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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6.05.24 혐오와 자기혐오
  2. 2016.04.22 친함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3. 2016.04.04 거칠 혹은 까칠
  4. 2016.03.28 마음 둘 곳
2016. 5. 24. 16:59 내 생각

"혐오와 자기 혐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최근 1주일 사이 저의 SNS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었음에도 그 개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단어는 바로 '혐오'입니다.

 

혐오(嫌惡)란 보다시피 두 개의 한자가 모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싫어한다는 뜻의 ''과 미워한다는 뜻의 '', 다시 말해 싫고도 미운 어떤 대상에 대해 품는 감정입니다. 교육심리학에서는 '혐오'를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정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쉽게 풀어 설명하면, 사람이라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고 물건이라면 부숴버리고 싶을 감정을 느끼는 대상에 대한 감정인 것입니다. 그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될 때가 있습니다.

 

최근 '혐오'라는 단어가 저의 눈과 귀에 많이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2016517일 밤 120분 경 서울 강남역 인근의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으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이 남성은 자신이 평소 여성으로부터 무시를 받아왔기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혐오 중에서도 '여성혐오'의 발현이 이번 살인사건의 큰 원인으로 보는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 내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적 태도와 성범죄의 가해자로서의 남성에 대한 각성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혐오의 개념은 간신히 알게되었습니다만, 여성혐오란 무엇일까요.

 

집단지성인 위키피디아에 정리된 여성혐오는, 사회학자 마이클 플러드((Michael Flood)의 말을 빌어 여성혐오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성혐오는 대부분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나, 여성들이 스스로나 다른 여성을 대할 때에도 나타난다.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와 함께, 수천년 동안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못박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권력과 의사결정에 대해 제한적인 접근만을 허락하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이념 혹은 신념체계로 기능한다. [...] 서양 문화 속의 여성은 스스로의 역할을 사회적인 희생양으로 내면화하여 왔으며, 21세기에는 멀티미디어에 의한 여성의 대상화로 인해 문화적으로 승인된 자기 혐오와 성형 수술, 거식증 및 식욕항진증(폭식증)에 대한 집착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특이한 점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혐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여성에 대한 혐오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 들어와 여성에 대한 대상화가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으로 정착되었다는 점 역시 특이합니다. 이러한 특이점은 여성혐오의 발원지가 남성 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우리 일상에서 매우 쉽게 여성혐오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합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른 견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의 시작이며 일상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앞선 '혐오'의 개념과 연결시켜 보면, '죽이고 싶은 대상'이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혐오 그리고 여성혐오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지금의 시점에서는 위험한 발상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글을 적고 있는 본인은 남성이 가진 혐오의 대상이 '여성'이 되었든, 여성이 가진 혐오의 대상이 '남성'이 되었든 또는 그 대상이 바퀴벌레가 되거나 개미가 되었든 혐오를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그 혐오의 감정을 근거로 실제 행동이 표현되었을 때는 법적 그리고 사회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혐오의 감정을 갖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혐오의 감정을 어떤 형태로든 실행한다면, 타인의 생명과 자유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성과 가능성이 있기에 제약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혐오의 대상이 사람이라는 또 다른 인격이라면 문제는 더욱 첨예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바퀴벌레를 혐오해서 죽이는 것과 여성을 혐오해서 죽이는 것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에는, 혐오의 대상이 여성이었습니다. 특정되지 않은, 20대 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의 표현은 이제 개인의 자유 영역에서 벗어나 법적-사회적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혐오 표현은 우리 사회 내에 아니, 인류의 역사 속에서 뿌리 깊게 스며 있는 여성혐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지 모릅니다.

 

긴 글이 될 듯 하지만, 저는 여성혐오를 포함한 혐오 감정이 발생하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개인의 감정으로서의 혐오와 발현된 혐오 모두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혐오의 원인은, 바로 도구화입니다.

 

도구화, 타인을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 혹은 감정입니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들은 여성을 자신의 성욕의 해소나 성공의 발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자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 역사적으로 갖고 있었던 권력들이 자신들의 삶을 더욱 나은 삶으로 만드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이며, 그러한 권력의 붕괴를 위한 수단으로서 남자를 공격이나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성과 남성 뿐만 아니라, 도구화의 대상은 자기 자신에 까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을 찾기가 힘들어진 현대에 들어와 직업을 가짐으로 인해 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자부심을 갖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회사를 위한 도구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직업적 측면 뿐만 아니라, 누군가는 부모의 꿈을 대리해 실현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서로 사랑을 하는 연인 관계에 있어서도 타인의 행복을 돕는 수단으로까지 여겨지지도 합니다.

