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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6.12.03 시멘트 핫도그
  2. 2015.03.29 현우의500자_115
  3. 2015.02.21 현우의500자_81
  4. 2013.11.11 해외봉사활동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다. (1)
2016. 12. 3. 11:02 내 생각

‘시멘트 핫도그’ 20161203

 


2009 1,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위앙짠)의 근교, 어느 한 초등학교에서 2주간의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 유스클립(Youth CLIP)이라는 대학생국제교류단체에 소속되어 있을 당시였고, 보건복지부의 후원으로 진행하게 된 봉사활동이었다. 2주간 내가 맡았던 업무는 다름 아닌 도서관 짓기였다. 그곳의 초등학교는 교사(校舍)와 화장실 건물만이 있는 곳이었기에 도서관을 세울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당시 현지에서 활동중이던 시민단체로부터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라오스에 가기 이전까지 내가 손에 벽돌을 잡아본 적은, 2006년 아동양육시설에서 공익근무를 할당시 식당을 증축할 때 뿐이었으므로 완전 초짜였다. 현지의 인부-라고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지역 주민들이었다와 협력하며 도서관의 바닥이 될 곳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학교의 정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오른쪽에 널찍한 공간이 형성된 뒤, 본격적으로 벽돌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평소 한국에서 길을 걷다가 집이나 건물을 새로 짓는 공사장을 지나가며 보았던 대로, 현지 인부들이 쌓아놓은 벽돌 첫 줄 위에 잘 게운 시멘트를 얇게 발랐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벽돌 줄을 만들기 위해 벽돌을 올려놓는 일이 반복되었다. 집중해서 몇 장 째 올리고 있었는데, 현지인 인부이자 2주간 봉사활동 끝에 친구가 된 뎅(빨갛다는 의미의 이름)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사래를 쳤다. 뎅이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라는 건 확실했다. 이어 뎅은, 자신이 들고 있던 망치로 내가 쌓아 올린 벽돌을 가볍게 툭 하고 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하며 놀라기도 전에 벽돌은 힘없이 툭 하고 쓰러졌다. 나는 당황했다. 분명 벽돌은 세워져 있는 듯 보였다. 몇 장의 벽돌이 아주 보기 좋게 줄지어 서 있었고, 그것은 내가 익히 보던 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뎅은, 그렇게 해서는 벽돌이 제대로 붙어있지 못한다며 직접 시범을 보였다. 잘 게운 시멘트를 한 움큼, 손에 들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판자에 덜어내더니 그것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꽤 두꺼운 핫도그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세워져 있던 벽돌 위에 툭 하고 올려놓았다. 그럼 벽돌 위로 핫도그 모양의 시멘트 덩어리의 반 정도가 드러나 보였다. 나머지 반은 아래 벽돌과 접착되어 있었다. 드러난 반 정도의 시멘트 핫도그 위에 새 벽돌을 올리자 새 벽돌의 무게에 의해 시멘트 핫도그는 납작 눌려졌고,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들이 삐죽하며 묻어 나왔다. 그것을 시멘트 칼로 긁어내자, 그때야 비로소 내가 흔히 보던 모습의 벽이 드러났다. 이어 뎅은 다시 망치를 들어, 처음에 내가 세웠던 벽돌을 넘어뜨리던 강도와 비슷해 보이는 강도로 그 벽돌을 툭 하고 쳤다. 벽돌은 움직이지 않았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가 잘 접착되어 있었기에 벽돌은 큰 흔들림이 없었다.

 

방법을 알게 된 나는, 2주간의 시간 동안 벽돌 쌓기에 나름의 조예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실제 공사장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우스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여타 봉사자들보다는 빠르고 바르게 벽돌을 쌓아 올렸다는 것은 확실했다. 덕분에 내 손과 얼굴은 거칠어져 갔지만 말이다.

