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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12.21 단상
  2. 2014.06.01 두 가지 단상.
  3. 2014.05.16 단상
  4. 2012.03.14 실패론
2014. 12. 21. 03:52 내 생각

단상 2014.12.20.


각 개인의 삶이 절대적으로 불공평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공평하다.


자신이 균형 잡힌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만큼 편향적인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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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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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 16:27 카테고리 없음

두 가지 단상. 2014.06.01


(아래 글은 어제 새벽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폰으로 적은 뒤 '게시'를 눌렀건만 사라져 버린 글을 다시 정리하여 적는 글입니다ㅠㅠ 아닌 새벽에 멘붕..ㅎㅎ)

# 1
어제의 공연은 몇 가지 생각을 저에게 남겼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글로 옮기고자 합니다. 
공연의 시작 시간은 저녁 6시였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만큼 해는 길어질 만큼 길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오후 6시라 하여도 하늘은 밝았습니다. 일찍이 제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고 또 이미 자리에 착석해 있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얼굴을 갖고 있고 어떤 옷을 입었고 무엇을 읽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이 있었지만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알아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공연은 약 6시 반 정도에 시작했습니다. 공연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는 저물었고 어둠은 밀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학교 측에서 나눠준 형광봉을 하나 둘씩 꺼내어 들었습니다. 밤이 완연히 깊었고 사람들이 들고 있는 형광봉의 물결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는 개별 사람의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굴과 옷 그리고 누구와 왔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자 얼굴과 옷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흔들리는 형광봉만이 보였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만이 보였습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어두워지자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서 있었다고 해도 사람이었습니다. 어두움은 개별성을 매몰시켜 버렸습니다. 대신 보편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낮은 우리에게 각자의 차이를 드러내 주었지만 밤은 그 차이를 무시하고 단지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인권이나 '인류의 진보' 등은 개별 주체의 노력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이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듯 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죄로 지금도 어디선가 간을 독수리들에게 쪼아 먹히고 있습니다. 불이 가져다 준 것은 낮과 같은 밤입니다. 밤이 되어도 사람들은 낮에 보는 것과 같이 개별적 주체로 다른 사람을 인식합니다. 오히려 더욱 밝게, 더욱 선명하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하고 구별하고 구분짓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우리에게 문명을 가져다 주었지만 가끔은 그 불을 숨겨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종교와 인종, 외모와 장애 등은 낮이 우리에게 준 기준들입니다. 밤이 되면 고고히 흐르는 인류의 파도 속에 들어갑니다. 개별적 주체가 강조되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인권과 인류 그리고 그것을 신장하기 위한 노력들은 밤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아침이 되고 낮이 밝겠지만 밤은 우리에게 어둠을 선물해 '인류 보편의 평등'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저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어둠 속의 사람을 보는 것 그리고 그들이 흔드는 형광봉의 흐름을 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잊고 지냈던 사람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 2 
대학원에 들어오고 난 뒤 신기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같은 시간에 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종종 일어나기도 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좋은 점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그 대안 제시나 수단 확보 등에 다른 측면이 있을 때 방향을 잡기 쉽습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갖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점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경우 창의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기존의 형식을 깨는 신(新) 사고의 등장을 막을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쁜 점 역시도 공통으로 흐르는 생각의 기준이 있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기도 합니다. 
바야흐르 선거의 계절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가끔 우려되는 것은 너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만이 진실이라며, 그것을 생각의 기준으로 세울 때가 있습니다. 가령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인 '자유민주주의'가 그렇습니다. '자유'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공유, 기준의 설정이 명확히 이뤄지지 않으면 대안은 제시되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 그 기준에 대한 토론을 하기에는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여러 가지 공약들을 많은 사람들이 쏟아냅니다. 가끔 상반된 내용들의 공약들이 한 후보의 공약집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또 어느 일방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인 양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문제의 원인이 '서로 공유하는 생각의 기준'이나 '가치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기준은 '시민의 행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막연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전에 많은 정치적 실험들을 통해 어떤 방향이 옳은 방향인지에 대한 검증 역시 어느 정도 완료되어 있다고도 봅니다.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을 각 후보가 잘 인식하고 있다면 어느 후보가 되든 큰 상관은 없어보입니다. 행복을 '지금 당장' 실현할 것인지 '몇 년 뒤에' 실현할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그 기준이 형성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같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떤 기준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그로부터 대안을 찾고자 하는 행위는 선호되지 않습니다. 시민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기준과 정치인이 갖고 있는 기준이 다를 경우 정치는 삶과 괴리됩니다. 같은 생각의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수단과 대안을 제시할 때 좋은 사회가 형성되고 그 방향성도 가질 수 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같더라도 구체적인 방안과 실행 방법은 무수히 다를 수 있습니다. 최근의 한국 정치를 보면 그 생각 자체가 달라 무의미한 것들로 논쟁하고 비난하는 듯한 모습들을 봅니다. 지켜야 할 가치, 즉 '시민의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사회적 토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p.s 여기서 '시민'이라는 표현은 '서울시'의 시민이 아닌 자발적이며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말합니다.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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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16. 16:45 카테고리 없음

