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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6.04.17 어리석은 질문
  2. 2016.04.12 아끼는 법
  3. 2016.04.04 거칠 혹은 까칠
  4. 2016.04.04 기타와 휘발유
  5. 2016.03.30 100쪽
  6. 2016.03.29 샤프를 쓰지 못한 이유
  7. 2015.03.09 현우의500자_92
  8. 2013.07.01 목소리도 늙을까
2016. 4. 17. 20:13 내 생각

어리석은 질문


운전면허를 갓 따고 운전에 재미를 붙여나가고 있던 20살이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아버지로부터 운전을 하나씩 배웠기에, 말 그대도 실용적인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운전 면허 시험장 코스는, 떨어져가며 한 코스씩 한 코스씩 익혀 나갔다. 몇 번의 낙방 결과 운전면허를 손에 쥐게 되었으니 그 재미와 기쁨은 크디 컸다.


택시를 탈 일이 있었다.


운전에 재미를 붙이고 있을 시기였던 만큼 매일 운전을 하시는 택시기사님은 얼마나 재밌을까 생각하다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택시 기사님께, 20살의 천진난만함을 담아 물었다. 기사님께서는 이렇게 재미난 운전을 매일 하시니 참 좋으시겠어요. 기사님께서 나를 슬쩍 보시고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뭐든 처음에는 재밌는데, 그게 먹고 살 일이 되면 재밌지 않아요.


그 당시에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재미가 없어지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다들 힘들게 운전면허를 딴 만큼 이렇게 운전을 하는 것 자체가 재미가 없을리 없다는 일종의 근거 없는 확신도 들었다.


그러고 시간이 꽤 지나, 법무사 사무실에서 일할 때 였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점심과 저녁 시간을 포함해 약 10시간을 운전을 해야하는 업무가 이어졌다. 졸음을 이기기 위해 아메리카노와 담배를 물고 살았던 당시였다. 서울의 구석구석과 경기도라는 것만 알고 있던 평택 등을 직접 왕복하며 이틀에 기름 한 통을 비우며 운전을 하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운전이 재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해야했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은 내 생활비와 조금씩 모으는 저축을 위해 필요했다. 다른 재미난 일을 하는 것을 찾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고 밤만 되면 피곤해서 쓰러지기 일쑤였다. 운전은 재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고, 생계라는 항목 속에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20살의 내가 택시기사님께 했던 질문은, 살면서 경험이 얼마나 많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지를 모르는 내가 던진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쉽게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때로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론 매우 쉬워보이기도 한다. 힘들어 보이는 일들도 많은 것은 당연하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기에 사람들은,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길 원한다. 간접경험도 경험일 수 있지만, 실제로 겪는 경험을 통해 자신이 느끼는 것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경험 뿐이다.


경험을 직접적으로 하든, 간접적으로 하든 그 경험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은 경험 뿐이면 안되지만, 결국 경험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해야 한다. 타인의 경험을 읽거나 들으며 나의 경험이 될 수도 있었을, 혹은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던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


20살 때, 운전에 재미를 느꼈던 나는, 택시 기사님의 삶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하지 못했다. 이후 운전을 하지 않다가 운전이 삶의 큰 부분으로 들어왔을 때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내가 바보 같고 어리석은 탓일 수 있겠지만, 사소한 것이라도 내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단지 경험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타인과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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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2. 19:06 내 생각

"아끼는 법."

 

---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하나. 명품 화장품, (bag)이나 고급 승용차 등 비싼 가격을 주고 산 것은 아끼고 저렴한 것들은 잘 아끼지 않는다.

 

---

 

몇 해 전, 아버지께서 해외에 나갔다 오시며 남성용 스킨 하나를 내게 선물로 주셨다. 향이 진했고, 병이 예뻤다. 나는 그것을 면도 후 피부결을 정리할 목적으로 상쾌하게 막 썼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유럽에 갈 일이 생긴 나는 비행기 안에 앉아, 내 손바닥에 흥건히 흐르던 그 스킨을 떠올리며 울적해졌다.

 

그 남성용 스킨이 비행기 내 면세 카탈로그에 비싼 가격으로 예쁜 사진과 함께 떡! 하니 실려 있는 것이었다. 몇 십 만원이 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스킨의 가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목욕탕 안의 '쾌남'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화가 났다.

