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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04.21 길어도 괜찮아
  2. 2014.08.12 손가락을 깨물음
  3. 2013.11.24 내일은 없다
2016. 4. 21. 00:14 내 생각

길어도 괜찮아.”

 

페이스북을 시작한 것은, 2009년 일본에 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페이스북이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꽤 많은 친구들이 가입을 했고, 서로의 일상과 가벼운 인사를 담벼락에 남기는 도구로서 좋은 도구라 여겨졌다. 당시의 페이스북은 지금의 페이스북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면은 훨씬 조잡했고 채팅 기능은 있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렇게 광고가 많지 않았다.

 

벌써 7년 째 페이스북을 하고 있다.

 

뭔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한 서비스를 사용한다는게 놀랍기도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나에게 있어 약 1년 반 전부터 페이스북 사용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특별한 변화는 아닐지 모르지만, 페이스북에 어머니께서 가입을 하신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몇 해 전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셨으면서도 페이스북은 하시지 않으셨다. 아마 하시는 방법을 모르셨을 것이다. 1년 반 전 고향에 내려간 김에 어머니의 스마트폰에 페이스북을 깔아드렸다. 집에 노트북도 한 대 내려보내드렸는데, 노트북보다는 폰이 쓰시기 편하실 듯 했다.

 

그리고 나는 페이스북에서 더욱착한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께서 가입하시기 전에는, 술을 마신 뒤 다소 우울한 내용이나 특정한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정치적으로 날카로운 글을 마구 싸적어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가입 이후, 나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불편해졌을까? 답답해졌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물리적 거리가 먼 어머니와 더욱 심리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글을 적을 때에도 읽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며 적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통해 어머니께서는 페이스북을 하시면서, 작은 아들이 서울에서 어떻게 하며 살고 있는지를 직접 보실 수 있게 되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를 아실 수 있게 되었다. 또 작은 아들의 글을 꼭 읽으시며 응원의 한 마디나 농담 한 마디까지 던져주시게 되었다.

 

그리고 또 나는, 내 글의 팬을 얻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적은 글은 꼭 읽으신다 하셨다.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시곤 나에게 어머니의 생각을 말씀해주신다. ‘정말 좋은 글이다.’ ‘이번 글은 좀 이해가 잘 안된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시며 내게 조언해주신다. 어머니는 내 글의 팬이다.

 

얼마 전, A4 용지 두 장 분량의 글을 페이스북에 적었다. 어머니께서 그 글을 다 읽으셨다며, 이야기를 이으셨다. “매일 올라오는 너의 글이 갑자기 올라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하게 된다.”하신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글을 매일 적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기다리지 마세요. 어머니께서 말씀 이으시며, “글이 길어서 읽기 힘들지만, 끝까지 다 읽을테니 계속 글 적어줘.” 내가 되묻는다. 글이 길어요? 그럼 좀 짧게 적을까요? 어머니 대답하시길,

 

길어도 괜찮아.”

 

되도록 길게 적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가끔 길어지면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 글 역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머니께서는 괜찮다 하신다. 길어도 읽어주시는 마음이 고맙고 또 한편으로 미안하다.

 

페이스북을 한 지 7. 지금은 단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훔쳐볼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꽤 멀리 살고 있는 나의 가족에게 혹은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누군가 나의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2016, 32살의 권현우라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목소리가 되었다.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 기쁘다. 읽어주셔서 고맙다. 누구보다 어머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들은 오늘도 하루 열심히 살았고, 내일도 오늘 보다 나은 하루를 살기 위해 노력할겁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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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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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2. 02:21 카테고리 없음

손가락을 깨물음    2014.8.12. 


내일을 예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잠들기 전 내일을 가끔 생각해보기도 한다. 몇 시에 일어나서 언제 집을 나설 것인지, 또 어떤 교통수단으로 내가 원하는 곳에 갈 것인지 등을 생각한다. 또는 내일 만나게 되는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때로는 가슴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괜한 꾸중을 들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계획한 대로 혹은 예상한 대로 내일이 이뤄지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졸음은 내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침대 위에 마냥 누워만 있고 싶지만 그렇게 해서는 어제 세운 계획이 몽땅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껴 몸을 일으키지만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출근을 하는 직장인이라면 사람으로 가득차고 그만큼의 다양한 화장품 냄새로 가득찬 대중교통을 타거나,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이렇게 많은데 아직도 자동차를 갖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함을 느낄 정도로 많은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교통체증이란 변비보다 해결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침의 기상과 출근 시간만을 적어도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왜냐하면 산뜻하지 못한 기상과 전쟁과 같은 출근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라 하는 편이 옳다. 사람들은 예상을 자신이 느끼기에 편한 것들을 우선적으로 한다. 편하게 느낀다는 것은 그 계획을 세울 때 모든 기준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제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강인한 의지력을 비록 어제는 갖지 못했을지라도 내일 아침에는 그 능력이 생겼을 것이라 믿고, 또 내가 출근하는 시간에는 다른 사람들은 아마 다들 약해진 의지 탓에 침대 위나 이불 속에서 늦잠에 빠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계획인 만큼 그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빗나가는 것이 당연할 정도다. 


