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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30. 18:21 내 생각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처음 아동양육시설(고아원)이 공익근무요원으로서의 근무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으레 동사무소나 시청에서처럼 공익 같은 공익(?)의 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잡무를 하거나 개인적 시간이 많은 그런 공익생활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동들의 학습 지도, 병원에 차로 데려다 주는 것, 식자재 구입에서 부터 증개축을 할 때에는 건설현장 인부 같은 일까지 하였고 소집 해제 직전 몇 개월 동안은 요리를 담당해 직접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일이 힘들었겠다 싶겠지만 사실 가장 힘든 것은, 아동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 부모가 어디에 사는지 알지만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맡겨진 아이들 등 살아오면서 직접적으로 마주할 기회가 적었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해 아침에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고 나가는 일은 스스로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다.


지금도 고향에 추석이나 설날에 내려가게 되면, 아이들을 위한 사탕을 꼭 두 봉지 씩 사고 또 사회복지사와 직원분들을 위해 박카스를 한 박스 사서 들른다. 공익을 마친지 10년이 되어가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아 그러고 있다. 제일 최근에 방문했을 때는 살짝 충격도 받았다. 내가 공익근무를 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을 간 아이도 있었고, 취업을 한 아이 그리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그곳에서 일을 할 예정이라는 아이도 있었다. 시간이 그렇기 흘렀구나 싶으면서도 이 아이들이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 부모의 재산 여부에 따라 계급이 나눠진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회 내에서 이 아이들은 어떤 수저, 아니 수저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이런 시설을 나온 아동들이 자신들의 재정관리 및 경제에 관한 교육이나 조언을 받지 못해 힘들어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돈을 가져본 적이 없고 또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모른다는 어려움에 빠진 시설 출신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작은 결론을 내렸다.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시설출신들에게 경제 교육 뿐만 아니라 재무관리를 도와주고 장기적인 계획을 이뤄나가는데 가족 같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돈을 단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해주고 또 일자리나 복지 등에 대한 관리 및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회적 기업. 이런 회사가 벌써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없다면 지금이라도 만들어 재무관리 전문가와 사회복지 전문가 등으로부터 시설출신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실제로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만드는지는 슬프게도 잘 모르겠다. 생각만큼 쉽진 않겠지만, 왜 지금에 와서야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됐는지 스스로가 미울 지경이다.


공익근무를 하며 이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다시 대학에 가서 고시에 합격해서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전부 진행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계획이 실패했다고 해서 아이들의 삶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단지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로서 함께 그들의 경제적 삶에 도움이 되는 가족이 되어주고 싶다.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나는 요즘 공부를 하다가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사회적기업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산다. 답 알고 계신 분은 연락주시면 산타가 선물을 주실지도.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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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4. 02:48 카테고리 없음

자기 고백일지도.  2014.10.24. 


