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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11.29 멈추어 있다기보다 뒤로 가는 느낌
  2. 2014.11.20 인류 역사 진보와 장애인
  3. 2014.06.01 두 가지 단상.
2016. 11. 29. 00:24 내 생각

멈추어 있다기보다 뒤로 가는 느낌” 20161128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역에 들어선다. 평소와 다른 점이란 하나도 없다. 누군가는 무엇인가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찾을 것이며, 역까지 걸어오는 사이 누군가 나에게 보낸 메시지는 없는지 찾기도 할 시간. 스마트폰으로 무엇인가를 보는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만날 것이며,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 신경도 쓰지 않을 그 시간으로 들어가는 평소와는 다를 것 없는 일상.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 아니어도 괜찮다. 백화점이든 대형마트든 그것이 있었던 어느 곳이면 어디든지,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 보았을 일상적이면서 평소와는 다르지 않는 그 시간에 그것이 고장이 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에스컬레이터. 때에 따라서는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무빙워크(moving walk)라고 해도 될 것이다.

 

지난 번에 왔을 때까지도, 아니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나 있다. 내려가는 길이 그것을 타고 지나가는 것 뿐이기도 하고 고장난 게 대수냐 싶기도 해서 멈춰선 에스컬레이터 위에 한 발자국 올려놓으면, 기분이 묘하다.

 

항상 눈으로 인식하고 몸으로 확인하며 움직인다거나 내려간다거나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 멈추어 서 있을 때, 몸과 마음이 느끼는 그 느낌. 쉽게 표현할 수는 없다. 내 발로 걷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왠지 조금 뒤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특별한 일 없는 걸음걸이임에도 걸을 때 마다 요상한 전율을 느껴가며 걷다가, 멈춰선 에스컬레이터의 중간 즈음에 이르러서는 어느새 익숙해져있다. 마치 그것이 원래 처음부터 계단이었던 것처럼.

 

고장이 난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 고치면 다시 에스컬레이터는 원래처럼 사람들을 아래로 위로 실어 나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멈추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다시 그것이 제대로 동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시 그것이 움직이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 예전처럼 그것을 타고 어딘가로 향해 움직일 것이다.

 

정치적인 용어라는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인류는 진보해왔다. 불과 100년 전과 지금의 삶은 얼마나 다른가. 1000년 전과는 또 얼마나 다른가. 오랜 시간이 아니어도 괜찮다. 10년 전에는 스마트폰이 없었고, 20년 전에 인터넷이 우리의 삶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과 비교해보면 옛날이라고 부를 정도의 과거.

 

지금까지 인류는,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진보를 거듭하며 자유를 확대하여 왔다. 기술이 그럴 것이고 예술이 그럴 것이고, 나아가 정치가 그럴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당일(20161128), 한국이라는 반도국가에서는 새로운 국정 역사교과서에 집필진으로 참여한 교수 및 교사의 명단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지금의 국정교과서재편찬이 있기 전, 국정교과서였던 역사교과서가 정부가 검정하고 인정하는 교과서로 변경된 적이 있었다. 학교마다 자율적으로 검인정 역사교과서 중에서 선택을 하여 역사를 가르치던 때를 끝내고 다시, 국가가 일률적으로 편찬한 역사교과서를 사용토록 하고자 한지 1. 그 결과물이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멈추어 있다기보다 뒤로 가는 느낌이다. 과거에도 국정 역사교과서로 사용한 적이 있으니, 다시 국정교과서 체제로 가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하는 반론은, 인류의 자유 확대와 사상적 진취성의 발전을 멈추자 주장하는 것이다. 국정교과서를 채택하자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너무 방종하게 나아가고 있으니 멈추자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것은 뒤로 가는 것이다. 느낌만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뒤로 간다고 느낄 정도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가 확대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느껴오며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채 해결되지 않은 불평등과 부조리 등이 있지만, 성공했던 사례들을 기억하고 나아지려는, 나아가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이런 욕망들이 모여 자유와 민주주의의 향연을 준비하고, 예비해왔던 것이다. 이미 이룬 성취들을 지키고, 획득하지 못한 권리를 얻고 다하지 못한 의무들을 다할 마음가짐을 갖춰왔던 것이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훼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길게 논할 것은 되지 못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현대인이라면 신문을 펼치거나 뉴스를 틀어볼 것이며, 미래의 사람이라면 20164분기의 사료를 살펴보길 바란다. 이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멈추어 있었던지를. 그리고 결코 그것은 멈추어있는 것이 아니라 뒤처지고 복고(復古)적인 것이었던지를.

