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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혐오와 자기혐오

"혐오와 자기 혐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최근 1주일 사이 저의 SNS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었음에도 그 개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단어는 바로 '혐오'입니다.

 

혐오(嫌惡)란 보다시피 두 개의 한자가 모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싫어한다는 뜻의 ''과 미워한다는 뜻의 '', 다시 말해 싫고도 미운 어떤 대상에 대해 품는 감정입니다. 교육심리학에서는 '혐오'를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정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사람이라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고 물건이라면 부숴버리고 싶을 감정을 느끼는 대상에 대한 감정인 것입니다. 그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될 때가 있습니다.

 

최근 '혐오'라는 단어가 저의 눈과 귀에 많이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2016517일 밤 120분 경 서울 강남역 인근의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으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이 남성은 자신이 평소 여성으로부터 무시를 받아왔기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혐오 중에서도 '여성혐오'의 발현이 이번 살인사건의 큰 원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 내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적 태도와 성범죄의 가해자로서의 남성에 대한 각성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혐오의 개념은 간신히 알게되었습니다만, 여성혐오란 무엇일까요.

 

집단지성인 위키피디아에 정리된 여성혐오는, 사회학자 마이클 플러드((Michael Flood)의 말을 빌어 여성혐오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성혐오는 대부분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나, 여성들이 스스로나 다른 여성을 대할 때에도 나타난다.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와 함께, 수천년 동안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못박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권력과 의사결정에 대해 제한적인 접근만을 허락하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이념 혹은 신념체계로 기능한다. [...] 서양 문화 속의 여성은 스스로의 역할을 사회적인 희생양으로 내면화하여 왔으며, 21세기에는 멀티미디어에 의한 여성의 대상화로 인해 문화적으로 승인된 자기 혐오와 성형 수술, 거식증 및 식욕항진증(폭식증)에 대한 집착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특이한 점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혐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여성에 대한 혐오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 들어와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으로 정착되었다는 점 역시 특이합니다. 이러한 특이점은 여성혐오의 발원지가 남성 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우리 일상에서 매우 쉽게 여성혐오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합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른 견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의 시작이며 일상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앞선 '혐오'의 개념과 연결시켜 보면, '죽이고 싶은 대상'이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혐오 그리고 여성혐오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지금의 시점에서는 위험한 발상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글을 적고 있는 본인은 남성이 가진 혐오의 대상이 '여성'이 되었든, 여성이 가진 혐오의 대상이 '남성'이 되었든 또는 그 대상이 바퀴벌레가 되거나 개미가 되었든 혐오를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그 혐오의 감정을 근거로 실제 행동이 표현되었을 때는 법적 그리고 사회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혐오의 감정을 갖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혐오의 감정을 어떤 형태로든 실행한다면, 타인의 생명과 자유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성과 가능성이 있기에 제약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혐오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또 다른 인격이라면 문제는 더욱 첨예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바퀴벌레를 혐오해서 죽이는 것과 여성을 혐오해서 죽이는 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에는, 혐오의 대상이 여성이었습니다. 특정되지 않은, 20대 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의 표현은 이제 개인의 자유 영역에서 벗어나 법적-사회적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혐오 표현은 우리 사회 내에 아니, 인류의 역사 속에서 뿌리 깊게 스며 있는 여성혐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지 모릅니다.

 

긴 글이 될 듯 하지만, 저는 여성혐오를 포함한 혐오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개인의 감정으로서의 혐오와 발현된 혐오 모두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혐오의 원인은, 바로 도구화입니다.

 

도구화, 타인을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 혹은 감정입니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들은 여성을 자신의 성욕의 해소나 성공의 발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자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 역사적으로 갖고 있었던 권력들이 자신들의 삶을 더욱 나은 삶으로 만드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이며, 그러한 권력의 붕괴를 위한 수단으로서 남자를 공격이나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성과 남성 뿐만 아니라, 도구화의 대상은 자기 자신에 까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을 찾기가 힘들어진 현대에 들어와 직업을 가짐으로 인해 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자부심을 갖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회사를 위한 도구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직업적 측면 뿐만 아니라, 누군가는 부모의 꿈을 대리해 실현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서로 사랑을 하는 연인 관계에 있어서도 타인의 행복을 돕는 수단으로까지 여겨지지도 합니다.

 

이즈음 되면 사람이 도구화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춘 철학자나 사상가가 있지 않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있습니다. 그것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도구화'를 막기 위한 철학적-종교적 체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씁쓸한 것이 사람의 도구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시대를 막론하고 만연한 문제였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혐오의 원인으로서 전제한 도구화에 대해서 역사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서술했을까요.

 

칸트는 정언명령(定言命令) 중 하나로서 인간의 도구화를 일갈합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 쉽게 말해, 자신과 타인 모두를 수단화하지 말라 말하죠.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논어위령공편에 나온 표현으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 말합니다. 그 뜻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입니다. 직접적으로 도구화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듯 보이지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타인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며, 자신이 어떠한 목적을 이루고 싶지 않으면 타인 역시 그럴 것이라 상정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시키거나 수단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는 어떻게 이야기했을까요. 다소 포괄적이고 다양한 해석이 있기도 하지만 자비가 수단화를 막는 답이자 대안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단어는 혐오처럼 두 한자의 결합입니다. ()는 사랑한다, 즐거워한다는 뜻이고 비()는 슬퍼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비란,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공감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있지 말고 타인의 행복이나 슬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것은, 앞서 설명한 칸트와 공자가 언급한 맥락과 함께 합니다. 타인이 어떤 감정을 가질지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입니다. 즉 타인을 수단화하는 것입니다.

 

수단화에 대한 비판은 칸트, 공자, 부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혐오의 원인이 도구화이고, 도구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인들의 일갈을 듣는다고 우리는 혐오를 멈추게 될까요. 그렇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성에, 타인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을까요?

 

제가 제시하는 대안은 자기 혐오를 멈추자는 것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혐오한다는 것이 어색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의 생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하게 된다면 자기 밖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만들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 혐오를 불식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타인에 의해 흔들리는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을 확인하고 확보시켜 나간다면, 타인의 기준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에는 여성 뿐만 아니라 외국인, 장애인 나아가 동물 혹은 식물에게 까지 공감의 확대가 가능할지 모릅니다.

 

 

앞서 긴 글을 요약하면 이렇게 한 문장이 될 듯 합니다.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도구화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런 혐오의 근저에는 자기 혐오가 깔려 있으니 자기 혐오를 하지 않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위 요약된 문장에는 많은 맹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만의 기준을 만들고 자신을 혐오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타인들은 여전히 그 기준을 찾지 못했고, 사회-제도적으로도 차별이 남아있다면 여전히 혐오가 범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선후관계를 설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혐오를 멈추기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사회 전체적인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혐오는 감정입니다. 그것을 갖든지 말든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혐오든 타인에 대한 혐오든 혐오의 감정을 갖는 것은 자신에 대한 정신적 피해를 끼칩니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지만 혐오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생각과 감정의 악순환에 빠져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한 이런 혐오가 감정의 고삐에서 풀려나 실행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법적인 책임과 반드시 직면하게 됩니다. 우선 혐오의 감정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있어, 그 시작이 자기에 대한 혐오를 멈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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