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가고파라가고파

Notic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92,043total
  • 0today
  • 4yesterday

'생각'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6.04.22 친함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2. 2016.04.04 거칠 혹은 까칠
  3. 2015.04.02 현우의500자_121
  4. 2014.06.01 두 가지 단상.
  5. 2013.07.02 벌레 한 마리
  6. 2013.06.25 어떻게 적어야 하지?
2016. 4. 22. 01:30 내 생각

친함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가끔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는 장면이 있다. 그건 고3이었을 때 수능을 마친 뒤의 일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패잔병들의 모임처럼, 수능이라는 전쟁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져 버렸으니 자존심이라도 지켜보려는 친구들은 날카로웠다. 사소한 일에도 큰 시비로 번질 수 있었으니 서로 졸업 때까지 조용히 지내자는 암묵적 합의도 있었던 듯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반의 한 친구와 다른 반의 한 친구가 싸운다는 소식이 복도로부터 들렸다. 이 싸움이 있기 몇 달 전 우리 반의 두 친구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불똥이 이상하게 나에게 튀었다. 그 둘의 싸움을 말리거나 중재할 사람이 나 밖에 없었는데(?왜일까?) 내가 말리지 않았다며 꽤나 욕을 들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누군가 싸움을 하면 말리겠노라- 하고 했던 허망한 맹세를, 수능이 끝난 뒤에야 지키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 ! 싸우지 마라. (한껏 짜증난 목소리로)

 

한참 서로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사지하고 있던 두 친구의 사이를 슬며시 쑤셔 들어갔다. 그런 뒤 한껏 힘을 주어 둘을 떼어냈다.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때만 해도 힘이 셌던 것인지 둘은 생각보다 쉽게 멀어졌다. 우리 반 친구에게 그만하라며, 교실로 들어가자고 하는 순간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돼지쉐끼(새끼의 사투리, 쉐끼), 니는 뭐꼬?

 

? 나한테 한 이야기일까? 정말?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반 친구는 정확히 내 눈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 난 그냥 싸움 말린거 밖에 없는데? 하고 냉정을 찾았으면 다행이었겠지만 나 역시도 무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이 있는 느낌으로 갑자기 싸움을 시작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바라!’ 라고 시작한 싸움에 옆반 친구는 참 많이도 맞은 듯 했다. 체급이 달랐다고 솔직히 고백해야겠지만, 어쨌든 나의 싸움은 두 친구를 말리던 것보다 더 격렬하게 말림을 당하며(?) 끝이 났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 화장실을 갔다.

 

가보니! 나와 싸웠던 그 친구가 밀대자루를 손에 쥐고, 나를 죽일거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씩씩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나도 죽을 만큼 소변이 급했으므로, 그 친구가 보이지 않는 쪽으로 총총거리며 가서 소변을 시원하게 보고 들키지 않은 채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난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한 무리의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아왔다.

 

잠시 배경설명.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이상한 교육을 했는데 대학처럼 학생들이 교실을 옮겨다니며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시기가 잠시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교실 앞에 넓은 공간을 만들어 일종의 휴식공간이 있었다. 배경설명 끝. 나는 그 한 구석 모퉁이에 앉아 당시 유행하던 힐리스를 신은 채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를 찾아온 한 무리의 친구들은 나의 위치와 정대각선의 모퉁이에 한껏 어깨와 미간에 힘을 주며 섰다. 굳이 분류하자면 양아치일까. 3이 되어서도 와해되지 않았고, 수능을 치고서도 저러고 있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에게는 그게 우정인 듯 보였다. 무리 사이에서 마치 대변인인 양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평소 얼굴과 이름은 알지만 딱히 친하다고 할 친구는 아니었다. 그 역시 양아치였다.

 

니가 내 친구 때렸나?

 

일종의 보복성 방문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 한 걸음 나왔던 친구가 다시 묻는다. 돌았나?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갑자기 잘 안난다. 좀 길게 대답했던 것 같은데,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저 새끼가 내한테 먼저 욕을 했다. 나는 싸움을 말릴려고 한건데, 내한테 시비 걸고 그러면 안되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비논리적인 대답이었는데, 이 대답이 먹혔다. 무리의 친구들이 생각해봐도 싸움 말리는 사람한테 다시 시비거는 건 아니었나 싶었던 듯 하다. 한 걸음 나왔던 친구는 다시 뒤로 들어갔고, 그 무리의 친구들 중 일부는 나에게 앞으로 조심해라, 툭툭 던지며 모두 다시 자기 교실로 들어갔다. 나와 싸움을 했던 친구는 양아치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도 나름의 계파는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열심히 조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싸움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런 치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도 적고 있냐.

