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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11.30 명예
  2. 2016.03.28 착하던데요.
  3. 2014.09.27 "평화를 이야기할 때"
2016. 11. 30. 01:13 내 생각

명예”   20161130

 

두 명의 이름이 등장했었다.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중국의 옛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은 친구였다. 한 명의 친구가 다른 한 친구에게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치며 말하길,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친구는, 자살했다. 왜 자살했을까.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친구의 비밀을 영원히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이야기. 대단한 우정이지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친구의 마지막 부탁, 즉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그 말에 자신의 명예가 더렵혀졌다고 생각해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명예? 친구에게 자신이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자신은 명예를 더렵혀졌다 여겼던 것이다. 요즘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1948년 광복 이후 우리 역사에 몇 명의 대통령이 있었다. 그 대통령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통령은 단 한 명이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거 당시 나는 일본의 사이타마현의 한 맨션 안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교환학생 중이었고, 어머니로부터의 인터넷 전화에 잠이 깼고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누워있던 내 몸은 일으켜세워졌다. 누군가 일으켜 세운 듯 했다. 티비를 틀었고, 일본 뉴스에서도 그 사람의 서거 소식이 특종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 후 몇 일 간, 애먼 줄담배만 태웠다. 왜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 친인척 비리가 있다는 검찰의 발표. 그리고 검찰 소환.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바로 그 검찰 소환일 뿐이었다. 민주화운동을 거쳐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까지. 독재 시대를 끝내려는 노력과 다음 시대를 새롭게 만들려는 노력을 국회의원으로 대통령으로 해왔던 인물. 아마 그는 자신의 명예가 더렵혀졌다고 통감(痛感)했을 것이다. 자신의 집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 바위에 서서 죽음으로써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하고 살아남아 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예가 무엇인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명예가 무엇인지를 보이고자 했을 것이다.

 

---

 

그리고 2016년 지금. ‘명예로운 퇴진이라는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혼란을 막고 안정적인 방법을 찾는다는 그 사람의 사전에는 분명 두 글자가 없다. 나폴레옹의 사전에는 포기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으로 유명하듯 그 사람에게는 제목으로 적은 이 두 글자, “명예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명예란 무엇일까. 지키고자 한다면 무조건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 누구의 명예와 누구의 명예가 대립한다면 무엇을 지켜야할까. 국가의 명예와 개인의 명예가 충돌한다면 무엇을 지켜야 할까. 그 사람에게는 지킬 것이 없으니 충돌할 것도 없는 것일까. 하지만 누군가의 명예는 분명 훼손당하고 있다. 다름 아닌 국민이다. 국민의 명예, 국가의 명예 그리고 나아가 민주주의의 명예는 난자(亂刺)당하고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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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요.”라고 말했다는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와네트. 하지만 사료에서는 그녀는 그렇게 말한 적 없다 한다. 오스트리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일한 여제이자 전쟁을 통해 자신의 왕위를 지켜낸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외로웠을 것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했었던 적이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시집을 가야했던 마리 앙투와네트는 자신의 남편과 함께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성공을 거둔다. 시민들의 명예를 위해, 시민들의 빵을 위해, 시민들의 권리를 위해 두 사람은 명예를 빼앗겼고 그것은 역사로 남았다. 시민혁명의 성공의 역사로, 시민들의 명예가 지켜졌던 첫 시작으로.

 

---

 

지금의 우리, 어떤 명예가 남아있을까. 남아 있다면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그것을 갖지 못한 단 한 사람에게 어떤 책임을 지도록 할 수 있을까. 세대가 변하고 시대가 흘러도 누군가는 지켜야 한다. 그동안 살아있는 우리는, 고통스럽더라도 지켜내야 한다. 한 명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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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28. 18:10 내 생각

"착하던데요."

2008년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당시 다시 대학에 갓 들어온 '24살' 신입생으로서, 대학생으로서 해볼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해보자는 생각에 이런 저런 곳에서 주최하는 강연을 찾아 들었다.


고려대에 재학중이던 친구로부터 당시의 진보신당의 대표였던 심상정 국회의원의 강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2222번 버스를 타고 고려대로 향했다. 정치적인 입장이 유사해서도, 심상정 의원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기에 향했다.


강연 내용은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상가가 아닌, 정치인의 말이란 시처럼 함축적이고 소설처럼 역동적이다. 하지만 시나 소설이 아닌 탓에 마음에 남지는 않았다. 정치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문학은, 정책이 아닐까.


여튼


강연은 마쳤고, 고대 정문 앞의 한 식당에서 뒷풀이를 가지게 되었다. 고려대 진보신당 모임이 주축이 된 모임인 만큼, 관련된 관심을 가진 학생, 강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내 옆자리에는 고려대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신다는 분이 앉았다. 가볍게 내 소개를 했다.


