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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 후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봉사 후기 - 7

또 하루의 해가 밝았다. 다시 발리 북부로 돌아가는 날이기도 했고, 공식적인 휴양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공식적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이유는, 돌아오기 전날, 다시 말해 8 11일도 객관적이 기준에서 보면 휴양에 속할 수 있을 패션 센스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핑계를 대자면 ‘8 11일은 귀국 준비를 위해서라고 둘러댈 수 있을까.

일요일의 첫 방문지는 폴로 매장이었다. 어제 해산물 요리를 먹고 나서 호텔로 돌아오면서, ‘폴로 못산다, 폴로 못산다노래를 불렀던 단원들이 많았기에, 물론 나도 그랬지만, 내일 관광을 하러 가기 전에 대형 폴로 매장을 방문한다기에 다들 입을 다물었었다. 그래서 처음 들른 곳은 폴로 매장. 폴로 매장을 가는 차 안에서, 이창선 군과 김경희 양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계급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아직도 계급이 나눠져 있는 사회가 이 지구 상 위에 하나의 제도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낮은 계급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기하게 생각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도 1910년 경술국치 이전의 시기에는 신분제라는 제도에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3세대가 지난 시점에서 신분제에 대한 실감을 외국의 관광지에 와서 생각해 본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기 까지 했다. 신분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성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의 성안동 권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이창선 군과 김경희 양이 안동권가 전국청장년 체육대회의 개최 사실에 꽤 놀라는 듯 하였다. 안동 권가는 매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서 청장년 체육대회를 열고 있다. 나도 2번 참가한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마산창원지역 청장년회 회장을 역임하셨었고, 어릴 적부터 안동 권가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매사에 임할 수 있도록 강제적이지는 않지만 품위를 되도록 유지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던 나는 성씨에 대한 자부심은 갖고 있었지만, 다른 이와의 비교를 통해서 높고 낮음을 겨뤄본 바가 없기에, 이러한 체육대회를 여는 것에 대해서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눈빛을 보내는 다른 단원들의 신기함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폴로 매장에 도착해 입구에 들어가니, 일단 인도네시아의 내수 폴로와 수출용 폴로의 차이점에 대해서 한국인직원이 설명을 해 주었다. ‘한국인이 폴로 매장을 하나의 관광코스로 생각하고 있고, 그에 대한 수요가 이러한 매장을 형성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심지어 다른 현지 직원들도 유창한 한국말을 사용했으니, 한국에서의 폴로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가치가 또 다른 의미의 한글의 세계화를 진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빈정거렸다. 여기서 나는 빨간 티를 하나 샀다. 의류뿐만 아니라, 발리에서 만든 비누나 화장품 등등을 팔고 있었지만, 티 한 장에 무리를 한 나는, 무료로 마실 수 있도록 해준 커피나 마시면서, ‘, 잔 예쁜데?’ 하면서 놀고 있었다. 다들 살 것들 것 많았는지, 양손 가득 종이 가방을 들고 나오는 모습들을 보면서, 싸긴 싼가 보다 하고 생각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가 매장을 나오려 했을 때, 또 다른 한국 관광객들이 입구에서 폴로 상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고, 같은 말투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이야기 하는 직원의 기억력에 놀랐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특정한 그룹에 속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생각해야 한다거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나라이고 우리 민족이기 때문에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내가 왜 뜬금없이 한국인에 대한 서술을 하느냐면,  폴로를 통해 바라본 한국인의 한 단면이 이번 발리 봉사활동 기간 동안 나를 꽤 상념에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앞서도 서술한 바 있지만, 한국에서 폴로 셔츠를 한번 선물로 받아 본 적이 있다. ‘폴로라는 브랜드를 처음 입어 본 것이기도 했지만, 지금 4년 동안 봄가을겨울에 입고 있는데, 셔츠의 상태가 나빠지거나 닳거나 해지지 않았다. 다리미로 다리면 다시 새것과 같이 되는 것에 나름대로 감탄을 느껴 옷의 질이 나쁘지 않은 것도 폴로의 특징인가보다.’