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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6.05.17 옷을 파는 노파
  2. 2016.04.01 내 걱정
  3. 2015.04.12 나에게 바란다_5 (1)
  4. 2015.02.10 현우의500자_63
  5. 2013.12.02 삶, 사람, 사랑.
2016. 5. 17. 02:17 내 생각


"옷을 파는 노파"


이대역과 신촌역 사이, 나무에 옷을 걸어놓고 옷을 파는 한 노파가 있다. 옷걸이에 걸린 옷을 연신 나풀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지나가는 여대생들이나 여자들에게 옷을 권유한다. 자주 마주쳐보았지만, 남자 옷은 팔지 않는다. 옷의 질은 낡았다. 보세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헌 옷 상자에 들어있을 법한 그런 옷들이다. 하지만 그런 옷들을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들이댈 때는 사뭇 진지하다. 저런 옷이 팔릴까 정말 궁금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 옷을 사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러다 얼마 후, 집으로 가는 길에 그 노파가 보이지 않았다. 활기찬 모습으로 옷을 날개삼아 펄럭이고 있어야 할 곳에 아무도 없자 순간, 걱정이 스쳤다.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닐까. 환절기라 날씨가 아침저녁으로는 추웠고, 또 그 노파는 얇은 반팔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새로 옷을 도매상에서 혹은 헌 옷 상자에서 사오거나 꺼내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그 어떤 것도 답은 아닐지 모른다. 그저, 하루가 고단해 그날은 쉬고 싶었을지도.


나는 아마 다시 그 길을 지나겠지만, 그 노파가 파는 옷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 옷을 팔고 있는 그 모습을 반가워는 하겠지만, 내가 입지도 않을 옷을 사 그 노파에게 동정심이 들었다는 것을 표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정심이 든 마음이란, 그 노파가 가진 가난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아무도 옷을 사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데에 대한 동정이지, 다른 동정은 가진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노파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또 그것을 자신의 생계 수단으로 삼는데 있어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함을 배웠다.


무엇보다 계절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꾸준하게 있는 그 모습이 멋져보이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간혹 다른 사람들과 또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나, 편견에 대해서 쉽게 판정짓고 편한대로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는 답은 없다. 성공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꿈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사회적이나 금전적 성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열정이 없다느니 젊은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느니 하는 말도 필요 없다. 꿈을 가지지 않아 되는대로 산다는 사람에게도 비난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사는 방식이 다른 것 뿐이고 주어진 삶에 대한 태도가 다를 뿐이다.


이대-신촌 거리의 한 노파는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살 것이다. 옷이 많이 팔리면 좋겠지만, 그러지는 않을 듯 하고, 노파가 그것을 깨달으면 자신이 스스로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찾을 것이다.


그러면 되지 않을까.


노파도,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언젠가 깨달을 수도 있는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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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 17:00 내 생각
"내 걱정"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아무런 미사여구도 없는 저 문장은 읽는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닮아있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것은, 어떤 불행을 말하는 것일까.

다시 읽어보면 설핏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요즘과 같이 행복한 가정이나 불행한 가정 모두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또는 불행한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여러 도구들이 있는 시대에는 말이다.

행복한 가정의 닮은 모습이란 아래와 같지 않을까.

자녀와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자하기까지 한 부모. 각자의 공간이 있는 충분한 넓이의 집. 여름과 겨울에 떠나는 휴가. 건강하고 자신의 삶을 관조할 줄 아는 할아버지, 할머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꿈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자녀 혹은 꿈을 찾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활기차게 하고 있는 자녀. 끊어지지 않는 가족 간의 웃음과 대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그리기란 참으로 쉽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의 마음 속에 어떤 이상처럼 그 모습이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이란, 결코.

상상하기 조차 싫다.

하지만 그 상상 속의 어떤 일이나 사건들은 각자의 의지와 다르게 일어난다. 또 누군가는 지금도 그 불행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소모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살고 있다.

행복한 가정에서도 불행한 사건들은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각 가정에는 다르게 나타난다.

아마도.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의 차이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이나 경제력의 상실, 삶에의 의지 박약 등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함에도 그것을 가족이 같이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닐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이 아닌 한 개인이라 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접하고 해결함에 있어 그것을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감히 '행복'한 상황이라 불러도 될 듯 하다.

고등학교 시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이 있었다.

"너희는 그냥 너희 앞날을 위해서 공부만 하면 되는데, 왜 공부를 하지 않니?"

