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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05.24 혐오와 자기혐오
  2. 2015.01.21 갑을 문화 그리고 계층 사회 (1)
  3. 2014.11.20 인류 역사 진보와 장애인
2016. 5. 24. 16:59 내 생각

"혐오와 자기 혐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최근 1주일 사이 저의 SNS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었음에도 그 개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단어는 바로 '혐오'입니다.

 

혐오(嫌惡)란 보다시피 두 개의 한자가 모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싫어한다는 뜻의 ''과 미워한다는 뜻의 '', 다시 말해 싫고도 미운 어떤 대상에 대해 품는 감정입니다. 교육심리학에서는 '혐오'를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정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사람이라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고 물건이라면 부숴버리고 싶을 감정을 느끼는 대상에 대한 감정인 것입니다. 그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될 때가 있습니다.

 

최근 '혐오'라는 단어가 저의 눈과 귀에 많이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2016517일 밤 120분 경 서울 강남역 인근의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으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이 남성은 자신이 평소 여성으로부터 무시를 받아왔기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혐오 중에서도 '여성혐오'의 발현이 이번 살인사건의 큰 원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 내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적 태도와 성범죄의 가해자로서의 남성에 대한 각성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혐오의 개념은 간신히 알게되었습니다만, 여성혐오란 무엇일까요.

 

집단지성인 위키피디아에 정리된 여성혐오는, 사회학자 마이클 플러드((Michael Flood)의 말을 빌어 여성혐오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성혐오는 대부분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나, 여성들이 스스로나 다른 여성을 대할 때에도 나타난다.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와 함께, 수천년 동안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못박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권력과 의사결정에 대해 제한적인 접근만을 허락하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이념 혹은 신념체계로 기능한다. [...] 서양 문화 속의 여성은 스스로의 역할을 사회적인 희생양으로 내면화하여 왔으며, 21세기에는 멀티미디어에 의한 여성의 대상화로 인해 문화적으로 승인된 자기 혐오와 성형 수술, 거식증 및 식욕항진증(폭식증)에 대한 집착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특이한 점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혐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여성에 대한 혐오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 들어와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으로 정착되었다는 점 역시 특이합니다. 이러한 특이점은 여성혐오의 발원지가 남성 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우리 일상에서 매우 쉽게 여성혐오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합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른 견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의 시작이며 일상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앞선 '혐오'의 개념과 연결시켜 보면, '죽이고 싶은 대상'이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혐오 그리고 여성혐오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지금의 시점에서는 위험한 발상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글을 적고 있는 본인은 남성이 가진 혐오의 대상이 '여성'이 되었든, 여성이 가진 혐오의 대상이 '남성'이 되었든 또는 그 대상이 바퀴벌레가 되거나 개미가 되었든 혐오를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그 혐오의 감정을 근거로 실제 행동이 표현되었을 때는 법적 그리고 사회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혐오의 감정을 갖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혐오의 감정을 어떤 형태로든 실행한다면, 타인의 생명과 자유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성과 가능성이 있기에 제약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혐오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또 다른 인격이라면 문제는 더욱 첨예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바퀴벌레를 혐오해서 죽이는 것과 여성을 혐오해서 죽이는 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에는, 혐오의 대상이 여성이었습니다. 특정되지 않은, 20대 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의 표현은 이제 개인의 자유 영역에서 벗어나 법적-사회적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혐오 표현은 우리 사회 내에 아니, 인류의 역사 속에서 뿌리 깊게 스며 있는 여성혐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지 모릅니다.

 

긴 글이 될 듯 하지만, 저는 여성혐오를 포함한 혐오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개인의 감정으로서의 혐오와 발현된 혐오 모두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혐오의 원인은, 바로 도구화입니다.

 

도구화, 타인을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 혹은 감정입니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들은 여성을 자신의 성욕의 해소나 성공의 발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자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 역사적으로 갖고 있었던 권력들이 자신들의 삶을 더욱 나은 삶으로 만드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이며, 그러한 권력의 붕괴를 위한 수단으로서 남자를 공격이나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성과 남성 뿐만 아니라, 도구화의 대상은 자기 자신에 까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을 찾기가 힘들어진 현대에 들어와 직업을 가짐으로 인해 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자부심을 갖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회사를 위한 도구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직업적 측면 뿐만 아니라, 누군가는 부모의 꿈을 대리해 실현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서로 사랑을 하는 연인 관계에 있어서도 타인의 행복을 돕는 수단으로까지 여겨지지도 합니다.