하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러한 질에 관련한 배려가 누구에게나 구매의 심리적 바탕에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나 또한 빨간 색 폴로 티를 사면서, 왼쪽 가슴팍에 수 놓여 있는 폴로 상에 일정한 가치를 두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 백화점에 갈 때에는 백화점에 맞는 옷을 입고 가야 굳이백화점에 가서 옷이나 물건을 사는 것에 대한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 한 명을 동등한 지위를 가진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이나 들고 있는 가방’,’액세서리등의 물질에 의거한 판단에서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비싼 옷을 입은 사람은 구매력이 있는 것이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은 그냥 구경만 하고 떠나는 사람이라면,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은, 구경을 하기 위해서 백화점까지 가서 그 굴욕을 받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한국인론으로 다시 돌아오면, ‘사람에 대해서 낮은 가치를 두는 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높은 가치를 둔다. ‘가지고 있는 것속에는 부모도 포함이 되고, 직업이나 다니고 있는 학교 등 다양한 비물질적인 것도 포함된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 가에 대해서만 집중을 하게 되니, 앞으로 이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지향점을 바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특히 사람의 가치를 낮게 보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대입이나 취직을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의 기준에 맞춰서 설정하게 되고, 끊임없이 그 기준이 뿜어내는 마약과 같은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폴로라는 브랜드 하나를 가지고, 한국인론(韓國人論)을 이끌어 내는 것이 다소 이상하게 생각될 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가지는 브랜드가 우리의 가치를 매긴다고 한다면, ‘인권을 추구하기 위해서 죽어갔던 수많은 혁명가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명품을 사주면서, ‘당신들이 만들고자 했던 인간의 모습은, 이 옷안에 갇혀 버린 지 오래요.’ 라고 말해 줘야만 할 것이다. 옷만을 이야기 했지만, 비단 옷 뿐이랴. 나 역시 그러하니, 실컷 내 얼굴에 침만 뱉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여행을 가서, 또 다른 한국인의 소비 행태를 보면, 나는 아예 옷을 벗어 던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폴로 매장을 나와, 잠시 은을 직접 세공한 장신구들을 전시하고, 그 세공하는 현장을 구경하는 곳으로 갔다. 사실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지라, 버스 안에서 잠이나 잘까 하고 있었는데, 다들 나가버리고 에어컨을 꺼 버리니 더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나도 결국 은 제품 매장으로 갔다. 가격은 보지 않기로 하고, 하나하나 살펴보니,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가격을 봐도 못 사고, 보지 않아도 못 사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크게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그림들이나 풍경,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들만 한 것을 찾아서 보고 있었는데, 은 세공품들도 그러한 생각을 하도록 하였다. 왜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보고 있는가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을, 아름답지 않은 것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잃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외관의 아름다움도 물론 아름다움이지만,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나, 중고등학생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흙 묻은 손으로 자신보다 더 어린 동생의 얼굴에서 흙을 털어주는 어린이의 모습 등에서도 아름다움은 만날 수 있기에, 내가 이 아름다운 것들을 감정이 삭막해져보지 않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열심히 아름다운 것을 찾아 다니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쇼핑을 마친 우리들은 다시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날씨가 꽤 좋았던 관계로 기분도 좋았다. ‘물 위에 떠 있는이라는 뜻을 가진 따나 롯사원은 바다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는 사원이 바다 중간에 떠 있는 듯 하여, 사실 떠 있는 것은 아니고 바닷물이 길을 막았을 뿐인데, 이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현지 시간으로 11시 정도에 그 곳에 갔을까. 