선생님들의 이런 말들을 듣다보면, 한편으로 참 다행이다 싶고 또 한 편으로는 어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다행이다' 싶은 것은, 나에게 저런 말을 하고 있는 선생님이 어릴 적 자기 걱정만 할 수 있었던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소위 말하는' 안정감 있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선생님이 되었다는 것에 다행이라 느꼈다. 또 한 편 느끼는 것, 어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질문이 드는 이유는, 나보다 최소 10년 이상을 더 산 사람들이 그 사이에 타인의 -그것이 비록 학생일지라도- 고민이나 고통에 대해서 저다지도 공감을 할 수 없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어른이면 누구나 다양한 경험과 식견을 통해 이해심이 넓을 것이라 여겼던 내가 '어렸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네 걱정만 해라.'

라는 말에는, 결국 부모의 배려와 학교를 포함한 사회의 노력이 필요한 듯 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고민하고 걱정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릴 적에는 부모의 배려가 필요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사회가 갖추고 있는 제도나 시스템이 필요하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뉴스 한 꼭지나 신문 한 장만 들추어보아도 불운한 사건을 당한 사람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끝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말문이 막힌다.

부모의 배려가 무엇인지, 사회의 제도나 시스템이 어떤 구조인지는 모르겠다.

부모가 된 사람도-부모가 될 사람도- 제대로 알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각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과 가치가 부딪히는 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을 위한 어떤 제도가 필요한지가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는 결국 '배 부르고 등 따뜻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조건만을 제시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내 걱정만 하고 싶다. 길게 적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내 걱정만 하고 싶다. 내 행복을 위한 걱정과 고민과 탐색과 시도를 하고 싶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 역시도 행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내가 되고 싶다.

그런 사회를 바란다는 것 만으로도, 톨스토이의 저 위대한 한 문장.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문장에 대해 "톨스토이 할아버지, 틀렸습니다. 훗!" 하고 콧방귀를 뀌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내 걱정만 하고 싶다. 나만 내 걱정을 하는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걱정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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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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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2. 01:32 내 생각

"오늘도 한 걸음을 열심히 걸었다."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이면 자신이 하는 공부나 향후 합격 이후의 삶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나누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신림동에서 만난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험 공부를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그 시험에 합격한 사람인 양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 합격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상상하고 기대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자기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좋은 태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합격이라는 지상명제를 얻기 이전까지 고시생은 고시생에 불과합니다. 고시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곧 구성원이 될 것이라 믿는 정부나 법조계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은 오히려 공부할 때에 가져야 하는 비판의식이나 문제의식을 쉽게 잠식해 버리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위험성 뿐만 아니라, 만약 자신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을 경우 가질 수 밖에 없는 박탈감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주변 고시생들의 합격 소식을 듣기라도 한다면 축하의 마음보다, 자책과 후회의 마음이 더욱 크게 들기 마련입니다.

과연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만 그럴까요?

최근에는 취업을 준비하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가야겠다, 마음 먹은 순간부터 자신은 이미 대기업에 속한 사람이 된 양 행동합니다. 예비창업자들 역시도 창업을 위한 준비도 채 하기도 전에 창업 이후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를 낙관적으로 예상합니다.

취업 준비생, 예비창업자 역시 취업과 창업 전 가장 필요한 생각들(예를 들면, 이 직업과 자신의 가치관이 부합하는지, 이 사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은 쉽게 무시하게 됩니다.

고시든, 취업이든, 창업이든 무엇 하나 쉽지 않다 보니 준비하는 시점에서 요구되는 생각들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나친 몰입은 합격을 한 이우에는 오히려 가질 수 없는, 자신만의 색깔이나 생각 정립의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있으니 경계해주길 바라는 마음만은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대감과 실망감의 간극에서 느낄 수 있는 자기 훼손입니다. 준비를 하는 순간부터 이미 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패를 하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원하는 것은 남도 원합니다. 고시든, 취업-창업이든 다른 모든 분야에서든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준비한다는 것 만으로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은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과도한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다는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언제나 실망은 기대보다 더욱 크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실망 이후에 찾아오는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자기 훼손입니다.

실패의 원인이 자기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어제의 휴식으로 인한 나태함, 또 때론 신이 자신에게 준 시련과 고난이라며 자기 자신을 한 없이 낮고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훼손은 오히려 나을지 모릅니다. 앞서 말한 자기 훼손은 협의(狹意)의 자기 훼손입니다. 광의(廣意)의 자기 훼손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가족의 경제 상황이나 주변 친구들의 방황, 연인의 존재 등)까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전가시키게 됩니다.

