경을 손에서 놓았고, 그때 현지인은 그 안경을 낚아 채 중국인 관광객에게 주었다. 보는 우리로서는 신기한 경험이라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인 관광객은 원숭이의 침이 묻어 있는 안경을 받아 다시 쓸 때 그 기분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단원 몇몇이 해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좋은 사진기를 들고 있는 정기연 군이 앞에 있길래, 사진을 좀 찍어 달라 부탁을 하였다. 단원들은 포즈를 취하고, 정 군은 사진을 찍기 위해 하나, .. ‘ 을 외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담벼락에 앉아 있던 원숭이가 이 끝나자 마자 정기연 군의 머리를 밟고 건물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기연 군은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친 줄 알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모든 사건의 추이를 보고 있었던 단원들은, 말 그대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상황과 타이밍이 어찌나 웃기던지,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도 웃고 있다.

 

원숭이가 우리들을 살짝 긴장시키긴 하였지만, 원숭이의 기억은 단편적인 추억으로 남을 만큼 바다의 모습은 좋았다. 사원의 울타리를 나와, 바다 가까이 가보니, 절벽 바로 앞까지 나갈 수 있는 풀밭이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어느 곳이든, 아무 카메라가 찍어도 엽서가 되었다. 절벽 바로 앞까지 나아가 보았다. 파도 소리가 지금 이 세상 어느 스피커를 쓰고, 아무리 좋은 영화관에서 쓰는 앰프라 할지라도 이 음량과 청량함은 담아낼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큰 파도가 치고 난 뒤, 잘게 부서지는 파도는, 벨벳 같이 파도가 한번 스윽 하고 쓸어가자 흰 바다로 변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정신이 팔려 절벽에 빠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황홀한 상태가 되었다. 마구 눌러대던 셔터에 잠시 손을 땐 채, 가만히 앉아 그 순간을 느꼈다. 이 글의 처음에 적었지만, 모두 다 가지고 오고 싶었지만 가져올 수 없었던 추억이 된다는 것이 슬플 만큼 좋았다. 바다를 어릴 적부터 좋아하고 또 사랑하고 있지만,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바다는 참 고마운 친구라 생각했다.

 

울루와뚜 사원에 대해서 계속 적고 싶지만, 감상에 빠져 감정만을 서술하는 것보다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발리의 울루와뚜 사원은 0순위의 관광지가 될 것임을 감히 추천하면서 울루와뚜에 관한 내용은 여기서 그만.

점심을 현지 시간으로 3시 정도에 먹었고, 울루와뚜 사원에서 다시 차로 돌아오니 시간은 7시 정도가 되어 있었다. 4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지만, GWK파크에서 사진을 찍느라 많이 돌아 다니고, 울루와뚜 사원에서의 산책이 우리에게 소화제가 되었던지 또 배가 고파 오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해변으로 갔다. 해변의 이름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의 해변이었는데, 식당들이 해변을 따라 이어져 있고 테이블은 해변 위에 있었다.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맨발로 식사를 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영화에 나오는 듯한 느낌의 식당이었다고 설명하려니 어느 영화?’라고 질문이 들어올지 몰라서 그냥 조용히 넘긴다. 좌석의 약 5미터 앞에서 전통공연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다른 레스토랑을 보아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하나의 정형화된 서비스인 듯 하였다. 식사 주문을 개인적으로 하게 되면, 상상 이상의 가격이 나오기에, 선생님과 팀장 정윤성 군이 주문을 하러 간 뒤, 조용히 앉아서 공연을 보거나 파도 소리를 듣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신 없이 하루가 지나갔고, 휴양지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며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고, 힘이 빠진 것은 아니지만 활발하게 움직이는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왜 그랬었는지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겠다. 맥주를 한 병만 마셔서 그런가.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한 그릇씩의 밥이 나왔고, 4명이 먹을 양의 생선 2마리, 오징어 튀김 그리고 조개 구이가 나왔다. 처음에는 양이 좀 적은 것이 아닌가 했지만, 먹다 보니 배가 부를 정도였다. 특히 생선구이가 맛있었다. 꽤 큰 생선이었는데 어떤 생선인지도 모른 채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었다.

식사를 하던 중에, 식당들을 돌아 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우리 테이블에도 왔는데, 바로 내 뒤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통에, 매우 흥겨운 기분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 얼굴을 올려보니,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눈이 풀려 있다고 해야 할까. 노래를 부를 때에는 이상하지 않았는데, 말을 할 때,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의미의 이상함이 아니라, 발음이 좀 풀려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선생님께서 얼마의 팁을 주셨고, 음악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들 즐겁게 식사를 하였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표정들은 행복을 증명하고 있었고,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에, 발리에서 먹었던 식사들 중에서 항상 1위를 차지 하는 것을 보면 좋긴 좋았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해변가에 잠시 내려와 파도와 함께 놀고, 사진을 찍었다. 울루와뚜 사원에서부터 내가 단원들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사진사와 같은 말투를 계속 쓰고 있었는데, 단원들은 그 말투가 재미가 있었던지 흉내를 내고 있었고, 나는 바닷가에서도 이 말투를 계속 썼다.

, 사진 찍습니다-‘ ‘여기 봅니다-‘ ‘다른 데 보지 않습니다-‘ ‘찍습니다-‘ ‘고맙습니다-‘ ‘- 또 아무도 날 찍어주지 않습니다-‘ ‘- 또 나는 혼자 셀카 찍습니다-‘ 등등의 말을 하였다. 글로 적으려니 느낌이 잘 살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언제 듣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언제든 이야기해 주세요.

저녁식사를 하러 가던 길의 이야기가 빠진 듯해 채워 넣는다. 앞서도 이야기했었지만, 버스 안에서 단원들이 다같이 90년대 노래나 최신 가요 등을 부르면서 이동했다. 맨 뒷좌석에 앉아있는 단원들 말고는 단지, 우리들이 내는 소음을 감내하는 인내심만을 보여주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서는, 모든 단원들이 한 곡씩 노래를 불렀다. 아마 첫 시작의 운은, 현지 가이드가 발리에서 꽤 유명한 가수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노래를 시켜 보자고 나랑 마음이 맞은, 이창선 군이 분위기를 만들었고, 마침 그때 저녁식사 하러 가는 장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던 가이드는 마이크를 든 채로, 노사연의 애모를 불렀다. 한국인의 겸양을 가진 듯, 한 번은 웃으면서 거절하였으나, 계속 우리들이 요구하자 마지못해 부르는 듯, 노래를 신나게 불러주었다. 과연 노래를 잘 부르기로 소문이 날 수 있을 실력이라 생각했다. 한번 마이크 홀더를 떠난 마이크는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장학주임 이미숙 선생님을 포함해서 모두다 한 곡씩 불렀다. 나는 꽃을 든 남자를 불렀다. 2004년 숭실대학교 정외과에 들어가서부터 계속 이 곡만 부르고 있다. 처음 부를 때는 높은 음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는다거나, ‘꺾임이 자연스럽지 못했지만, 6년 째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 같다. 이미숙 선생님께서 그때 한국 가면 노래방 쏠게라고 하셨던 이야기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선생님, 약속은 지키시는 분이시죠?

다시 저녁을 먹은 뒤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나니 현지시간으로 9시가 넘어 있었다. 바로 하모니 호텔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내가 순간적으로 생각한 것은 어제 폴로 매장에서 보았던 보라색 티, 사이즈 맞는 것을 찾아야 해!’ 였다. 결국 찾지 못하고 폴로는 빨간 티 하나를 손에 쥐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이때는 무언가 보물찾기와 같은 느낌으로 보라색 사이즈 맞는 티 찾기놀이를 즐겼다. 호텔에 도착하면서 번화가를 지나오니, 이미 폴로 매장은 폐점 상태였고, 실망을 했다기 보다 즐거움을 잃었다. 인도네시아에 관광을 오는 사람들은 폴로 쇼핑을 하나의 관광코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지만, 한국 국내의 이상적으로 높은 가격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 인도네시아라는 폴로 공장이 있는 곳에서의 쇼핑으로 이어지는 듯 하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 폴로 티셔츠, 티는 인도네시아에서 싸게 주고 산 거야.’ 라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도 스스로 이야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한국에서 보이는 폴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이미 안중에 없었고, 단지 그 생산지가 인도네시아라면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폴로 매장은 방문하지 못했다. 그 대신, 호텔 주변에 마사지를 할 수 있는 가게들이 많이 있어, 다시는 오지 못할 이곳에서 마사지를 한번 받아보자고 마음 먹고, 단원 몇몇이랑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주로 하는 마사지 시술소이다 보니, 영어로 적혀 있는 마사지의 종류가 적힌 메뉴를 볼 수 있었고, 실제로 가게 안에 눈이 파란 여자들이 몇몇 있었다. 나는 한 시간 반 동안 전신 마사지를 받는 것을 선택했고, 비용은 75000루피아였으니, 한국 원으로 환산하면 1만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마사지를 시술해주는 사람들이 여자 마사지사 밖에 있지 않아, 다른 선택의 여지가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현지 마사지사에게 나의 뭉친 근육을 부탁했다.

