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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05.24 혐오와 자기혐오
  2. 2016.04.18 티 없는 순수함
  3. 2015.09.01 새벽에 토해낸 토사문
2016. 5. 24. 16:59 내 생각

"혐오와 자기 혐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최근 1주일 사이 저의 SNS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었음에도 그 개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단어는 바로 '혐오'입니다.

 

혐오(嫌惡)란 보다시피 두 개의 한자가 모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싫어한다는 뜻의 ''과 미워한다는 뜻의 '', 다시 말해 싫고도 미운 어떤 대상에 대해 품는 감정입니다. 교육심리학에서는 '혐오'를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정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사람이라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고 물건이라면 부숴버리고 싶을 감정을 느끼는 대상에 대한 감정인 것입니다. 그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될 때가 있습니다.

 

최근 '혐오'라는 단어가 저의 눈과 귀에 많이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2016517일 밤 120분 경 서울 강남역 인근의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으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이 남성은 자신이 평소 여성으로부터 무시를 받아왔기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혐오 중에서도 '여성혐오'의 발현이 이번 살인사건의 큰 원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 내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적 태도와 성범죄의 가해자로서의 남성에 대한 각성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혐오의 개념은 간신히 알게되었습니다만, 여성혐오란 무엇일까요.

 

집단지성인 위키피디아에 정리된 여성혐오는, 사회학자 마이클 플러드((Michael Flood)의 말을 빌어 여성혐오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성혐오는 대부분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나, 여성들이 스스로나 다른 여성을 대할 때에도 나타난다.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와 함께, 수천년 동안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못박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권력과 의사결정에 대해 제한적인 접근만을 허락하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이념 혹은 신념체계로 기능한다. [...] 서양 문화 속의 여성은 스스로의 역할을 사회적인 희생양으로 내면화하여 왔으며, 21세기에는 멀티미디어에 의한 여성의 대상화로 인해 문화적으로 승인된 자기 혐오와 성형 수술, 거식증 및 식욕항진증(폭식증)에 대한 집착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특이한 점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혐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여성에 대한 혐오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 들어와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으로 정착되었다는 점 역시 특이합니다. 이러한 특이점은 여성혐오의 발원지가 남성 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우리 일상에서 매우 쉽게 여성혐오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합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른 견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의 시작이며 일상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앞선 '혐오'의 개념과 연결시켜 보면, '죽이고 싶은 대상'이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혐오 그리고 여성혐오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지금의 시점에서는 위험한 발상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글을 적고 있는 본인은 남성이 가진 혐오의 대상이 '여성'이 되었든, 여성이 가진 혐오의 대상이 '남성'이 되었든 또는 그 대상이 바퀴벌레가 되거나 개미가 되었든 혐오를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그 혐오의 감정을 근거로 실제 행동이 표현되었을 때는 법적 그리고 사회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혐오의 감정을 갖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혐오의 감정을 어떤 형태로든 실행한다면, 타인의 생명과 자유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성과 가능성이 있기에 제약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혐오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또 다른 인격이라면 문제는 더욱 첨예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바퀴벌레를 혐오해서 죽이는 것과 여성을 혐오해서 죽이는 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에는, 혐오의 대상이 여성이었습니다. 특정되지 않은, 20대 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의 표현은 이제 개인의 자유 영역에서 벗어나 법적-사회적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혐오 표현은 우리 사회 내에 아니, 인류의 역사 속에서 뿌리 깊게 스며 있는 여성혐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지 모릅니다.

 

긴 글이 될 듯 하지만, 저는 여성혐오를 포함한 혐오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개인의 감정으로서의 혐오와 발현된 혐오 모두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혐오의 원인은, 바로 도구화입니다.

 

도구화, 타인을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 혹은 감정입니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들은 여성을 자신의 성욕의 해소나 성공의 발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자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 역사적으로 갖고 있었던 권력들이 자신들의 삶을 더욱 나은 삶으로 만드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이며, 그러한 권력의 붕괴를 위한 수단으로서 남자를 공격이나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성과 남성 뿐만 아니라, 도구화의 대상은 자기 자신에 까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을 찾기가 힘들어진 현대에 들어와 직업을 가짐으로 인해 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자부심을 갖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회사를 위한 도구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직업적 측면 뿐만 아니라, 누군가는 부모의 꿈을 대리해 실현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서로 사랑을 하는 연인 관계에 있어서도 타인의 행복을 돕는 수단으로까지 여겨지지도 합니다.

 

이즈음 되면 사람이 도구화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춘 철학자나 사상가가 있지 않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있습니다. 그것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도구화'를 막기 위한 철학적-종교적 체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씁쓸한 것이 사람의 도구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시대를 막론하고 만연한 문제였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혐오의 원인으로서 전제한 도구화에 대해서 역사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서술했을까요.