 

나 한 명 조지겠다고, 우루루 몰려온 그 친구들 - 결국 다 고등학교 동창들이긴 하지만 -이 참 미웠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기가 맞았다고 친구들을 불러온 그 친구보다 무슨 일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랑 단지 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해코지하려 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그 친구들이 난 참 미웠다.

 

그럴 수도 있다.

 

, 그럴 수도 있다. ‘친하다는 것 역시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 내가 속하지 않은 그룹이나 집단의 친함이 나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러고 있지 않은지 반성을 해보게 되는 측면도 있다. 내가 당할 때는 느끼는 것을, 가해자가 되면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진 이중성인가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감정의 근원이 친함이라는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기도 하다.

 

자주 만난다. 이런 상황.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 않아도,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또 다른 사람과 어울리도록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된다. 정치에 있어서는, 자신에게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물급 인물이나 정당에 친밀함을 느껴 거물급 인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을 막무가내로 비난하거나 또는 상대 정당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을 일삼기도 한다. 정치에서 뿐만 아니다. 오히려, 정치를 포함하는 공적 영역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소한 일상에서의 친밀함이 주는 폭력이 더욱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는 친구라 할지라도 나는 누군가와 친하다는 것으로 거의 모든 것이 용인되는 경우도 있고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뒤에 서줄 수 있는 용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이 옳은 행위인지 옳지 않은 행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을 해야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죄를 물을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적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취재하며 내린 결론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주체적인 판단 즉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저런 반인류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지금도 그 울림이 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리거나 혹은 철학적이거나 사상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세운 기준에 의해서 행동하거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정도로도 생각은 그 충분조건은 모두 채운 듯하다. 이런 생각의 기준에 친함이 포함될 수 있을까?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친함이라는 것이 향하는 방향이 중요하다. 내부적인 친함을 외부적인 미움으로 표현할 경우, 친함은 사실 친함이라기보다 추악함이다. 지키려는 것은 고작 자신의 마음 편함정도일지도 모르고 다음에 자신이 같은 경우를 겪게 되었을 때, 다른 이에게 보였던 미움처럼 같이 미워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히 바라건대

 

친함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이 있다면, 그 친함의 외부적 표현도 친함으로 보여주면 어떨까. 아니, 욕심을 버리고 친함의 시작으로 보여주는 건 어떨까 싶다. 친밀함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서 연구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엔 친밀함이란 결국 우연의 결과이다. 가족이 되는 것도 친구가 되는 것도 연인이 되는 것도, 이러한 친밀함의 시작은 결국 우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라도 지금 부모의 아들딸이 되고 싶어 된 사람은 없고, 친구라 할지라도 연인이라 할지라도 우연한 만남에 의해서 시작했다. 그럴 것이면, 지금은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우연한 기회나 친밀함의 시작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우리 사회나 국제 사회나 나아가 향후 형성될지 모르는 우주 사회나 발생할 수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마음 많이 연 사람이 상처받는다.

 

슬픈 문장이다. 위의 문장을 다르게 표현하면, 더욱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 받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결국은 누가 더 친해지고 싶어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 중 누군가가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친밀함을 표현한다면, ‘? 나랑 안친하잖아?’ 라거나 왜 갑자기 친한 척 하지?’ 라는 반응이 아니라, ‘저 사람과 친해질 수 있겠구나.’ 라거나 나도 마음을 열어볼까?’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더욱 넓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친함은 결국 폭력이 발생하는 요소였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많은 전쟁과 갈등의 근간에는 친밀함이 있었다. 더욱 친한 사람을 지키고자 했던 갈등, 자신과 같은 국적을 갖고 있거나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부터 느끼는 친밀함으로부터 발생한 전쟁 혹은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 세계를 반으로 나누어 싸웠던 냉전까지. 이런 글을 통해서 서로 친해집시다!’ 하고 연설적으로 외치는 것이 결국 일상 혹은 세계사에 어떤 큰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친밀함에 친밀함을 연습하고 포용해나간다면, 더욱 나은 우리가 될지 모르겠다.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 친밀함의 범위 밖의 한 학생이 느낀 소외감 혹은 폭력의 경험으로만 끝내기는 아쉬워 글로 남긴다.