천장이 뚫려 있고, 각 방의 입구는 어두운 핑크색의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전체적인 조명은 어두워서, 졸리는 분위기를 만드는 듯 했다. 정확히 10시 반에 마사지를 시작하였는데, 한숨 푹 자다가 몸을 한 번 뒤집고, 다시 푹 자고 일어나니 11 50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 마사지 강도를 어느 정도에 맞출 것인가를 묻길래, 처음 했던 것보다 조금 강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 뒤, 팔도 힘을 빼고, 머리에도 힘을 빼고 뇌에도 힘을 뺀 상태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마사지사였는데, 악력이 내 뭉친 몸을 풀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특히 뭉친 곳을 누를 때면, 다소 고통스러웠지만 손길이 지나고 나면, 다시 그리워지기도 했다. 오일을 바르면서 마사지를 진행했는데, 그 오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어떤 오일인지 궁금했지만, 때로는 모르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또 좋은 추억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오일 뿐만 아니라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마사지사는 얼마의 임금을 받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신 이명박 대통령은, 경남대학교 산업대학원 초청으로 경남대 본관에서 강연을 했을 때, 어릴 적 그의 고향 포항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던 시절 이야기를 했다. 뻥튀기를 도매상에서 많이 떼어 와 가득 어깨에 매고 돌아다니다 보면, 꼭 어떤 사람들이 와서 이거 팔면 얼마를 버니? 일이 힘들지는 않니? 몇 살이니?’라고 물으면서 뻥튀기는 하나도 사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했다. 어린 이명박에게는 그런 말들 보다, 이거 전부 얼마냐, 라고 물으며 전부 사 가는 사람들이 훨씬 고맙게 느껴졌다고 했다. 내가 이곳 마사지사에게 한 달에 얼마를 버냐, 잠은 어디에서 자냐 등을 물어서 그들과 친밀감을 느끼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사지가 끝나고 난 뒤, 팁을 주면서 뜨리 마카시(감사합니다)’라고 웃음을 지어주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어제 오승식 군이 매우 피곤한 모습으로 호텔에 돌아왔길래, 도대체 밖에서 무엇을 했길래.. 라고 물었다. 그 대답이 마사지였다. ‘무슨 마사지를 받았길래, 진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냐?’라고 되물었고, ‘받아 보라라는 대답을 들었다. 마사지를 받고 나니,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았다. 나와 함께 같이 마사지를 받았던 4, 나를 포함해 5명의 표정이 발리는 천국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눈은 충혈되어 있고, 몸 전체에 힘은 빠져서 걷는 것 조차 힘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제대로 된 마사지였기 때문에, 몸이 가벼워 진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또 언제 전문 마사지사에게 마사지를 받아 볼지, 표현이 조금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다.

확실히 정신을 놓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마사지를 하고 난 뒤 호텔에 돌아와서 다같이 모여서 술을 마셨는지, 일찍 잠들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지상 마지막 낙원에서 혼자 그날 밤을 보냈었던 듯 하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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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31 해외봉사활동 후기

플로라에서도, 발리 타만에서도 그리고 역시 하모니에서도 우리의 첫 일정은 수영이었다. 수영장에 다들 몸을 풍덩 했다. 풍덩풍덩. 김영한 군이 방수 장치가 되어 있는 카메라를 들고 와서 사진도 찍으며 즐겁게 놀았다. 아직 그때 찍은 사진을 확인하지 않아,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사진을 찍던 중 일어난 아주 사소한 일인데, 그때에도 생각했지만, 지금도 생각해보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 있어 글로 남긴다.

물 속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고 놀고 있었다. 단체 사진을 찍는 다길래, 나는 그냥 다같이 평범하게 찍히는 것이 싫다고 여겨,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사진을 찍는 순간, 물 속으로 들어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대기 하고 있었다. ‘하나, , 이라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옆에서 카메라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물론 내가 생각한대로 사진은 잘 나왔지만,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가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단원들의 성화가 꽤 거셌다.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가 내 오른쪽 어깨를 손톱으로 잡았고, 그 손톱이 나에게 아주 미미한 상처를 남겼다. 손톱이 살점을 살짝 찢은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3개의 자국이 있었지만, 지금은 한 개만이 흉터로 남았다. 그냥 긁힌 것이려니 했는데 가만히 보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상처가 났다며 혼자서 조용히 얕은 곳으로 가서 아프다를 연발하며 누가 그랬는지 궁금하다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같이 즐겁게 놀고 있는데, 누군가의 손톱에 긁혔다며, 중얼거리고 앉아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기분이 좋겠는가. 아무도 자신이 나의 팔을 잡았다고는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내가 더욱 미안하고 또 부끄러운 것은 왜 그래야 했었는가 하는 데에 대한 반성이다. 자신의 몸을 소중히 다루는 것은 좋지만, 큰 상처도 아니었고 즐겁게 놀고 있는 분위기에서 단지 나만의 기분을 위해서, 좋지 않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된다고 판단했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또 기분이 나빠졌다고 이야기를 하면, 최소한 반나절은 그것이 지속이 되던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웃으면서 놀 것을 왜 그랬었는지. 지금 이 지면을 빌어 그 때 나를 걱정해주던 다른 단원들에게 감사의 말과 사과의 말을 전한다. 아직 어른이 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가 보다.

상처는 잊은 지 오래. 저녁을 먹기 위해서 꽃 단장을 하고 로비로 나왔다. ‘단장이라고 하는 특별한 이유는 이때 입은 셔츠가 꽃 무늬 셔츠였기 때문이다. 2006년도에 아버지의 옷장에서 꺼내 입은 이후, 해운대에 가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2009년도에는 일본, 그리고 2010년에는 발리에서도 또 한번 화제가 되는 내 셔츠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왁스를 잔뜩 발라 올린 머리, 검은 선글라스 그리고 꽃 남방을 입고 로비에 있으니 완전한 관광객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손지혜 양이 입고 왔던 옷이 꽃 무늬패턴은 아니지만 내 셔츠의 형이상학적 꽃 무늬에 지지 않을 정도의 무늬가 프린팅 되어 있는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패턴의 원피스였지만, 손지혜 양은 그 옷을 맵시 있게 소화하고 있었다. 같이 로비에 앉아 있으니 다른 단원들이 한결 같이 하는 소리가 신혼 여행 온 신혼 부부라며 부러움에 찬 목소리도 아니고, 조롱의 목소리도 아닌 이야기를 하였다.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흔들려 있어 그때의 그 느낌이 정확히 전달이 되지 않았다.

식당으로 향했다. 야자수 껍질을 숯으로 이용해서, 조리에 하루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전날에 주문했다는 오리 요리를 먹기 위해, 기대감을 품고 갔다. 또 잠시 길을 헤맨 뒤, 우리 상상했던 식당과는 다소 다른 모습의 식당에 들어갔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라기 보다, 순수한 의미로 일반 발리 사람이 외식을 하는 장소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다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신기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식탁에는 우리가 주문해 놓았다는 오리인지 닭인지 정확히 분간이 가지 않는 조류가 테이블 당 반 마리씩 조리되어 있었다. 다시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테이블 위에 있는 조류는 우리가 주문을 하였던 오리 요리는 오리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리는 병가를 내어서 쉬고 있고, 대신 닭 친구들이 우리들의 식탁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뭐 그런가 보다. 오리는 아픈가 보다.

 

 

음료를 주문하라 길래, 별 생각 없이 맥주를 주문했다. 그러자 갑자기 음식점 직원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맥주가 없다며, 꼭 마시고 싶은지 다시 물어보는 것이었다. ‘마시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있다면 마시고 싶다고 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 현지 코디네이터를 통해서 알아보니, 맥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주변의 마트에 가서 사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뭔가 맥주를 마시는 데,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맥주를 가진 것이 없는 줄 알았으면 시키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 번거롭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맥주를 즐겨 먹던 남자 단원 세 명이, 나쁜 짓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각자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남자 단원과 여자 단원은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크게 두 테이블로 나눠져 있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한 쪽 테이블은 더럽지만 환호했고, 다른 테이블은 깨끗했지만 배고픈 저녁식사를 하였다. 한 쪽 테이블이 남자 단원들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고, 다른 테이블이 인솔 장학주임님과 여자 단원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나를 포함한 남자 단원만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손을 씻으라는 물을, 다른 단원들에게 마셔보라며 권하는 것으로부터 장난을 치기 시작하면서, 그 물에 손을 깨끗이(?) 씻고 카레 향이 나는 닭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오른손을 이용해서 밥과 닭 요리, 그리고 우리나라의 김치와 비슷한 것이라 생각되는 매운 향이 나는 야채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닭 요리는 카레 향이 났지만, 입 속에서의 매운 카레 향이 아니라 입술을 맵게 만드는 카레 맛이 기억에 남는다. 매운 닭 요리에 매운 야채 요리를 먹으니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입 안과 입술을 차분히 하기 위해 밥은 많이 먹었다. 남자 단원 4명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닭 반 마리는 양에 찰 리가 없었고, 발리에서 가장 즐겨 먹었던 사테즉 꼬치와, 배를 채우기 위해 구운 닭 요리를 주문했다. 사테는 우리가 익히 맛을 알고 있던 터라,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기대를 하지 않고 주문했던 구운 닭 요리가 우리의 입맛에 딱 맞는다는 사실을 발견, 우리는 대박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거의 일인당 한 마리 정도의 양을 소화시켰다. 소문이 옆 테이블에도 전해져 여자 단원들도 닭 요리의 맛을 알기 시작하였고, 공감대는 형성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킨 요리는 처음 먹었던 카레 향이 진했던 닭을 그냥 구운 것인데, 카레 향을 연하게 입혀서 구워주는 요리가 있다 길래 주문을 했다. 첫 요리와 향은 비슷했지만 카레 향은 연했고, 닭 고기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우리의 행복 수치를 낮추지 않을 만큼의 맛을 보여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태양이 비친 곳과 비치지 않는 곳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 인양, 남자 단원들은 웃는 얼굴, 여자 단원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입은 삐죽이 튀어 나와있었다. 개인적으로 손으로 음식을 먹었던 기억은 5살 때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던 공장에서 같이 일을 하고 있던 인도인들이 인도 현지 카레를 들고 와서 손으로 먹었던 기억과, 작년 라오스에서 약 2주간의 손으로 먹었던 기억이 있었지만, 이번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손으로 먹은 닭은 또 다른 추억으로 남아 있다. 여담이지만, 우리가 요리가 닭인지 아닌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여러 증거들이 우리의 접시 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 진실성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닭의 머리와 그 머리 위에 있는 벼슬, 그리고 엄마 닭에게 발톱을 깎지 않았다며 꽤 혼이 났을 법한 발톱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도록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었다. 이런 증거들이 우리의 식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을 보니, 우리가 배가 고프긴 고팠나 보다.