 

이즈음 되면 사람이 도구화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춘 철학자나 사상가가 있지 않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있습니다. 그것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도구화'를 막기 위한 철학적-종교적 체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씁쓸한 것이 사람의 도구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시대를 막론하고 만연한 문제였던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혐오의 원인으로서 전제한 도구화에 대해서 역사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서술했을까요.

 

칸트는 정언명령(定言命令) 중 하나로서 인간의 도구화를 일갈합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건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하라!“ 쉽게 말해, 자신과 타인 모두를 수단화하지 말라 말하죠.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논어위령공편에 나온 표현으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 말합니다. 그 뜻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입니다. 직접적으로 도구화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듯 보이지만,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타인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며, 자신이 어떠한 목적을 이루고 싶지 않으면 타인 역시 그럴 것이라 상정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을 타인에게 시키거나 수단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는 어떻게 이야기했을까요. 다소 포괄적이고 다양한 해석이 있기도 하지만 자비가 수단화를 막는 답이자 대안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단어는 혐오처럼 두 한자의 결합입니다. ()는 사랑한다, 즐거워한다는 뜻이고 비()는 슬퍼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비란,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공감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있지 말고 타인의 행복이나 슬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것은, 앞서 설명한 칸트와 공자가 언급한 맥락과 함께 합니다. 타인이 어떤 감정을 가질지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입니다. 즉 타인을 수단화하는 것입니다.

 

수단화에 대한 비판은 칸트, 공자, 부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혐오의 원인이 도구화이고, 도구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인들의 일갈을 듣는다고 우리는 혐오를 멈추게 될까요. 그렇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성에, 타인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을까요?

 

제가 제시하는 대안은 자기 혐오를 멈추자는 것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혐오한다는 것이 어색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의 생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하게 된다면 자기 밖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만들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 혐오를 불식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타인에 의해 흔들리는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을 확인하고 확보시켜 나간다면, 타인의 기준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인에는 여성 뿐만 아니라 외국인, 장애인 나아가 동물 혹은 식물에게 까지 공감의 확대가 가능할지 모릅니다.

 

 

앞서 긴 글을 요약하면 이렇게 한 문장이 될 듯 합니다.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을 도구화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런 혐오의 근저에는 자기 혐오가 깔려 있으니 자기 혐오를 하지 않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

 

위 요약된 문장에는 많은 맹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만의 기준을 만들고 자신을 혐오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타인들은 여전히 그 기준을 찾지 못했고, 사회-제도적으로도 차별이 남아있다면 여전히 혐오가 범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선후관계를 설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혐오를 멈추기 위해 노력하고, 동시에 사회 전체적인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혐오는 감정입니다. 그것을 갖든지 말든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혐오든 타인에 대한 혐오든 혐오의 감정을 갖는 것은 자신에 대한 정신적 피해를 끼칩니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지만 혐오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생각과 감정의 악순환에 빠져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또한 이런 혐오가 감정의 고삐에서 풀려나 실행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법적인 책임과 반드시 직면하게 됩니다. 우선 혐오의 감정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있어, 그 시작이 자기에 대한 혐오를 멈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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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2. 01:30 내 생각

친함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가끔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는 장면이 있다. 그건 고3이었을 때 수능을 마친 뒤의 일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패잔병들의 모임처럼, 수능이라는 전쟁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져 버렸으니 자존심이라도 지켜보려는 친구들은 날카로웠다. 사소한 일에도 큰 시비로 번질 수 있었으니 서로 졸업 때까지 조용히 지내자는 암묵적 합의도 있었던 듯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반의 한 친구와 다른 반의 한 친구가 싸운다는 소식이 복도로부터 들렸다. 이 싸움이 있기 몇 달 전 우리 반의 두 친구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불똥이 이상하게 나에게 튀었다. 그 둘의 싸움을 말리거나 중재할 사람이 나 밖에 없었는데(?왜일까?) 내가 말리지 않았다며 꽤나 욕을 들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누군가 싸움을 하면 말리겠노라- 하고 했던 허망한 맹세를, 수능이 끝난 뒤에야 지키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 ! 싸우지 마라. (한껏 짜증난 목소리로)

 

한참 서로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사지하고 있던 두 친구의 사이를 슬며시 쑤셔 들어갔다. 그런 뒤 한껏 힘을 주어 둘을 떼어냈다.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때만 해도 힘이 셌던 것인지 둘은 생각보다 쉽게 멀어졌다. 우리 반 친구에게 그만하라며, 교실로 들어가자고 하는 순간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돼지쉐끼(새끼의 사투리, 쉐끼), 니는 뭐꼬?