그럼 예상을 하거나 계획을 세우는 것에 있어 자신을 중심에 두는 사람은 나쁜 사람인가. 설마 그럴리가 있겠는가. 나쁘기는 커녕 여전히 매력적인 사람이고 사람들이다. 예상이나 계획 수립이 진정으로 가능해지고, 오늘과 내일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조각할 수 있다면 어떨까. 다시 말해 만약 오늘과 내일이 같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오늘 아주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해보자. 연봉 협상에서 내가 원하는 정도의 인상율을 얻어 내었거나 자신에게 평소 관심이 있어 보이던 이성으로부터 고백을 받았거나, 또는 지난 몇 달 혹은 몇 년간의 시간을 들여 준비한 시험에서 합격을 했다는 결과를 통보받았던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면, 내일이 오늘과 같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반대의 예도 많으니 긴장을 풀지 마시라. 오늘 지난 몇 년간 자신이 충성을 다했고 주말에도 빠짐없이 나와 마치 내가 사장인 듯한 인상마저 줄 정도로 혼신의 힘들 다했던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거나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주고 싶었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마치 '그대'를 만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연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거나 또는 길을 가다 불운하게도 사고를 당하여 자신의 현재 모습을 잃어버린 일이 오늘 일어났다면, 내일은 오늘과 결코 같아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오늘과 내일이 같으면 어떨까?  


오늘과 내일이 같지 않은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지금은 오늘이고 지금이 아닌 것은 내일이라는 점이다. 내일이 되면 지금이 오늘이 되고, 다시 내일은 지금이 아닌 것이 된다. 당연한 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지금을 살고 오늘을 산다.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니들은 내일을 위해 살지만 나는 오늘을 위해 산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멋진 말이다. 원빈이 멋있어서가 아니라 내일을 사는 사람은 오늘만 사는 사람에게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진리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 오지 않은 내일을 사는 사람은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 혹은 오늘보다는 더 못할 내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결국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설마 '현실에 충실하라' 따위가 이 글의 주제일리는 없다. 이런 천박한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갓사온 따끈따끈한 전등을 켜고 선풍기의 수고를 느끼면서 이런 글을 적을 이유는 없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묻고 싶다. 좀 더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도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당신의 지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내일은 예상하거나 계획하는 것이라 길~게 적었다. 오늘 기분 좋았던 일이 있었다고 해도 혹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만큼, 혹시 이 세상에 타임머신이 존재한다면 어제로 돌아가 오늘을 어떻게든 바꿔보고 싶을 정도의 기분 나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었다고 해도 내일은 또 다시 온다. 내일을 예상하는 것은 오늘의 연속이지만, 단 한 가지 단점이 있다. 내일은 기억할 수 없다. 예상하거나 계획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기억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억을 하려해도 할 수 없는 숙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내일에게 조의를 표할 수 밖에 없지만, 내일은 오늘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며 흐르는 눈물을 콧물이라 속이며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질문을 해보자. 오늘이 되어버린 내일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잊지 못할 추억" 이라는 표현을 많이들 쓴다. 잊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았던 기억이 있다면 이 표현을 한 번쯤은 사용해 보았을 터이다. 또는 '결코 잊지 않겠다!'라며 이를 갈거나 붉은 펜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휘갈겨 쓰거나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하는 방법을 통해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던 경험 역시도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결국은... 잊혀진다. 


사람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은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간혹 천재의 등장이 인류 미래의 희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천재 역시도 내일은 기억할 수 없으니 '너도 어차피 같은 인간이야.'라고 말하며 피식 웃어주는 것 밖에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할 일이 없기도 하다. 결국 사람은 누구든 기억을 한 것 중 일부는 잊게 되고, 또 잊은 만큼 다시 새로운 것을 기억하게 된다. 끊임없이 기억하려는 노력은 되려 집착을 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과거의 추억에 빠져 살고 있는 듯한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어디까지 기억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기억량을 보유하여야만 좋은지에 대한 기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냥'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기억하면 되는 것, 혹은 기억하기 싫은 것은 자연스레 잊혀지도록 기다려보는 것 이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당신의 오늘을, 지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잊지 못할 추억이든,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든 이런 일들은 일상적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을 '아, 정말 잊지못할 추억이야' 라고 생각는 사람은 없을 듯 하고, 친구가 나를 보며 놀린 한 마디에 대해서 '잊지 않겠다!'라며 버럭버럭거리는 순수해보이지만 꽤나 잔인한 어린 친구들도 없을 듯하다. (혹시 있다면 꼭 응징하길 바란다.)  우리의 삶을 고고히 흐르게 하는 것들은 잊지 못할 추억이나,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일부러 해야 하는 것들이 아니다. 사실은 아무일도 아닌 듯, 돌아봐도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않은 일들에 의해서 하루하루가 채워져 나가고 있다. 