 

---

 

사람들은 비싼 것은 아낀다. 그렇기에 그것은 오래 가고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 비싼 것이란, 그것을 사기 위해 들였던 자신의 노력이 돈으로 환산된 것일테고 그런 만큼 아끼게 되는 것이리라. 반면 싼 것은, 망가지면 또 다른 거 사면 되지- 하는 심정으로 함부로 쓰거나 잃어버려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을 얻기 위해 들인 노력은 미미하기도 하다. 심지어 망가지거나 잃어버리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

 

친구는 비싼 것일 때도 있고, 아주 값싼 것일 때도 있다.

 

---

 

처음부터 친구인 사람은 없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같은 학교를 다녀서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고 어려운 시기를 같이 겪어냈기에 나이와 성별을 떠나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친구들 중에 비싼 친구도 있고, 싼 친구도 있다. 비싼 친구란 다시 말하면, 오래된 친구다. 친구라는 단어 자체가 오래되고 가까이 사귄이라는 뜻이라면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요즘, 그렇지 않다. 오랜 친구는 서로 아낀다. 지금의 우정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시간을 들였다. 헤어지거나 잃어버린다는 생각만으로도 우울해진다. 하지만 값싼 친구는 그렇지 않다. 막 대하거나 영영 보지 않게 되더라도 우울하긴 커녕 오히려 통쾌한 친구도 있다. 값싼 우정이란 들인 시간과 노력 따위 의미가 없다.

 

---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중 좋은 친구가 되는 사람과 별 것 아닌 친구가 되는 사람도 있다. 생각해보면 좋은 친구란 별다른 친구가 아니다. 특별한 추억이 있어서 좋은 친구가 아니라, 그 친구와 좋은 시간과 추억을 갖고 싶기에 좋은 친구다. 별 것 아닌 친구란, 막 대하는 누군가이다. 친구라고 이름 붙이기도 싫을 정도의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좋은 기억이나 추억 따위 생각도 나지 않고 만들고 싶지도 않다.

 

---

 

사람들은 비싼 것은 아끼고, 싼 것은 아끼지 않는다. 우정도 그렇다. 어떤 계기가 되었든 만나게 된 사람이면, 친밀해지려는 노력까지는 아니더라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아야 할텐데, 그러지 않는다. 저 사람 말고도 사람은 많아 보인다. 명품과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명품은 상처 받지 않지만, 사람은 상처 받는다는 점이다.

 

---

 

반성해본다. 싼 것이라 생각해서 막 썼던 비싼 스킨처럼,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막 대했던 친구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고. 또 그 친구가 느꼈을 - 혹은 내가 느꼈을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하고. 사람의 가치를 값으로 따졌다는 것, 이것부터 반성해야 할 듯 하다.

 

---

 

마음이라는 것은 쓰면 쓸수록 넓어지는 것 같다. 서로에게 배려하는 마음이란, 특히 사람에게 있어서 그런 마음이란 나도 사랑받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 듯하다. 좋은 친구란 우연의 결과라기보다 배려가 준 필연의 결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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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4. 19:16 내 생각

"거칠 혹은 까칠"

 

20대 이후가 되어 나를 만난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어릴 적에 꽤나 재밌는 사람이었다. (재밌는 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고, 남을 잘 웃기는 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때는 흔히 말하는 '오락부장'으로서의 복무를 충실히 했지 말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에는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닌다고 별명이 '씨산이' 였을 정도였다. (씨산이는 사투리로, 바보 같이 실실 웃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던 어린이가

 

20살이 넘고 머리에 뭔가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남을 웃기는 일에 주저함이 많아지게 되었다. 투철한 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 내가 웃기는 것을 즐겨 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대방이 웃을 상황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좋아하지만 편하게 하지 못하는 '장난' 이 대표적이다. 평상시에는 장난을 잘 받아주던 친구들이, 어느 날은 내 장난에 정색을 한 경우가 있었다. 그 원인은 친구가 '몸이 아파서' 일수도 있었고,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되묻지 못했고, 어느 사이엔가 분위기를 살피고 친구를 배려하다 보니 진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배웠기 때문이다. 20살 때 처음 들어온 대학의 오티를 가는 버스 안, 학생회장 형님의 오티 관련 안내를 듣고 있었다. 당시에는 어색했던 '양성 평등'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오티에 가게 되면, 여장을 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여장은 여성을 희화화하는 도구이며,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중에는 여성을 포함한 많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멸시 혹은 조롱이 담겨 있다 했다.