 

라오스에 가기 전까지 벽을 보면, 보기만 좋은 그 평평한 모습만 생각했다. 벽돌은 아주 얇게 바른 시멘트로도 충분히 붙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벽돌을 서로 붙이기 위해서는 보이는 양보다 보이지 않는 꽤 많은 양의 시멘트가 필요했다. 그것들이 끈끈히 붙어 무너지지 않는 벽이 되었고, 건물이 되었고 라오스에서는 도서관이 되었다.


 


우리 사회도 그렇다. 어떻게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을까 생각을 해보면, 겉으로 보면 별다른 것 없이 멀끔해 보이지만 사람들 사이 사이에도, 제도 사이 사이에도 두꺼운 핫도그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다. 그것이 개인 간에는 사랑일 수도 있고 가족 안에서는 책임감과 존경일 수도 있고, 사회 전체로 보면 법과 제도든지, 민주주의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겉에서 볼 때는 어떻게 지탱되고 유지되는지 궁금해 할 수 있는 것들이, 어떤 시련이나 고난이 닥치면 결국 이런 끈적임과 접착력이 그것을 지켜준다. 사랑, 가족애, 책임과 의무, 민주주의라고 했지만 그것들 결국 하나로 묶으면 연대(連帶)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아껴 여기고, 누구 하나도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함께 손을 잡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너지려 할 때 힘을 모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주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시멘트 핫도그가 아닐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겉모습에 신경을 써온 듯 했다. 겉으로 멀끔하면 되니, 부실공사를 한 탓에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붕괴했고, 씨랜드에서는 유치원생과 선생님을 포함한 2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세월호가 가라앉으며 사망자 295명과 실종자 9명이 발생한 것이다. 겉보기에 배는 바다에 침몰하지 않을 듯 보였다. 바다에 빠지더라도 나라가 승객들을 구해낼 것이라는, 국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 사회적 연대는 원활히 진행되지도 않았다. 불필요한 색깔 논쟁과 유가족을 비난하는 글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법적인 책임만이라도 제대로 묻길 바랐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다시 말해 벽 안에 끈끈히 묻어 있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그것은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 필요한 시멘트 핫도그 보다 더욱 중요하다. 글을 적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공교롭게도 우리는 사회적 연대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가 누구를 지킬 것인가. 누가 국가를 지킬 것인가. 지킬 것은 자기 자신 뿐인 세상에 살고자 하는가, 아니면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가. 산업화가 주었던 사회적 연대 배고픔과 민주화가 주었던 사회적 연대 민주주의를 넘어 무엇을 사회적 연대의 목적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해 보인다.

 

일을 마치고 난 뒤 뎅과 술을 마시면, 우리는 서로를 격려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우리가 느꼈던 연대감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난 뒤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애국심 따위가 아니라 우리 친구의 이야기이며,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며, 우리보다 먼저 더 나은 우리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남긴 이야기들이다. 더 튼튼한 벽을 세울 것이다. 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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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9. 22:28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15


화려하게 꾸며진 꽃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꽃꽂이에는 꽃 뿐만 아니라 뭉털이실이 흐느트러져 있다. 봉사활동을 시작하기 전의 오전, 나는 합장을 한 채 마을 사람들을 기다린다. 라오스의 수도 위앙짠 근교의 한적한 마을의 학교 운동장이다. 마을 어른들께서 모두 모이자 바시 의식은 시작된다. 마을 이장 쯤 되시는 분이 의식을 진행한다. 나는 가만히 엄숙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시간을 흘리듯이 손에 담고 있다. 그리고 꽃에서 이어진 실의 끝을 잡은 채다. 의식이 끝나자 현지 어른들께서 실을 내 왼쪽 손목에 묶어주신다. 적은 금액이지만 지폐와 함께 묶는다. 헐거우면서도 끊지 않는 이상 풀리지 않게 실을 묶어 주시며 눈을 마주친 뒤,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 나도 여러 사람들에게 실을 묶어주었다. 2009년 1월에 맨 바시의 실은 2011년 여름이 되어서야 끊어졌다. 실이 끊겨 버렸을 때 아쉽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게 되니 더이상 집착하지 않고 변치 않는 모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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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21. 16:06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81