 

칸트는 정언명령(定言命令) 중 하나로서 인간의 도구화를 일갈합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 쉽게 말해, 자신과 타인 모두를 수단화하지 말라 말하죠.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논어위령공편에 나온 표현으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 말합니다. 그 뜻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입니다. 직접적으로 도구화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듯 보이지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타인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며, 자신이 어떠한 목적을 이루고 싶지 않으면 타인 역시 그럴 것이라 상정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시키거나 수단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는 어떻게 이야기했을까요. 다소 포괄적이고 다양한 해석이 있기도 하지만 자비가 수단화를 막는 답이자 대안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단어는 혐오처럼 두 한자의 결합입니다. ()는 사랑한다, 즐거워한다는 뜻이고 비()는 슬퍼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비란,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공감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있지 말고 타인의 행복이나 슬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것은, 앞서 설명한 칸트와 공자가 언급한 맥락과 함께 합니다. 타인이 어떤 감정을 가질지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입니다. 즉 타인을 수단화하는 것입니다.

 

수단화에 대한 비판은 칸트, 공자, 부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혐오의 원인이 도구화이고, 도구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인들의 일갈을 듣는다고 우리는 혐오를 멈추게 될까요. 그렇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성에, 타인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을까요?

 

제가 제시하는 대안은 자기 혐오를 멈추자는 것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혐오한다는 것이 어색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의 생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하게 된다면 자기 밖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만들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 혐오를 불식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타인에 의해 흔들리는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을 확인하고 확보시켜 나간다면, 타인의 기준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에는 여성 뿐만 아니라 외국인, 장애인 나아가 동물 혹은 식물에게 까지 공감의 확대가 가능할지 모릅니다.

 

 

앞서 긴 글을 요약하면 이렇게 한 문장이 될 듯 합니다.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도구화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런 혐오의 근저에는 자기 혐오가 깔려 있으니 자기 혐오를 하지 않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위 요약된 문장에는 많은 맹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만의 기준을 만들고 자신을 혐오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타인들은 여전히 그 기준을 찾지 못했고, 사회-제도적으로도 차별이 남아있다면 여전히 혐오가 범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선후관계를 설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혐오를 멈추기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사회 전체적인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혐오는 감정입니다. 그것을 갖든지 말든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혐오든 타인에 대한 혐오든 혐오의 감정을 갖는 것은 자신에 대한 정신적 피해를 끼칩니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지만 혐오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생각과 감정의 악순환에 빠져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한 이런 혐오가 감정의 고삐에서 풀려나 실행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법적인 책임과 반드시 직면하게 됩니다. 우선 혐오의 감정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있어, 그 시작이 자기에 대한 혐오를 멈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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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8. 00:47 내 생각

"티 없는 순수함"

 

20대 초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고백했다. 단 한 번 만난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몇 해를 걸쳐 만난 사람에게도 그랬다.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기보다 그렇지 않으면 가슴 속 어딘가가 아팠다. 마음은 결코 물질이 아니라는 말이 거짓이라 확신했던 순간들이 이어졌다.

 

어찌 보면 고백을 남발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단 한 번의 고백에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적은 없다.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진심의 순간을 빨리 느낀 것 뿐이었다. 확신에 찼던 내 감정과 진심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버렸지만, '고백하지 말걸' 이라는 후회는 결코 들지 않았다.

 

30대가 되어, 사랑 고백에 대한 달콤한 이야기로 회상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10 여 년 전 감정들에 섞인 이물질을- 당시에는 보지 못한- 지금에서야 확실히 알아냈기 때문이다.

 

이물질.

 

그 이물질은, 내가 고백했던 대상들에 대한 무한한 이상화였다. 이 사람은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적이 없기를 바랬고 슬픈 영화를 보아도 그 슬픔이 마음에 남아있지 않기를 바랬다. 힘든 일을 마주함에 있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굳건한 마음이 언제나 있길 바랬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이물질이었다. 그리고 앞선 잘못된 생각과 함께 가장 내 마음에 큰 이물질로 남았던 것은 "내가 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아무리 깨끗한 옷을 입고 있어도, 손을 깨끗이 씻어도 나와의 관계나 감정으로 인해 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고, 그 사람의 마음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생각은 흔한 말인 자괴감과는 달랐다. ‘상처받기 싫어라는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과 동시에 나의 단점을 이 사람이 알게 되면 안되는데.’ 하는 불안함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그래서 차일 때, 안도감이 들었다.

 

누군가 또 한 명에게 상처를 주지 않게 되었다는 생각과 나 역시 상처로부터 지켜졌다는 생각이었다. 틀린 생각이었고, 이물질이었다. 이 세상 누구도 티 없는 순수함을 갖고 있거나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순수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살아오면서 겪어야했던 어려움과 느껴야했던 상처들을 품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 당연한 사실들을 품어내고 보살피고 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상처 받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그 상처를 그대로 두면서도 더욱 넓은 마음으로 상처를 작은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 실수를 저질렀던 이들은 실수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지 않으려는 고난한 노력을 해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라는 큰 틀 속에 고이 담아두었던 것이다.