 

몰랐다.

 

어릴 적 내가 웃기는 현우였을 수 있었던 것이, 다른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조롱해서 웃긴 것이 아님에도 '혹시 내가 그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없지는 않았을 테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니, 그것을 알면서도 나쁜 일들을 저지른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몇 가지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뭔가 투박했다.

 

배운 것을 적용하고 써먹는데 있어서, (나의 표현이지만) 서울사람다워지지 않았다. '서울사람답다'라는 말은 뭔가 세련된 느낌이나 먼저 크게 배려하는 느낌의 어떤 것이지만, 나는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고집이 있었고, 배려를 너무 티나게 했다. 무언가 의도가 있는 듯 보였던 배려들은 오히려 많은 오해들을 낳았다.

 

언젠가 한 동생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 조금 더 매끈할 수 없어요? 형의 거칠거칠한 면이랑 잘 맞는 사람은 형과 친해지고 형을 더 잘 알 수 있겠지만, 형의 그 거친 면에 상처를 받는 사람도 많을 듯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 나름의 배려와 공부를 통해 얻은 어떤 것을 글이나 말로 표현할 때 그 거친 면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되려 그 거친 면이 나의 모습이라며, 세상 모든 것이 다 쉽고 편하고 별 일 없이 돌아갈 때 나 혼자라도 그렇게 거친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마치 김영랑의 시 '독을 차고'의 화자와 같은 심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외로워졌다.

 

몇몇의 편한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고 인정했지만, 새롭게 사귄 친구나 나의 거친 면을 원하지 않게 확인한 친구들은 그 거침을 까칠함으로 인식한 듯 했고 그렇게 멀어져갔다. 결국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배려'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배려는 없을 것이라 여겼던 나는, 사실 내 주관에 맞춰 배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타인의 몸과 마음 모두에게 어떤 '불편함'을 주고 있었다.

 

그럴수록 점점 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쉽게 변할 수는 없었다. 지금 적고 있는 이런 글도 마찬가지였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글을 적자니 이전에 써 오던 '나의 스타일'의 글들이 가지는 관성이 있었고, 사람을 대할 때도 이전과는 다르게 갑자기 '너의 생각은 이런 부분이 잘못되었구나~‘ 라거나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고 차근차근 설명이나 해명을 할 수 있게 되기는 쉽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고집 센 사람이 무엇인가를 잘못 배우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은 가득 남아 있고 단지 그것을 배우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나은 사회를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나의 입장으로서는 여러모로 답답한 측면이 없지 않다. ‘고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싶으면서도 또 세상이라 부르던 사회라고 부르던 복잡다단하게 돌아가는 이 곳에서 나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강변해보아도 결국 외로운 사람은 나뿐이다 싶다.

 

가끔 혹은 자주 나도 매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몸도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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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4. 00:54 내 생각

"기타와 휘발유"


고등학교 1학년, 기타를 배웠다. 버스정류장 앞 조그만 기타 학원에서 성함이 '박진영'이라는 선생님으로부터 기타를 잡는 법부터 코드를 쥐는 법 등 하나씩 기타 현이 내는 소리를 만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몇 개월 동안 배운 실력이지만, 코드의 운용이나 멜로디 잡는 법을 열심히 배운 덕에 그해 학교 축제에서 '비오는 거리'라는 노래를 무대 위에서 부르기도 했다. '인기' 처녀 선생님이었던 담임선생님과 반장인 나, 부반장, 총무 이렇게 4명이서 무대를 꾸몄다.


기타를 배우니


다른 노래를 들으면 기타 소리에 관심이 갔다. 드럼이나 베이스, 보컬의 소리 사이에서 기타의 음에만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이렇게들 잘 칠 수 있는지 흥분하며 악보를 찾아 연습을 해보기도 했고, 기타 연주곡을 찾아듣거나 관련된 영상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휘발유?


