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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

실패론

늦은 밤, 일본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오전에 잠을 충분히 자서이기도 하지만, 뭔가 잠이 들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젊음이라는 가치를 느낀 지, 이제 4년이 지나간다. 20살 때 느끼기 시작한 ‘젊음’.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어떤 방향으로든 젊음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젊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젊음’의 가치는 ‘실패’다. 단순한 반어로서의 지식인처럼 굴기 위한 어구가 아니라, 순수한 의미의 실패다. 하지만 실패를 예상하면서 ‘젊음’의 가치를 활용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법, 실패의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 마치 바둑을 두고 난 뒤, 진 사람이 조용히 앉아서 복기(復記)를 하는 것과 같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실패는 두려워 할 것은 못 된다. 하지만 분명 하나의 선택지, 그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실패를 ‘하더라도’ 해보자 라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일에 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시쳇말로, ‘때린 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맞은 놈은 평생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24년 동안 살아오면서, 분명히 그러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맞은’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분하게 생각하고,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었으면 하는 후회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후회로,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것인가.

복기는 결코, 진부하거나, 보수적이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행위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삶을 ‘바둑’에 비유한다는 것이 일정한 오류의 수준을 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의 바둑돌을 두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그 바둑이 끝나는 시점은 짧게는 오늘 하루, 길게는 우리가 다시 뜨지 못할 눈을 감을 때까지는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20대, 청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금의 우리는 ‘일정한 직업’을 가지기 전까지는 분명 한 판의 바둑이다. 그 바둑판에서 배웠던 것을 우리는 남은 인생에서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 때의 실수를 되돌아 보면서, 또는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 난 생각한다.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실수를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는 한 번의 후회를 낳지만, 그 후회가 낳는 씨앗은 또 다른 후회라기 보다, 한 층 더 유전적으로 진화된 생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파울로 코엘료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궁수는 과녁을 수없이 빗맞혀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같은 동작을 수천 번 반복해야만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활과 자세, 시위, 과녁의 맥락이 통째로 머리 속에 자리잡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적었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 속에서 스스로 그 실패를 인정하고, 그 인정한 그 자신이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덧대어지는 순간, 그 과녁은 더 이상 먼 것이 아니며, 둥근 것도 아니고, 또한 맞추지 못할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글을 적을 때에는 항상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진정 나는 이런 글을 쓸 만큼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의, 태평양의 상어들에게 충분히 나눠줄 만큼의 크기를 가진 간, 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분명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새로운 일을 할 때는 항상 무엇인가 두렵고, 영원한 성공 보다는, 이것으로 인해 내가 잃게 될 것들에 대한 나열이 우선시 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뭔가 즐길 수 있겠다는 느낌은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일에 실패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맞으면서 즐기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보자. 실패를 해보자. 이렇게 마음 먹고, 시작한 일에서 성공을 한다면, 그것은 뭐랄까.정말 맛이 없어 보이는 음식을, 맛이라도 볼까. 맛이 없으면 뱉어 버려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입에 넣은 순간, 그 음식이 매우 맛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릇을 황급히 손에 집어 드는 그런 기분과 같은 것일까?

 

수많은 책에서 ‘실패는 젊음의 특권’이라고 광고하고 설득하고, 또 인식시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실패를 하기에는 사회, 적어도 내가 느낀 사회, 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며, 또 그 한번의 실패를 두고 두고 그 사람의 그림자에 보이지 않는 무게를 싣기도 한다. 난 실패를 두려워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옆의 친구들이 실패에 굴복해서 쓰러져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도 그를 위로하기 보다, 오히려, 그 실패의 대상이 내가 아니었다는 데 안도하고, 실패한 사람과 다른 길을 가리라고 마음 먹는 순간에 우리는 ‘실패에 대한 연계’를 잃게 된다.

‘실패에 대한 연계’, 어릴 적 바른 생활 시간에 배웠다. 길을 가다가. 친구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주라고. 하지만 우리는 지금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세우는 법을 배웠다기 보다, 넘어진 친구를 다시 한번 확실히 자근자근 밟아주고, 그 위를 넘어가는 법을 자연스레 배워가고 있다. 실패에 대한 연계,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왜 넘어져 있냐고 물어보는, 그 정도의 관심, 그리고 그 넘어짐에서 자신을 다시 한번 발견하고, 내가 만약 저 상황이었으면 넘어졌을까, 이 친구가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를 같이 고민하는 시점이 된 것은 아닐까.

 

실패를 경험해보세요. 달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씹다보면 익숙해지고, 그것이 결국은 약이라는 것을 ‘허준’의 ‘동의보감’을 빌어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쓴 것이 약이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다시 한번 파울로 코엘료의 같은 글의 마지막으로, 나도 마지막을 갈음합니다.

‘책임을 완수하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완수했을 때, 궁수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는 비겁하지 않았으므로.’

 

 

20090507 제1편 – 실패에 대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