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 혹은 까칠"
20대 이후가 되어 나를 만난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어릴 적에 꽤나 재밌는 사람이었다. (재밌는 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고, 남을 잘 웃기는 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때는 흔히 말하는 '오락부장'으로서의 복무를 충실히 했지 말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에는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닌다고 별명이 '씨산이' 였을 정도였다. (씨산이는 사투리로, 바보 같이 실실 웃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던 어린이가
20살이 넘고 머리에 뭔가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남을 웃기는 일에 주저함이 많아지게 되었다. 투철한 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 내가 웃기는 것을 즐겨 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대방이 웃을 상황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좋아하지만 편하게 하지 못하는 '장난' 이 대표적이다. 평상시에는 장난을 잘 받아주던 친구들이, 어느 날은 내 장난에 정색을 한 경우가 있었다. 그 원인은 친구가 '몸이 아파서' 일수도 있었고,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되묻지 못했고, 어느 사이엔가 분위기를 살피고 친구를 배려하다 보니 진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배웠기 때문이다. 20살 때 처음 들어온 대학의 오티를 가는 버스 안, 학생회장 형님의 오티 관련 안내를 듣고 있었다. 당시에는 어색했던 '양성 평등'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오티에 가게 되면, 여장을 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여장은 여성을 희화화하는 도구이며,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중에는 여성을 포함한 많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멸시 혹은 조롱이 담겨 있다 했다.
몰랐다.
어릴 적 내가 웃기는 현우였을 수 있었던 것이, 다른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조롱해서 웃긴 것이 아님에도 '혹시 내가 그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없지는 않았을 테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니, 그것을 알면서도 나쁜 일들을 저지른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몇 가지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뭔가 투박했다.
배운 것을 적용하고 써먹는데 있어서, (나의 표현이지만) 서울사람다워지지 않았다. '서울사람답다'라는 말은 뭔가 세련된 느낌이나 먼저 크게 배려하는 느낌의 어떤 것이지만, 나는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고집이 있었고, 배려를 너무 티나게 했다. 무언가 의도가 있는 듯 보였던 배려들은 오히려 많은 오해들을 낳았다.
언젠가 한 동생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형, 조금 더 매끈할 수 없어요? 형의 거칠거칠한 면이랑 잘 맞는 사람은 형과 친해지고 형을 더 잘 알 수 있겠지만, 형의 그 거친 면에 상처를 받는 사람도 많을 듯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 나름의 배려와 공부를 통해 얻은 어떤 것을 글이나 말로 표현할 때 그 거친 면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되려 그 거친 면이 나의 모습이라며, 세상 모든 것이 다 쉽고 편하고 별 일 없이 돌아갈 때 나 혼자라도 그렇게 거친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마치 김영랑의 시 '독을 차고'의 화자와 같은 심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외로워졌다.
몇몇의 편한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고 인정했지만, 새롭게 사귄 친구나 나의 거친 면을 원하지 않게 확인한 친구들은 그 거침을 까칠함으로 인식한 듯 했고 그렇게 멀어져갔다. 결국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배려'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배려는 없을 것이라 여겼던 나는, 사실 내 주관에 맞춰 배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타인의 몸과 마음 모두에게 어떤 '불편함'을 주고 있었다.
그럴수록 점점 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쉽게 변할 수는 없었다. 지금 적고 있는 이런 글도 마찬가지였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글을 적자니 이전에 써 오던 '나의 스타일'의 글들이 가지는 관성이 있었고, 사람을 대할 때도 이전과는 다르게 갑자기 '너의 생각은 이런 부분이 잘못되었구나~‘ 라거나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고 차근차근 설명이나 해명을 할 수 있게 되기는 쉽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고집 센 사람이 무엇인가를 잘못 배우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은 가득 남아 있고 단지 그것을 배우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나은 사회를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나의 입장으로서는 여러모로 답답한 측면이 없지 않다. ‘고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싶으면서도 또 세상이라 부르던 사회라고 부르던 복잡다단하게 돌아가는 이 곳에서 나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강변해보아도 결국 외로운 사람은 나뿐이다 싶다.
가끔 혹은 자주 나도 매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몸도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