 

사람을 만나 그림자를 보았다. 그 그림자의 색깔은 검지 않고 어두웠다. 새까만 것이 아니라 회색과 하얀색도 섞여보였다. 다양한 색을 띠고 있는 얼굴과 옷, 신발에 이어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지만 그림자에도 밝음은 보였고, 그림자는 있다가도 사라지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은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티 없이 순수한 사람은 없다.

 

내 결론이다. 자신의 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이왕 때가 묻었으니 더욱 때를 묻히며 살자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상처를 가졌음에도 혹은 자신의 마음이나 성격, 태도 등에 부정적인 것이 있음에도 그것 또한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어두운 면을 보이고 싶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보이게 된 어두운 면을 미안해 하지만,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자신이 결코 하찮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냥 좋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은 있다. ‘티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티 없이 사람이 되려하기 보다 티 있어도 그 티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 상대방의 티를 품어내는 사람, 더욱 많은 티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거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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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 03:12 일상다반사

2015.09.01. 


새로운 달력을 펼치는 심정이야 기대와 후회가 동시에 밀려드는 어떤 것인 줄 알면서도, 또 한 장 넘겨보게 된다. 감정이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숭고한 행위란 시간을 기다리는 것 뿐 아니겠는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이야기 속에는 그 시간 속의 부단한 사건들을 징검다리 정도로만 치부시켜 버리는 데에 반감이 들어,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 따위 지금 해결해 버리고 말겠어 라며 몽니 부려 보지만 어찌 됐든 기다리는 것은 시간 뿐인 듯 하다. 


감정이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란, 결국 감정이 없는 일이다. 음식물 쓰레기에서 흘러 나오는 침출수라도, 그것이 자신의 감정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면 반갑지 않을까 하면서도 이왕 나오는 것이라면 누구나 마시고 싶어 하는 1등급 청정수였으면 하는 바람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나오는 것이라곤 사하라 사막 위에 뿌려진, 아프리카 부족의 독특한 술 뿐이다. 이 술은 기우제를 지내는데 사용될 뿐 아니라 사막을 지키고 있는 선인장이 취하고 또 취해 여기가 사막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되는 용도로도 기능하니, 기특하지 아니한가. 아니, 사막이란 말이다. 비 한 방울 흘러 내리지 않고 물 줄기 하나 찾기 힘든 사막과 같은 감정을 지닌 인간들이, 결국 품고 가진 것은 가시 가득한 선인장 뿐인 것이다. 


오아시스가 있을 것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대지만, 그 오아시스에 담겨 있는 물이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는 알아볼 생각조차 않은 사람들. 이들을 탓하거나 힐난할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뭄! 가뭄! 가뭄의 해갈에 무엇이든 도움이 될 것을 건드려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이 두서 없는 글도 침출수 향기를 풀풀 풍기며 적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이황과 이이가 논쟁했다던, 사단칠정 까지 가지도 않을 듯 하고 스피노자는 뭐한다고 그리고 많은 감정을 분류해 놓았는지, 48가지나 되는 감정 그 중 하나라도 제대로 느껴 본 적 있다면 수원지라도 찾은 것은 아닐까 하고 기대 반 우려 반을 해보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란 가죽 안에 뼈나 내장이나 뇌나 피나 이리저리 많은 것을 진화론으로 주어 담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뇌가 하는 것이라곤 고작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믿고 싶은 합리성을 제공할 뿐, 이 아이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바에야 결국 감정 하나 믿을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오노노노, 감정이 최고다! 라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 왜 감정감정 이야기를 하는지, 좀 더 적어야 이 글이 유서가 됐든 자기소개서가 됐든 뭐라도 의미가 생기겠군.


감정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 뿐인 상황에서, 그래. 네 말이 옳아. 무조건 시간이 해결해 줄거야 라고 말하는 대신, 감정을 가져, 지금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울고 웃기면 웃어 라고 말해주는 것이 더욱 낫지 않을까. 


참는다고 참을 수 없는 것이 감정일 터인데, 우리가 배운 것이 이성은 뛰어난 것이고 감정은 숨기고 그것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따위의 비난 아닌 예의를 익혀왔던 결과일런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문제였든, 사하라 사막의 부족이 뿌린 술 냄새 말고 사막에서도 꽃 피울 수 있도록 그 씨앗이 바나나 나무든 악마의 꽃이든 뭐든 피어낼 수 있도록 그 밑에 감정의 계곡을 흐르게 할 필요가 있다. 뭐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었지. 


새로운 달력을 마주하면서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노래를 흥얼거리며 몇 일 일을 할까 생각하기 보다 그 검고 붉은 숫자들 안에 겪을 감정들을 쏘옥쏘옥 담아 보면 달력이 춤을 추고 하루가 노래를 부르고 일 년이 악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 해보았다.


어쨋든 나는 글 쓰는 연습을 좀 더 해야겠다. 누구한테 하는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독백처럼 너절이는데.. 너무 재밌어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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