아니면 더 늦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때는 썰물 때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원의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사원이 있는 곳까지 가서 성수로 손과 얼굴을 씻고, ‘천리향을 오른쪽 귀에 꼽고 흰 쌀을 이마 가운데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썰물이라는 자연 현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썰물을 강조하는 것은, 굳이 썰물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따나 롯 사원이었지만, 바닷물에 들어왔을 때 그 모습이 자못 궁금해서, 썰물이었다는 것에 강조하는 것이다. GWK파크에서 신상이 완성 되었을 때, 다시 오겠다는 다짐이 첫 번째 다짐이었다면, 밀물이 되었을 때, 다시 따나 롯 사원에 오겠다는 것이 두 번째 다짐이 되었다. 3번째 돌아오기 전날이었던, 11일에 하게 된다. 바닷가에 있는 사원인지라, 또 멀리 보아도 섬이 보이지 않아, 바다만 보아도,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웠다. 하늘에는 구름이 구름 같이 떠 있었고, 바다 역시 바다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셔터를 마구 눌러대는 내 손가락이, 더 아름답게 찍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양, 찰칵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원이라는 특성상 소란스럽게 뛰어 다닐 수는 없었으나, 파도는 예외 인양 마음껏 포화를 내뿜으며 사원으로, 사원이 있는 해변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가만히 다른 단원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있는데, 바닷물 속에 어디서 많이 보던 슬리퍼 짝이 보였다. 추측으로는 김성환 군의 신발인 듯 한데,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김성환 군이 신발이 없는 채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왜 그러냐?’ ‘, 바닷가에서 게 보고 있는 데 파도가 덮쳐서 신발을 빼앗아 갔어요.’ ‘ㅋㅋㅋ’ ‘, 저 신발 하나 사 올게요.’ ‘그래라그랬단다. 나머지 한 짝은 보이지도 않았으니, 넓은 인도양을 혼자 유유히 떠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단원들을 이동했다. 이동하는 데, 신기한 것이 눈에 띄어 유심히 살펴 본 것이 있다. ‘HOLY SNA..’ 무엇인가를 영어로 적어 놓았는데, 뒷부분이 지워져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읽어보니 ‘HOLY SNAKE’라고 적혀 있었다. ‘성스런 뱀이라는 의미였는데, 뱀이 있는가 해서 흠칫 놀랐지만, 광주리만 있고 그 안에 뱀은 없었다. 뱀이 있었으면 그 주위에 사람들이 그렇게 여유롭게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 그렇게 많은 쓰레기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한가지 생각한 것이 ‘HOLY’라는 표현을 이 사원에서 보았던 듯 하여, 주위를 빙 둘러 보니, 아까 손과 얼굴을 씻었던 물도 성스러운 물이었고, 또 다른 무엇인가의 표지판에서 성스러운이라는 의미의 영어가 적혀 있었다. 인도를 신의 나라라고 표현한다면, 인도네시아의 발리를 신들의 섬이라고 표현한 글들을 본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중 88퍼센트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지만, 발리만이 유일하게 인구 중 90퍼센트가 힌두교를 믿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힌두의 신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누가 무슨 신을 섬기는 지조차 자기 자신 빼고는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고 할 정도의 많은 신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 힌두교가 발리에만 특별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믿는 이유가 특별한 것이 있는지에 대한 조사는 하지 못 했다. 어디를 가나 짜낭(향과 꽃 등을 담아 놓은 것)과 우리나라의 솟대처럼 집 앞에 서 있는 나무들은 신들의 섬이라는 느낌을 한층 더해 주었다. 이 솟대와 같은 것은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것이라 하고, 그 옆에 꽃과 음식들을 놓아 두는 것은 동물들에 대한 보시의 의미라고 한다. ‘짜낭에 대해서 또 하나 이야기를 하면, 이날 오전에 우리가 들렀던 폴로 매장에서, 공짜 커피를 홀짝거리며 앉아 있을 때였다. 직원 중 한 명이 계산대 옆에 있는짜낭을 새로운 것으로 갈면서, 잠시 기도를 드리는 듯 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더 낮은 노동력을 찾아 인도네시아까지 온 폴로의 공장, 그리고 그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팔고 있는 발리의 매장에서 공짜 커피를 마시면서 힌두교의 간단한 의식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이라. 종교에는 시간의 순서를 매기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임은 충분히 알고 있으나, 폴로 매장 안에서의 짜낭은 뭐랄까. 콘서트 홀 안에 앉아 있는 무당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발리 어디를 가나, 짜낭은 매장의 앞이나, 매장 안에 꼭 있었으니, 신기할 바는 아니었으나, 매번 새로웠다.