다시 하모니 호텔 근처로 돌아오니 시간은 약 10, 현지시간으로 9시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거의 저녁을 5시 반에 먹거나, 늦어도 7시에는 먹었는데, 저녁 늦게 먹는 것도 이제는 완전히 적응이 된 듯했다. 저녁을 먹고 난 이후는 온전한 자신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번화가에 왔겠다 다들 격양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현지 시간으로 11시에 다시 호텔에서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잡고 안전을 위해 그룹을 이루어 르기안 지역을 어슬렁어슬렁 대기 시작했다. 현지 운전기사의 말을 그대로 전하면서, 잠시 르기안 지역을 설명하겠다. ‘2002년과 2004, 두 번의 폭탄 테러가 지금 여러분이 있는 이 곳에서 있었다. 많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과 뉴질랜드 사람이 사망했다. 그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저기 서 있다. 저기서 사진 찍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찍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석에는 그때 죽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테러가 있었을 때, 여기서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그때의 폭발 규모를 상상할 수가 있다. 테러 지역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고막이 터지고,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폭탄을 실은 차가 와서 그 상태 그대로 폭발했다. 많은 외국인이 오기 때문에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라는 내용을 자카르타 출신의 기사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테러라는 것은 항상 나와는 거리가 먼 것, 내가 어디에 있던지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테러가 실제로 일어난 곳에서 우리는 밤을 보내야만 했다. 얼마 전,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당신을 괴롭히는 불안 요소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많은 영국인들이, 이라크 전쟁 후의 테러 위협을 지적하기 보다, 자신의 집에서 자유로이날라 다니는 파리를 실질적인 불안 요소로 대답한 적이 있다. 사람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판단되는 것에는 상상력을 총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그것에 대한 정보와 공감대는 형성시키기 어렵다.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따르면 바로 옆의 사람의 기분이 좋지 않음에 대해서 그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도 실제적으로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서, 다시 말해 감정의 수준을 낮출 수 있을 만큼 낮춰야 상대방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테러라는 우리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두 번 다시 모든 경험의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경험에 대해서 공감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적 관광지의 번화가인지라 외국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았다. 오히려 현지 발리 사람이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하기까지 했다. 국적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인, 백인, 유럽인 등의 표현으로 밖에 서술하지 못하는 인종의 사람들은 다같이 맞춰 입은 듯이 빈탕맥주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들은 조금씩 취해가는 듯 하였다. 또 다시 발리 현지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빌어 말하면, ‘백인들은 술 마시면 미친다.’

한국에는 매우 고가의 브랜드로서 티 한 장에 10만원이 넘는 가격을 자랑하는 폴로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가 있다. 내가 26세가 되도록 가져보았던 폴로의 물건은 셔츠 한 장이 전부였고, 그것도 설날 선물로 옛 대학 동기 형에게 받은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폴로 매장이 5분에 한 곳씩 있는 이곳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가치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곳인가 하는 생각에 호기심 반, 물욕 반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보니, ‘폴로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한국인은 나뿐 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시 호텔로 돌아 왔을 때, 손에는 폴로를 하고 있는 남자의 마크가 그려진 종이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폴로 사랑은 이날부터 시작해, 어느 관광지를 가든 누군가 한 명은 항상 폴로의 물건을 샀고, 돌아오기 전 날의 마지막 쇼핑에, 어느 단원들은 다른 이의 달러를 빌려가며 폴로를 샀다. 그리고 나도 폴로 티를 샀다. 빨간 색 단색의 티. 내가 산 폴로가 한 장의 플레인 티라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를 절제하는 듯한 인간의 풍미가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마음에 드는 옷이 없었고, 하나 있었지만 사이즈가 맞지 않아 사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에 근접한 변명일 듯 하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이 있는 르기안 지역은 바다와는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걸어서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고, 그래서 서울의 신촌쯤 되는 곳에서 단원들은 쇼핑을 했고, 나는 눈으로 물건을 샀다. 11시 즈음이 되었을까. 호텔 로비에 사람들이 다시금 모여들기 시작했고, 전쟁터에서 전리품을 획득한 사람의 표정인 사람과, 마사지를 받아 마치 자신의 영혼을 발리의 안마사에게 팔아 버린 듯한 표정으로, 세상 어느 순간보다 지금 자신의 몸이 가볍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났다. 

각자의 방에 들어가, 10분을 쉬었을까. 르기안에는 클럽이 있다는 사실을, 문제의 현지 운전기사가 알려주었고, 나는 그 사실을 친절하게도 다른 단원들과 공유했다. 정보는 공유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니, 그러한 숭고한 일을 나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은 내 방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언제 출발을 할 것인가 에 대한 논의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10분 뒤에 로비에서 보자. 이미 공격명령은 떨어졌다. 그냥 입고 있는 옷을 입고, 다시 시내로 나갔다. 시내로 나갔다기 보다는, 그곳이 시내였다. 10분을 걸었을까, 아무 곳이나 들어가자 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3층 높이의 건물에서 음악소리가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현지 기사’(자주 등장)가 각 층마다 다른 음악을 틀어주기로 유명하다는 클럽이었다. 심지어 3층에 올라가보니, 홀과 베란다가 음악이 달랐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우리는 이 클럽에서 3시간 가량을 보내게 된다. 처음에는 2층에 올라갔지만, 국적 모를 백색 서양인들이,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조용한 곳을 찾아찾아 3층의 테라스로 다같이 자리를 잡았다. 건물 안의 음악과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특유의 소음이 우리들이 지금, 발리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소음을 뚫고,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발리의 날씨가 더웠던지 자신의 몸을 심하게 드러낸 옷을 입고 있는 여자 직원이 우리에게 와서 음료 쿠폰을 권하길래, 한 장을 샀다. 보드카 스프라이트인가 와 산 미구엘 맥주를 한 병 마시면서 2시 반까지 신나게 놀았다. 서울에 있을 때에도 약 4개월에 한번씩은 강남의 클럽에 들러, 추고 싶었던 춤을 마음껏 추고 아침에 돌아와서 일상을 보내기도 하는 나로서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즐겁고 또 우리를 서양인도 아닌, 그렇다고 자신들과는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아시아인으로 분류되는 우리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그윽한 눈빛을 즐기면서 춤을 추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내 셔츠를 바라보니, 클럽에 나 혼자 비를 맞았던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오늘만 날인가. 클럽을 나오기 전에 혼자 속으로 되뇌었던 말이다. 결국 클럽은 금요일 밤을 화려하게 밝히고 다시 가지 못했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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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30 해외봉사활동 후기

다시 아침이 밝았고, 이제는 조금 익숙해는 일하는 준비를 무의식 중에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같이 방을 썼던 김영한 군은 직업병이라고 언급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다시 준비된 차를 타고 일터를 향해 갔다. 어제 구덩이를 파면서 우리가 조금 파놓고 가면 현지 인부들이 마무리를 지어 놓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찾아가서 보니 그대로였다. 아무런 변화는 없었지만 어제 꽤 깊이 파 놓았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화장실을 위한 구덩이를 파고 나서 느끼는 뿌듯함이라니. 일터에 도착하자마자 구덩이를 보는 것은 이 이후에도 계속 처음 하는 일과가 되었다. ‘깊군.’ 이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다른 일을 하고 가면, 성취감이 주는 기쁨에 다른 일도 같은 기분을 할 수 있었다. 옛 전설에 사과나무 묘목을 심어서 그 나무가 자라나기 전에 그 나무를 넘기 시작해, 매일 그 나무를 넘는다면 시간이 흐른 뒤 그 나무가 매우 높은 나무가 되어도 그것을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가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심을 하고 있지만, 어떤 것을 성취하고 난 뒤에, 그 성취가 기반이 되어 다른 일, 더욱 큰 일도 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나에게 구덩이가 사과 나무였다.

구덩이 파는 것이 마무리 되지 않았으므로 구덩이를 계속 팠다. 이제 깊이가 꽤 되었으므로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으나 곡괭이 질을 한 번 할 때 마다 깊이의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해 오히려 일은 재미있었다. 우리나라의 흙과는 다르게 깊이 판다고 하더라도 돌맹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흙이 나왔으므로 일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날에는 남자 단원 대부분이 구덩이를 파는데 투입이 되었으나, 무리한 단원과 손에 상처를 입은 단원들은 다른 곳에 투입되어 다양한 업무를 하게 되었다. 오전 중에 구덩이를 완성하자는 의지를 갖고 있었고, 조금씩 쉬고 열심히 땅 속으로 내려갔다. 보기에는 상당히 깊어 보였는데, 줄자를 들고 와 깊이를 재어 보면 1미터 50센티미터에는 턱 없이 모자란 높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에 서서 깊은 땅을 바라보면 우리의 키에다가 그 깊이가 더해져서 더 깊어 보였던 것 같다.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갈 때, 마지막으로 내가 내려가 깊게 한번 팠고, 줄자로 가장 깊은 곳을 재어보니 충분한 깊이가 되어 벽면을 정리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한 구덩이는 완성이 되었고, 그 구덩이 안에서 다같이 사진을 찍었다.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서서,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 들어가 사진 한 장을 남길 것이라고 미소를 지었던 것을 보면, 힘들기는 했어도 보람 차고 즐거웠던 작업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점심을 먹었는지, 점심 먹기 전에 벽돌 쌓기를 시작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벽돌을 쌓았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나는데, 점심은 크게 적을 내용이 없으니 벽돌을 쌓았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벽돌을 쌓는 것은 라오스에서 거의 2주간 내내, 도서관 건설 담당을 하면서 하였던 일이었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시멘트 삽을 손에 쥐고 무거운 벽돌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입구 쪽에 있는 벽을 쌓다가 뒷면을 먼저 쌓아 창문을 다는 것이 좋겠다는 현지 코디네이터의 의견을 들어 혼자서 뒷면의 벽을 쌓기 시작했다. 다른 단원들이 보면 대충한다고 욕을 듣기 딱 좋을 만큼 대충대충 벽을 쌓기 시작했다. 라오스에서 같이 일을 하던 ’(‘붉은의 의미)이 가르쳐 준 방법으로 오므라이스 모양으로 시멘트 반죽을 만든 뒤, 그것을 벽돌을 올릴 위치에 철푸덕 하고 올려 놓는다. 그러한 것을 몇 개를 연결 시킨 뒤, 그 위에 수직으로 벽돌을 잡고 좌우 위치를 맞춰가며 높이도 맞춰가며 놓는다. 확실히 시멘트와 벽돌을 접착시키고 난 뒤, 시멘트 손삽의 뒷부분을 이용해 높이와 평행을 맞추고 실과의 높이도 다시 한번 맞춘다. 이것이 기본적인 시멘트 쌓는 것의 순서이다. 다른 단원들은 밖에서 보기에 만화에 나오는 벽돌 쌓기처럼 보이도록 시멘트 반죽을 평평하게 만든 뒤 그 위에 벽돌을 올려놓는 작업을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해도 붙기는 하지만 확실히 접착이 되지 않으면 벽돌을 나중에 수평으로 치면 그대로 나올 수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크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시멘트를 많이 올려서 벽돌을 위에서 올려 누르면 옆 부분은 벽돌의 무게 때문에 자연스럽게 눌려져 보기 좋게 되고,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사후에 채워 넣는 것이 작업의 효율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더욱 낫다고 알려주었다. 벽이 좁았던 것도 있지만, 나름대로 요령을 알고 있었던 나는 빠른 속도로 벽면 한쪽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현지 인부들이 가끔씩 와서 내가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여주었던 것이 더욱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엄지손가락만 들어 보여주었던 것이 아니라, 나와 멀리 쌓여 있던 벽돌들을 계속 내 가까이로 들어 올려주었고, 시멘트도 항상 부족하지않게 공급해 주었다.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벽돌을 올렸다.’라는 말로 요약이 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참 길게도 적었다. 벽돌을 올리는 것은 라오스에서의 추억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이번 발리에서도 내가 쌓았던 벽면에 내 이니셜을 새겨 놓고 왔기 때문에 애정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고 있는 내용이 많고, 생각했던 양이 많은 경우에는 길게 쓰고 싶지 않아도 길게 적는 것을 보니 나는 아직 문학적 수준이나 자아 비평적 관점을 가지기에는 부족한 사람인가 보다. 