단상들 


# 1 
거시사는 박력있지만 미시사는 매력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크든 작든 어떤 이야기나 역사는 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 

# 2 
행복에도 한계가 없듯이 불행에도 한계가 없다. 

# 3 
실제로 있었던 실험이다. 쥐 세 마리를 하나의 우리에 가둬놓는 실험을 설계했다. 한 마리는 강한 쥐, 다른 한 마리는 평범한 쥐, 마지막 한 마리는 매우 약한 쥐. 강한 쥐와 평범한 쥐와 약한 쥐가 모여 있을 때는 강한 쥐가 나머지 두 마리의 쥐를 통제했다. 강한 쥐를 빼고 평범한 쥐 두 마리와 약한 쥐 한 마리를 우리에 넣었다. 평범한 쥐 두 마리 중 조금이라도 더 센 쥐가 나머지 두 마리를 통제했다. 약한 쥐는 어떤 실험에서도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했다. 
이번에는 약한 쥐 세 마리를 한 우리에 가뒀다. 초반에는 서로의 눈치를 보기에 바쁘던 쥐들이 어느 순간 위계질서가 정해졌다. 분명 약한 쥐 세 마리가 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위계질서가 잡히고 가장 강한 '약한 쥐'가 나머지 두 마리를 통제했다. 아주 사소한 차이였지만 분명 나머지 두 마리는 굴종했다. 
동물만이 이럴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급'을 나눈다. 키가 얼마이고 연봉은 얼마이고 대학은 어디를 나왔고 지금 사는 곳은 어디인가 등의 기준은 무수히 많다. 키가 같은 사람끼리는 얼굴을 보고 얼굴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옷을 보고 옷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시계를 보고 시계가 비슷한 사람끼리는 차를 본다. 같은 대학을 다녀도 무슨 과를 다니는지를 나누고 같은 과를 다니는 사람끼리는 무슨 전형으로 들어왔는지를 나눈다. 같은 전형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학점으로라도 다른 사람과 자신의 급을 나누려 한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의 특성을 좌지우지하는 '성별'까지 나누고 나누고 나눈다. 그러다가 어떤 한 분야에서든 모든 분야에서든 압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볍게 찬양한다. 찬양한 이후 또 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하며 자신이 더욱 나은 것을 찾는다. 농담으로라도 '원빈의 키'와 '김태희의 연기력'과 '정몽준의 아들'과 '유재석의 젖꼭지'를 찾는다. 찾고야 만다. 그러고선 혼자 만족한다. 하지만 앞에서는 엎드린다. 
자기만의 고유한 영역이 없다보니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당연하다. 경쟁이라는 것은 겹치지 않으면 안되고 경쟁을 겪고 나면 순위는 생기기 마련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지. 인간이되 인간이지 않은 인간들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참 답답하게 산다. 

# 4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하면 된다. 

# 5 
현 정부를 나는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블랙코메디 정부" : 웃음을 주되 그 웃음이 기쁘지 않다.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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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14. 13:25 내 생각

늦은 밤, 일본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오전에 잠을 충분히 자서이기도 하지만, 뭔가 잠이 들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젊음이라는 가치를 느낀 지, 이제 4년이 지나간다. 20살 때 느끼기 시작한 ‘젊음’.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어떤 방향으로든 젊음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젊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젊음’의 가치는 ‘실패’다. 단순한 반어로서의 지식인처럼 굴기 위한 어구가 아니라, 순수한 의미의 실패다. 하지만 실패를 예상하면서 ‘젊음’의 가치를 활용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법, 실패의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 마치 바둑을 두고 난 뒤, 진 사람이 조용히 앉아서 복기(復記)를 하는 것과 같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실패는 두려워 할 것은 못 된다. 하지만 분명 하나의 선택지, 그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실패를 ‘하더라도’ 해보자 라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일에 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시쳇말로, ‘때린 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맞은 놈은 평생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24년 동안 살아오면서, 분명히 그러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맞은’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분하게 생각하고,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었으면 하는 후회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후회로,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것인가.