 

? 나한테 한 이야기일까? 정말?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반 친구는 정확히 내 눈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 난 그냥 싸움 말린거 밖에 없는데? 하고 냉정을 찾았으면 다행이었겠지만 나 역시도 무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이 있는 느낌으로 갑자기 싸움을 시작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바라!’ 라고 시작한 싸움에 옆반 친구는 참 많이도 맞은 듯 했다. 체급이 달랐다고 솔직히 고백해야겠지만, 어쨌든 나의 싸움은 두 친구를 말리던 것보다 더 격렬하게 말림을 당하며(?) 끝이 났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 화장실을 갔다.

 

가보니! 나와 싸웠던 그 친구가 밀대자루를 손에 쥐고, 나를 죽일거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씩씩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나도 죽을 만큼 소변이 급했으므로, 그 친구가 보이지 않는 쪽으로 총총거리며 가서 소변을 시원하게 보고 들키지 않은 채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난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한 무리의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아왔다.

 

잠시 배경설명.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이상한 교육을 했는데 대학처럼 학생들이 교실을 옮겨다니며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시기가 잠시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교실 앞에 넓은 공간을 만들어 일종의 휴식공간이 있었다. 배경설명 끝. 나는 그 한 구석 모퉁이에 앉아 당시 유행하던 힐리스를 신은 채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를 찾아온 한 무리의 친구들은 나의 위치와 정대각선의 모퉁이에 한껏 어깨와 미간에 힘을 주며 섰다. 굳이 분류하자면 양아치일까. 3이 되어서도 와해되지 않았고, 수능을 치고서도 저러고 있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에게는 그게 우정인 듯 보였다. 무리 사이에서 마치 대변인인 양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평소 얼굴과 이름은 알지만 딱히 친하다고 할 친구는 아니었다. 그 역시 양아치였다.

 

니가 내 친구 때렸나?

 

일종의 보복성 방문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 한 걸음 나왔던 친구가 다시 묻는다. 돌았나?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갑자기 잘 안난다. 좀 길게 대답했던 것 같은데,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저 새끼가 내한테 먼저 욕을 했다. 나는 싸움을 말릴려고 한건데, 내한테 시비 걸고 그러면 안되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비논리적인 대답이었는데, 이 대답이 먹혔다. 무리의 친구들이 생각해봐도 싸움 말리는 사람한테 다시 시비거는 건 아니었나 싶었던 듯 하다. 한 걸음 나왔던 친구는 다시 뒤로 들어갔고, 그 무리의 친구들 중 일부는 나에게 앞으로 조심해라, 툭툭 던지며 모두 다시 자기 교실로 들어갔다. 나와 싸움을 했던 친구는 양아치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나름의 계파는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조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싸움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런 치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도 적고 있냐.

 

나 한 명 조지겠다고, 우루루 몰려온 그 친구들 - 결국 다 고등학교 동창들이긴 하지만 -이 참 미웠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기가 맞았다고 친구들을 불러온 그 친구보다 무슨 일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랑 단지 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해코지하려 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그 친구들이 난 참 미웠다.

 

그럴 수도 있다.

 

, 그럴 수도 있다. ‘친하다는 것 역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 내가 속하지 않은 그룹이나 집단의 친함이 나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러고 있지 않은지 반성을 해보게 되는 측면도 있다. 내가 당할 때는 느끼는 것을, 가해자가 되면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진 이중성인가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감정의 근원이 친함이라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기도 하다.

