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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2015년 3월 11일

2015년 3월 11일 - 2014.03.11. 


오늘은 일본에서 쓰나미가 일어난 지 4년이 되는 날이다. 그와 더불어 나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 날이기도 하다. 형의 큰 아들, 즉 나의 조카의 생일이다. 불교적 전통을 가진 우리 가족은 음력 생일을 쇠지만, 나는 큰 조카의 생일을 양력으로 기억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이 일으킨 천재지변으로 죽은 날, 우리집은 새로운 가족을 맞이했다. 그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4년 전에 일본 열도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죄를 지은 것이 없다. 죽은 이들 중에 범죄자나 살인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그런 죽음을 당해야만 하는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죄를 짓지 않았지만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부모의 사랑 덕에 태어난 조카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삶이란 죽음을 담보하는 과정 중 하나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으며, 사는 그 순간부터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다만, 선택할 수 있도록 삶을 운영할 뿐이다. 자살을 꿈꾸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부러 자신의 목숨을 내맡긴 곳에서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기대하고 있지 않는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태어나 사랑하는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평화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죽기를 바라는 것, 이것은 문명이 이룩해낸 성과이다. 불과 물을 다룰 수 없었던 시기, 많은 인류의 원조들은 야생 동물들의 먹이감이 되는 불상사를 당했거나 치수(治水)에 실패한 탓에 여름이면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야만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가치가, 일반화되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최소의 단위가 가족(최근에는 개인이 되고 있긴 하지만)이다. 삶과 죽음이란 결국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우리 인류는, 가족과 괴리된-사랑과 괴리된 탄생과 죽음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2011311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날이다. 그들이 그런 상황에 빠졌던 것은, 단지 자연재해가 일어날 곳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조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그것 뿐이다. 삶과 죽음이란 어찌 보면 운, 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누구의 아들딸로 태어날 것인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운의 한 측면을 갖고 있다면, 죽음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 관리나 인생을 통해 운영되어온 삶의 원리가 타락이 아니라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더이상 현대는 죽음조차도 운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할 듯하다. 어떤 죽음을 구할 것인지에 대해서 선택의 권리는 박탈되었다. 박탈된 선택권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그 권리를 찾아오겠다 의지를 불지르게 만들었다. 자살이 그 하나의 방법이며, 안락사 역시도 같은 맥락에서 되짚어 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진실이, 지구가 자신을 지키는 원리라 하여도, 이미 생겨버린 측은지심, 가족의 사랑 속에서의 탄생과 죽음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사례가 아니라 한국의 사례만 하여도 무수한 사례를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 죽음에 대한 측은지심이 정치에 의해 훼손되고 정치화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훼손된 측은성은, 그것을 없애고자 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더욱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사랑이라는 가치에 눈을 떠 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있어서든, 국가가 해야할 일은 국민 개개인이 그 가족의 사랑 속에서 태어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보호막을 쳐 주어야 할 것이며, 또한 그 개개개인이 고통 속이 아니라 사랑 속에서 얼굴에 흰 천을 덮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데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데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일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나, 객사하는 사람을 두고 앞뒤없이 너의 책임이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충생신고와 사망신고를 받는 행정의 원칙과 젊은이들의 젊음을 담보로 내맡겨진 안보의 원리 역시 '가족의 사랑 안에서의 탄생과 죽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만나지 못하는 이를 위한 보호이며, 단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이의 수를 최소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다. 2011311일 일본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그 날 나의 조카가 태어났다.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은 416일의 세월호 사건 당일 어딘가의 나라, 어딘가의 가족 안에서는 새로운 사람이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차가운 철제 배 안에서 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누구나 사람을 죽는다. 그러니 죽음을 인정하라 따위의 말은 더이상 이 지구 상 위의 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311일의 일본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416일을 기억해야 하고, 그 유가족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누구나 죽지만 그 죽음이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할 수 있었던 불상사에 대해서 국민이 권력을 이양해 가며 많은 돈과 힘을 싣어준 국가라는, 추상적 존재에 대한 역할을 다시 한 번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 사랑 안에서의 탄생과 죽음은 인권 진보의 산물이 아니라, 선사 시대에는 가지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삶의 운영 원리 중 하나이며, 그것을 최근에 들어서야 이룩해낸 성과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빌어, 선택한 죽음이 아닌 '뒤집어 씌어진 죽음'을 맞이한 모든 이에 대한 애도와 함께, 그런 와중에도 가족의 일원이 된 우리 조카를 비롯한 모든 새로운 존재들에 대한 환영과 함께, 각자가 살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 과연 요구하는 것들이 무리한 것들인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은 생각을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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