 

이즈음 되면 사람이 도구화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춘 철학자나 사상가가 있지 않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있습니다. 그것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도구화'를 막기 위한 철학적-종교적 체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씁쓸한 것이 사람의 도구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시대를 막론하고 만연한 문제였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혐오의 원인으로서 전제한 도구화에 대해서 역사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서술했을까요.

 

칸트는 정언명령(定言命令) 중 하나로서 인간의 도구화를 일갈합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 쉽게 말해, 자신과 타인 모두를 수단화하지 말라 말하죠.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논어위령공편에 나온 표현으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 말합니다. 그 뜻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입니다. 직접적으로 도구화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듯 보이지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타인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며, 자신이 어떠한 목적을 이루고 싶지 않으면 타인 역시 그럴 것이라 상정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시키거나 수단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는 어떻게 이야기했을까요. 다소 포괄적이고 다양한 해석이 있기도 하지만 자비가 수단화를 막는 답이자 대안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단어는 혐오처럼 두 한자의 결합입니다. ()는 사랑한다, 즐거워한다는 뜻이고 비()는 슬퍼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비란,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공감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있지 말고 타인의 행복이나 슬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것은, 앞서 설명한 칸트와 공자가 언급한 맥락과 함께 합니다. 타인이 어떤 감정을 가질지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입니다. 즉 타인을 수단화하는 것입니다.

 

수단화에 대한 비판은 칸트, 공자, 부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혐오의 원인이 도구화이고, 도구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인들의 일갈을 듣는다고 우리는 혐오를 멈추게 될까요. 그렇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성에, 타인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을까요?

 

제가 제시하는 대안은 자기 혐오를 멈추자는 것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혐오한다는 것이 어색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의 생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하게 된다면 자기 밖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만들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 혐오를 불식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타인에 의해 흔들리는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을 확인하고 확보시켜 나간다면, 타인의 기준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에는 여성 뿐만 아니라 외국인, 장애인 나아가 동물 혹은 식물에게 까지 공감의 확대가 가능할지 모릅니다.

 

 

앞서 긴 글을 요약하면 이렇게 한 문장이 될 듯 합니다.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도구화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런 혐오의 근저에는 자기 혐오가 깔려 있으니 자기 혐오를 하지 않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위 요약된 문장에는 많은 맹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만의 기준을 만들고 자신을 혐오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타인들은 여전히 그 기준을 찾지 못했고, 사회-제도적으로도 차별이 남아있다면 여전히 혐오가 범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선후관계를 설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혐오를 멈추기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사회 전체적인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혐오는 감정입니다. 그것을 갖든지 말든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혐오든 타인에 대한 혐오든 혐오의 감정을 갖는 것은 자신에 대한 정신적 피해를 끼칩니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지만 혐오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생각과 감정의 악순환에 빠져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한 이런 혐오가 감정의 고삐에서 풀려나 실행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법적인 책임과 반드시 직면하게 됩니다. 우선 혐오의 감정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있어, 그 시작이 자기에 대한 혐오를 멈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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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21. 19:16 내 생각

'갑을 문화 그리고 계층 사회'  2015.1.21. 


JTBC의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한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다양한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고정 게스트로 합류한 네팔의 '수잔'이라는 청년이 고정 게스트가 되기 전 '인턴(?)'으로 한 번 방송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게스트와 MC들로부터 네팔의 문화와 종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카스트'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네팔 역시 힌두교 문화권이므로 카스트 제도가 있으며 결혼 상대의 결정, 직업의 결정 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카스트 제도의 틀 내에서 정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나라 MC 뿐만 아니라 여타 국가들의 게스트들은 '아직도 그런 신분제와 같은 제도가!' 하는 놀라움과 동시에 문화다양성을 인정하는 뉘앙스를 동시에 풍겼다. 


최근 다양한 사건으로 불거지긴 했지만, 한국 사회의 '갑을' 문화는 역사와 전통이 깊다. 사실상 일본에 의한 갑오개혁이 시행되기 이전에 오천년의 역사는 신분제 사회였다. 크게는 왕족과 양반, 서민 그리고 노예(근대적 단어이긴 하지만.)로 구성된 신분 사회는 그 구조를 변경시키려는 일부의 노력들은 여지 없이 실패로 끝났다. 갑오개혁 역시도 신분제의 철폐를 통한 평등 사회 구축이라는 대의를 갖춘 듯 하지만 사실은 조선 말기 이미 문란해 지기 시작한 신분제를 국가가 나서서 그것을 법적으로 보호하고 그를 통해 세수 확보를 도모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식민정부에 소속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기준이 되었고, 몇몇 친일파는 기사 작위를 받아 조선 이전과는 또 다른 신분을 갖게 되었다. 