오늘 아침 일어나면서, 알람 소리를 어찌 저리도 청명히 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의 휴대전화를 미워하다가도, 또는 출근의 지옥버스나 지옥철 그리고 교통체증을 느끼더라도 그것들은 잠자리에 드는 순간 거의 잊어 버린 기억이 되어 버린다. 적게는 몇 십분에서 많게는 몇 시간을 쓴 그 경험들이 결국은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이 당연해지는 이유는,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일상은 특별하지는 않지만 조용히 당신의 삶을 채워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시간을 통해서 성장하고 또 배우고 관계를 맺곤 한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잠을 잠으로써 성장하듯이 우리는 일상 속에서 경험을 하고 성장해 간다. 


나는 가끔 손가락을 깨물고 있을 때가 있다. 대부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혹은 멍하니 있을 때, 둘 중 하나의 상황에서 나는 왼손 검지 손가락을 여지 없이 가만히 깨물고 있다. 아프지는 않을 정도지만 내가 손가락을 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쯤 되는 고통을 내 손가락에게 가하곤 한다. 두 가지 행동의 이유는 사실 같다고 해도 무방하다. 손가락을 깨무는 이유는,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생각을 하는 것을 사진으로 찍을 수도 없고 또 생각을 글로 옮길 여유가 없을 만큼 빠르게 돌아가는 내 두뇌 속의 적혈구들의 순환을 막을 의지도 없을 떄 나는 지긋이 손가락을 깨문다. 아프지는 않지만 내가 손가락을 깨물면서 지금의 순간을 기억하고자 한다. 멍하게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일을 할 때 멍하니 손가락을 깨물고 있으면 '내가 지금 아무일도 하지 않고 있구나' 정도의 기억을 내게 남길 수 있다. 물론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해야할 무엇인가를 종종 바로 다시 찾기도 하지만, 가만히 멍하니 손가락만 깨문 채,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열심히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다소 느슨히 깨물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깨무는 것은, 오늘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깨물면 마치 스위치가 켜지는 것처럼 '지금'을 느낄 수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나만의 행동을 통해서 오늘을 기억하는 방식이 내일은 또 어떤 기억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상은 하지 못할지언정 기대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손가락을 깨물어, 오늘의 내가 얻은 행복이 사실인지 정말인지 진짜인지 확인해보기도 하고, 잊지 못할 슬픔에 빠지게 되었거나 눈물을 펑펑 흘리고 싶을 때는 손가락을 있는 힘껏 꽉 깨물어, 내가 지금 우는 것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아파 우는 것인양 행동하고 그리고 손가락이 다시 아프지 않게 되면 오늘 겪었던 힘든 일이나 좋지 않았던 일들도 다 잊혀질 것처럼... 


손가락을 깨물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현실에 충실하신가요?' 가 아니라, '당신은 당신의 지금을, 오늘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이 질문이다. '어떻게'라는 부분에서 나는 손가락을 깨물고 손가락을 입에서 빼고 얼얼할 즈음에 그 생각을 글로 옮기거나 하기도 하지만, 결국 손가락을 깨물음이라는 행위가 그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사람마다 다양하고 또 특이하거나 평범하거나 뭐 여튼 각자의 방식으로 지금을, 오늘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을 오늘을, 지금을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지만 굳이 알려주실 필요는 없다. 지금을 기억하고, 오늘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의 방식을 통해서 더욱 오늘이 될 내일을 의미있는 날로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기억할 가치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루를 보내는 누군가가 있다면 손가락을 꽉 깨무는 것을 추천해 드린다. 아프다고 느끼는 것을 두려워 하지말고 사라질 고통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가진다면, 가치나 의미는 굳이 찾지 않으려 해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어느 순간 아픔을 느끼지 않는 손가락들이 엄지 손가락에게 말해, 그 당당한 위용을 당신의 눈 앞에 딱하고 치켜 세울 수 있도록 해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내일의 예상보다는 오늘의 기억을, 지금의 기억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내일도 오늘이 된다는 것이 오늘만을 기억해도 되는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까.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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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4. 00:35 카테고리 없음

내일은 없다. 2013.11.24.