 

'내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이야기  (0) 2016.05.18
옷을 파는 노파  (0) 2016.05.17
친함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0) 2016.04.22
길어도 괜찮아  (0) 2016.04.21
여드름 자국  (0) 2016.04.19
티 없는 순수함  (0) 2016.04.18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6. 4. 4. 19:16 내 생각

"거칠 혹은 까칠"

 

20대 이후가 되어 나를 만난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어릴 적에 꽤나 재밌는 사람이었다. (재밌는 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고, 남을 잘 웃기는 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때는 흔히 말하는 '오락부장'으로서의 복무를 충실히 했지 말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에는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닌다고 별명이 '씨산이' 였을 정도였다. (씨산이는 사투리로, 바보 같이 실실 웃고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던 어린이가

 

20살이 넘고 머리에 뭔가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남을 웃기는 일에 주저함이 많아지게 되었다. 투철한 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 내가 웃기는 것을 즐겨 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대방이 웃을 상황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좋아하지만 편하게 하지 못하는 '장난' 이 대표적이다. 평상시에는 장난을 잘 받아주던 친구들이, 어느 날은 내 장난에 정색을 한 경우가 있었다. 그 원인은 친구가 '몸이 아파서' 일수도 있었고,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되묻지 못했고, 어느 사이엔가 분위기를 살피고 친구를 배려하다 보니 진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배웠기 때문이다. 20살 때 처음 들어온 대학의 오티를 가는 버스 안, 학생회장 형님의 오티 관련 안내를 듣고 있었다. 당시에는 어색했던 '양성 평등'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오티에 가게 되면, 여장을 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여장은 여성을 희화화하는 도구이며,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중에는 여성을 포함한 많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멸시 혹은 조롱이 담겨 있다 했다.

 

몰랐다.

 

어릴 적 내가 웃기는 현우였을 수 있었던 것이, 다른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조롱해서 웃긴 것이 아님에도 '혹시 내가 그랬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없지는 않았을 테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니, 그것을 알면서도 나쁜 일들을 저지른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몇 가지의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뭔가 투박했다.

 

배운 것을 적용하고 써먹는데 있어서, (나의 표현이지만) 서울사람다워지지 않았다. '서울사람답다'라는 말은 뭔가 세련된 느낌이나 먼저 크게 배려하는 느낌의 어떤 것이지만, 나는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고집이 있었고, 배려를 너무 티나게 했다. 무언가 의도가 있는 듯 보였던 배려들은 오히려 많은 오해들을 낳았다.

 

언젠가 한 동생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 조금 더 매끈할 수 없어요? 형의 거칠거칠한 면이랑 잘 맞는 사람은 형과 친해지고 형을 더 잘 알 수 있겠지만, 형의 그 거친 면에 상처를 받는 사람도 많을 듯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 나름의 배려와 공부를 통해 얻은 어떤 것을 글이나 말로 표현할 때 그 거친 면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되려 그 거친 면이 나의 모습이라며, 세상 모든 것이 다 쉽고 편하고 별 일 없이 돌아갈 때 나 혼자라도 그렇게 거친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마치 김영랑의 시 '독을 차고'의 화자와 같은 심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외로워졌다.

 

몇몇의 편한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고 인정했지만, 새롭게 사귄 친구나 나의 거친 면을 원하지 않게 확인한 친구들은 그 거침을 까칠함으로 인식한 듯 했고 그렇게 멀어져갔다. 결국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배려'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배려는 없을 것이라 여겼던 나는, 사실 내 주관에 맞춰 배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타인의 몸과 마음 모두에게 어떤 '불편함'을 주고 있었다.

 

그럴수록 점점 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쉽게 변할 수는 없었다. 지금 적고 있는 이런 글도 마찬가지였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글을 적자니 이전에 써 오던 '나의 스타일'의 글들이 가지는 관성이 있었고, 사람을 대할 때도 이전과는 다르게 갑자기 '너의 생각은 이런 부분이 잘못되었구나~‘ 라거나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고 차근차근 설명이나 해명을 할 수 있게 되기는 쉽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고집 센 사람이 무엇인가를 잘못 배우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은 가득 남아 있고 단지 그것을 배우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나은 사회를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나의 입장으로서는 여러모로 답답한 측면이 없지 않다. ‘고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싶으면서도 또 세상이라 부르던 사회라고 부르던 복잡다단하게 돌아가는 이 곳에서 나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강변해보아도 결국 외로운 사람은 나뿐이다 싶다.