 

자주 만난다. 이런 상황.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 않아도,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또 다른 사람과 어울리도록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된다. 정치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물급 인물이나 정당에 친밀함을 느껴 거물급 인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을 막무가내로 비난하거나 또는 상대 정당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을 일삼기도 한다. 정치에서 뿐만 아니다. 오히려, 정치를 포함하는 공적 영역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소한 일상에서의 친밀함이 주는 폭력이 더욱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는 친구라 할지라도 나는 누군가와 친하다는 것으로 거의 모든 것이 용인되는 경우도 있고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뒤에 서줄 수 있는 용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이 옳은 행위인지 옳지 않은 행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을 해야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죄를 물을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적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취재하며 내린 결론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주체적인 판단 즉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저런 반인류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지금도 그 울림이 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혹은 철학적이거나 사상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 의해서 행동하거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정도로도 생각은 그 충분조건은 모두 채운 듯하다. 이런 생각의 기준에 친함이 포함될 수 있을까?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친함이라는 것이 향하는 방향이 중요하다. 내부적인 친함을 외부적인 미움으로 표현할 경우, 친함은 사실 친함이라기보다 추악함이다. 지키려는 것은 고작 자신의 마음 편함정도일지도 모르고 다음에 자신이 같은 경우를 겪게 되었을 때, 다른 이에게 보였던 미움처럼 같이 미워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히 바라건대

 

친함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이 있다면, 그 친함의 외부적 표현도 친함으로 보여주면 어떨까. 아니, 욕심을 버리고 친함의 시작으로 보여주는 건 어떨까 싶다. 친밀함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서 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엔 친밀함이란 결국 우연의 결과이다. 가족이 되는 것도 친구가 되는 것도 연인이 되는 것도, 이러한 친밀함의 시작은 결국 우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라도 지금 부모의 아들딸이 되고 싶어 된 사람은 없고, 친구라 할지라도 연인이라 할지라도 우연한 만남에 의해서 시작했다. 그럴 것이면, 지금은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우연한 기회나 친밀함의 시작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우리 사회나 국제 사회나 나아가 향후 형성될지 모르는 우주 사회나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마음 많이 연 사람이 상처받는다.

 

슬픈 문장이다. 위의 문장을 다르게 표현하면, 더욱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 받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결국은 누가 더 친해지고 싶어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친밀함을 표현한다면, ‘? 나랑 안친하잖아?’ 라거나 왜 갑자기 친한 척 하지?’ 라는 반응이 아니라, ‘저 사람과 친해질 수 있겠구나.’ 라거나 나도 마음을 열어볼까?’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더욱 넓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친함은 결국 폭력이 발생하는 요소였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많은 전쟁과 갈등의 근간에는 친밀함이 있었다. 더욱 친한 사람을 지키고자 했던 갈등, 자신과 같은 국적을 갖고 있거나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부터 느끼는 친밀함으로부터 발생한 전쟁 혹은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 세계를 반으로 나누어 싸웠던 냉전까지. 이런 글을 통해서 서로 친해집시다!’ 하고 연설적으로 외치는 것이 결국 일상 혹은 세계사에 어떤 큰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친밀함에 친밀함을 연습하고 포용해나간다면, 더욱 나은 우리가 될지 모르겠다.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 친밀함의 범위 밖의 한 학생이 느낀 소외감 혹은 폭력의 경험으로만 끝내기는 아쉬워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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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4. 19:16 내 생각

"거칠 혹은 까칠"

 

20대 이후가 되어 나를 만난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어릴 적에 꽤나 재밌는 사람이었다. (재밌는 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고, 남을 잘 웃기는 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때는 흔히 말하는 '오락부장'으로서의 복무를 충실히 했지 말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에는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닌다고 별명이 '씨산이' 였을 정도였다. (씨산이는 사투리로, 바보 같이 실실 웃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던 어린이가

 

20살이 넘고 머리에 뭔가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남을 웃기는 일에 주저함이 많아지게 되었다. 투철한 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 내가 웃기는 것을 즐겨 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대방이 웃을 상황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좋아하지만 편하게 하지 못하는 '장난' 이 대표적이다. 평상시에는 장난을 잘 받아주던 친구들이, 어느 날은 내 장난에 정색을 한 경우가 있었다. 그 원인은 친구가 '몸이 아파서' 일수도 있었고,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되묻지 못했고, 어느 사이엔가 분위기를 살피고 친구를 배려하다 보니 진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배웠기 때문이다. 20살 때 처음 들어온 대학의 오티를 가는 버스 안, 학생회장 형님의 오티 관련 안내를 듣고 있었다. 당시에는 어색했던 '양성 평등'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오티에 가게 되면, 여장을 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여장은 여성을 희화화하는 도구이며,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중에는 여성을 포함한 많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멸시 혹은 조롱이 담겨 있다 했다.