속초와 강릉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 친구의 차로 이동을 했던 터라 서울에 도착하면 기름을 넣어야 했다. 친구의 차는 경유 차. 주차장에 고이 모셔져 있지만 내 차는 휘발유 차다. 친구가 기름 가격을 보는데, 친구는 경유의 가격을 본다. 나는 휘발유의 가격을 본다.


평소에도 나는 휘발유 가격만 본다. 경유의 가격이야, 내 차가 먹을 것이 아니니 관심 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기타도 그랬고, 휘발유도 그랬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이 가는 것을 먼저 보거나 아니면 그것만 본다. 노래는 기타 소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기타 소리만 들었고, 도로 위에는 휘발유 차만 다니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휘발유 가격만 보았다. 나 뿐만 아닐 듯 하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어떤 지위에 있는지에 따라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에 따라 - 심지어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이나 듣고 싶은 것만을 본다.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적은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저)가 먼 친척인 아우구스투스를 로마 초대 황제로 만들 때, 그를 평가하길.


"보고 싶은 것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라 평했다.


보고 싶은 것이든 듣고 싶은 것이든 먹고 싶은 것이든 자기가 하고 싶고 관심이 있는 것만 보고 듣고 느낀다면, 편하다. 상식이라는 것에 대한 상식이 사라진 최근에는, 결국 자기가 좋은게 좋은 거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나의 관심사와 타인의 관심사, 나의 위치와 타인의 위치 따위의 것들에 대해 비교는 하지 않아도 배려는 해야 한다. 배려를 해야 좋은 음악이 나오고, 다양한 탈 것들이 도로 위를 다닌다. 배려를 해야 좋은 정치인이 나오고, 좋은 나라가 된다. 굳이 정치가 아니라도. 좋은 가족이든 무어든.


살아가는데 있어 아는 것이 많을 필요는 없다. 살아갈 만큼 필요한 지식이면 된다. 하지만 살아가는데 있어 이해해야 하는 것이 많을 필요는 있다. 나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타인에 대한 - 나아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여나간다면, 최소한 내 이야기만 무조건 옳다는 사람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좀 더 나은 어른이나 사람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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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30. 12:28 내 생각

"100쪽"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고전이라는 이름 말고 또 다르게 불리기도 한다. '누구나 제목은 들어보았지만,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드문 책'. 맞는 말인 듯 하면서도 또 누군가 지속적으로 사서 읽으니까 출판되는 것일테니 반쯤 맞는 말이라고 해두어도 될 것 같다.


나 역시도 제목을 들어본 고전을 사서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세 번 이상 어떤 책의 제목을 듣게 되면 그 책은 꼭 읽는 편인데,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세 번은 훌쩍 넘게 들었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고전들을 죽 읽다보니, 한 가지 법칙이 자연스레 생겼다. 그것은 바로 '100쪽 까지만 읽자' 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100쪽 까지만 읽고 읽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고전은 시간적으로 오래된 책들이기도 하고, 또 다양한 국가에서 적힌 책들인 만큼 시대나 배경을 이해하기 힘든 측면들이 많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정말 어려운 책들을 만나도 우선 '100쪽' 까지만 읽자고 마음 먹는다.


보통 책이 300쪽 전후라고 한다면 100쪽은 3분의 1은 읽은 셈이다. 500쪽의 책이라 할지라도 100쪽은 5분의 1.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다.


왜 꼭 100쪽 까지 일까?


100쪽을 지나서야 고전들은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100쪽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어떤 배경인지, 어떤 인물들이 나오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설명이 100쪽 정도가 되면 거의 마치게 되고, 내가 그때까지 책을 다시 책장에 꽂지 않는다면 이제 재미가 생긴다. 또 100쪽까지 읽었는데 억울해서라도 더 읽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고전에서(고전 소설이라 한정지어도 되겠다) 이 법칙은 지켜졌다. 100쪽을 넘게 읽은 책들은 그 결말까지 읽었고, 또 한 권의 책이 나의 책이 될 수 있었다.


책이 이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20년이 된 책도 있고, 50년 된 책도 있다. 이런 책과 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역시도 고전과 같이 100쪽의 법칙이 적용되는 듯 하다.