 

멈춰선 에스컬레이터. 그 위를 걸을 때의 묘한 느낌은 일시적일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다시피 반쯤 내려왔을 때 다시 그것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래서는 안된다. 익숙해질 것은, 지구가 멈추지 않고 돌고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유는 확대되어야 하고 권리와 의무는 정의로운 절차를 거쳐 획득되고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가 멈추면 모든 인류가 죽듯이,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손에 쥐도록 한 민주주의의 역사 앞에 멈출 수는 없다.

 

에스컬레이터가 멈추어 있다면, 그 위를 한 번 걸어보면 이 글이 이해가 더욱 잘될지도 모르겠다. 현대인이여, 그리고 지금을 역사로 만든 현대인들의 후손 미래인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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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0. 23:18 내 생각

인류 역사 진보와 장애인 2014.11.20. 


나는 인류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이다. 그 인류 역사 진보의 핵심은 기술 발전도 아닌, 우주 탐험도 아닌 인간 개인개인의 가치를 높였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도 '노예'가 있었다. 노예라는 표현보다는 노비 혹은 머슴이라는 표현이 익숙하지만 그들의 처지는 노예였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살지 못했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했으며, 자녀의 출생은 '재산 증식'으로 간주되었다. 제1차 갑오개혁(1894년)에 이르러서야 공사 노비제를 없애는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주인집에 '자발적으로' 남아 자유로인 노비를 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 남자 노비는 머슴으로라도 불렸지만 여자 노비의 경우는 그 이름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여자 노비의 경우에는 주인의 성폭행과 성추행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어미가 노비인 경우에는 남편의 지위에 관계 없이 노비 지위를 물려주는, 말 그대로 노비 생산 공장으로 밖에 대접받지 못했다. 
광복을 맞이한 이후, 각 개인의 권리가 중요 시 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연합국들로부터 받아들였지만 막상 나아지지는 못했다. 알다시피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손을 잡고 들어왔고, 민주주의는 광복 이후 몇몇 독재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인간 개개인의 가치를 높여가는 인류 진보의 역사 속에 간과하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 지에 따라 그 국가의 선진성을 척도로 삼는다면 적절한 기준이 될 듯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장애 역시 비용이 문제로 밖에 치환되지 않는다. 낙태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고, 태어난 이들에 대해서 당연히 '불행할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어제 내가 올린 아이디어는 '시각장애인이 버스를 더욱 편하게 탈 수 있도록 하자'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이 아이디어를 들은 한 친구는 "장애인은 안내견이나 자원봉사자가 있지 않냐."라는 질문을 내게 했다. 물론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학적인 논리 뿐만 아니라 사람이 가진 '선의'를 베풀 수 있다는 점에서 성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매번 그 도움을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받을 수도 없고 또 줄 수도 없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장애 제도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려가는 것이다. 도움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는 부분들을 혼자 해결해나가면서 사람은 성장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한다. 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논의에서 벗어나 누구에게나 통용된다. 
시각장애인이 버스를 탈지 택시를 탈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지에 대해서 선택권을 넓혀나가야 그 장애인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권리도 아닌, 의무도 아닌 한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장애를 갖고 있다 해서 혜택이라 생각해서도 또 혜택을 준다고 생각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지금 인도 위에 서 있다면 가운데 노란 보도블럭이 보이는가. 그 보도 블럭은 시각장애인이 길을 혼자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지금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면 '저상 버스'라는 이름의 버스가 혹시 서 있는가. 그 버스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버스다. 지하철 역에 있다면 휠체어 리프트를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들 역시 장애인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인류 역사의 진보는, 노비 상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극적인 사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역시도 제도로서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그 내용에 대한 학습과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허황된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인류 역사의 진보, 자유주의의 적용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장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잣대가 장애인에 대한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왜 집 밖에 나와서 난리야?' 라던지 '누군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길에서 장애인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소한 것들이라도 장애인들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려 나가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 그에 대해 도움을 주어야 함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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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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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 16:27 카테고리 없음

두 가지 단상. 2014.06.01


(아래 글은 어제 새벽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폰으로 적은 뒤 '게시'를 눌렀건만 사라져 버린 글을 다시 정리하여 적는 글입니다ㅠㅠ 아닌 새벽에 멘붕..ㅎㅎ)