이른 새벽이다. 어제의 작업에 고단했던 나는, 10시 경 침낭에 들어가 얼굴 만을 내어 놓은 채 잠이 들었다. 잠을 자야겠다, 는 생각도 없이 잠이 들어버리고는 아침이 어슴푸레 밝아오면 눈꺼풀 위로 새로운 빛이 들었다. 동남아라고는 해도 1월 라오스의 새벽은 스치는 바람이 시기하듯 춥다. 얼굴에 간 밤의 추위가 서리 내려, 바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눈썹을 한 번 으쓱하곤 침낭의 지퍼를 내린다. 피로는 가셨지만 여전히 어제 도서관을 짓기 위해 들었던 벽돌의 무게가 근육 곳곳에 남아 있다. 으, 짧게 신음소리를 내고 1층으로 내려 간다. 라오스인 아저씨와 부인 그리고 학교를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난 첫째 아들이 바짝 모은 모닥불가에 앉아 있다. 모닥불 위에는 검게 그을린 주전자가 올려 있고 주둥이에서 나오는 흰 빛이 새벽의 붉푸름에 선명히 대비된다. 인사를 꾸벅, 하고 자리를 잡는다. 주인 아저씨께서 라오스의 명물인 환한 미소와 함께 커피를 건넨다. 그 한 잔, 참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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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1. 09:30 카테고리 없음

해외봉사활동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다.  2013.11.13. 


봉사활동이라는 것은, 참으로 좋은 활동 중 하나이다. 자신이 취한 입장이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상황 등 모든 것들을 뒤로 한채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의 활동은 인류가 가진 '이타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봉사활동이 숭고한 의미의 봉사를 넘어,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적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묵묵히 봉사활동을 하는 '진정한 봉사자'들에게는 언짢게 들릴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봉사자들의 행복과 권리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취업, 입학 또는 장학금 수혜의 수단으로서 변질되는 봉사활동에 대한 경계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봉사활동 중 대표적인 것이 '해외봉사활동'이다. 


생각보다 우리 주위에는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다. 비영리재단에 속한 봉사단에서 1년 간 파견되어 그 지역의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실무자로 봉사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해외봉사와 동시에 카톨릭이나 개신교 선교 등 부수적 목적으로 봉사활동을 떠나는 사람들 역시 있다. 숭고한 목적을 위한 봉사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들의 노고를 아낌없이 치하해야 할 것이다. 글을 적는 본인이 치하할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응원이라도 보태주고 싶다.


반면, 거의 대부분 대학생들로 이루어지는 단기 해외봉사활동들에 있어서는, 그 선발의 기준과 해외 파견 이후의 활동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익을 보는 여러 학교, 단체 혹은 기업들이 주최하는 해외봉사활동은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이러한 다양한 해외봉사활동 중에서 특히 '대학생 해외봉사활동'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띠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왜 우리가 봉사활동을 '가야만' 하는가의 문제이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약 한 달 정도의 기간을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해외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기업이 모든 비용을 대어주거나 심지어 숙소마저도 호텔에 숙박하게 하는 등의 활동들에 대해서 대학생 봉사자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듯 해보인다. 