벽돌을 쌓고, 쌓고, 쌓고 회색 벽돌을 쌓고, 빨간 벽돌을 쌓고를 계속 하다 보니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이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늘이 없는 곳에서 지속되는 작업이다 보니 땀이 많이 났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해를 가려주면 어찌나 그 구름이 고맙던지. 또 살랑살랑 불어 오던 바람이 그토록 시원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나무꾼의 땀을 훔치는 산바람이 고마움이 이런 느낌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회색 벽돌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문단 적고 가야지. 회색 벽돌을 옮길 때였다. 처음에는 옮겨주기로 벽돌을 옮겼지만 시간이 지나자 단원들이 힘들어 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나는 벽돌을 일정한 속도로 던지고 그것을 받는 것으로 작업을 하면 5명이 서 있어야 하는 거리를 3명 만으로도 충분히 옮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남자 단원 중 오승식 군과 박규병 군과 함께 벽돌이 쌓여 있는 곳으로 갔다. 벽돌을 오승식 군(상황에 따라 바뀌었다)이 나에게 일정한 속도로 던져 주면, 나는 그것을 받아 다시 일정한 속도로 박규병 군에게 던져 주었다. 시간은 단축되었고 들고 있는 시간이 적으니 무거운 것을 드는 것으로 인한 피로감은 없었다. 다만 허리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일을 마치고 나면 허리 쪽 통증이 격심했고, 날아오는 벽돌을 손으로 잡아야 했으므로 손 주변에 몇 개의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받는 행위와 던지는 행위는 꽤 재미있었기 때문에 즐겁게 일했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워 보였던지, 돌아오기 전날에 현지 코디네이터가 나에게 준 활동 인증서에 들어있는 사진 중 한 장이 벽돌을 던지고 있는 사진이라니, 즐거워 보이긴 즐거워 보였나 보다. 내가 가끔 잘못 던져서 회전이 들어간 것을 받는다고 고생한 박규병 군에게 미안했다는 말을 전한다. 다같이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벽돌 옮기기는 빠른 시간에 마쳤다. 허리의 고통과 함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내 시계는 어느덧 4시 반-현지 시간으로 바꾸지 않았다-이 되어 있었고, 현지 시간으로는 3시 반이 되어 있었다. 이날은 돌아가기 전에 덴파사에서 싱아라자로 오는 길에 운전기사가 이야기 해주었던, 발리 섬에서 가장 큰 폭포로 잠시 놀러 갔다. 일을 한 뒤라, 땀에 절어 있고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보면 피로도 풀릴 것이라 생각되어 찝찝한 몸을 이끌고 갔다. 저녁이 되었기 때문에 날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구름이 끼어서 주변 환경은 짙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 깃깃 폭포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우리들은 차에서 내려 깃깃 폭포로 출발했다. 차 안에서 현지 운전기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15분을 내려가고 15분을 올라가면 폭포가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폭포에서 수영을 할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맑은 호수를 상상하면서 무거운 발걸음도 가볍게 올라가며 내려갔다. 한참을 오르내린 뒤, 20분쯤 지났을까. 꽤 큰 물살의 소리가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발리 섬에서 가장 큰 폭포라는 기대감을 충분히 만족시켜주지는 못했지만, 그 소리와 웅대함은 충분히 그 명성에는 어울리는 것이었다. 오전 오후의 일을 하고 난 뒤의 피곤함은 어느 사이엔가 잊고 있었고, 휘몰아 치는 물방울들 앞에서 우리는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안경에는 물방울들이 끼여, 세상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고 그러한 사이사이에서도 우리 단원들의 웃는 얼굴은 해맑았다. 바지와 상의, 그리고 신발은 물에 젖어 질퍽거렸지만, 그렇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랑비에 옷이 젖었지만, 흘러내린 땀을 잊게 해주어 되려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덴파사에서 상아라자로 이동할 때, 차를 타고 산을 넘으면 산의 고도가 꽤 높았던지 귀가 멍멍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꽤 높은 산을 넘는구나.’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높은 산에는 반드시 폭포나 자연이 만들어 주는 경이로운 것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었다. 산에는 물이 있기 마련이고 그 물은 반드시 조용조용하게 흐르지는 않은 터인데, 나는 왜 폭포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발리라는 것에 너무 마음을 열고 있어 날카로운 생각보다는 푸둥푸둥한 생각들로 모든 사물들을 바라보니,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요,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며, 심지어 이성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물가마저도 싸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발리기를 쓰고 있는 이 시점에 생각을 쥐어 짜 내느라고 힘이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깃깃 폭포에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잠시의 휴식 따위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사치였다. 아침에 널어 놓고 나왔던 수영복이 바짝 말라서 나를 좀 입고 저 수영장에 뛰어 들어 주세요라고 말을 하길래,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손에는 수경을, 한 손에는 수건을 든 채 수영장으로 뛰어갔다. 한참을 첨벙첨벙 한 뒤, 오늘 저녁은 호텔에서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저녁 식사를 호텔에서 주는 평범한 뷔페와 함께 했고 또 저녁에는 맥주를 마셨다.

발리 타만 호텔에 있을 때는 거의 매일을 차를 타고 10분 거리의 하디스 마켓에 갔었다. 각자가 필요한 물품들을 사기 위해서 돈을 조금씩 들고 왔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것은 초콜렛이나 기념품, 아니면 그날 밤에 마실 맥주나 과자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하디스 마켓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꽤 큰 규모의 건물에 일층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형태의 대형 마트가 있었다. 혼자 조용히 산책하는 느낌으로 빙글빙글 돌았던 적이 있는데, 꽤 큰 넓이에 맞게 전자 제품도 판매하고 있었고, 발리의 기념품들도 꽤 많은 수가 진열되어 있었다. 이때 본 발리의기념품들은 돌아오는 공항에서도 보았는데, 확실히 공항의 물건들이 가격이 비싸게 책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마트는 마트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층에는 다양한 종류의 옷을 팔고 있었는데, 너무나 많은 옷이 창고처럼 쌓여 있어, 그 많은 옷들 중에서 자신과 어울리고 싸고 좋은 옷을 찾는 것은, 꽤 수준 높은 안목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는 여러 브랜드의 옷을 만드는 공장들이 산적해 있어서 옷 가격은 매우 싼 편이었다. 너무 많은 옷을 만들어 팔다 보니 옷을 진열하는 방법이라든지 고객들에게 상품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법들이 부족했다. 인도에서는 여러 과일들을 노점이나 상점에서 팔 때, 그 과일이 썩게 되면 그것을 그냥 버리고 다시 새 물건을 가져다 놓는 방법으로, 크게 유통이나 진열방식의 개선 등에 신경을 쓰지 않고 충분한 물자가 있으니, 굳이 아낄 필요와 상품에 대한 연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많은 옷이 있으니 그 옷들을 굳이 깨끗이 진열하지 않아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사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두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간단한 경영 기법만 들어가도 충분히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을, 그 어느 누구도 개선 방안을 제기하지 않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신선하게 충격적이었다. 여담이지만, 내가 꽤 마음에 들어, 내가 맞는 사이즈가 있냐고 표정과 손짓으로 이야기를 하면, 내게 맞는 옷을 없다는 것이 대답의 대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발리에서 나와 몸집이 비슷한 사람을 만난 기억이 서구 사회의 외국인들을 제외하고 없는 것을 보니, 옷 사이즈가 작은 것도 이해는 될 만 했다. 내게 옷 사이즈는 작던지, 아니면 확실히 크던지 둘 중 하나였다.

나도 꽤 많은 선물들을 샀고, 그 선물들은 나의 기숙사 방에 잘 보관 중이다. ‘누구를 위해서산 선물은 몇 되지 않고, ‘선물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줘야겠다고 생각을 해, 아직 주지 못한 선물들이 많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 내가 나름대로 고심해서 사온 발리 선물을 받고 싶은 분들은 제게 연락을 해 주세요. 이 글의 페이지 수가 16장이 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 여기까지 과연 몇몇이 읽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문단을 읽고 제게 연락을 해주시는 분은, 뭐랄까 제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의 열정에 보답하는 의미의 선물과 같은 의미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에어컨을 켜놓고 잔 것이 조금 내 체온을 떨어지게 했던 것 일까. 간밤에 잠시 깨었다가 에어컨 온도를 높이고 다시 잤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이불을 꽁꽁 안고 자고 있는 내 모습이, 인도네시아라는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추워서 이불을 덮고 자는 내 모습이 어찌나 이상하기도 하던지. 아침을 먹기 위해 수영장 옆 식당을 갔고, 매일 아침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바다는 여전히 넓어 보였다.

시간은 흘러, 금요일이 되어 있었다. 금요일은 오전에만 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토요일, 일요일의 휴양과 휴식을 위해 다시 덴파사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오전의 작업을 위해 출발하기 전에 모든 짐을 싸서 로비로 가져다 놓아야 했다. 이제 다시 발리 타만에 머무르지 않고, 덴파사에서 다른 호텔에 지내고, 다시 싱아라자로 돌아와도, 우리가 묵었던 최고의 호텔이었던 퓨리 살롱에서 머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일찍 챙겨먹고 짐을 챙겼다. 3일 정도 머무르고 나니 꽤 짐도 흩어져 있는 상태였고, 그 동안 사 놓았던 선물들이 있어서 꽤 짐의 양도 늘어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을 하러 가기 전에는 멋지게, 군화를 신고 바지를 정리하고 조끼를 갖춰 입고 선글라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밀집 모자를 썼다. 오늘 입고 또 몇 일 동안 일을 하지 않을 것임을 생각하고 이번 주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더 옷의 에 신경을 썼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군대 경험이라는 것은, 2004 9월의 해군에서의 5일간의 생활과 2005 3월부터 4월까지의 39사단에서의 공익근무요원이 되기 전의 훈련이 전부였다. 그래서 매번 군복을 입을 때 마다, 아침마다 군복을 자신의 몸의 일부분인양 생활을 했어야 했던 군인들의 심정을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을 입으면, 이상하게 나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사실을 인정했다. 군대라는 곳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은 없지만, 그 내부에서의 문제와 국가 방위의 효율성 등의 문제점 때문에 항상 비판의 각을 낮추지 않는 나로서는 군복이 어울린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또 느낄 때마다 위화감을 느끼는 말이었다.