처음 만났는데, 뿅! 하고 마음이 가거나 '이 사람과는 무조건 친해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친구는,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이라고 영화 '친구'에서는 설명해주고 있듯이 친구는 고전의 전형이라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서 나아가 그 사람의 진실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100쪽이 필요하다. 시간적으로 몇 년이라던지 물리적으로 몇 번 만난다는 것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도록 기다려줄 수 있는 태도가 최근에 들어서는 더욱 필요해진 듯 하다.


읽다가 포기하는 책도 있고, 다 읽고 나서 혹평을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책에 대한, 그 사람에 대한 이해의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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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29. 18:01 내 생각

"샤프를 쓰지 못한 이유"


지금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초등학생은 샤프를 쓸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샤프를 쓰지 말라 하시기도 했고, 부모님께서도 연필을 쓰라 하셨다.


왜 샤프를 쓰지 못하게 했을까.


연필은 매번 깎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었고, 또 연필심이 쉽게 부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샤프를 사용하지 말라는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특별한 이유라기 보다, 샤프를 사서 쓸 수 없는 친구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연필은 저렴했고, 샤프는 초등학생이 사기에는 고가였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혹은 지역만 하더라도, 지금의 기준으로 금수저와 흙수저가 편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편한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또 그와 동시에 부모의 재산이나 직업이 학생에 영향을 끼친 측면도 물론 있다. 옷차림만 보아도 알 수 있었고, 간혹 있는 생일 잔치에 초대받아 가면 그 친구의 환경을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부모의 재산이나 배경이 아이들을 주눅들게 하거나 자신의 현재를 비관하게 두지는 않았다. 아이들과 부모 각자가 서로를 배려하려 노력했다.


최근의 뉴스나 기사들을 보면 자신이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 몇 평의 집에 사는지 등으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구분 짓기'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부모의 직업으로 불려지는 것보다 정도가 더 심하게, 'OOO동'으로 불려지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또 간혹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고급 아파트 단지 사이로 지나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바리게이트를 치고 철조망을 친다는 기사를 읽을 때면, 고개가 자연스레 저어진다.


사회적 차별이란 별 것 아닌 듯 싶으면서도 한 사람에게, 특히 그 사람이 어린 아이라면 크게 영향을 끼치는 듯 하다. 옛날이 그립다는 생각이 아니라, 차이를 차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예전의 태도가 지금은 많이 사라진 듯 하기 때문이다.


사회와 학교 그리고 부모가 배려하는 속에서, 연필을 사용하게 된 아이들은 샤프를 사용하지 못하는 불만이야 물론 있었겠지만 다른 친구와 자신을 부모의 직업이나 경제력에 의해 차별하지는 않았다.


헬조선이니, 금수저니 흙수저니 다양한 계급의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지금에서, 나는 연필 한 자루에 담긴 그 배려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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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9. 06:32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92


손이 하나 없는 친구가 있었다. 왼손 하나 뿐이었다. 혈관기형으로 오른손에 피가 많이 쏠려 잘라 냈다며, 친절히도 샤프심과 볼펜으로 예를 들며 자신의 기형을 설명해주던 친구였다. 중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이 친구는 오른손에는 항상 붕대를 감고 있었다. 수술 흉터가 남아 있다고는 했지만, 붕대를 꼭 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붕대는 항상 깨끗했다. 언젠가 한 번 물었다. 너는 왜 붕대를 감고 있냐고. 굳이 필요없는 붕대를 왜 하고 있느냐고. 친구가 대답했다. 사람들이 내 없는 손을 보고 언짢아 할까봐. 같은 중학생이었음에도 친구의 배려는 깊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배려심에서 한 일이었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 이유도, 자신과 같이 아픈 사람을 고치고 싶기 때문이라 했다. 지금은 한의사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친구가 떠오르는 이유는 배려, 단 이 두 글자가 고팠기 때문이다. 나와 남 모두가 고픈 배려의 굶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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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1. 00:50 카테고리 없음