협의든, 광의든 자기 훼손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자신이 가졌던 과도한 기대 심리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시나 취업-창업 뿐만 아니라 연인 관계의 파탄의 주요 원인이 되는 '네가 그런 사람일지 몰랐어'라는 표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기 훼손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기대감을 낮추면 됩니다. 기대감을 낮춘다는 것은, 시험 합격 이후나 취업 이후, 창업 대박 이후에 대한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낙관적인 기대를 유지하되 당장 그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루 아침에 삶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은, 사고나 생사(生死) 밖에 없습니다.

먼 미래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철저한 준비를 해야합니다.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의 기대란, 자신이 오늘 이룰 수 있는 목표치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소 책을 하루 7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오늘은 책을 10 페이지 읽겠다는 목표를 잡고 그것을 이루고 난 뒤의 기대를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이고, 취업, 창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고 그 단계는 꽤나 사소한 목표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큰 기대를 한 번에 잃었을 때 느끼는 실망감을 느끼기 보다, 작은 기대를 조금씩 쌓아가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는 사랑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투덜대고 잘 챙겨주지도 않던 사람이, 한 번의 큰 이벤트를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과거의 모든 잘못이나 섭섭함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 연인에 대한 사소하지지만 소중한 기대들을 쌓아나가는 과정에서 큰 기대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기나긴 다툼 끝의 다이아몬드 보다 오랫동안 주고 받은 따뜻한 편지 끝에 금 반지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기대는 자기도 모르게 커져만 갑니다. 겉잡을 수 없이 커진 기대감이 자신의 삶을 더욱 가치있게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근거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근거들은 이루어졌을 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실패의 가능성이 '0'이라 단언할 수 없는 상황들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예상해 기대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실패할래야 할 수 없는, 또는 실패를 하더라도 충분히 수긍가능한 기대를 조금씩 하며 쌓아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제의 밥 한 끼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처럼, 조금씩 꾸준히 기대를 채워나가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자기 훼손을 막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태도입니다.

한 걸음입니다.

높은 산을 오르든, 고시를 공부하든, 취업이나 창업을 준비하든 그것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기대는 결과의 산물(産物)이 아니라 과정의 산물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기대에 대한 성취로 삼으세요.

기대를 버리지 말되 기대의 단계를 나누어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기대에 대한 노력을 다하길, 로마가 하루에 완성되지 않았듯 우리네 삶도, 꿈도, 사랑도 역시 그럴 것이기에 꾸준히 노력하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만이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생각들을 너무 쉽게 '성취' 이후 자신의 모습에 몰입하여 놓치지 말기를, 자기 훼손을 야기할 수 있는 지나친 기대감을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으로 삼지 말길, ‪#‎나에게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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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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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망망 2016.03.07 23:06  Addr  Edit/Del  Reply

    좋은글잘읽었습니다~정말많이깨닫고갑니다.

2015. 2. 10. 20:19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63


슬픔을 동정할 자격 따위 없다. 그렇다고 행복을 가져야만 한다는 값싼 권리도 물론 없다. 마음대로 저 사람은 불행할 것이고 슬플 것이라는, 그런 식의 선입견을 갖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슬픔이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다. 성인 남자의 상체만한 박스를 들고 오는 한 명의 남자를 보았다. 해에 그을린 것인지, 자신을 숨기려는 것인지 온통 검은 옷에 검은 신발이다. 상자만이 자신은 원래 나무였다는 듯, 연한 갈색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위의 얼굴이 있다. 상자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생각해 순간 아래를 보았다. 신발이다. 상자가 트위스트를 추는 것은 신발 때문이다. 아니, 신발이 아니라 다리 때문이다. 다리 길이가 다른 아저씨가 그 길이를 맞추기 위해 한 쪽 신발에는 높은 굽을 댔다. 낮은 굽과 높은 굽이 번갈아 움직여가며 아저씨의 삶을 운행해 나갔다. 내가 본 것은, 나무였던 것과 추운 바람에 나무결이 되어가는 얼굴과 그리고 신발. 신발 위의 삶, 딱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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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TAG 나무, ,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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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 01:23 카테고리 없음

삶, 사랑, 사랑. 2013.12.2. 


과거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정해놓은 시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 '나이'를 만들었고, 나이는 사람의 관계를 만들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같은 나이의 사람일 수 있으며 같은 나이라 할지라도 다른 달, 다른 날에 태어난 사람도 있다. 태어나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이 '나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만, 그때부터 그 사람의 삶이 시작한다는데 있어 그 차이는 꽤 크다고 할 수 있다. 