짐은 짐 트럭으로 바로 덴파사의 숙소로 이동되었고, 우리는 일터로 가서 일을 하고, 일하던 옷을 입은 채로 덴파사로 가야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가는 지역은 덴파사가 아니라, 르기안이라는 지역이었다. 차를 타고 일터로 이동하는 중간에, 일을 하면 땀이 날 것이고, 일을 하고 갈아 입을 깨끗한 티셔츠를 하나 챙겨둘 걸 하는 후회를 했다. 일터로 가는 차 안에서 생각해 냈으니, 어찌나 스스로가 바보스럽게 느껴지던지. 오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봐도 무엇을 했을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구덩이는 팠고, 벽은 쌓여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나는 분명히 벽은 쌓지 않았고.. . 구덩이를 팔 때 생겼던 흙을, 건물의 바닥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흩뿌리기라고 말은 했지만, 파놓은 흙은 다시 파서 건물의 바닥의 높이에 맞게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흩뿌리는 것처럼 여기 저기 옮기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흙을 파고, 옮기고, 흙을 파고 옮기고.

9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일을 했으니 약 3시간 정도의 일을 했던 듯 하나,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은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람을 그룹으로 나눠서, 미묘한 경쟁심을 느낄 수 있게 일을 했기 때문에 다들 즐겁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가끔 여자 단원들이 와서 곡괭이 질이나 삽 질을 해보고 싶다는 말에, 우리는 단 일초의 망설임 없이 곡괭이를 넘겨 주었고 그 잠시 동안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쉴 수 있었다.

점심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선가 배달이 되어 온 도시락이었다. 매번 올 때마다 내용물은 조금씩 달랐으나, 가운데 밥이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반찬들은 조금씩 변했다. 우리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기도 했지만, 특유의 향이 강한 음식은 내가 먹기도 전에 다른 단원들이 먼저 먹어보고, ‘, 그거 드시지 마세요.’라고 말해주는 바람에 선입견을 가져 버려, 더욱 사소한 도전을 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도전에 성공해서 한입 먹어보면, 먹지 말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 하고 혼자 쓸쓸한 위로를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군화를 털털 털고, 다들 자신의 차라고 생각하는 차에 앉아, 자신의 좌석이라고 생각되는 좌석에 앉아서 덴파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올 때와는 다르게 가는 길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날과 그 다음날이었던 일요일을 계속 놀 것이라는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어서 가깝게 느껴졌는지, 아니면 지름길을 왔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잠을 잤을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조용한 북부의 모습은 사라지고, 외국인 많고, 외국인의 수보다 더 많은 오토바이가 있는 덴파사, 르기안에 와 있었다.

인도네시아도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2차 대전 기간 동안에는 일본군의 점령을 받았지만,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우리와 같이 독립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던 만큼, 그들에게도 독립기념일은 의미 있는 날이리라. 우리와는 다르게 8 17일이 독립기념일이었다. 내가 왜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왜냐하면 우리가 발리에 있었던 기간이 독립기념일 전의 약 2주일이었고, 심심찮게 길거리에서 행진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독립기념일을 기념해 각 학교에서 행진대회를 열고, 그것으로 상을 수여한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의 도로사정을 설명하지 않고는, 왜 행진대회 연습이 나에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본 가장 큰 도로가 왕복 4차선 도로였으니, 일반적인 시내의 도로나 산을 넘어가는 도로는 왕복 2차선이었다. 즉 한 쪽 차선에서 학생들이 행진대회를 연습하고 있으면, 그 도로를 이용해서 통행을 해야 하는 차량은, 아무런 일도 아닌 듯이 중앙선-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중앙선이 점선으로 되어있다. 실선으로 되어 있는 중앙선도 있었는데, 운전기사의 행동패턴으로 미루어 보건대, 실선에서는 중앙선을 넘는 추월은 하지 않았다. 점선일 때만 추월을 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을 넘어가며 통행하고 있었다. 행진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은 매우 절도 있게 행진했고 그 모습을 주민들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8 17일이 다가갈수록 학생들의 실력은 높아지는 듯 했고, 돌아오기 거의 직전에 학생들을 보았을 때는, 옷도 맞춰 입고 화장도 한 뒤 행진을 했다. 북한의 어린이들의 행진이나 가끔 조선중앙통신의 화면을 한국 방송에서 보여 줄 때, ‘무섭다라고 느꼈던 행진의 느낌이 살짝 들기도 하였지만, 인도네시아 학생들의 표정에서는 즐거움과 당당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을 보고는, 북한의 주민과 학생들의 표정이 궁금해지기도 하였다.

시내에 들어오자 이런 행렬들을 해치며, 운전기사가 자카르타 출신이라 발리의 길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내가 탄 차는 다른 차보다 약 1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신촌쯤 될까?’라는 여행관련 블로그를 적는 사람이 남긴 말이, 유행어가 되어 있었던 우리에게, 르기안은 과연 그러한 곳이었다. 많은 외국인이 보였다. 물론 우리도 발리 현지인이 보기에 외국인이겠지만. 하모니 호텔에 짐을 풀었다. 같이 방을 쓰게 된 경영정보학과 김성환 군도 같이 짐을 풀었는데, 신기한 붉은 상자가 보이길래,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내가 물었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한 장 찍어줄 수 있을까 하고 부탁을 했고, 나는 도착하자 마자 옷을 거의 다 벗고 있는 상태에서 팬티 한 장만을 입은 채 침대에 걸쳐 앉아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필름을 생산하지 않는 기종이 되었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오래되었던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 것 모르겠지만 화면이 붉게 나왔다. 그 붉게 나온 사진 속에서도 내가 얼마나 땀을 흘렸던지, 속옷에 땀이 묻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하모니 호텔은 우리가 묵었던 다른 호텔과 비교했을 때, 가장 평범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발리의 풍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비교적좁은 방과 그리고 비교적좁은 수영장이 있었다. 하지만 시내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첫날 밤 잠시 머물렀던 플로라 호텔이 하모니 호텔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비행기를 타기 전날 오후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플로라 호텔 역시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2일 간 이 호텔에서 잠을 자야 했기 때문에, 짐은 적당히 풀어 놓기로 하였다. 각방에 공용 짐이 분배되었고, 우리 방에 왔던 상자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열어보지 조차 않아서 알 수가 없다. ‘공용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에게 관련이 있는 물건이지만, 다시 말해서 와 관련성이 가장 먼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같이 방을 지내게 된 단원은 첫날 플로라 호텔에서의 정윤성 군과 김성환 군 중 김성환 군과 다시 지내게 되었다. 형과 지내는 것이 꽤 힘들었으리라 사려되는데, 아무 말 않고 잘 지내준 김성환 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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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28 해외봉사활동 후기

다음날 아침의 해가 밝았고, 에어컨을 틀고 잔 것이 조금 춥게 느껴졌던지 몸이 미묘하게 떨렸고, 코는 살짝 막혀 있었다. 반쯤 감긴 눈을 뜨고 아침 식사를 하러 수영장 옆의 식당으로 갔다. 일찍 나와 있던 사람들은 반가운 미소로 나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침 식사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구나.’

역시 그랬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있었고, 또 계란 프라이와 오믈렛 등은 바로 조리해서 주는 코너가 있어서 따뜻하게 먹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일을 하러 가는 날인 만큼, 든든히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확실히 배를 채웠다. 하지만 기름진 음식과 빵이 주요 메뉴였기에, 배는 채웠지만 과식할 수는 없었다. 과일로써 입가심을 하고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방에 돌아갔고, 마치 전투에 나가는 군인 마냥 전투화 끈을 조여 메고 다시 모였다.

전투화를 들고 가자는 아이디어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전투화의 존재가 얼마나 큰 긍정적 효과를 일으켰는지 이루 설명하기가 힘들다. 전투화를 신고 일을 하면 처음에는 발은 좀 아프지만 아스팔트나 잘 포장된 길이 아닌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발과 전투화가 밀착해서 매우 편한 상태가 된다. 그 상태가 되면 전투화의 무게도 잊을 만큼 편한 상태가 되는데, 그런 상태에서 남아 있는 기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다. 발이 아프지 않았던 이유는 발리에 들어가는 날에, 기숙사에서부터 발리 도착할 때까지 전투화를 신고 있어서 미리 발 아픈 것을 충분히 느껴봤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내 발의 설명이다.

