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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04.19 여드름 자국
  2. 2013.06.26 안경을 벗어보니.
2016. 4. 19. 00:31 내 생각

여드름 자국

 

중학교 시절까지 단 하나도 나지 않던 여드름이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내 얼굴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춘기가 되면 누구나 나는 것이라 생각해 내버려두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선 배 밑에 베개를 깔고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양손을 얼굴에 대고 여드름을 상처로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드름을 무던히도 열심히 짰던 기억이 선명한 것은, 그 사소한 실수가 지금까지도 내 얼굴에 남아 있다는 것을 매일 거울을 보며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하얀 고름이나 유분기가 ’-이 소리는 실제로 난 소리는 아니고, 마음 속에서만 들렸던 소리다-소리를 내며 거울에 튀겼고, 나는 더욱 힘껏 여드름을 손으로 꾹꾹 눌러 피가 나도록 했다. 몇 번의 반복된 동작 끝에 내 얼굴에는 여드름의 기미는 사라졌지만 불긋한 상처와 딱지들이 남았다. 상처가 나으면 예전의 피부도 돌아가겠지- 하는 착각. 이 있었다. 그때는 그 사소한 행동들이 이후의 내 얼굴의 한 특징이 될 줄 알았을리 없다.

 

나에게는 익숙해졌지만.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익숙해지지 않는 듯 했다. 대놓고 내 피부를 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내 피부 상태를 보고, 나 자신을 관리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기는 듯 했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 것은, 내 눈을 보지 않고 묘하게 피부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적어졌지만 과거에는 꽤- 많았다.

 

상처가 남았다.

 

여드름 흉터로 인해 상처가 남은 것은 내 피부였지만,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이나 사소한 놀림-예를 들어 달의 표면 사진을 보는데, 네 피부가 생각났다.’ 라던지, ‘좀 씻고 다녀라라던지- 에 의해서 마음에도 상처가 남았다. 피부의 치료를 위해 피부과를 다녀보기도 했지만, 호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내가 익숙해진 만큼 크게 신경쓰지 않는 시간들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예전의 중학교 친구가 생각났다. 오른손이 있을 자리에 항상 붕대를 감고 다녔던 친구. 그 친구는 혈관기형으로 손을 잘라내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했다. 자신과 같이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기 위해 한의사가 되고자 했었는데,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친구는 손이 없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오히려 불편한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는데, 그 시선탓에 굳이 감지 않아도 될 붕대를 감아야만 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혐오스럽다며 언짢은 표정을 자주 지었다고 했고 자신도 그런 피해를 남에게 주고 싶지 않다 했다.

 

손과 피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가는데 있어 용도와 이질감이 덜 드는 쪽은 피부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다르다라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그 결과는 같을 수도 있다.

 

이질감.

 

티비를 틀어보면 피부 미끈한 사람과 손 두 개인 사람들이 나온다. 심지어 예쁘고 잘생기기까지 했다. 굳이 티비를 틀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도 관리 잘된 피부를 갖춘 사람을 꿀피부나 피부 미녀/미남이라 칭송하기도 하고 매력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손이 없거나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저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편하게 만들어내어 관리복지의 대상으로까지 만들어 버린다. 그 원인에는 이질감이 있다. 누가 만들어낸 기준이고 평균인지 알 수 없으나, 사람은 피부가 미끈해야 하고 손은 두 개, 발도 두 개, 눈도 두 개 등등 다양한 평균적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이질적인사람이 되어버리고, 관심의 대상이 되거나 복지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다르다는 것의 아름다움.

 

나는 비록 내 실수로 인해 그리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여드름 흉터가 생겼지만,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장애를 가진 사람은 대부분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내 실수로 지금의 피부가 되었지만, 나는 내 피부가 부끄럽거나 불편하지 않다. 그저 내 피부는 남과 다를 뿐이다. 장애 역시 그렇다. 그저 그 한 사람의 개성으로 받아들이면 안될까. 개성이면서 일상 생활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사회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부족한 사람에게 부족하다 비난할 것이 아니라, 부족하니 사회에서 조금씩 채워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이러게 된다면 다름은 개성으로 굳혀지고, 그 개성은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하나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든 드러나지 않는 것이든, 다시 말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혹은 심리적)인 것이든 불편함과 다름을 안고 산다. 마치 현재 모든 인류의 공통점이라 할만한 불편함과 다름을 이질적이라거나 비정상이라고 낙인찍는다면 이 세상 누구도 정상은 없다. ‘정상평균이라는 것의 틀을 벗어나야만 모든 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지 않을까.