 

지금, 나는 어떤 신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일까?’

 

다시 버스를 타고, 북부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디로 갈까하며 궁금해 하고 있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첫날을 덴파사에서 지내고 싱아라자로 이동하는 길에서, 현지 운전기사가 나에게 옆에 보이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고 알려줬던 곳이었다. 그때에도 그다지 날씨가 맑지 못해, 다시 오게 되면 밝은 날에 오고 싶다 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다시 그곳에 찾았을 때에도 날씨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맑은 느낌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그곳은 해발 700미터의 높이에 있는 곳으로, 항상 선선한 날씨를 하고 있다는 것이 관광책자 등의 설명이었지만, 그때 그런 것은 알지 못했다. 부두굴 지역에서 가장 큰 호수인 브라딴 호수가 우리가 향한 곳이고, 그 옆에는 울룬다누 사원이 있었다. 해발 700미터라는 것을 발리 남부와 북부를 오가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는데, 차에 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귀가 먹먹하게 되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오긴 올라 왔나 보다 하고 있었지만, 700미터의 해발을 자랑하는 곳인지는 몰랐다. 브라딴 호수는 끝이 보이긴 했으나, 한 눈에 다 보이지는 않을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고, 물은 맑다기 보다는 평범한 물이었다. 살짝 추웠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안개도 많이 끼어 있고, 흙도 축축했다. 발리에서 계속 보이던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고, 현지인들이 많이 보였고,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있었다. 

울룬다누 사원은 사원의 느낌보다는 정원의 느낌이 많이 들었다. 워낙 힌두교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었던 지라, 탑이나 건물 하나의 의미에 대해서 알 수는 없었다. 과거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사찰이나 탑들을 보면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마구 파괴했던 것이나,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분리와 해체를 자행했던 많은 문화 유산들, 이런 문화유산들을 그들은 제대로 알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무지에서 기인하여 힌두교에 대한 사원 앞에서 마구 사진을 찍어 댔을지 모르며, 그들의 신성히 여기는 것에 대한 모욕을 했을지 모른다. 역사 속에 자행되었던 일들과 내가 저질렀을지 모르는 일들이 같기 때문에, 뭐 그럴수도 있었겠다, 라는 것이 결론이 아니라 무지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그러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지금에서야 알게 된다. 부끄럽다.

탑처럼 보이는 것 건물을 유심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멀리서 볼 때는 검은 시멘트와 같은 재료일 줄 알았던 것이 가까이 가서 보니, 짚과 같은 풀로 풍성하게 만든 뒤, 그 밑 선을 깔끔하게 잘라 내어 탑의 모양을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탑 전체가 짚과 같은 재료라는 것이 아니라, 탑의 삿갓 부분만이 그런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이거 새로운 것으로 갈 때, 우리나라 초가 지붕 바꾸는 것처럼 할까?

다른 단원들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또 사진사 놀이를 하였지만, 다시 역시 나의 사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옆에 우연히 지나가던 정기연 군에게 사진을 부탁했고, 이때, 나는 재미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공중에 뜬 채 사진을 찍으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진을 위치를 바꿔가면서 계속 뛰어 있는 채 사진을 찍으면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과 같은 느낌의 연속 사진이 완성된다. 브라딴 호수 옆에서 이런 사진을 찍고 있는데, 현지인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이렇게 사진을 찍는 것이 신기했던지, 사진을 다 찍고 나자, 박수를 쳐주어서 심히 놀랐다. 무슨 특별한 일이라고.