첫 일은 기왓장 옮기기. 다들 한 줄로 늘어서서 기왓장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리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에서 해비타트 직원이 와서 하게 될 일에 대한 자료를 보여줄 때, ‘전달을 통해서 벽돌이나 기왓장을 옮기는 것이 참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한 명씩 10장씩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했는데, 사실은 그와 달랐다. 자신의 위치에서 앞사람에서 뒷사람으로 기왓장을 옮기면서 내가 잘 받기 위해서는 나에게 기왓장을 주는 사람을 생각해야 하고, 내가 잘 주기 위해서는 받는 사람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나를 제외한 2명에 대한 배려심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에서 조정이 일어났고, 위치는 미묘하게 바뀌었지만 빠른 속도로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처음 한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충분히 몸을 풀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을 시작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다음 할 일이나, 점심은 무엇을 먹기로 되어 있는가 등, 매우 실용적인 대화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화 중에서 계급제와 비슷한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계급제역시 차를 탔다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번 발리 봉사단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단어이다. 나이가 다양하게 모여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동생의 관계나 오빠-동생, 누나-동생의 관계 등이 형성되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김영한 군, 그 밑으로 오승식, 권현우, 전재하가 두 번째 레벨을 형성했고, 그 밑으로 정윤성, 이창선, 박규병, 김성환이 3번째 레벨을, 정기연 군이 4번째, 박태건 군이 실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5번째 막내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남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 했던 이번 봉사단에서 남자 중 2명 만이 국방의 의무를 마치지 않은 사람이어서, 자연스럽게 군대와 비슷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나는 2번째 레벨이 속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크게 어려움은 없었지만, 3레벨 이하의 단원들은 학교에서의 선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많이 힘들었으리라 예상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 중에 군대 문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고, 그런 문화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창조성을 해치고, 평등이라는 가치를 기본 가치로 명명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나도 그 속에서 편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했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을 맡기거나 부탁을 하거나 할 때 나이를 이용해서 밀어 붙인 적은 없다고 믿고 있고,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고계급제를 사용했다기 보다는 재미가 우선적이었다고 언급해 두고 싶다. ‘없어져야 하는 것재미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 자체가 일정 부분 타협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죄송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기왓장 나르기가 모두 끝이 난 뒤, 이제는 각자의 일을 찾아서 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몇 가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현지 코디네이터가 정해준 일이 있었기에 일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남자 단원 거의 대부분이 이틀을 꼬박 들여 만들어야 했던, 구덩이의 이야기가 시작한다.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물이 들어갈 공간이 필요했다. 그 곳에 정화조를 넣어야만이 화장실이 화장실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는 곡괭이 한 자루, 삽 두 자루 그리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만 쓸 것 같았던 괭이를 사용해 1미터 50센티미터의 깊이로 가로 1미터 새로 1미터 20센티미터의 구덩이를 파야 했다. 평균적인 여자 키보다 작은 깊이를 파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느냐 라는 것이 우리의 처음 반응이었지만, 아무도 숙달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곡괭이와 삽 만으로 구덩이를 파는 것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역경이었다. 우리가 파야 하는 땅은 농사를 지었던 땅도 아니고, 평범한 땅이었던 만큼, 처음에는 파는 것이 힘들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땅을 곡괭이로 솎아내고, 삽으로 흙을 들어내고 하기를 반복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속도보다는 훨씬 뒤떨어졌다. 남자 단원들이 힘을 내어서 팠지만 생각보다 곡괭이 질이 체력소모가 격심해서 한 번 곡괭이 질을 하고 나면 10분 정도를 쉬어줘야만 다시 일을 할 수 있었다. 처음은 한 명이 곡괭이로 땅을 파면, 다음 사람이 파여진 흙을 퍼 내는 것으로 순환 시켰다. 이러한 형태는 깊이가 깊어져 다음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 자체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지속되었다. 내리쬐는 햇빛이 우리들을 힘들게 했지만, 단원들은 힘든 얼굴을 지으면서도, 다른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소한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았다. 중간 중간에 여자 단원들도 삽질이나 곡괭이 질이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뒤, 남자 단원들은 낄낄거리며 쉬었다.

우리가 구덩이를 파고 있을 때, 다른 단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보지는 않았지만, 몇몇은 벽을 쌓기 위한 토대를 만들 기본 벽돌을 건물에 접착시키고 있었고, 여학우 두 명은 철근 골조를 만들 때 철근을 고정하기 위한 쇠 고랑을 만들고 있었다. 벽돌을 쌓는 작업을 하는 단원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벽돌을 쌓는다기 보다 시멘트를 예쁘게 만들고 그 위에 벽돌을 올려 놓고 있었다. 시멘트의 접착성은 벽돌과 닿는 면적에서 서로서로의 거친 면이 맞닿아 접착력이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 벽돌 작업을 하는 단원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벽돌 작업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실을 고정을 시켜서 그 실에 높이, 배열 등을 확인해 가면서 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난 뒤 한쪽 벽의 기초가 완성 된 것을 보니 파도가 치고 벽이 앞뒤로 돌출되어 있었다. 내가 볼 때 그렇게 만족스러운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현지 인부들은 아무런 일도 아닌 듯, 그 상태 그대로 놓여져 있는 것을 다음날 아침에 왔을 때 확인했을 때, 내가 라오스에서 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공사가 진행이 되는 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현지 인부가 그 상태 그대로 놔 둔 것은 크게 높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시멘트와 자갈을 섞은 것을 넣고 기반을 만들면 벽돌 부분은 완전히 덮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걱정하였던 내가 오히려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부분은 에 대한 것이다. 작년 라오스에서도 느꼈던 일인데, 건축관련 일을 할 때는 항상 실을 사용한다. 요즘에 아파트를 짓거나 할 때는 벽을 만들 때, 큰 틀을 이용해서 만들지만, 크지 않은 건물을 지을 때는 아직도 사람이 직접 벽돌을 이용해 벽을 쌓거나 미장을 할 때에는 실을 이용해서 건물을 짓는다. 벽돌을 한 개씩 쌓다 보면 그 순간에는 옆의 벽돌과 높이가 맞고 또 밑의 것과 맞아 떨어져 보여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지만 그냥 그대로 쌓다 보면, 울퉁불퉁하고 높이도 맞지 않아 전체적으로 망쳐버린 건물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는 않을까. 당장의 편의를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이 편한 것을 즐기기 위해서 자신이 설정한 일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않은 채 일을 마쳐 버린다면, 나중에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그것을 고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되어, 결국은 후회하기 마련인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높이의 실의 높이와 벽의 두께는 각자가 다를지 모르지만, 그 실의 높이에 맞도록 시멘트를 더 넣고 벽돌을 높이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우리는 그 실에 맞게 우리의 삶을 높이고 있을까.

다른 작업은 철근 골조를 연결할 철사 고랑을 만들고 있었다. 작업이 힘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도를 맞춰야 하는 등 정교함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여학우 두 명이 담당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에도 땡볕에 앉아서 허리를 숙이고 일을 하고 있었던 김경희 양과 손지혜 양께 수고했다는 한 마디를 남겨두고 싶다.

일을 열심히 한 덕일까.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점심은 무엇이 나올까.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을 발리에서의 9일 동안 하지 않은 적이 없는 나였기에, 점심은 항상 기대의 순간이었다. 점심은 주변의 식당에서 만들어 온 도시락이었다. 다양한 반찬이 있었지만 우리의 입맛에 맞는 반찬은 개중의 한 개 정도였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고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지만, 반찬이 입에 맞지 않을 뿐이지 양은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었기에, 한 개의 도시락을 먹고 일을 하면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크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사실 배가 고프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밥을 잘 먹어서가 아니라, 날씨가 덥고 고된 일을 하는 만큼 계속 물이나 이온 음료를 마셨기 때문에 배 속은 항상 무엇인가로 차 있었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리라.

점심을 먹고 나면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다시 일을 하러 갔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다들 일을 하기 싫어서 쉬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한껏 좋아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 그 기분을 더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던 것이리라. 남자 단원들 중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담당(?)하고 있었던 이창선 군과 정기연 군은 점심을 다 먹어 갈 즈음이 되면 조금씩은 불안함을 느꼈으리라. 저 두 단원보다 나이가 많은 몇몇 단원(나를 포함해서)은 점심 식사가 끝나면 노래 일발 장전이라는 구호를 외쳤고, 보통은 이창선 군이 먼저 일발 장전, 장전 끝이라고 대답을 한 뒤, 우리가 발사라고 외치면 다시 발사라고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는 노래를 부르면 웅성거림과 동시에 비난이 이어졌기 때문에 즐거운 노래를 찾는데 그 둘은 꽤 고민했으리라.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무슨 일을 했었는가 하고 반추해 봐도, 딱히 새로운 일은 없었기 때문에 오전부터 파고 있던 구덩이를 계속 팠다. 일을 하기 시작한 뒤 첫째 날에 비가 왔는지 둘째 날에 비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첫째 날이구나. 왜냐하면 이틀 만에 구덩이를 완성했으니, 첫째 날에 비가 오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 구덩이를 완성했다는 말이 되는가. 한참 남자 단원들이 돌아가며 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왼쪽 하늘에 어두운 구름들이 맑은 하늘을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른쪽 하늘은 청명한데, 왼쪽 하늘은 당장 천둥 번개가 쳐도 이상하지 않을 듯 구름이 밀려 왔다. 우리들은 다소 당황해서-사실 당황한 면보다는 비가 오면 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잡고 있던 장비들을 손에만 쥔 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지 인부들은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이 비 금방 그치는 거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20분 정도 비가 내렸을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려 우리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도 물이 흘러갈 정도의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릴 때의 시원함은 잠시, 다시 쨍쨍한 날씨로 변하는 발리 섬의 날씨는, 다시 우리를 한번 더 독려하는 의미인지 일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 신발에는 흙과 엉킨 풀들이 들어 붙어 키는 어느덧 3센티미터 이상은 자라 있는 듯 하였고, 움직일 때는 무거워서 중력의 크기가 늘어난 듯 하였다. 다시 일하던 곳, 구덩이에 들어가 곡괭이 질을 해보니 비가 와서 흙에 무게가 더 실려 있었다. 곡괭이 질 자체는 크게 문제가 아니었지만, 삽으로 떠 내는 무게가 무거워지고, 그것을 옮기기 위한 수레가 지나다니는 길이 빗물에 뭉개져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래도 꾸준히 계속한 결과 우리 단원들의 다리가 들어갈 정도의 깊이는 확보를 하고 이날의 작업은 마쳤다.

발리에 와서 처음으로 연장이나 도구를 들고 직접 일을 해보니, 단원들의 얼굴에 일종의 기쁨의 기색이 보였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는 발리까지 온 이상 휴양의 의미를 담아서 오기는 하였지만, 실제 일정이 시작한지 3일이 지나서야 땀다운 땀을 흘려 보는 것이, 마냥 놀고 있는 것이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일도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앞으로 일을 할 날들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 역시 우리들의 일을 할 때 더욱 열심히 일을 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일을 너무 열심히 한 탓에 몸에 힘이 다 빠져 버린 날에는 아무도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돌아오던 차에서 잠만 잤다. 그래도 일의 시작이 크게 어렵지 않았고, 발리의 날씨도 우리에게 너무 무리 하지 말라는 의미로 시원한 비를 내려주었으니, 이날, 오늘 하루는 좋은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3시 반쯤에 오늘 작업을 마무리 하고 발리 타만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은 오늘 하루 흘린 땀과 모래 등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우리들이 풍기는 냄새로, 참지 못할 지경은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청결하지 못함에 괴로움을 느끼는 정도까지는 되었다. 얼른 호텔로 돌아가 시원한 수영장에 몸을 담궈야지. 호텔에 도착해 차에 내리자 마자, 언제까지 저녁 식사를 위해서 모이세요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수영장에 뛰어 들었다. 일을 할 때는 수영할 체력도 모두 소모해 버린 것 같았던 사람들이 수영장 안에서는, 중력의 크기를 적게 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수영을 할 체력은 남겨 두었던 것인지 다들 즐겁게 놀았다.