 

피부 나쁜 것도 장애가 있는 것도, 마음이 아픈 것도, 몸이 아픈 것도 또 그 어느 한 곳 아프지 않은 것도 그저 그 사람이 가진 개성이고 다름이 되기를. 불편하더라도 스스로가 변하길 원치 않으면 마음 깊이 존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나만의 욕심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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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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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6. 23:11 카테고리 없음

안경을 벗어보니. 2013.6.26. 


아침 일찍 일어나 집 주위에 있는 도림천을 걸었다. 고시촌에서 시작하는 산책로는 신림역을 지나 신대방역까지 이어지지만, 오늘 아침의 산책 혹은 운동은 신림역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것으로 정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약 20분이 소요되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도림천 내(內)의 이름 모를 물고기들을 구경하면서 걸으면 약 35분 정도가 걸리는 그리 길지 않은 거리다. 


하루 온종일을 앉아만 있다보니, '걷기'라는 행위의 욕구가 생겨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 사뿐사뿐 걸어다니기를 즐기는 본인이지만, 평소와 다르게 오늘 아침 느낀바가 있어 글로 남긴다. 


본인은 시력이 좋지 않다. 시력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기준이 '병역'이기에 간단히 설명코자 한다. 20살이 되던해, 해군병에 지원해서 해군 기초군사학교에 들어갔다. 해군은 1주일의 가입교 기간 동안 다시 신체검사를 받는다.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해군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은, 시력이 상당히 나빠 군대 자체를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입교 후 5일이 지난 후 다시 사회로 나왔고, 신체검사를 다시 받으니 '양안난시'로 인해 4급 판정을 받았다. 간단히 설명한다고 했지만, 설명이 좀 길었다. 결국, 군대를 갈 수 없을 만큼 눈이 매우 나쁘다는 것이다. 


눈이 나쁘니, 안경을 벗으면 사물의 분간이 쉽지 않다. 형체는 제대로 알아볼 수 있어도 글자를 읽거나 숫자를 분간하거나, 신호등을 인식하는데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항상 안경을 쓰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별 계기없이 안경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산책을 하는 것이었으니 속도를 낼 것도 아니었으므로 안경을 벗어도 무방하겠다 싶었다. 안경을 벗어도 길과 건물, 사람의 형체는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는 키나 체형을 보고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이 남자인줄은 알겠으나 어떤 얼굴을 가졌는지를 알기 어렵고, 연령대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여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으므로 젊은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그때 생각했다. 


아, 사람이 사람으로 보인다. 몇 살이든 얼굴이 예쁘든 못생기든 잘생기든 관계 없이 사람이 사람으로 보인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구분지었던 방법이었던 연령이나 성별, 그리고 최근 부각되고 있는 '능력'이라 여겨지는 외모에 대한 생각들은 소용이 없다. 어떤 얼굴을 가졌든, 키가 얼마든, 옷을 어떻게 입었든 관계 없이 모두 다 사람인 것이다. 심지어 부끄럽게도 내가 젊은 남자로서 가졌던 여성의 외모에 대한 편견이, 내가 안경을 벗는 것만으로 사라졌다. 결국 나는 안경을 쓰고 있었을때, 모든 것을 명확히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오히려 내가 제대로 보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내 인식 속에 안개만 덧씌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안경을 벗고보니 그랬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관계 없이, 나와 부딪히지 않으려면 피해야하는 사람이었고, 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여자가 젊은 사람이든 나이가 든 사람이든 예쁜 사람이든 예쁘지 않은 사람이든 관계가 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썼던 안경이 오히려 내 인식을 흐리게 만들었고, 사물에 대한 분간이 쉽지 않아지자 오히려 더 명확히 그 본질이 보였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옳고 이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놓치게 되는 부분은,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라는 것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 역시 나와 또 다른 사람이라는 것, 그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든, 키가 크던 작던, 돈이 많건 적건을 떠나서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리라. 


러시아의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 안톤 체호프의 소설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의 부인과 함께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는 예전 어머니가 보시던 거울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거울에만 빠져서 평생을 미쳐 사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 그 거울 없이는 단 하루도 사실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거울을 우연히 본 자신의 부인 역시도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거울에 집착했다. 사실 그 거울은 평평하지도 않고 더러워보이는 거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소설에서 안톤 체호프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결국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본다는 것,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편한 것만을 찾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결코 진실이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의 내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잘못 옮긴 부분이 있으면 추후에 수정을 하겠다.)


나도 오늘 안경을 벗고, 내가 만나고 싶어하던 '예쁘고 젋은 여자'(다시 한번 부끄럽지만, 쑥스럽지는 않다)가 아닌, 남녀를 떠나고, 노소(老少)를 떠나고 미추(美醜)를 떠나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내가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혹은, 볼 수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살았던 삶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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