최근의 갑을 문화에 대한 비판에 대해, 마치 '역사적으로 갑을 문화가 정착된 국가이니 문제 삼을 것이 없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미군정기 이후 1948년 독립 이후 우리가 취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갑을 문화와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계층 문화를 우리 스스로 내면화시키고 있다는 데 더욱 큰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핵심 의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자와 연구자들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니 좀 더 전문적인 해석은 여타 학자들의 저서를 통해서 확인해보길 바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유주의의 핵심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정도 내에서 자신의 자유를 제한 없이 펼칠 수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 다른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결정으로 그 방향을 이루는데 도와주는 사람을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뽑는 절차이며 과정이다. 이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는 본인은, 한국 사회의 갑을 문화, 계층 문화는 사실 자유주의도 아니며, 민주주의도 아닌 상황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의 핵심 의제를 시쳇말로 표현한다면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라 요약할 수 있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범위의 일들은 극소화되고 있다. 가령 예를 들어 화가가 되겠다는 어린 학생이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그 어느 시대에도 경제적 지원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어떤 시대와 어떤 사회와 비교한다 할지라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지원은 막대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림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화가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경제적 지원은 일상화되어 있다. 화가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분야라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이미 '노력'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꿈들로 가득차 있다. 혹자들은 노력을 해보지도 않고 사회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냐며, 노력을 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며 반문을 하겠지만 노력을 해서 성공한 그 일부의 사람들이 결코 한 사회의 평균이 될 수 없기에, 되지 않았기에, 여러 사람이 그 사람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 주었으면 한다. 누구나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다면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라는 말에 부정적인 어투를 본인은 과감히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한가.


민주주의 핵심 의제 역시 흔히 쓰는 표현으로 바꾸면, "내가 원하는 미래는 내가 만든다."라 할 수 있다. 작게는 구의원에서 크게는 대통령까지, 각자가 원하는 마을, 사람, 나라의 모습을 그리며 투표를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투표는 번거로운 일이 되었고, 누군가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그러한 태도에 크게 반감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민주화 이전의 시대의 사람들은 그러한 태도에 자신의 목숨과 청춘을 바쳤지만 제도적으로 민주주의가 다시 한 번 확립된 이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내 통장의 잔고를 더욱 늘려줄 수 있는 사람을 유명인으로 만들어 주는 법'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세금 제도와 교육 제도를 끈질기게 요구했음에도 점점 더 삶과 유리되는 방향으로 정치가 이끌려 가는 것은 그러한 '올바름'이 '경제적인 혜택'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경제에 종속된 '카스트' 사회가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고 카스트 제도에 대한 검색을 해 본 결과 "학벌 사회, 한국 사회 카스트 만들어" 등의 글을 읽었다. 대학 서열이 한 사람의 신분이 되어 버리는 위험성을 경고한 글이었지만, 이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일 수 밖에 없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명문 대학을 나왔다고 그 사람이 카스트의 정점이나 그 언저리에 머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어떤 대학을 나왔든 그 사람이 사장이 되거나, 의사, 변호사, 판사 등 사회적 지위와 동시에 경제적 혜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대학의 이름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같은 대학 내에서도 '인문계열' 학생과 '공학 계열' 학생들 사이의 취업 시장에 있어서의 카스트 제도는 만연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어느 덧 사람들은 한국 사회를 '계급은 없지만 계층은 있는 사회' 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계층이 어디 인지를 자신 스스로, 그리고 타인을 통해서 확인받기 시작했다. 대기업 직원이라 할지라도 스스로를 '미생'이라 부르기도 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기도 하며, 결혼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 등 개인적인 부분에 까지 그 계층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대기업 총수와 그 일가들의 행태를 보며 '저들도 저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라는 연민의 시각 마저 보이며 일부 사람들의 경제력-권력 독점을 내면화시켜버리고 있다. 