사실 난 '꿈'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막연하게만 느껴졌고 누군가 억지로 심어주어 가지게 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라는 것이 그다지 아름답거나 찬란한 '꿈'처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직업적' 꿈은 정해놓아 누군가 나에게 '넌 꿈이 뭐니?'라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꿈을 이야기하곤 했기에 나에게 '꿈'은 가지지 못한 사람이 칭얼대는 어리광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2년 동안 내가 1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외쳐오던 외교관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한 외무고시 도전이 실패로 끝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면, 큰 바다로 나가 범고래를 잡고자 출항했던 배가 큰 바다에 도달했을 때 들려온 소식이 '범고래는 사라졌다' 는 식의 상황처럼 말이다. 이미 바다에 나와 있었고 바다에 나오기 위해 소비해야했던 시간, 노력과 비용은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돌고래라도 잡아가자 생각하여 차선책이었던 대학원 입학을 하였지만 결국 대학원이라는 곳도 휴학을 했다. 내가 원했던 범고래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지출한 매몰 비용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향후 돌고래를 잡기 위한 비용을 대는데에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꿈'이라는 단어가 우스울 때는 전혀 몰랐다. '그것도 없이 어떻게 살아?'라는 쭈볏거리는 반응을 대놓고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꿈이 있다'라는 것이 내 자신감의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그러다가 꿈을 이루는 것이 좌절되고 난 뒤 그것의 소중함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그것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크기와 종류에 관계 없이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 사회적 지위나 지금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 꿈을 '변경할 수'는 있을 지언정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 그리고 꿈을 가지기에 앞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점, 그 조사에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주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 또 꿈을 이루는데에도 비용이 든다는 점, 꿈을 포기 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꿈'을 꾸어야 한다는 점. 다시 말하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으로 설정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래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은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다른 꿈들을 폐기해 버리면 안된다. 꿈은 '유일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 중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만약 자신이 선택한 첫 번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른 꿈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 꿈으로 넘어가는데 있어 공백기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첫 번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다. 두 번째 꿈, 세 번째 꿈.. 이렇게 순서가 내려올 때마다 가끔은 '포기'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한 상황이 올 것이고, 이것을 흔히들 '실패'라고 부르지만 이때에는 좀 다르다. 단 하나의 꿈만이 있었던 사람에게 포기나 실패는 그 사람의 삶을 종결지을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일일 수 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있는 사람에게는 포기든 실패든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실패가 경험이 된다'는 말은 다음 꿈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사실 위의 이야기는 내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대학원 휴학 이후 취업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여러 기업이나 공단 등에 원서를 썼지만 합격자 발표를 보지 않았다. 합격을 했을리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직장인'이라는 직업은 내가 아직 선택하기에는 낮은 순위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난 두 번째 꿈에도 진심을 다해 도전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몇 번째인지도 모를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고 여러 준비를 한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바라보건대 지금의 내 상황은 '공백기'이지만 이 공백기가 길어지고 있다. 큰 의미가 없는 일들을 하루 하루 해나가면서 마치 그것들이 나를 지탱하는 것들인양 생각하고 있었고, 주변의 친구들을 만나 '내가 공백기다'라는 것을 자기 비하와 자기 확신이 반반 섞은 채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자기 비하는 첫 번째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의 비하였고, 자기 확신은 두 번째 꿈에서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지금 내가 해야할 것은 자기 비하도, 자기 확신도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꿈에 대한 실현 노력이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다.


나쁘게도 '공백기'가 익숙해졌다. 두 번째 꿈을 찾으려는 노력보다 단지 공백기를 하루하루 '즐겁지 않게 즐기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스스로 분석하기에는 '내적 내전의 패전' 즉,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나만의 전쟁에서 졌다고 분석하지만 빨리 다시 전후 복구를 해야할 것임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두 번째 꿈이 자신에게 열정을 불어 달라며 손을 내밀지만 애써 외면하며 가만히 자리에 앉아 소꿉놀이나 하고 있거나 아니면 첫 번째 꿈을 아쉬워하며 회상만 하고 있다. 그리고 첫 번째 꿈의 실패 탓인지 두 번째 꿈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 긴 가래떡을 뽑아내는 기계에서 가래떡을 자르듯이 첫번째 꿈과 두 번째 꿈이 '딱'하고 끊어지면 좋을텐데 구질구질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직도 첫 번째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남았을까. 아니면 두 번째 꿈, 세 번째 꿈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큰 것일까.


직장인 친구들이 보면 부러워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새벽까지, 먹고 쉬고 쉬고 먹고 책보다가 영화보다가 글 쓰다가 쉬고 먹고를 반복하고 있지만 단 1초도 편하지 않다. 내가 편하지 않은 이유는 '나이가 서른이니 이제 돈을 벌 때가 되지 않았니', '친구들은 적금 들고 결혼하고 집사고 하는데 넌 뭐하니', '대학원까지 입학해놓고 지금 놀고 있으면 어쩌자는거니', '일단 현실을 바라보고 취업을 해서 돈을 좀 모아야 하지 않겠니' 등의 이야기에 의해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야만 하고 선택할 두 번째 꿈이 내게서 더욱 멀어지고 있는 듯 하여, 내가 다시는 꿈을 선택하지 못할 듯 하여, 꿈을 선택하지도 못할 만큼 패배자가 되어 이번 삶을 '이리저리' 살다가 끝낼지도 모를 듯 하여 불편한 것이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참,

'공백기'의 나는 참 나약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내 성격 중 정말 나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이렇게 나약하면서도 아무런 근거 없도, 그 어떤 통계적 조사도 없고,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기대나 응원이나 비난이나 힐난이나 그 무엇이 나에게 가해지더라도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그 앞에 붙어야 할 세 글자, '무엇을'. 이것을 찾아야 한다. 아니,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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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1. 04:02 카테고리 없음