예를 들면, 학생 한 명을 해외에 파견하고 그 곳에서 숙식하며 또 해외 여러 비공식단체들과의 연계된 활동들을 운용하는데 드는 비용이 100만원이라고 해보자. 대부분의 해외봉사가 '오지'에서 진행되는 측면에서 보면 100만원이라는 금액은 실제로는 많이 축소된 금액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편의상으로 100만원이라 해보자. 봉사자가 단지 '파견'되는 것만으로 드는 비용이 100만원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만약 그곳에 직접 가지 않고 그 돈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지역이나 마을 혹은 국가에 지원한다면 그 효과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클까. 우리가 직접 간다고 해서 일면식도 없는 그 곳의 사람들이 더욱 반가워하지는 않을 것이고, 우리가 하는 봉사활동이라는 것이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또는 건물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지역에서는 그런 것을 할 사람이 없어서 우리가 그 먼 곳까지 가야했던 것일까. 우리가 가지 못한다면, 그 지역에서 우리가 파견되는 비용으로 선생님을 고용하거나 건설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것이 아닐까.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대학생이 봉사활동을 가도록 하고, 또 보내는 입장에서 그 나름의 논리가 있지 않았을까. 왜 우리가 거기까지 가서 단지 해외봉사활동 "경험"이라는 것을 쌓아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우선, 해외봉사활동을 통해서 그 지역에서 보고 배우고 느낀 것들이 앞으로의 그 대학생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또 그것으로 인해 그 대학생들이 국제적인 시각을 갖추는데 일조할 것이라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외봉사'의 의의를 둘 것이다. 아무리 책을 읽고 또 다큐멘터리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직접 겪어본 것만큼 그 사람의 인생에서 큰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논리이다. 


백보 양보해도, 기업이나 학교에서 보내'주는' 해외봉사활동으로 진정한 '국제인'이나 '해외봉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수는 소수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거의 모든 대학교에서 자체 봉사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기업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대학생들을 해외 오지로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돌아오고 난 뒤, 한국의 해외원조 규모가 작다고 항의하거나  세계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권리 향상에 직접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다면, 지금보다는 더 평화로운 세계가 되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파견되는 비용은, 자신의 안전을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외봉사활동에 있어서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해외봉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권리 향상이나 장기적 대책 마련이어야 한다. 만약 자신의 안전이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면 해외봉사활동을 갈 것이 아니라, 유니세프나 여러 해외원조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자신을 내려놓고자 하는 곳에서 자신의 안전 비용이 해외 지역의 현지인이 평생을 벌어도 벌지 못하는 돈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해외봉사활동을 가는데 있어, 자신이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이며 갔다오고 난 뒤 어떤 의무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면, 해외봉사활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사람이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온 뒤, 그에게나 그의 주변사람에게 남는 것이라곤 몇 장의 사진이거나, 기업이나 단체, 학교에서 발급해주는 봉사활동 확인서가 전부가 될 것이다. 흔히들 '스펙'이라고 일컫어지는, '인간 사용설명서'에 한 줄을 넣기 위해 해외봉사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가도 좋지만, 그런 의도가 아닌 사람들은 자신이 해외봉사활동을 왜 가고, 자신이 그곳에 감으로 인해서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도움을 주고 받을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해외봉사활동을 가려는 대학생 혹은 사람은 자신이 그곳에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반드시 해야 한다. 


두 번째로, 태극기 남용이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가보면 마치 한국 국가대표 봉사단들이 모두 해외를 나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각 기업이나 단체, 대학에서 해외로 파견하는 대학생 봉사자들의 가슴 팍에는 자랑스럽게 태극기가 박혀 있다. 해외에 나가 우리나라가 과거에는 해외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지금은 대학생 봉사자를 파견할 만큼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있다. 대학생들이 해외봉사활동을 가는 것은, 한국을 대표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지도 않고 한국 국민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굳이 대표한다고 하면 자신이 속한 학교나 단체, 혹은 후원을 한 기업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이 태극기를 달고 해외봉사활동에 가면, 그 사람들의 활동이 한국의 활동으로 비춰지기 쉽다. 