우리가 수영을 할 때, 꽤 많은 외국인들도 발리 타만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항상 책을 읽고 있었다. 왜 그들은 휴양지에 와서 책을 읽는 것일까? 평소에 책을 읽지 않아서 쉬는 동안에 책을 읽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몸만 태우기 적적하니까 책이라도 읽으면서 몸을 태우는 것일까? 등등의 생각을 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1년에 제대로 된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따로 시간을 내어서 책을 읽지 않으면 을 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발리 타만 호텔에서는 계속 일을 했던 지라 수영을 하기 전에 을 읽는 흉내를 내지 못했지만, 주말 휴양을 마치고 다시 북부에 돌아왔을 때 머물렀던 퓨리 살롱 호텔에서는 잠시라도 내가 들고 갔던 책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읽어보려는 노력을 했었다. 푸른 바다 옆에서 읽는 고전의 재미란. 이런 느낌에 여기까지 와서도 책을 읽는 가 보다 하고 생각을 했지만, 책을 읽은 시간보다는 수영장에서 논 시간이 확실히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제의 다소 실망감이 있었던 저녁을 만회하기 위해서, 이날 밤은 다른 식당으로 가보기로 했다. ‘밤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식당이었는데, 대나무가 많은 곳에 있다기 보다 대나무로 만든 식탁 등이 신경을 써서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었지만, 어쨌든 대나무는 있었다. 꽤 분위기가 좋은 식당이었고, 우리가 오기 전부터 외국인 몇몇이 앉아 있는 것을 봐서 외국인들의 순회 코스 정도가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단체 예약인 만큼 연결 된 긴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음식을 우리가 오기 전에 주문을 해 놓았다고 해서 앉으면 바로 음식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아서, 음식이 약 40분이 지난 뒤 나오기 시작하자, 음식이 늦게 나오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음식이 늦게 나오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음식이 나오기 전에 이미 발리 맥주 빈탕큰 병을 한 병 비우고, 다른 곳에서는 마셔 본 적이 없었던 스톰이라는 이름의 발리에서 생산되는 맥주를 다시 주문해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 곳의 맥주를 마셔 보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지의 맥주는, 일부 외국인에게 팔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할지라도, 현지인들도 그 맥주를 마시면서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한번 돌아보게 하고, 같은 맛을 느끼면서 동일한 곳을 바라보는 추억을 만들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내가 발리에서 마셨던 맥주에 대해서 언급을 하자면, ‘빈탕맥주는 흔히 마실 수 있는 맥주였던 듯 하다. 첫 맛은 부드러워 계속 마시게 되지만, 돌아오기 전날 밤에 꽤 많은 양을 마셨더니 다음날 머리가 아픈 것으로 봐서는, 약간의 알코올을 첨가했거나 아니면 좋지 않은 보리를 사용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스톰 맥주는 밤부가 들어가 있는 가게에서는 3 가지 종류만 판매하고 있어서, 그 것들만 마실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골든 에일이었다. 이 맥주는 살짝 시큰한 맛이 도는 것이, ‘호가든과 비슷한 맛을 내었다. 향이 꽤 깊다고 해야 하나. 입 안에 남는 맛이 좋았다. 두 번째는 브론즈 에일이었는데, 골든 에일의 시큰한 맛은 빠지고 일반 맥주의 부드러움이 좋았다. 딱히 논평할 것이 있는 맥주는 아니었는데, 마지막 맥주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맥주는 아이론 스타우트였는데, 이름으로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흑맥주였다. ‘기네스와 비견해보면 맛의 농도는 확실히 낮았다고 생각되는데, 그래도 꽤 흑맥주의 검은 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어 마시면서 맛있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이 식당에서만 4가지의 맥주를 마셨으니, 나 혼자만으로 꽤 많은 돈이 나왔으리라 예상되지만, 금액 확인을 하지 않은 쿨한 나(?)는 기분 좋게 호텔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맥주 이야기만 해서, 여기서 밥은 먹지 않고 맥주만 마시고 왔나 라는 비난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날 먹었던 이야기를 하자면, 다들 너무 맛있었던 음식들이었고, 특히 우리들은 사테’, 즉 꼬치를 계속 주문해서 마치 일본의 선술집에 온 양, 술 안주로 삼았던 기억이 난다. 음식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아서 어떤 음식은 맛있었고, 다른 것은 어땠다 라는 정도의 서술이 되지 않는 것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먹는 순간 인도네시아를 위시한 동남아시아 특유의 향신료의 풍미가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음식들은 한국인의 입맛의 범위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실 시장이 반찬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시장뿐만이 아니라 음식점의 도 꽤 좋은 요소였다고 생각이 된다.

가득 맥주를 마신 뒤, 호텔에 돌아와서 연습을 했었던가. 연습을 하기 위해서 발리 타만 호텔에서 공간을 빌려서 연습을 했다. 7월 중순 즈음에 고향에 내려가서 열흘 동안 쉬고 올라 온 뒤, 연습다운 연습을 다시 해본 적이 없는 나는, 몸이 굳어 버렸는지 여러 동작들이 잘 되지 않았다.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의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권도 부분을 연습할 때는 의지와는 다르게 다소 엄한 사람이 되어서 단원들을 다그쳤던 것 같다. 연습을 처음 할 때, 많은 단원들이 생애 처음으로 태권도라는 것을 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습을 통해서 실력이 쌓여가는 것을 보면서,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운동 신경이 다른 사람보다 떨어져서 운동을 못하는 것이라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가 떨어진다고 생각될 때는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뛰어난 사람과 동일한 수준까지는 오르지 못할 지라도 자신의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누구나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해 보았던 적이 없던 것을 해 봄으로 써 자신 속에 숨어 있었던 기능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인 듯 하다.

태권도뿐만 아니라, ‘도 춰야 했고, ‘응원도 해야 했다. 춤은 많은 연습을 통해서 충분히 몸에 익은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응원은 미묘한 동작의 차이가 전체의 느낌에 큰 차이를 주었기 때문에 응원을 담당했던 강민혜 양이 꽤 많은 수고를 하였다.

연습을 약 2시간 정도 하고 나니, 다들 땀에 흠뻑 젖어, 또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 한 가지 단어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수영장

연습을 마치자 마자 다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채 마르기도 전의 수영복을 입고 다시 수영장에서 만났다. 거의 매일이 이러한 패턴이었다. 일을 하고 돌아와서 수영, 저녁을 먹고 수영. 어느 호텔에 가서도 이런 패턴은 변하지 않았고, 지금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거울을 보면 살이 좀 빠진 듯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수영의 덕인 듯 하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수영하는 맛이란.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수영하는 맛이란. 수영장 바닥에 발은 대고 있었지만 은하수 사이를 헤엄쳐서 어디론가로 날아갈 수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매일 밤, 충분히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잠을 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 역시 동시에 들었다. 젊은이의 열정이라기 보다는, 아직은 육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믿고 더 놀고 싶다는 생각에 매일 밤 2시까지는 누군가의 방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서로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눈빛이나 서신 등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서로의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눈빛이나 억양 등을 보면서 듣는 것 자체가 좋은 시간은 아닐까. 발리의 자연이 주는 맑음과 비교해도 함께 갔던 단원들의 순수한 마음은 결코 뒤지지 않고, 뜨거운 태양 아래 탔던 우리의 피부가 기억하는 여름보다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가 기억하는 여름이 더욱 진하게 남을 것이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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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6. 04:27 해외봉사활동 후기

아침식사 시간이 되어 아침식사를 하러 갔고, 생각보다 부실한 아침에, 매일 아침이 이 정도의 식사라면 어떻게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커피 가루 가득한 커피를 한잔 했다. 다시 플로라 호텔에서 잘 수 있는 시간은 없기 때문에 짐을 다시 싸고 발리의 햇살을 듬뿍 받으며 시내로 이동했다.

간밤의 환전을 하지 못한 탓에 느꼈던 배고픔 때문이었을까, 환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우리는 우선적인 일정을 환전으로 잡았다. 그다지 큰 은행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은행에서 달러를 루피아로 바꿨고, 나는 50달러를 45만 루피아로 환전했다. 우리나라 돈과의 비율로 따져보면 1.32의 비율로 바꾸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돈의 단위도 꽤 크지만, 물가도 생각보다 싸지는 않았다. 세계적인 관광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물가는 싼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가 가보았던 라오스와 비교해 보았을 때 보다는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비싼 물가의 인도네시아 발리였다. 

이제는 우리는 우리가 일을 할 곳, 북부의 싱아라자로 이동을 하기 위해 다시 차에 몸을 실었다. 3시간 동안 좁은 차에 타 이동을 할 것을 생각하니 꽤 지루한 시간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3시간 동안 지루함을 느낄 겨를 없이, 사실은 발리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현지 운전 기사님이 중앙선을 경적을 울리며 자주 넘나들었던 것이 잠을 푹 자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었기는 하지만, 즐겁게 이동할 수 있었다. 높은 산을 꽤 지나왔는데, 산이 생각보다 높아서 차를 타고 올라가고 있노라면 고산지대에 들어온 마냥 귀에 압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가는 길에 한국어로 적혀 있는 간판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한국 관광객이 꽤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1시간 반 가량이 흘렀을까. 산의 언덕에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왜 사람들이 주차를 하고 있을까 하고 그들이 향하는 곳을 보았더니 그 곳에는 가드 레일에 앉아서 사람들이 준 바나나를 맛있게 먹고 있는 원숭이들이 있었다. 공격적으로 보이지도, 온순해 보이지도 않는 원숭이들이 사람들-인종에 관계 없이-이 사진을 찍든 말든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들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원숭이를 보는 것이, 동물원에서 보았던 적이 있던 없든, 다윈에 처음으로 갈라파고스 섬에서 핀치 새를 보면서 진화론을 떠올렸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토록 가까이서 원숭이를 본 적은 없었지만 우리들은 아무런 경계심을 품지 않고, 원숭이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손을 잡거나 하였다. 원숭이들은 우리가 자신들과는 다른 동물이라는 사실을 알까.