정외과를 지망하거나 혹은 현재 정외과에 재학중인 대학생들에게.  2014.6.11

본인은 어릴 적부터 대학을 가게 된다면 정치외교학과에 꼭 들어가고자 마음 먹었다. 다른 학문이나 분야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외교'라는 학문만이 가지고 있는 갈등 해결 연구에 가장 높은 관심을 가졌었고, 꿈 역시도 외교관이라는 지극히 실무지향적이며 현실적인 이상을 갖고 있었기에 정외과를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정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두 군데의 대학에서 정외과를 다녔고 한 군데의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정외과는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다소 다른 점이 많았다. 최종적으로 졸업한 학부에서 높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고 학교를 다니면서 전국 단위의 대회에서 수상을 해 본 경험도 있었지만 그러한 것들과 '정치외교학도'라면 알아야 하는 내용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정치외교학도를 지망하거나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 학생들에게 당부해 두고 싶은 말이 있어 글로 남긴다. 

1. 이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리해 두어라. 
정외과에 처음 들어온 학생들은 '정치학의 이해'라던지 '정치학 입문' 등의 수업을 기초적으로 듣는다. 정치학이 어떤 것이며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온 학문인지를 대략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어떤 이론들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 이론들이 적용된 실제 사례들은 어떤 것인지 또한 배우게 된다. 이때 수많은 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단지 이론에 불과하다. 내가 생각한 정치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 정치 현상에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난 이런 이론들을 굳이 열심히 배워지 않겠다.' 과감히 말해서 이런 생각은 틀렸다. 정치학은 이론의 학문이다. 여타 학문 역시도 이론이 매우 중요하겠지만 정치학은 특히 그렇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분석하기 때문에 더욱 이론이 중요해진다. 지금까지 많은 이론들이 만들어져왔고 또 적용되었다. 그러나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이론들 역시 존재한다. 새로운 이론을 만들기 위해서도 기존의 이론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래서 반드시 정치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이론을 정리하는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누군가 어떤 이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때 그 이론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하지 못한다면 정치학을 제대로 배운 것이라 할 수 없다. 누구의 이론이며 어떤 책에 나오는 내용이라는 것을 굳이 외울 필요는 없겠으나, 이론의 구조와 역할에 대한 숙지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여러 정치 현상에 대해서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노트를 만들든 녹음을 하든, 만화를 그리든 영화를 찍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론을 정리해 두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면 대학원을 가지 않는 이상 이론들은 어느 샌가 자신의 머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새로운 이론을 만들고 싶어하는 야망이 있는 정치외교학과 신입생은 자신만의 이론 정리 방법을 꼭 찾기를 바란다. 