"건국대에서 오셨구나. 건국대 학생들은 참 착하던데요."


내 소개를 듣자, 이어 앞의 문장을 정말 환한 얼굴로- 그 어떤 악의도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반가워하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궁금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대학들에서도 수업을 진행하지만, 서울대, 연대, 고대 같이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학교들이랑 비교해보면 건국대 학생들은 참 착해요. 크게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고, 또 시키는 거 잘하고."


그렇구나. 당시 건국대 학부에 재학중이었으므로, 마치 내가 건국대를 대표해서 온 듯한 인상을 받긴 했지만, 그렇구나 정도로 말을 아꼈다.


간단한 저녁과 술을 먹고, 다시 2222번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착하다는 건 어떤 뜻일까. 또 그 착한 대상이 학문의 탐구를 하러 들어온 대학생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건국대 학생들이라는,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의미로서의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랬다. 고려대는 투박하고, 연세대는 세련되고 서울대는 이기적이다 라는 인식이 나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착하다'라는 평가는, 놀라웠다.


서울에 있는 종합대학 중에서 나름의 성과를 내고 또 학교를 다니면서 만난 수많은 '멋진' 친구들이 사회에서 바라 보았을 때는 단지 착한 대학생들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억울하기도 했다.


다시 생각했다.


세계에서 바라보는 우리나라는? 세계경제 10위권에 머물러 있으면서, 역사와 전통이 있지만 착한 나라. 미국과 중국과 일본 그리고 다소 멀지만 러시아 사이에서, 식민지가 되기도 했지만 광복 이후 미국과의 동맹 속에서 미국의 말을 잘 듣고 있는 착한 나라.


누군가 외국에서 만난 사람이 우리 나라 사람을 두고, '착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구나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듯 하다. 마찬가지로, 건국대 학생에 대한 이미지 역시 그래야만 했다.


세계 속의 한국과 서울에 있는 대학들 사이에서의 건국대. 참 많이 닮았다 싶으면서도 한 편으로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는 많은 편견을 갖고 산다. 그 편견이 잘못된 것인지 잘못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불편하다. 편견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편하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지를 갖는다.


개인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집단에 대한, 국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아니라도 항변하는 것은, 피해의식이 드러난 것 뿐이라고 또 비난 받기 딱 좋은 태도기도 하다.


뭐랄까.


살면서 많은 편견들과 마주치고, 또 개인이 매몰된 조직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 수긍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런 문제들은 우리 사회가 겪으면서도 또 동시에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상이 누구든지, 그 대상이 원하지 않은 편견과 이미지는 그 사람의 가능성을 낮추어 버리기 때문이다.


건국대도 그렇고, '아줌마'도 그렇고, '아저씨'도 그렇다. 마치 한국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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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7. 02:40 카테고리 없음

"평화를 이야기할 때"  2014.09.27.


군대 생활을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를 담은 글을 작년 5월 경에 적었다. (그 글은 이미 소개하기도 했고 내 블로그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읽어보시길 바란다.) 핵심적인 주장은 이랬다. 군대 문화라는 것은 군대 내부의 문화여야만 하지 예능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사회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정체되고 있는 원인 중에 '개인의 창의성 부재'가 큰 몫을 담당한다고 하면 이 창의성을 말살시키고 있는 문화가 군대 문화인 만큼 군대 문화의 사회적 유연화 역시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선 얼마 전, 군대 내의 폭행으로 인한 사망사건과 성추행 사건이 연달아 밝혀지면서 내가 비판했던 근거와는 다른 논법으로 '진짜 사나이'의 폐지 주장이 있었다. 실제 군대는 사람이 맞아 죽어 나가는 곳인데 TV에서 보는 군대는 너무나 평화롭고 개인의 내적 안정이 보장되어 있는 듯하기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런 폐지에 몰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도입된 것이 '여군 특집'이다. '진짜 사나이' 제작진은 분명 지난 특집을 계기로 한숨을 돌렸을 것이다. 시청률을 회복한 정도가 아니라 기록에 남을 만한 시청률을 남겼다고 하니, 야구 감독으로 치면 구원투수의 등판이 매우 적절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여군 특집은 본인도 재밌게 보았다. 군대 문화의 사회적 반영에 대한 생각이 변했다기 보다 그들이 좌충우돌 그리고 여자들 간의 진한 우정과 같은 것이 엿보였기에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배우 라미란과 홍은희는 아들을 둔 것으로 방송에 비춰진다. 아마 이 아들들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향후 입대를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라미란과 홍은희 이 두 사람에게 군대는 아들이 반드시 한 번은 거쳐 지나가야 할 관문일 수 있다.


