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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드름 자국 “여드름 자국” 중학교 시절까지 단 하나도 나지 않던 여드름이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내 얼굴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춘기가 되면 누구나 나는 것이라 생각해 내버려두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선 배 밑에 베개를 깔고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양손을 얼굴에 대고 여드름을 상처로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드름을 무던히도 열심히 짰던 기억이 선명한 것은, 그 사소한 실수가 지금까지도 내 얼굴에 남아 있다는 것을 매일 거울을 보며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하얀 고름이나 유분기가 ‘찍’-이 소리는 실제로 난 소리는 아니고, 마음 속에서만 들렸던 소리다-소리를 내며 거울에 튀겼고, 나는 더욱 힘껏 여드름을 손으로 꾹.. 더보기
샤프를 쓰지 못한 이유 "샤프를 쓰지 못한 이유" 지금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초등학생은 샤프를 쓸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샤프를 쓰지 말라 하시기도 했고, 부모님께서도 연필을 쓰라 하셨다. 왜 샤프를 쓰지 못하게 했을까. 연필은 매번 깎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었고, 또 연필심이 쉽게 부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샤프를 사용하지 말라는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특별한 이유라기 보다, 샤프를 사서 쓸 수 없는 친구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연필은 저렴했고, 샤프는 초등학생이 사기에는 고가였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혹은 지역만 하더라도, 지금의 기준으로 금수저와 흙수저가 편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편한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또 그와 동시에 부모의 재산.. 더보기
현우의500자_94 ‪#‎현우의500자‬ _94 외가쪽 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저녁 8시 즈음 모여 저녁을 같이 먹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외가쪽 친척들은, 자주 뵙지 못해도 나와의 관계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어른들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제사를 마치고 조상이 주신다고 하지만, 사실 외숙모께서 고생하시면서 만드신 제사 음식을 가볍게 나누어 먹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조상이 남긴 과거가 아닌, 가족의 미래를 위해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 사이 어머니의 사촌오빠 즉 외가의 외삼촌 중 한 분께서 형과 나에게 용돈을 주셨다. 정확한 금액은 기억나지 않지만 형이 받은 돈이 내가 받은 돈의 두 배였다. 돈을 받아든 나는 인종차별하지 마라! 소리치며 돈을 친척이 가득 서 있는 거실에 세게 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