역사가 아무리 발전하다고 한들, 사람이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으며 자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역사가 아무리 발전하다고 한들,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으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내일은 없다'라는 말을,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오롯한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일은 없는 것이 아니라, 내일도 오늘일 것이며 사실은, 어제도 오늘이었다. 


시간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사람들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오늘'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늘을 더욱 세분화 하기 위해서 시간을 나누게 되었고, 더 확장 시키기 위해서 1년을 만들게 되었다. 그때 시간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오늘을 오늘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은, 그들이 쉽게 예상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늘이 있었다는 것만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이 올지도 모르고, 어제가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이 아니라, 단지 시간 상으로 '지나가 버린 것'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충격이었을 것이다. 


글에 역사를 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은 역사학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그 당시에만 통용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역사를 담되 그 역사가 10년 뒤, 100년 뒤에도 그 시대 전체와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글을 쓰는 것은 누군가 '글을 쓴다'라고 말할 때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슬퍼할 수 있고, 또 때론 기뻐할 수도 있다. 기쁨만을 가진 삶은 없고 한정 없는 슬픔만을 감정으로 갖고 있는 삶도 없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픈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 삶의 굴레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어려움은 숭고함을 낳는다고 했던가. 앞서 말 했듯이 역사가 아무리 발전한다고 한들,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죽지 않고 죽은 뒤의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서 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그런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 남아 그것을 글이든 말이든 사진이든 그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던 사례들이 있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감정의 극한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현실감은 매우 떨어진다. 우리가 직접 겪어 볼 수 없는 어떤 것은 마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사진으로 보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하는지 의심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둥글고, 우리가 글로 보는 역사, 기록된 역사 속에는 '어려움'을 느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증거들이 있다. 이런 증거들로부터 우리는 그런 어려움은 우리가 어떻게 이겨냈는가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 확인 자체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진 않는다.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곤, 당장의 식사일 수도 있고 자녀의 학업이나 취학, 혹은 자신의 연봉 협상 등일 수 있다. 이러한 것들도 어찌보면 '거시적'이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곤 지금 당장의 기분일지 모른다. 바로 10분 뒤에 후회할 일이라도 우리는 지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가장 큰 근거로 삼으면서 어떤 현상들에 대해서 판단하고 설득당한다.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마치 지금은 모든 세계가 '기분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양한 사례에서, 자신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기분의 기준은 달라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는 순간 기분 나빠 한다. '가진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더욱 중요해 보이는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복합되어서 자신의 '선호'를 드러내게 되는데, 그 비율의 차이는 언제나 존재한다. 때로는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기도 하고 또 반대의 경우도 빈번히 드러나기도 한다. 입장을 취하는 것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다. 오히려 악의 입장이라도 그런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반가운 일이지도 모른다. 입장을 취한다고 했지만, 그 입장은 자신이 어떤 정신적, 물질적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매우 쉽게 바뀐다. 손바닥 뒤집는 것이 그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자신의 입장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에게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몇 명이든, 자신이 가진 재산이 얼마이든 관계 없이 입장이 변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냐, 그건 또 아니다. 입장은 언제나 변할 수 있고 자신의 상황이나 주변의 상황은 우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이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어려운 기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기준 말이다. 사람을 더 확장하면 '인류'라는 기준을 대입해 볼 수도 있는데, 그 인류라는 기준이 우리가 평소 쓰는 용어가 아니라서 다소 어색해 보일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태어난 이상 이 인류의 역사성 속에 매몰되어 버린다고 하면, 그 흐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그리고 그 기준이 인류의 보편적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은 결코 선만으로 가득찬 세상은 아니고, 오히려 자신과 입장이 다른, 가끔은 너무나 자명한 '악'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어찌 보면 고맙다고 할 수 있다. 히틀러가 없었으면 우리는 인간의 추악함의 끝을 지금 확인해 보았을지도 모를 것이며 독재가 만약 다른 나라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지금 독재를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를 수도 있다.


이런 결과론적 도덕론은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앞으로 또 어떤 악이 펼쳐질지, 그것들이 인류에 기여하는 바가 얼마나 추악하고 클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과거의 어떤 사건들로부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수한 사례가 이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금 그런 잘못들을 아무일도 아닌 듯이, 또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어차피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 배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않는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오늘을 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을 정의롭거나 인류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으로 살지 않으면 그 의미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려움은 숭고함을 낳는다. 그 어려움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나 오늘일 수 밖에 없고, 지금도 지구 상 위 어디선가는 먹지 못해, 자지 못해 죽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바통을 터치 받아 다시금 누군가 태어나기도 한다. 그런 삶들에게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라는 따위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고, 어제의 노력이 오늘의 보상으로 다가 올 것이라는 거짓을 들려줄 수는 없다. 


역사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내일을 살지 않았고 오늘만을 살았다.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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