뜬금없이 여배우들의 아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들이 군대를 가게 되었을 당시가 지금과 같다면, 결코 우리는 더욱 나은 군대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고 공식적인 '휴전' 상태에서 단 한걸음도 진보하지 못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군대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과 의견이 존재한다. 적군의 도발을 막기 위한 억지력으로서의 군대, 자국의 국민과 재산을 방위하기 위한 수동적 목적의 군대 또는타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적극적 목적의 군대, 마지막으로 국제사회 내에서 자주적인 국방력을 갖추는 것이 국가의 위신에 걸맞는 행위라는 인식에 의거한 보유 등 다양한 보유 목적이 있을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수동적 목적에서 창설한 자위대를 적극적 목적으로 변경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고, 한국의 경우는 억지력으로서의 군대로서 주한미군과 그 보조를 맞추고 있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군대의 존재 목적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목적은 부수적이라고 밖에 판단할 수 박에 없다. 본인의 의견은 군대의 존재 목적은 "평화"를 위해서라 보인다.. 관념적 개념이 아닌, 실체적 평화 즉 외적으로는 자국에 공격이나 무력 행사를 할 의지나 시도 자체가 사라진 상황이며, 내적으로(국내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적에 대한 관용과 평화에의 경향성 나아가 사상적인 갈등이 해소된 상황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들은 역사 속에서 경주되어왔지만, 거의 대부분의 노력은 실패했다. 평화에 대한 인식과 개념이 국가별로 달랐던 것이 주된 원인임과 동시에 자국 위주의 평화를 무력으로 이루고자 했던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1945년 국제연합이 창설되고 난 뒤, 전쟁에 대한 법이 마련되기도 했고 인종학살을 금지하는 조약이나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 등 국제 사회는 국가별로 상이한 평화에 대한 정의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았다. 그 문제가 남은 공간은 바로 '국제'가 아닌 '국내'였다.


다시 한국의 군대, 아니 한국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시점이 되었다. 한국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진보주의자'로 구분되어진다. 평화의 주체가 대한민국으로 설정되고 평화의 객체 즉 평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 있는 주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이 된다. 북한과의 평화를 위한 방법은 과거 박정희 정권부터 시작하여 노태우의 북방정책, 김대중-노무현의 햇볕 정책 그리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선핵포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나 그 실효성은 오리무중인 것이 현실이다. 북한과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으면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오리가 아니라 백리무중일 수 있으니 여전히 우리에게 '평화'라는 단어는 정치 지형에서 일부를 대표하는 양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게 옳은 것인가.


평화를 이야기함에 있어 진보와 보수는 동일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 그 목적은 다시 평화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를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는 오히려 평화를 카오스로 만듦으로서 정권 유지 혹은 정권 탈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끊임없이 군대는 그 본연의 목적인 평화의 달성에 이르는 길은 찾지 못하고, 과거 조선 말기에 일어났던 '군역의 요역화' 가 일어나기도 하고 군대의 일원인 군인조차 지키기 못하는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평화의 대상이 반드시 북한일 필요는 없다. 북한에 대한 평화에 골몰하고 있는 사이, 군대는 결국 고인 물이 되었고 고인 물에 대한 자정 작용을 해야할 정치는 그 고인물을 퍼마시며 자기의 배를 부르게만 하고 있었다. 북한에 한정된 평화로는 더이상 새로운 군대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지 못한다. 아니, 새로워질 필요까지 없을지도 모른다. 새롭지는 않을 지언정 기존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할 시도라도 해야할 터인데 그 시도조차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향하는 평화의 대상은 '세계'가 되어야 한다. '전지구적 평화'라는 구색만 좋은 슬로건이 아닌 과거 발칸 반도의 지위를 그대로 물려받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내-외적 평화가 잘 구축되도록 해야한다.


그래서 지금 평화학이 필요하다. 평화에 대한 담론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을 경우 결국 기존의 군대는 유지될 수 밖에 없다. 군대 내부에서 평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과 전지구적 평화에의 여정을 준비해야할 뿐아니라 군대 외부, 즉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도 평화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단지 한시적인 논의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평화에의 이상적 지향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정부들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대북정책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국제 사회 내에서의 대한민국의 지위에 있어서 우리가 그다지 성공적이었거나 높은 지위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평화에 대한 아이디어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 아이디어를 짜내어도 모자랄 시간에 이미 구축된 정치 지형의 패러다임에서 네편-내편을 나누어 싸우고만 있었던 것이다.


평화학.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국제 사회의 평화를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진짜 사나이'가 가지는 긍정적인 역할일지 모른다. 군대의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군대의 필요성과 목적 그리고 그것이 지향해야 할 방향 등에 대한 국민적인 토론이 이뤄진다면 평화학의 기초는 마련될 것이다. 기초 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이 우수하기 뛰어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평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내 가족의 이야기이며 내 아들의 이야기이며 '여군 특집'에 나왔듯이 내 딸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 평화학이자 평화이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학 그리고 평화에 대한 일상적 담론이 형성되기 좋은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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