한국의 활동으로 비춰지는 것이 무엇인 문제인가 하는 반론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태극기를 달고 외국에 나가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입장이 세계 속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국가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샌가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폭력성을 인식하고 있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K-POP이 전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폭력성'은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국은 사실 과거 베트남 전쟁 이전과 이후, 국제 사회 속에서 미국의 패권에 편입된지 오래 되었고, 한국은 곧 미국의 우방국가라는 것을 세계 속 사람들은 알고 있다. 미국의 우방국가라는 것 자체가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아랍 국가 내의 원리주의자들이나 동남아시아 내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미국 혹은 영국에 대한 테러를 멈추지 않는 것은, 그들이 역사적으로 가진 폭력성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나라들이 해외봉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가진 태극기의 인상이 어떻게 비춰질지는 확답을 줄 수 없다.  


미국과의 문제는 우리가 걱정할 부분은 분명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국제 사회의 논리에 의해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가장 좋은 선택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태극기를 가슴에 새기고 해외 봉사활동을 간다는 것은 서방 사회에 편입하려는 국가가 가진 또 다른 의미의 확장 정책으로 보여질 수 있다. 


이렇게 예를 들수도 있겠다. 만약 우리나라의 어떤 한 달동네에 일본 국기를 가슴에 새긴 사람들이 봉사활동을 하러 온다고 해보자. 일본인의 봉사활동 자체는 숭고하다. 하지만 그 숭고성을 우리는 '일장기'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의해 일정부분 반감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만행을 적은 '한국인 혐오비'라는 것이 지금까지도 베트남 현지에는 세워져 있다. 베트남의 예를 특별히 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나, 이런 혐오비가 존재하는 국가에 가서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느 것보다는, 민간인 대 민간인으로서 봉사활동을 하는 선량한 마음을 가진 새로운 이웃을 갖는 느낌의 봉사활동이 이뤄지는 것이 오히려 봉사 대상의 마음을 더욱 열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국제정치나 일본과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국기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우리 생각보다 다양하게 받아들여 진다는 것을 해외봉사활동을 가는 단체나 기업, 학교 그리고 무엇보다 봉사자들이 알아야 한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봉사는 민간에서 하는 것이고, 국가에서 하는 것은 '원조'라는 형태로 이뤄진다. 우리가 원조와 봉사를 헷갈리기 시작한다면 봉사의 의미는 퇴색되고 만다. 봉사는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에게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원조는 경제적 사정이 그나마 나은 국가가 경제적 사정이 좋지 못한 국가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경제'는 결국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뇌관이다. 


해외봉사는 해외봉사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의 대상의 입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태극기나 기업의 후원 로고 등은 결코 봉사 대상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세 번째로, 기업의 무분별한 후원 혹은 홍보의 목적이다. 


과거 한국의 기업들은, 자신의 이익은 오로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서만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방식이며, 이미 임금이라는 형태로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기업은 그 국가의 다양한 주체들의 노력과 사회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런 인식의 결과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투자 확대나 고용 창출, 장학재단 설립 등의 형태로도 이뤄졌지만 미래의 자신들의 기업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를 대학생들에 대한 국내/해외봉사활동의 파견의 형태로도 이어지게 되었다. 


중소 규모의 기업에서는 대학생들을 대규모로 해외에 파견할 수 있는 재정적 여력이 되지 않는 관계로,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대학생 해외봉사를 독점하고 있는 듯한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기업들은 대학생들이 입는 옷부터 시작해 항공비, 체제비 등 거의 모든 비용을 지불한다. 그리고 그 대학생들의 옷에는 어김없이 그 회사의 로고를 박는다. 기업이 후원하는 것인 만큼 그 로고를 다는 것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로고는 기업 홍보의 수단이 된다.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해보면 이렇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과연 그 기업의 명칭이나 로고를 드러내지 않아야만 하는 것일까. 


대학생 해외봉사는 기업의 홍보 목적이 아닌, '봉사활동'이며 파견 지역 주민이나 국민들의 삶의 질 확장이라는 것에 더욱 포인트를 둔다면 기업은 대학생들 보내는 것이 옳은 것일까. 첫 번째 의문점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행사함에 있어 굳이 대학생들 보내야만 했던 것일까. 진정으로 자신들의 브랜드나 업적을 홍보하는 것이 필요했다면 그들이 지원해준 주택 사업이나 교육사업의 팜플렛이나 건물에 로고 하나 박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었을까. 