2. 영어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라. 
영어에 대한 수요가 높은 것은 오늘 내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영어 공부에 대한 집중은 쉽지 않다. 정치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이나 정치외교학도라면 영어는 수단으로든 목적으로든 반드시 필요하다. 수단의 의미에서 볼 때 영어 공부는 원서를 읽을 때 우선 가장 도움이 된다. 이미 많은 번역이 되어 있어 굳이 원서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뒤따라 올 것이지만, 번역은 그 원문의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론가나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내용은 글자나 문장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행간에도 숨어있기 마련인데 아무리 완벽한 번역이라도 그 내용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 신간의 책은 번역되지 않은 책도 여전히 많고 그러한 내용들을 제때 모른다는 것은 뒤쳐지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수단적 의미로 국제 정치를 전공하거나 비교정치를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각 국제 기구의 결의안이나 국제 회의 혹은 국가들이 내놓은 보고서를 읽어야 하는데 이런 보고서들은 거의 번역이 되지 않는다. 번역이 채 이뤄지지 않은 내용들을 알기 위해서는 영어를 공부해서 그 내용을 알 수 밖에 없다. '정치학과에 들어왔으니 영어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학생의 새로운 지적 영토 확장 역시 끝난다. 왜 철학과 학생이나 법학과 학생들이 이미 번역이 차고 넘치는 책들의 원서를 읽는지를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목적의 의미에서, 연구자가 되고 학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논문을 영어로 적을 만큼은 영어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한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학문 세계에서 영어는 세계 공용어가 되어 있다. 미국의 패권 어쩌구 하는 백마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영어를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논문이나 생각을 적을 수 없다면 정치학계에서 주목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영어로 쓴 논문이나 보고서가 반드시 주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학문적 성과가 많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3. 정치학과 정치는 다르다. 
수많은 학생들이 여기서 좌절한다. '제가 생각한 정치외교학은 이런 사변적인 이야기만 하는 학문이 아닌, 현실 반영을 도모하는 학문이었어요.' 틀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 정치외교학은 현실에 반영되고 또 현실 역시도 정치외교학에 반영되기도 한다. 이론가와 학자가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을 정부가 반영하여 정책으로 형성시키기도 하고 그 결과를 다시 정치학에서 받아들여 새롭게 이론을 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정치학의 연구가 일정 정도 마무리 되었을 때 이뤄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학에서 배우는 정치학은 현실에 반영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정합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정치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이나 정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현실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거나 이미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 정치는 정치학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정치학의 공부 과정에 있는 사람이 현실 정치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참여 방식으로 선호되긴 하지만, 대학 내의 정치학 학습은 현실 정치를 반영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는 의과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이 수술을 집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배우는 단계에서는 그 내용과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볼멘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해서 자신이 원하는 정치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면 그때 주제를 잡아 연구를 해도 늦지 않다.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난 뒤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니 설익은 사과가 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4. 정치학은 사람을 다루는 학문이다. 
'사람을 다룬다'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정치학은 사람을 다룬다. 경영학은 기업에 소속되어 있는 노동자나 경영자가 어떻게 더욱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경제학은 간단히 이야기해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경영학과 경제학 역시 사람이 그 중심에 있기는 하지만 사람 자체를 다루기 보다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 관계나 효율성을 다루기에 정치학에서의 '사람'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정치학에서 다루는 '사람'은 다소 온정적인 개념이다. 국제 정치를 공부하든 비교 정치를 공부하든 정치 사상을 공부하든 그 핵심 내용은 '어떻게 하면 더욱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가, 왜 정당은 갈등을 하고 국가들은 전쟁까지 불사하면서 더 넓은 영토, 더 강한 국가를 형성하고자 하는가 에 대한 대답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 의식에서 그 출발점이 있다. 다시 이야기하면 '사람'을 잊은 정치학은 그 시작점부터 틀린 것이다. 정치학에서 이론의 정합성이 중요해지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잘못된 이론이 확산되고 또 적용된다면 그 피해를 입는 대상은 '사람'이다. 나치즘, 파시즘, 교조적 공산주의 등의 사상들이 우리 인류에게 끼친 피해는, 사람을 잊은 정치학이 가져다 준 폐해라고 해도 무방하다. 사람을 다루는 학문인 만큼 정치학은 쉽게 접근해서도 안되고 어영부영 말만 맞추는 학문이 되어서도 안된다. 자신을 포함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는 이가 정치학을 공부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쳤고 또 끼치고 있는가에 대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기기도 하지만 정외과를 지망하거나 이미 정치학도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몇 가지 정치외교학을 지망하거나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인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었다. 다소 격렬한 표현도 있고 또 '영어 학습' 등 지겹게 듣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어 글을 적고 나니 민망한 부분도 있다.

정치학 혹은 정치외교학은 매력적인 학문 분야임에는 틀림이 없다. 수많은 학생들이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그 매력을 나름대로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치외교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단지 '매력' 혹은 '재미'를 느껴 들어온 학생들은 자신의 4년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안타까운 부분이라 생각한다. 

4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에 대해서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 역시 있으리라 예상한다.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토론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아마 지금의 대학 기말고사 시즌인 듯하다. 마지막으로 당부해주고 싶은 말은 기말고사가 끝난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어렵게 얻은 지식과 소중한 시간이 수포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일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한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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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vestory 2014.10.25 22:08  Addr  Edit/Del  Reply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 2016.03.07 22:59  Addr  Edit/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14. 6. 1. 16:27 카테고리 없음

두 가지 단상. 2014.06.01


(아래 글은 어제 새벽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폰으로 적은 뒤 '게시'를 눌렀건만 사라져 버린 글을 다시 정리하여 적는 글입니다ㅠㅠ 아닌 새벽에 멘붕..ㅎㅎ)