# 1
어제의 공연은 몇 가지 생각을 저에게 남겼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글로 옮기고자 합니다. 
공연의 시작 시간은 저녁 6시였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만큼 해는 길어질 만큼 길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오후 6시라 하여도 하늘은 밝았습니다. 일찍이 제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고 또 이미 자리에 착석해 있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얼굴을 갖고 있고 어떤 옷을 입었고 무엇을 읽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이 있었지만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알아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공연은 약 6시 반 정도에 시작했습니다. 공연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는 저물었고 어둠은 밀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학교 측에서 나눠준 형광봉을 하나 둘씩 꺼내어 들었습니다. 밤이 완연히 깊었고 사람들이 들고 있는 형광봉의 물결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는 개별 사람의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굴과 옷 그리고 누구와 왔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자 얼굴과 옷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흔들리는 형광봉만이 보였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만이 보였습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어두워지자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서 있었다고 해도 사람이었습니다. 어두움은 개별성을 매몰시켜 버렸습니다. 대신 보편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낮은 우리에게 각자의 차이를 드러내 주었지만 밤은 그 차이를 무시하고 단지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인권이나 '인류의 진보' 등은 개별 주체의 노력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이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듯 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죄로 지금도 어디선가 간을 독수리들에게 쪼아 먹히고 있습니다. 불이 가져다 준 것은 낮과 같은 밤입니다. 밤이 되어도 사람들은 낮에 보는 것과 같이 개별적 주체로 다른 사람을 인식합니다. 오히려 더욱 밝게, 더욱 선명하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하고 구별하고 구분짓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우리에게 문명을 가져다 주었지만 가끔은 그 불을 숨겨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종교와 인종, 외모와 장애 등은 낮이 우리에게 준 기준들입니다. 밤이 되면 고고히 흐르는 인류의 파도 속에 들어갑니다. 개별적 주체가 강조되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인권과 인류 그리고 그것을 신장하기 위한 노력들은 밤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아침이 되고 낮이 밝겠지만 밤은 우리에게 어둠을 선물해 '인류 보편의 평등'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저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어둠 속의 사람을 보는 것 그리고 그들이 흔드는 형광봉의 흐름을 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잊고 지냈던 사람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 2 
대학원에 들어오고 난 뒤 신기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같은 시간에 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종종 일어나기도 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좋은 점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그 대안 제시나 수단 확보 등에 다른 측면이 있을 때 방향을 잡기 쉽습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갖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점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경우 창의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기존의 형식을 깨는 신(新) 사고의 등장을 막을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쁜 점 역시도 공통으로 흐르는 생각의 기준이 있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기도 합니다. 
바야흐르 선거의 계절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가끔 우려되는 것은 너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만이 진실이라며, 그것을 생각의 기준으로 세울 때가 있습니다. 가령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인 '자유민주주의'가 그렇습니다. '자유'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공유, 기준의 설정이 명확히 이뤄지지 않으면 대안은 제시되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 그 기준에 대한 토론을 하기에는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여러 가지 공약들을 많은 사람들이 쏟아냅니다. 가끔 상반된 내용들의 공약들이 한 후보의 공약집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또 어느 일방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인 양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문제의 원인이 '서로 공유하는 생각의 기준'이나 '가치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기준은 '시민의 행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막연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전에 많은 정치적 실험들을 통해 어떤 방향이 옳은 방향인지에 대한 검증 역시 어느 정도 완료되어 있다고도 봅니다.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을 각 후보가 잘 인식하고 있다면 어느 후보가 되든 큰 상관은 없어보입니다. 행복을 '지금 당장' 실현할 것인지 '몇 년 뒤에' 실현할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그 기준이 형성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같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떤 기준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그로부터 대안을 찾고자 하는 행위는 선호되지 않습니다. 시민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기준과 정치인이 갖고 있는 기준이 다를 경우 정치는 삶과 괴리됩니다. 같은 생각의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수단과 대안을 제시할 때 좋은 사회가 형성되고 그 방향성도 가질 수 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같더라도 구체적인 방안과 실행 방법은 무수히 다를 수 있습니다. 최근의 한국 정치를 보면 그 생각 자체가 달라 무의미한 것들로 논쟁하고 비난하는 듯한 모습들을 봅니다. 지켜야 할 가치, 즉 '시민의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사회적 토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p.s 여기서 '시민'이라는 표현은 '서울시'의 시민이 아닌 자발적이며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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