복기는 결코, 진부하거나, 보수적이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행위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삶을 ‘바둑’에 비유한다는 것이 일정한 오류의 수준을 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의 바둑돌을 두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그 바둑이 끝나는 시점은 짧게는 오늘 하루, 길게는 우리가 다시 뜨지 못할 눈을 감을 때까지는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20대, 청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금의 우리는 ‘일정한 직업’을 가지기 전까지는 분명 한 판의 바둑이다. 그 바둑판에서 배웠던 것을 우리는 남은 인생에서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 때의 실수를 되돌아 보면서, 또는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 난 생각한다.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실수를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는 한 번의 후회를 낳지만, 그 후회가 낳는 씨앗은 또 다른 후회라기 보다, 한 층 더 유전적으로 진화된 생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파울로 코엘료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궁수는 과녁을 수없이 빗맞혀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같은 동작을 수천 번 반복해야만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활과 자세, 시위, 과녁의 맥락이 통째로 머리 속에 자리잡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적었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 속에서 스스로 그 실패를 인정하고, 그 인정한 그 자신이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덧대어지는 순간, 그 과녁은 더 이상 먼 것이 아니며, 둥근 것도 아니고, 또한 맞추지 못할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글을 적을 때에는 항상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진정 나는 이런 글을 쓸 만큼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의, 태평양의 상어들에게 충분히 나눠줄 만큼의 크기를 가진 간, 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분명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새로운 일을 할 때는 항상 무엇인가 두렵고, 영원한 성공 보다는, 이것으로 인해 내가 잃게 될 것들에 대한 나열이 우선시 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뭔가 즐길 수 있겠다는 느낌은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일에 실패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맞으면서 즐기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보자. 실패를 해보자. 이렇게 마음 먹고, 시작한 일에서 성공을 한다면, 그것은 뭐랄까.정말 맛이 없어 보이는 음식을, 맛이라도 볼까. 맛이 없으면 뱉어 버려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입에 넣은 순간, 그 음식이 매우 맛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릇을 황급히 손에 집어 드는 그런 기분과 같은 것일까?

 

수많은 책에서 ‘실패는 젊음의 특권’이라고 광고하고 설득하고, 또 인식시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실패를 하기에는 사회, 적어도 내가 느낀 사회, 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며, 또 그 한번의 실패를 두고 두고 그 사람의 그림자에 보이지 않는 무게를 싣기도 한다. 난 실패를 두려워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옆의 친구들이 실패에 굴복해서 쓰러져가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들도 그를 위로하기 보다, 오히려, 그 실패의 대상이 내가 아니었다는 데 안도하고, 실패한 사람과 다른 길을 가리라고 마음 먹는 순간에 우리는 ‘실패에 대한 연계’를 잃게 된다.

‘실패에 대한 연계’, 어릴 적 바른 생활 시간에 배웠다. 길을 가다가. 친구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주라고. 하지만 우리는 지금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세우는 법을 배웠다기 보다, 넘어진 친구를 다시 한번 확실히 자근자근 밟아주고, 그 위를 넘어가는 법을 자연스레 배워가고 있다. 실패에 대한 연계,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왜 넘어져 있냐고 물어보는, 그 정도의 관심, 그리고 그 넘어짐에서 자신을 다시 한번 발견하고, 내가 만약 저 상황이었으면 넘어졌을까, 이 친구가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를 같이 고민하는 시점이 된 것은 아닐까.

 

실패를 경험해보세요. 달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씹다보면 익숙해지고, 그것이 결국은 약이라는 것을 ‘허준’의 ‘동의보감’을 빌어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쓴 것이 약이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다시 한번 파울로 코엘료의 같은 글의 마지막으로, 나도 마지막을 갈음합니다.

‘책임을 완수하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완수했을 때, 궁수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는 비겁하지 않았으므로.’

 

 

20090507 제1편 – 실패에 대한 단상 


posted by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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