 

 

그 이후로는 사진, 사진, 사진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이 특별한 추억을 만드는 수단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가끔 사진이 목적인 양, 다른 주위 풍경을 보기 보다는 사진에 자신의 모습을 담기만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진은 결국 물질로서 남는 것이지만, 자신의 눈과 가슴에 담는 그 곳의 풍경, 공기, 느낌은 사진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사진보다는 오래오래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호수에 가기 전에 점심을 먹었다. 이건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 아까 기억해내지 못했는지. 호수를 가기 전에 점심을 먹은 것을 왜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브라딴 호수의 일정을 마지막으로 우리말을 할 줄 아는 현지 가이드와는 헤어졌기 때문이다. 점심을 그와 같이 먹었으니, 점심이 먼저다. 잠시 점심 이야기를 하면, 아침을 하모니 호텔에서 먹고 출발을 하였으니, 꽤 시간은 흘러 있었고, 하모니 호텔의 아침이라는 것이 객실 수와는 다르게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하지 못했고, 있는 밥에 있는 빵,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두부는 있었지만 무엇인가 부족한 식사였다. 그러한 식사를 마치고 약 5시간 후에 점심을 먹으려니 배도 고프기도 고팠고, 점심을 먹은 부두굴의 식당의 음식도 맛있었다. 음식의 맛도 손에 꼽을 수 있으나, 음식뿐만 아니라, 그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었는데, 비가 내리는 동남아시아의 식당, 다시 말해 대나무로 기둥을 짜고 그 위에 짚과 같은 것으로 만든 높은 지붕의 집에서, 떨어지는 비의 소리를 들으며, 안개의 향기를 맡으며 먹는 밥은 일품이었다. 음식이 맛이 없었더라도 그 몽환적 분위기에 취해서라도, 맛있게 먹었으리라. 하얗게 번져 터지는 빗물이 마음도 시원하게 만들었다.

다시 브라딴 호수로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가이드와 인사를 나눈 뒤, 악수를 했다. 웃는 얼굴이 선한 사람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말이 2프로 정도 부족했지만, 좋은 표현을 사용하려 했고, 항상 첫 마디가 대학생 여러분이라는 말로 시작해, 우리들이 대학생임을 깨닫게 해주었던 현지 가이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다시 차를 나눠 탔다. 잠시나마 수학여행과 같았던 시간은 더 이상 없었다. 토요일 일요일 이전에는 도요타 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혼다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전기사도 한 명을 제외하고 바뀌어 있었고, 운전 실력들은 이전의 운전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더 나아져 있었다. 편하게 앉아서 다시 싱아라자 지역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졸다 깨기를 반복했지만, 처음 북부에 갔을 때처럼 멀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지막 숙소인 퓨리 살롱에 도착했다. 단연 시설 면에서 최고로 꼽힐 만 하였다. 시설뿐만 아니라, 수영장 앞의 바다는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 그 곳의 석양을 사진으로 제대로 담아 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 슬프기까지 했다. 마지막 3일간의 방은 정기연 군과 함께 쓰게 되었다. 방을 같이 쓴 단원을 정리하면 처음 하루 동안, 팀장 정윤성 군과 김성환 군이 나와 함께 방을 쓰는 수고를 했었고, 두 번째 발리 타만 호텔에서는 김영한 형님께서 불편하셨겠지만 나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이틀을 머물렀던 하모니 호텔에서는 처음 같이 방을 썼던 김성환 군과 지냈고, 마지막 퓨리 살롱에서는 정기연 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석양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면, 처음 도착한 날의 하늘에는 구름이 흩뿌린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 하늘이었다. 정교한 솜씨를 가진 장인이 구름을 한 손 가득 쥐고, 적절한 완력으로 흩뿌려 만든 듯한 하늘이었다. 마침 그때,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붉은 하늘과 주황색을 띄고 있는 구름, 그 구름 사이로 살짝 비치는 햇살은 바다 위에 비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