# 1
어제의 공연은 몇 가지 생각을 저에게 남겼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글로 옮기고자 합니다. 
공연의 시작 시간은 저녁 6시였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만큼 해는 길어질 만큼 길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오후 6시라 하여도 하늘은 밝았습니다. 일찍이 제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고 또 이미 자리에 착석해 있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얼굴을 갖고 있고 어떤 옷을 입었고 무엇을 읽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이 있었지만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알아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공연은 약 6시 반 정도에 시작했습니다. 공연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는 저물었고 어둠은 밀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학교 측에서 나눠준 형광봉을 하나 둘씩 꺼내어 들었습니다. 밤이 완연히 깊었고 사람들이 들고 있는 형광봉의 물결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는 개별 사람의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굴과 옷 그리고 누구와 왔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자 얼굴과 옷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흔들리는 형광봉만이 보였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만이 보였습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어두워지자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서 있었다고 해도 사람이었습니다. 어두움은 개별성을 매몰시켜 버렸습니다. 대신 보편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낮은 우리에게 각자의 차이를 드러내 주었지만 밤은 그 차이를 무시하고 단지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인권이나 '인류의 진보' 등은 개별 주체의 노력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이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듯 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죄로 지금도 어디선가 간을 독수리들에게 쪼아 먹히고 있습니다. 불이 가져다 준 것은 낮과 같은 밤입니다. 밤이 되어도 사람들은 낮에 보는 것과 같이 개별적 주체로 다른 사람을 인식합니다. 오히려 더욱 밝게, 더욱 선명하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하고 구별하고 구분짓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우리에게 문명을 가져다 주었지만 가끔은 그 불을 숨겨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종교와 인종, 외모와 장애 등은 낮이 우리에게 준 기준들입니다. 밤이 되면 고고히 흐르는 인류의 파도 속에 들어갑니다. 개별적 주체가 강조되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인권과 인류 그리고 그것을 신장하기 위한 노력들은 밤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아침이 되고 낮이 밝겠지만 밤은 우리에게 어둠을 선물해 '인류 보편의 평등'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저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어둠 속의 사람을 보는 것 그리고 그들이 흔드는 형광봉의 흐름을 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잊고 지냈던 사람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 2 
대학원에 들어오고 난 뒤 신기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같은 시간에 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종종 일어나기도 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좋은 점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그 대안 제시나 수단 확보 등에 다른 측면이 있을 때 방향을 잡기 쉽습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갖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점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경우 창의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기존의 형식을 깨는 신(新) 사고의 등장을 막을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쁜 점 역시도 공통으로 흐르는 생각의 기준이 있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기도 합니다. 
바야흐르 선거의 계절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가끔 우려되는 것은 너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만이 진실이라며, 그것을 생각의 기준으로 세울 때가 있습니다. 가령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인 '자유민주주의'가 그렇습니다. '자유'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공유, 기준의 설정이 명확히 이뤄지지 않으면 대안은 제시되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 그 기준에 대한 토론을 하기에는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여러 가지 공약들을 많은 사람들이 쏟아냅니다. 가끔 상반된 내용들의 공약들이 한 후보의 공약집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또 어느 일방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인 양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문제의 원인이 '서로 공유하는 생각의 기준'이나 '가치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기준은 '시민의 행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막연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전에 많은 정치적 실험들을 통해 어떤 방향이 옳은 방향인지에 대한 검증 역시 어느 정도 완료되어 있다고도 봅니다.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을 각 후보가 잘 인식하고 있다면 어느 후보가 되든 큰 상관은 없어보입니다. 행복을 '지금 당장' 실현할 것인지 '몇 년 뒤에' 실현할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그 기준이 형성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같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떤 기준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그로부터 대안을 찾고자 하는 행위는 선호되지 않습니다. 시민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기준과 정치인이 갖고 있는 기준이 다를 경우 정치는 삶과 괴리됩니다. 같은 생각의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수단과 대안을 제시할 때 좋은 사회가 형성되고 그 방향성도 가질 수 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같더라도 구체적인 방안과 실행 방법은 무수히 다를 수 있습니다. 최근의 한국 정치를 보면 그 생각 자체가 달라 무의미한 것들로 논쟁하고 비난하는 듯한 모습들을 봅니다. 지켜야 할 가치, 즉 '시민의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사회적 토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p.s 여기서 '시민'이라는 표현은 '서울시'의 시민이 아닌 자발적이며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말합니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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