'삶'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살펴본 일이 있다. 삶이라.. 삶은 다르게 표현하면 '인생'이라 표현할 수 있는데, 인생이라는 한자어 역시도 참으로 '나이'와 많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 즉 사람이 '생' 태어났다는 뜻의 인생은, 태어나고 난 뒤의 시간이 삶이 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개나 소나 악어에게 '인생'이라는 명사를 허락하지 않으며 '삶'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표현은 쓰지 않는다. 그들 역시도 그들이 부모가 생을 선물해주었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으나 그들이 앞으로 향유하게 될 자유와 선택의 폭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매우 좁을 수 밖에 없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매일 또 다른 생물을 파괴하거나 흡수하거나 또는 파괴되거나 흡수당해버리는 선택은 그다지 로맨틱해보지이 않는다. 


반면, 사람은 그 선택에 있어 꽤나 넓은 선택의 폭을 지닌다. 가끔은 그 선택의 폭이 너무나 넓어 몇몇 사람은 동물에게 주어진 '파괴'의 권리를 스스로에게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 선택은 어찌보면 '진화론'의 유산이자 인류 자체의 숭고함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많은 선택을 지닌 사람인 만큼 그 결과 역시 다양하다. 태어나 바로 죽는 갓난 아이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거나 또는 강압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들의 죽음은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의 선택은 '존재하기로 함'이라는 가장 숭고한 것이 된다. 태어났으니 죽는다는 매우 간명한 논리가 그가 선택한 유일한 것이다. 태중에서 죽는 수많은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그 죽음은 '인간'으로서의 선택을 증명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부모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삶이라.. 결국 이 삶은 '사람'의 줄임말이 아닐까 한다. 동물이나 식물은 가지지 못한 삶. 사람을 빠르게 발음하다보면 '삶'이라고 발음하게 되는데 그 발음 사이의 시간이 우리가 선택을 하게 되는 짧은 순간이 아닐까 한다.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빠른 시간. 그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시간이다. 


삶과 사람은, 같이 흐른다. 바람이 흐르는데 구름이 흐르지 않듯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삶이 흐르지 않을 수 없다. 가끔은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고 가뭄이 들기도 하지만 바람과 구름은 결국 한데서 어울려 있다. 삶과 사람 역시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삶이라고 한다면, 이 삶은 그 사이 어려운 결정을 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치기도 하며 또 어떤 날은 너무나 쾌청한 날씨에서 쑥쑥 자라나기도 한다. 삶의 구성인 사람이 그 혜택과 시련, 고난을 다 받아들이고 있음은 더할 나위가 없다. 


삶이라, 사람이라.. 제목에서 적었듯이 한 단어가 또 떠오른다. '사랑' 


이 주제가 없었더라면 시나 소설, 영화 그 어떤 문화 매체나 인문학의 상징이 사라졌을지 생각해보면 암담하다. 마치 인간은 사랑이라는 유전을 물려받는 것처럼, 유전자에 각인된 그 어떤 감정인 사랑을 우리는 삶과 사람과 함께 연결지어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여러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주저 없이 사랑이라 대답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핑크' 향기를 지울 수는 없으나, 그런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 어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혹은 가족 중 한 명을 강 건너로 보내준 사람에게는 사랑은 가슴 저린 일일 수 있다.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자신과 타인과의 사랑, 사람과 동물간의 사랑, 사람과 외부 환경간의 사랑,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 간의 사랑도 있을 수 있으며, 사랑과 사랑간의 사랑 역시 있을 수 있다. 동물이나 식물간의 사랑은 그들의 생존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사랑과 사랑간의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쉽게 이야기하여 연대라 할 수 있다.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같이 살아간다는 느낌만으로, 또 그 사람을 누군가 사랑하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정도로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학살'을 증오하며, 억압을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은 그만큼 다양하기에 쉽게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은 필수 요소이다. '사랑을 하라' 따위의 표현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할 필요는 없다. 어떤 대상이 있는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최우선의 사랑 표현이다. 우리는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의사표현이나 감정 표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자신은 사랑할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하여,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은 옛 중국 철학자들이 즐겨쓰던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이 확대된다면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이어닐 것이라 그들은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한계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여력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우리에게 '삶'은 노력해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은 어떤 조건이 조건으로 따라오게 되고,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드라마나 영화 속의 어떤 모습으로 밖에 그려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 조차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의심하곤 한다. 


삶, 사람, 사랑.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의 단어이다. 어느 한 단어가 다른 단어를 포괄하지도 못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 말은 결국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일 지도 모른다. 


생각나서 적어보았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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