 

가끔 혹은 자주 나도 매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몸도 마음도

'내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라하기  (0) 2016.04.11
에스크미 봉사단  (0) 2016.04.11
거칠 혹은 까칠  (0) 2016.04.04
기타와 휘발유  (0) 2016.04.04
내 걱정  (0) 2016.04.01
37점  (0) 2016.03.31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5. 4. 2. 22:15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21


생각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어디선가 들은 것이거나 읽은 것에서 벗어나 자기자신만의 생각을 구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이전의 나는, 생각이란 누구나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다 보면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또 논쟁이 붙거나 토론이 형성되었을 때, 내가 말했던 내용은 사실상 내 생각이 아니라 유명학자나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은 내용들을 내 입과 시간을 빌어 전하는 것 뿐이었다. 누군가의 생각을 읊는 것과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갖고 그것을 밝히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표절과 창작이 가지는 사회적 입장과 유사하다. 바쁘게 보내게 되는 일상 속에서든,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의 시공간 속에서든 자신만의 생각을 갖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차에 멍하니 앉아 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달았다. 비록 투박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갖겠다는 노력으로, 한 명의 사람은 타인과 다른 존재가 된다. 특별하지 않을지 몰라도 독립적인.

'현우의500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우의500자_122  (0) 2015.04.02
현우의500자_121  (0) 2015.04.02
현우의500자_120  (0) 2015.04.01
현우의500자_119  (0) 2015.04.01
현우의500자_118  (0) 2015.03.29
현우의500자_117  (0) 2015.03.29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4. 6. 1. 16:27 카테고리 없음

두 가지 단상. 2014.06.01


(아래 글은 어제 새벽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폰으로 적은 뒤 '게시'를 눌렀건만 사라져 버린 글을 다시 정리하여 적는 글입니다ㅠㅠ 아닌 새벽에 멘붕..ㅎㅎ)

# 1
어제의 공연은 몇 가지 생각을 저에게 남겼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글로 옮기고자 합니다. 
공연의 시작 시간은 저녁 6시였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만큼 해는 길어질 만큼 길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오후 6시라 하여도 하늘은 밝았습니다. 일찍이 제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고 또 이미 자리에 착석해 있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얼굴을 갖고 있고 어떤 옷을 입었고 무엇을 읽고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이 있었지만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알아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공연은 약 6시 반 정도에 시작했습니다. 공연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는 저물었고 어둠은 밀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학교 측에서 나눠준 형광봉을 하나 둘씩 꺼내어 들었습니다. 밤이 완연히 깊었고 사람들이 들고 있는 형광봉의 물결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는 개별 사람의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굴과 옷 그리고 누구와 왔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자 얼굴과 옷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흔들리는 형광봉만이 보였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만이 보였습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어두워지자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서 있었다고 해도 사람이었습니다. 어두움은 개별성을 매몰시켜 버렸습니다. 대신 보편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낮은 우리에게 각자의 차이를 드러내 주었지만 밤은 그 차이를 무시하고 단지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인권이나 '인류의 진보' 등은 개별 주체의 노력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이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듯 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죄로 지금도 어디선가 간을 독수리들에게 쪼아 먹히고 있습니다. 불이 가져다 준 것은 낮과 같은 밤입니다. 밤이 되어도 사람들은 낮에 보는 것과 같이 개별적 주체로 다른 사람을 인식합니다. 오히려 더욱 밝게, 더욱 선명하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차별하고 구별하고 구분짓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은 우리에게 문명을 가져다 주었지만 가끔은 그 불을 숨겨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종교와 인종, 외모와 장애 등은 낮이 우리에게 준 기준들입니다. 밤이 되면 고고히 흐르는 인류의 파도 속에 들어갑니다. 개별적 주체가 강조되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인권과 인류 그리고 그것을 신장하기 위한 노력들은 밤에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아침이 되고 낮이 밝겠지만 밤은 우리에게 어둠을 선물해 '인류 보편의 평등'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저는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어둠 속의 사람을 보는 것 그리고 그들이 흔드는 형광봉의 흐름을 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잊고 지냈던 사람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 2 
대학원에 들어오고 난 뒤 신기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생각을 같은 시간에 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종종 일어나기도 합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좋은 점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그 대안 제시나 수단 확보 등에 다른 측면이 있을 때 방향을 잡기 쉽습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갖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점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경우 창의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기존의 형식을 깨는 신(新) 사고의 등장을 막을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쁜 점 역시도 공통으로 흐르는 생각의 기준이 있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기도 합니다. 
바야흐르 선거의 계절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가끔 우려되는 것은 너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만이 진실이라며, 그것을 생각의 기준으로 세울 때가 있습니다. 가령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인 '자유민주주의'가 그렇습니다. '자유'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공유, 기준의 설정이 명확히 이뤄지지 않으면 대안은 제시되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 제도 내에서 그 기준에 대한 토론을 하기에는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여러 가지 공약들을 많은 사람들이 쏟아냅니다. 가끔 상반된 내용들의 공약들이 한 후보의 공약집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또 어느 일방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인 양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문제의 원인이 '서로 공유하는 생각의 기준'이나 '가치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그 기준은 '시민의 행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막연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에 대한 공감대는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전에 많은 정치적 실험들을 통해 어떤 방향이 옳은 방향인지에 대한 검증 역시 어느 정도 완료되어 있다고도 봅니다. '시민의 행복'이라는 기준을 각 후보가 잘 인식하고 있다면 어느 후보가 되든 큰 상관은 없어보입니다. 행복을 '지금 당장' 실현할 것인지 '몇 년 뒤에' 실현할 것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그 기준이 형성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같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떤 기준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그로부터 대안을 찾고자 하는 행위는 선호되지 않습니다. 시민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기준과 정치인이 갖고 있는 기준이 다를 경우 정치는 삶과 괴리됩니다. 같은 생각의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수단과 대안을 제시할 때 좋은 사회가 형성되고 그 방향성도 가질 수 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은 같더라도 구체적인 방안과 실행 방법은 무수히 다를 수 있습니다. 최근의 한국 정치를 보면 그 생각 자체가 달라 무의미한 것들로 논쟁하고 비난하는 듯한 모습들을 봅니다. 지켜야 할 가치, 즉 '시민의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사회적 토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p.s 여기서 '시민'이라는 표현은 '서울시'의 시민이 아닌 자발적이며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말합니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3. 7. 2. 07:50 카테고리 없음