 

몰랐다.

 

어릴 적 내가 웃기는 현우였을 수 있었던 것이, 다른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조롱해서 웃긴 것이 아님에도 '혹시 내가 그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없지는 않았을 테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니, 그것을 알면서도 나쁜 일들을 저지른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몇 가지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뭔가 투박했다.

 

배운 것을 적용하고 써먹는데 있어서, (나의 표현이지만) 서울사람다워지지 않았다. '서울사람답다'라는 말은 뭔가 세련된 느낌이나 먼저 크게 배려하는 느낌의 어떤 것이지만, 나는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고집이 있었고, 배려를 너무 티나게 했다. 무언가 의도가 있는 듯 보였던 배려들은 오히려 많은 오해들을 낳았다.

 

언젠가 한 동생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 조금 더 매끈할 수 없어요? 형의 거칠거칠한 면이랑 잘 맞는 사람은 형과 친해지고 형을 더 잘 알 수 있겠지만, 형의 그 거친 면에 상처를 받는 사람도 많을 듯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 나름의 배려와 공부를 통해 얻은 어떤 것을 글이나 말로 표현할 때 그 거친 면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되려 그 거친 면이 나의 모습이라며, 세상 모든 것이 다 쉽고 편하고 별 일 없이 돌아갈 때 나 혼자라도 그렇게 거친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마치 김영랑의 시 '독을 차고'의 화자와 같은 심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외로워졌다.

 

몇몇의 편한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고 인정했지만, 새롭게 사귄 친구나 나의 거친 면을 원하지 않게 확인한 친구들은 그 거침을 까칠함으로 인식한 듯 했고 그렇게 멀어져갔다. 결국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배려'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배려는 없을 것이라 여겼던 나는, 사실 내 주관에 맞춰 배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타인의 몸과 마음 모두에게 어떤 '불편함'을 주고 있었다.

 

그럴수록 점점 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쉽게 변할 수는 없었다. 지금 적고 있는 이런 글도 마찬가지였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글을 적자니 이전에 써 오던 '나의 스타일'의 글들이 가지는 관성이 있었고, 사람을 대할 때도 이전과는 다르게 갑자기 '너의 생각은 이런 부분이 잘못되었구나~‘ 라거나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고 차근차근 설명이나 해명을 할 수 있게 되기는 쉽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고집 센 사람이 무엇인가를 잘못 배우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은 가득 남아 있고 단지 그것을 배우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나은 사회를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나의 입장으로서는 여러모로 답답한 측면이 없지 않다. ‘고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싶으면서도 또 세상이라 부르던 사회라고 부르던 복잡다단하게 돌아가는 이 곳에서 나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강변해보아도 결국 외로운 사람은 나뿐이다 싶다.

 

가끔 혹은 자주 나도 매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몸도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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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28. 19:21 내 생각

"마음 둘 곳"


사람은 살면서 두 가지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듯 하다. 하나는, 마음 둘 곳을 찾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


마음 둘 곳을 찾는 것이란 별거 아닌 듯 하지만 꽤 어렵다. 가족이 있어도 그 안에서 편한 마음이란 생각보다 많은 조건이 필요하고, 또 서로 배려를 하지 않으면 너무 가깝기에 쉽게 불편한 곳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연애란,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만나 '내 마음 둘 사람'을 만나는 과정인 듯 하다. 그 결론이 가족이 됐든 그저 스처지나가는 인연이 되었든 연애를 하는 중에는 다행히 마음 둘 곳을 찾은 셈이다. 하지만 역시, 배려는 필요하다.


마음 둘 곳이 꼭 가족이나 연인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내 마음이 편한 어딘가는 있다. 그 대상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공간이 될 수도 있고 또 때에 따라 혼자 있을 때도 있는 법이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은 뭘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굳이 철학적인 어떤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 속에 산다. 주변 사람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하는 걱정은, 태어나자 마자 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이것은 결과보다 항상 과정이 중요한 노력이다.


누구에게나 마음 둘 곳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없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면 좋겠지만 사람은 다들 좋아하는 것이 다르니 이 역시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가지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될 듯 하다. 좋은 사람이 되어 마음 둘 곳에서 편암함을 느끼는 것, 이것이 어찌 보면 행복의 가장 쉬운 공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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