앞서 한국 사회의 갑을 문화-계층 문화의 역사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의 갑을 문화-계층 문화를 역사적 '유물'로서 보전하자는 취지가 결코 아니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하지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감히 역사를 만들 수 있는 힘이 개인 각자에게 주어져 있다면, 우리는 100년 뒤, 200년 뒤의 역사가들에게 최소한 이런 한 줄의 글은 쓰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2000년 대의 한국은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와 유사한 경제적 카스트 제도를 강화하며 유지하여 왔다." 그리고 그 카스트 제도가 활성화 되는데 있어 가장 주체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일부 대기업 총수나 권력층이 아니라, 99%라 스스로를 위치 짓는 민주주의 시민들에 의해서 성립-활성화되었다.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가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이며,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을 훼손하는 제도라고 욕하기 이전에 우리는 스스로 카스트 제도의 나쁜 원형을 우리의 손으로 소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힌두교 카스트 제도 내에 같은 계급끼리의 연대 혹은 연대 의식을 우리 사회는 결코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어느 사이인가 연대는 '전경련'이나 '국회의원 의원회관'에서나 통용되는 말이 되었지, 필부필부의 집이나 한적한 도로 위 혹은 어린 아이가 뺨 맞아 쓰러지는 어린이집 숫자 매트 위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은 아니게 되어버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길고 지루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찾아야 할 연대, "잃어버린 연대를 찾아서"라는 책이 나온다면, 프루스트의 저 책보다 훨씬 더 긴 시간과 지루함 그리고 때로는 일부 몇몇의 피가 붉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야아 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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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oodman 2015.04.10 00:43  Addr  Edit/Del  Reply

    글 잘읽었습니다 대단하네요 ㄷㄷ

2014. 11. 20. 23:18 내 생각

인류 역사 진보와 장애인 2014.11.20. 


나는 인류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이다. 그 인류 역사 진보의 핵심은 기술 발전도 아닌, 우주 탐험도 아닌 인간 개인개인의 가치를 높였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도 '노예'가 있었다. 노예라는 표현보다는 노비 혹은 머슴이라는 표현이 익숙하지만 그들의 처지는 노예였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살지 못했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했으며, 자녀의 출생은 '재산 증식'으로 간주되었다. 제1차 갑오개혁(1894년)에 이르러서야 공사 노비제를 없애는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주인집에 '자발적으로' 남아 자유로인 노비를 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 남자 노비는 머슴으로라도 불렸지만 여자 노비의 경우는 그 이름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여자 노비의 경우에는 주인의 성폭행과 성추행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어미가 노비인 경우에는 남편의 지위에 관계 없이 노비 지위를 물려주는, 말 그대로 노비 생산 공장으로 밖에 대접받지 못했다. 
광복을 맞이한 이후, 각 개인의 권리가 중요 시 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연합국들로부터 받아들였지만 막상 나아지지는 못했다. 알다시피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손을 잡고 들어왔고, 민주주의는 광복 이후 몇몇 독재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인간 개개인의 가치를 높여가는 인류 진보의 역사 속에 간과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 지에 따라 그 국가의 선진성을 척도로 삼는다면 적절한 기준이 될 듯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장애 역시 비용이 문제로 밖에 치환되지 않는다. 낙태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고, 태어난 이들에 대해서 당연히 '불행할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어제 내가 올린 아이디어는 '시각장애인이 버스를 더욱 편하게 탈 수 있도록 하자'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이 아이디어를 들은 한 친구는 "장애인은 안내견이나 자원봉사자가 있지 않냐."라는 질문을 내게 했다. 물론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학적인 논리 뿐만 아니라 사람이 가진 '선의'를 베풀 수 있다는 점에서 성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매번 그 도움을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받을 수도 없고 또 줄 수도 없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장애 제도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려가는 것이다. 도움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는 부분들을 혼자 해결해나가면서 사람은 성장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한다. 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논의에서 벗어나 누구에게나 통용된다. 
시각장애인이 버스를 탈지 택시를 탈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지에 대해서 선택권을 넓혀나가야 그 장애인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권리도 아닌, 의무도 아닌 한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장애를 갖고 있다 해서 혜택이라 생각해서도 또 혜택을 준다고 생각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지금 인도 위에 서 있다면 가운데 노란 보도블럭이 보이는가. 그 보도 블럭은 시각장애인이 길을 혼자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지금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면 '저상 버스'라는 이름의 버스가 혹시 서 있는가. 그 버스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버스다. 지하철 역에 있다면 휠체어 리프트를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들 역시 장애인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인류 역사의 진보는, 노비 상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극적인 사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역시도 제도로서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그 내용에 대한 학습과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허황된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인류 역사의 진보, 자유주의의 적용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장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잣대가 장애인에 대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왜 집 밖에 나와서 난리야?' 라던지 '누군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길에서 장애인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소한 것들이라도 장애인들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려 나가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 그에 대해 도움을 주어야 함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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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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