기업의 후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다양한 방법와 대안이 제시되어야 하며 지원 금액 역시도 확대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의 방식에 있어 대학생 봉사활동 참가자를 뽑는 것을 마치 기업 채용의 방식과 유사하게, 다양한 구비서류와 면접 그리고 해외봉사 이후의 의무까지 부과해가며 관리하는 것인 진정한 '봉사활동'의 의미에 맞는 활동인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네 번째로, 대학생의 입장이다. 


날이갈수록 취업문은 좁아져 가고, 자신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은 학점이나 공인영어점수 등 한정될 수 밖에 없는 대학생들은 무엇인가 자신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결코 본인은 대학생 전부가 '필요에 의해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자발적 대학생들의 참여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그런 참여가 우리 사회의 미래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의 소외된 지역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단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대학생들- 사실은 확대되어가고 있는- 에게 있어서 '국내 봉사활동'이든 '해외봉사활동'이든 이런 활동들의 목적 자체가 변질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국내 봉사활동이든 해외봉사활동이든, 봉사활동이 가지는 숭고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 채 단지 자신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한 줄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봉사활동을 택한다면 그 봉사활동은 사실상 봉사활동이 아닌, 자신의 경력활동으로 밖에 인정받지 못한다. 취업 시 혹은 대학 입학 시 제출하는 서류에는 그 한줄이 큰 의미를 가질지는 모르겠으나 그 봉사활동으로 자신의 진정한 변화를 일으켜 내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줄'을 위한 학생들은 2주간의 봉사활동 대신 차라리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봉사활동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욱 힘들어지는 취업이나 대입 등 관문을 넘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봉사활동의 경력이 있는데, 본인만 그 경력이 없다는 것은 상대적 손해가 되지 않느냐, 그리고 그런 경력을 통해서 자신이 앞으로 어떤 업무나 학습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잇는 것이 아니냐 하는 반론이다. 


충분히 타당한 반론이라고 본다. 하지만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해외에 나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자기소개서나 이력서에 들어있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같은 봉사활동을 갔다온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두 사람이 겪은 일이나 느낀 일이 다르다면 그것은 다른 봉사활동이다. 자신이 해외봉사활동을 통해 어떤 것을 느꼈는지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갔다왔다는 사실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자신의 봉사활동 경력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고, 또 어떤 누군가는 그 경력을 통해서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적을 수도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반론에 있어서 해외봉사경험이 자신의 장기적 계획에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버리는 것이 옳다. 해외 봉사활동은 자신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봉사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앞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봉사활동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야 한다. 목적을 이루고나서 그를 통해 또 다른 목적을 이루겠다는 것은, 결국 그 이전의 목표는 수단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봉사활동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봉사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참여하는 입장에서 대학생의 입장은, 아이러니할 수도 있다. 자신이 평소 가진 생각을 가지고 해외봉사활동을 가더라도 남들이 보기에는 단지 자기소개서의 한 줄에 비춰보이는 모습일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앞날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자신은 그것이 자신이 단지 수단으로 삼은 것이 아닌, 봉사활동을 통해 더욱 나은 세계와 더욱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적의식이 뚜렷하기만 하다면, 어떤 방식이나 표현으로도 그 사람의 삶 속에 그것은 이력서 한 줄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으로 남을 것이다. 본인은 그런 대학생들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이 글은 결코 대학생의 해외봉사활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적은 글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해외봉사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지원해서 '봉사' 특히 '해외봉사'를 통해서 이 지구 위에서 가보지 못한 곳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있고 또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글을 적었다. 


해외봉사활동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선발되었다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편안한 삶을 잠시 버리고 현지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비록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가는 것이다. 이런 봉사활동의 의미를 반드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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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27 21:00  Addr  Edit/Del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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