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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산중턱이었다. "산중턱이었다." 산중턱이었다. 어린 시절이었으므로 오르긴 힘들었지만, 한 번 오르고 나면 높은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탁트임과 그로 인한 청량감이 들었다. 할머니의 집(할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므로, 주말마다 방문하는 곳은 자연스레 할머니의 집이 되었다, 그리고 정식명칭은 할매집이다.)은 산을 뒤로 세워진 단독주택이었다. 넓다거나 크다고는 하지 못했지만, 형과 내가 뛰어 놀 만큼의 공간은 충분했다. 그리고 결코 한 번도 빠져보진 못하겠지만 마산의 명치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합포만은 또 그만큼의 상상력을 제공해주었다. 할머니집에서 가까운 곳에는 우물이 있었다. 할머니의 집 바로 앞 아래쪽에는 200평 남짓 되는 밭이 있었고 그 밭과 아랫집 사이에 흙길이 있었다. 그 흙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더보기
59초 "59초" 할머니 생신이었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할머니께서는 깨어있으실 것이 분명해 전화를 드렸다. 여보-세요.(할머니께서는 '보'를 길게 발음하신다.) 할매, 해눕니다. 아이고. 해누가? 예. 오데고? 서울입니다. '아이고. 서울에서 전화했나?' 예. 할머이, 생신 축하드립니더. 그래. 서울 먼데서 전화를 다 했나. 할머니께서는 아직 옛날 시외전화 시절의 기억이 있으신가 보다. 매년 생신이 되면 전화를 하는데, 서울에서 전화를 걸었으니 빨리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투의 말씀이시다. 아침 식사는 하셨는지, 편찮은 데는 없으신지 물어도 보고 해도 끊고 난 전화에는 59초라는 짧은 통화 시간이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다. 작은 손자, 해드릴 건 전화 한 통 밖에 없어 죄송한 마음 뿐이다. 명절 마다 내려가서 찾.. 더보기
현우의500자_79 #현우의500자 _79 할머니를 모시러 갔다 오는 길이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는 길,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내가 익숙하다고 해서 그가 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나지막이 형, 안녕이라 외쳤다. 차의 창문은 닫힌 채였고 속도 또한 늦지 않았기에 그에게 내 목소리가 닿았을 리 없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형이다. 그는 항상 우리에게 침을 뱉었다. 왜 침을 뱉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누군가 먼저 바보라고 놀리고 나서야 형이 침을 뱉기 위해 입을 오물거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바보라고 놀리지 않고 형에게 다가가면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어 준다. 친구들에게도 바보라 놀리지 않으면 침을 맞지 않는다고 알려주었지만, 친구들은 꾸준히 .. 더보기
현우의500자_66 #현우의500자 _66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다. 그것이 일본식 오무라이스인 줄을. 토요일 저녁이 되면 형과 나는 할머니집으로 갔다. 그리고 하룻밤을 보냇다. 디낄댁이라고 불리우던 할머니께서는 일본에서 태어나셨다. 광복이 되던 해 한국으로 돌아오시곤 마산에 터를 잡으신 할머니께서는, 내가 기억하는 고향과는 다른 마산을 기억하고 계셨다.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던 동네가 지금은 벚꽃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몇몇 집은 그 모습 그대로, 지금을 잊은 채 과거를 살고 있다. 그런 할머니께서 해주시는 오무라이스는 정말 맛있었다. 햄이 가득 들어가고, 얇게 편 달걀 지단 위 케첩을 뿌린 오무라이스는 할머니께서 해주시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일주일이 마치 그것을 통해 마감되는 느낌이었다. 베개를 말처럼 타고.. 더보기
현우의500자_59 #현우의500자 _59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방향의 쪽문 앞에는 조그마한 담배 가게가 있었다. 가게에 가서 내가 평소 피우던 담배를 달라고 말하며 동전을 꺼내는 척 안을 둘러보면 가게 안은 집이다. 좁아 보이지도 넓어 보이지도 않지만 다소 어두운 느낌의 일본식 집이 보였다. 나는 길가에 서 있고 담배를 파는 할머니께서는 가게 안에 앉아 담배를 건네 주신다. 평범한 날의 하교길이었다. 담배가 떨어져 가게를 들렀다. 할머니와 함께 한 보지 못했던 여성의 모습이 같이 보인다. 가게 안이 평소보다 환해 보였다. 담배 이름을 말하니, 젊은 여성이 담배를 건네준다. 고맙습니다. 몇 발자국을 걷다 멈추길 반복하다, 다시 담배 가게로 갔다. 가슴은 담배를 많이 핀 탓일테지만, 쿵쾅거린다. 할머니께서 나를 올려다 보신다.. 더보기
기술의 이야기 어느 기술의 이야기 2014.5.13. 어제 오후 연구실에 앉아 내일 강연에 쓸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근데 노트북의 디스플레이와 키보드 부분이 접합되는 부분에 균열이 보였다. '헐'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한번 나온 헐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헐헐 대면서 학교 주위의 서비스센터를 찾았다. 이대역 근처에 하나가 있길래 예약을 하고 부랴부랴 학교를 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을 해서 접수를 했고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시원한 차를 마시며 대기좌석에 앉아있었다. 그러고 멀뚱멀뚱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눈에 띤다. 할아버지는 연신 웃고 계신다. 웃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왼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자세히 보니 화면에는 영상 통화 창이 켜져 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