목소리도 늙을까 2013.7.1


날짜를 적으려고 보니 벌써 7월이다. 2013년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고, 추운 겨울을 잊은 채 더운 여름의 한복판에서 '덥다'를 연신 주억거리고 있다. 계절의 변화만큼 사람이 변한다면, 사람은 그 형체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2013년의 반을 보낸 지금으로서 앞으로 남은 반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해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글 주제와 상관 없는 이야기를 몇 줄 적었다. 하지만 전혀 상관이 없지는 않다.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 즉 우리가 나이가 듦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배경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라는 표현을 누가 처음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참으로 오묘한 표현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책임져야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므로 '나이를 짊어진다'라거나, 이 생에서 쓸 수 있는 시간들이 점점 줄어드니 '나이를 흘려보냈다'가 아니라 나이를 먹는다라. 아마도 처음 이 말을 사용한 사람은 나이가 듦에 있어서, 또 사람이 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 '먹음'에 관해서 강조를 했을 것이다.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욕을 먹기도 하고, 사랑을 먹기도 한다. 사람은 먹음으로서 혹은 마심으로서 사람의 존재를 형성하고 있기에 나이 역시 먹는 것으로 표현했지 않았나 싶다. 


나이가 드는 이유가, 세포의 노화 때문이라는 것은 생물학의 설명이다. 사실 사람의 세포는 일정 기간을 주기로 새롭게 태어나고 또 죽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지속적으로 모습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눈에는 보지이 않지만 수많은 세포들이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 노화가 간섭을 한다. 태어나자 마자 세포는 자신이 몇 번 정도 태어나고 죽으면 더이상 다시 태어날 수 없는지를 알고 있다. 정확한 기간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또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세포는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한다. 이런 원리로 우리는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세포가 늙어가는 것이면, 사람의 목소리는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에도 늙는 것일까? 


목소리가 늙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긴 하다. 목소리는 나이를 메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 늙는다. 어린이의 목소리와 변성기 즈음의 목소리는 다르고, 또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면 또 목소리가 달라진다. 미묘한 차이겠지만 어제의 목소리와 오늘의 목소리는 다르다. 목소리가 바뀌는 것은 성대의 세포가 늙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성대가 노화되니, 목소리가 늙는다' 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싫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목소리가 늙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늙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늙기 시작하면 목소리가 늙는다.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의 목소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의 연령을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리고 목소리만을 듣고도 사람의 성격이나 살아온 과정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하여 어떤 이야기를 했고,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척도이다. 생각이 늙는다는 것은, 지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관계된 주변 상황에 대한 애정, 관심 혹은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주변 사람이나 사회에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가족에게도 애정이 없는 사람의 목소리는, 딱 그 정도로 매말라 있다.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에서 관심이 생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주위 사람이나 가족, 사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고, 또 잘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좋은 목소리가 유지될 수 밖에 없다.


목소리가 좋다 나쁘다의 기준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목소리라는 것이 기준이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목소리일 수는 있지만 일반적인 기준은 존재한다. 그리고 아무리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일 욕설이나 타인에 대한 비방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좋은 기술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에게 그 가치를 인정해 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좋은 목소리는 결국, 자신이 사람 혹은 사회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그 사람이 목소리를 가지고 주위 사람에 좋은 영향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의 증거이다. 


나는 목소리가 좋은가. 좋지 않다. 저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나는 내 목소리를 가지고 사람들에게나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기에 좋은 목소리라고는 할 수 없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좋은 목소리라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들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에 그들에게 내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목소리도 늙을까. 


늙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사람의 목소리는 이미 늙었거나 늙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늙음'은 나이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밝혀두고자 한다. 10대 청소년도, 20대 청년들 사이에도 목소리가 늙은 사람이 있다. 분명히 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반대로 목소리가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다. 몇몇 아이돌 출신 가수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어린 아이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목소리가 어린 이유는, 자신의 생활 반경 내에서 변화가 없이 주위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고도 살 수 있기에, 딱 어린 시절 그때 그대로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목소리가 늙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어린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도 자신의 주위에 대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를 잘 생각해보자. 목소리가 좋다는 것이, 자신의 도구가 좋다는 이야기가 아닌 여러분이 하는 이야기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생물학적인 나이를 떠나, 배려-공감-애정을 기준으로 하는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목소리에 대해서 내 생각을 적은 것이다. 선천적으로 특이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을 논외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특이하기에 또 소수이기에 무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두고자 한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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