다시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우리가 3일 동안을 자게 될 발리 타만호텔에 도착했다. 우리가 발리에서 머물렀던 호텔의 대부분은 바닷가에 접해 있었고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건물의 층수가 2층 이상을 넘지 않았다. 발리 타만도 그런 호텔 중의 하나였고, 전날의 플로라호텔과 비교했을 때, 넓이나 시설면에서 결코 뒤떨어지는 호텔이 아니었다.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랬다.’라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 만큼의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플로라 호텔에서 하룻밤을 머무를 때에도 이 정도 시설의 호텔에서 계속 지내게 된다면,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발리 타만에 와서 더 나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묵었던 퓨리 살롱에서 최고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발리 타만 호텔은 바닷가에 접하고 있었지만, 바닷가에 가까이 다가가있는 모양을 갖고 있지는 않았고, 파도소리는 들을 만 했지만 바닷가의 수질이나 해변의 모래들은 그다지 깨끗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부의 시설은 참으로 좋았다.

 나는 단원 중 최고령자인 김영한 군과 지내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총 3단계의 방 중에서 그랜드 스위트 룸의 아래인 스위트 룸에서 지내게 되었다. 2인을 위한 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넓고 가까운 식당, 그리고 수영장 그리고 언제나 하늘로 눈을 향하면 밝게 빛나고 있는 하늘이 인상적인 호텔이었다. 호텔에서 간단히 짐을 풀고, 오후에 처음 일을 하는 장소에 가서 첫 일을 하려 했던 일정을 바꿔서 오후에는 호텔 근처에 있는 사원과 천연 온천에 가는 것으로 그날 하루를 보냈다.

가까이 있었던 사원은 이름을 물어보지 않아, 정확한 명칭을 적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하면 크게 후회하는 것 중의 하나인데,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적는 것을 습관으로 여긴지가 5년이 넘어가는데, 발리에서는 수첩조차 들고 가지 않고, 심지어 호텔에 돌아와서도 일기를 적지 않았다는 것이 매우 큰 후회로 남는다. 궁금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았고,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 머리 속에는 한 장의 사진처럼, 그 모습만 남아 있는 것이다. 여행지에 가기 전에 그 곳에 대한 조사를 확실히 하지 않는다면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고, 느낄 수도, 혹 느끼더라도 그 감흥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속되지 않는 것을 아는 본인이었지만, 왜 발리에서는 그러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을. ‘휴양지 신드롬이라는 이름으로 남기려 한다. ‘놀러 갔으니까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버리는 좋지 않은 신드롬이다. 글을 적거나 생각을 하는 것은 노는 것에 대한 상반된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제대로 놀 줄도 모르고 공부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의 가진 증후군이랄까. 설명이 길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첫날은 휴양지 신드롬에 취해서 내 눈으로 보기 보다 사진기의 렌즈로 보기를 갈망했고, 그 결과 나는 지금 한국에 돌아와서 그 당시의 장면들을 사진으로 밖에 추억할 수 밖에 없다. 사원을 나온 뒤, 학생복지처 이미숙 장학주임 선생님(이하 선생님)께서 음료수를 한 캔씩 사줄 테니 마시라고 하셨고, 한국에서도 마실 수 있는 포카리 스웨트나 코카 콜라를 선택하는 다른 단원들을 지켜보면서, 한국에서도 마실 수 있는 것은 내 입에는 익숙해서 마시기 편하겠지만, 인도네시아 발리에 온 만큼 여기서만 마실 수 있는 것을 마시자 라는 생각에 코끼리가 그려져 있고, 인도네시아어 이지만 대부부분의 인도네시아인이 글자로 쓰고 있지 않은 인도네시어아가 적혀 있는 핑크색의 음료를 마셨다. 딸기맛이 나는 물이랄까 그런 느낌의 음료수였다. 인도네시아에 갔으니, 인도네시아의 음식이나 음료를 반드시 마셔야 한다는 것이 여행자의 의무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새로움에 도전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라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는 요즘 세상에서, 간단한 음료수 한 잔에서부터 도전하는 용기, 우리와 다른,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마시는 것을 공유할 것이라는 의지를 가지는 것은 10년 뒤, 20년 뒤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지는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사원을 나온 뒤, 호텔로 돌아오기 전에 노천 온천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노천 온천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상상했던 모습을 깔끔한 풍경에 잘 정리 되어 있는 입구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온천의 이미지를 생각했지만, 밴을 타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알자 마자, 그리고 나무들의 밀도가 크게 변하지 않고, 개울에서 흐르는 물이 썩 맑지 않다는 것을 보고 나서,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라는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토 빛을 띄고 있는 물 안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수영을 하거나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물을 보고 들어가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땀이 많이 나 있는 상태였고 옷을 갈아입고 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밖에 앉아서 다른 단원들 사진을 찍어주었다. 옷을 갈아 입은 단원들은 하나 둘씩 그 온천으로 들어갔고, 그들의 몸은 물 속에 들어가지 않은 부분만 보였다. 물의 농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확실히 알려주었다. 남자 단원들은 수영복 바지만을 입은 채 자유롭게 수영을 하고 있었고, 여자 단원들은 자신들의 몸을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몸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무엇인가를 두르고 있거나 입고 있었고, 그리고 또 뭉쳐 있었다. 비키니를 입고도 당당히 걸어 다니는, 노천 온천의 유럽풍의 외모를 가진 여자들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했다. 그 때의 단상이지만, 한국의 여성은 유교적인 사고 관념의 잔영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육체에 대한 자신감의 기준을 다른 여성의 육체와 비교하는 과정에서 선정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한국 남자도 그렇지만, ‘한국 사회라는 것이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 구조로 이뤄져 있는 탓에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비교를 통한 자신감 확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하다.

   온천에 들어가기 전의 기대와는 다르게, 온천의 물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던지 들어갔던 단원들의 몇몇은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들어가지 않았던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라 하였지만, 건강에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또 그 곳에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과 들어가 본 사람 간의 차이는 꽤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글을 빌어서,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줬던, 노천 온천에 들어갔던 사람에게 박수를.

 

 

다시 호텔로 돌아 온 뒤, 싱아라자에 온 김에 호텔 식사를 하기 보다 주변에 있는 해산물 요리집을 가는 것으로 이야기 되어 다시 차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계속차를 타고 이동했다는 내용을 적을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차를 타고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리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고, 심지어 집을 지으러 가는 곳에 가기 위해서도 차를 타고 이동하는 수고를 보태야 했다. 2009 1월에 내가 몸 담았던 Youth CLIP이라는 국제교류시민단체에서 봉사단을 꾸려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 근교의 한 마을에 초등학교의 도서관 건설과 아동 대상 교육봉사를 하기 위해 갔다 온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우리 단원들이 함께 잠자고 식사하였다. ‘홈 스테이라는 이름 하에서 이뤄진 것이었지만, 잠시 머무르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을 위해서 매일 많은 양의 밥을 하고, 같이 새벽에 일어나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셔주었던 주인집 내외를 잊을 수 없다. ‘는 그 마을에 들어올 때 한번 타고, 그 마을을 나갈 때 다시 한번, 이 두 번이 라오스에서의 차를 탄 기억의 전부였지만, 발리에서는 를 빼놓고는 이동 자체가 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다녔다. 봉사의 성격이 달랐고, 주최하는 측이 대학생 단체냐 학교 법인이냐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1년이 훨씬 지나 2년이라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라오스라는 나라가 나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그들과 실제로 지냈던 시간과 그들과의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거리 역시 매우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발리에서의 숙소에 대해서 비판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각자의 방에 갈라져 일하는 곳과 멀어진 숙소, 그리고 밤 마다 외쳐대던 맥도날드슈퍼는 진정한 거리를 찾는 데는 걸림돌이지 않을까.

차를 타고, 해산물 요리 레스토랑으로 갔다. 해산물 요리라고는 했지만 발리에서 자주 먹게 되는 뷔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돌았고, 식당의 주인인 듯한 여자는 우리에게 음식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었다. 큰 기대를 하고 왔었던 것일까. 조용히 자신들이 시킨 음료수를 마시고, 먹고 마시고, 양이 부족한 사람들은 더 가져다 먹고를 반복하던 중,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렸다. 중년의 남자 한 명은 전자 키보드를 치고 있었고, 내 또래 즈음 되었을까 하얀색 원피스에 꽃이 그려져 있는 옷을 입은 여자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음식은 그저 그랬지만 노래가 아주 마음에 들어 신나게 노래를 듣고 실컷 박수는 쳐주었지만 팁은 주지 못하고 와버렸다. 팁을 주지 못한 것이 호텔에 돌아오고 나서야 생각이 난 것은 나도 술 한 잔에 잠시 이성을 놓쳤던 듯싶다. 노래를 부르면서 치마를 왼손으로 잡고 살랑살랑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노래 부르던 위치가 화장실 바로 옆이라, 왼쪽에서 키보드를 치고 있는 남자의 왼쪽에 ‘TOILET’라고 적힌 팻말이 보여서 화장실에서 나는 암모니아 향을 마시면 집중력에 좋다는데, 그래서 노래를 잘할까 생각하면서 혼자서 키득거렸다. 원래 음식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나였기에, 음식은 입에 맞지는 않아도 먹을 만 했고, ‘이라는 뜻을 가진 인도네시아 맥주 빈탕을 큰 병으로 한잔 거나하게 마셨기 때문에 매우 기분 좋게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와서 수영장이 우리에게 자신의 원하지 않는 평온을 깨 달라고 이야기 해 우리는 샤워조차 하지 않고, 옷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빠졌다. 깊은 곳은 내가 서도 머리 위로 20센티 정도가 남아 있을 정도였고 얕은 곳은 내 가슴까지의 깊이였다. 첫날 플로라 호텔에서는 물에서 소독약 냄새가 꽤 심하게 났는데, 발리 타만 호텔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좋았고, 물도 맑았다. 수영은 정식으로 배워 본 적이 없었기에 정확한 자세를 취할 수는 나였지만, 그래도 중학교 시절 스킨스쿠바를 했던 기억에 힘 입어 즐겁게 수영을 하면서 놀았다. 여자 단원들에게 물맛을 알게 하느라, 다소 악역이 되었던 것이 나만 즐거웠던 것은 아닌가 하는, 지금에 와서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미안.

수영을 마치고 난 뒤에도 우리들의 술자리는 계속 되었지만, 남자들끼리만 즐겁게 즐겁게 아주 즐겁게 마셨기 때문에 그렇게 적을 거리가 없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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