벌레 한 마리 2013.7.2 


(설마, 벌레 한 마리라는 제목을 적었다고 해서 내 상황을 비유적으로 적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물론, 없겠지만 이렇게 내가 지레 겁먹어 변명을 하는 것도 웃긴 상황이긴 하다) 


언제부턴가 내 방에 벌레 한 마리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파리나 모기보다는 그 크기가 작으나, 자신이 벌레임을 충분히 알리고도 남을 정도의 모습이다. 넓지도 않은 방임에도 벌레는 이리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벌레는 무엇을 먹고 어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카프카는 '변신'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가족의 한 구성원이 벌레가 되어가는 과정을 적었지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벌레보다는 그 위용이 더 대단했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카프카의 벌레는, 벌레지만 사람이고 사람이지만 벌레를 묘사했던 것이라면 내가 보고 있는 벌레는 나와는 다른 평범한 벌레다. 그 평범한 벌레에게는 내가 '변신'이라는 표현보다는, 차라리 '잉태'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벌레 한 마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내 방의 위생상태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벌레가 알을 까고, 자손을 번식할 만한 상황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벌레는 내 방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내 손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내 통장에서 얼마간의 돈을 주인집에 송금하는 형태로 이 방에 들어와 이렇게 글을 쓰고 앉아 있는데, 이 벌레는 도대체 누구와 어떤 계약을 맺고 나와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살고 있을까. 벌레를 만든 것이 신이라면 이 벌레의 계약은 신과의 계약을 맺은 것일까, 아니면 신마저도 신경쓸 겨를이 없이 어쩌다보니 태어난 미물일까.  나와 함께 동거를 하고 있지만 동거인은 아니고, 굳이 따지면 동거충(蟲)쯤 되겠는데,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니 이름도 모른다. 이름을 지어주려고 해보아도 특징을 잡을 수 없고 나와의 아이컨택이 쑥쓰러운지 내 손과 눈을 피하고 있는 이 동거충은 누구일까, 아니 무엇일까. 


지각 위에는 많은 벌레들이 존재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나 점잖은 학명을 가진 벌레도 있을 것이고 박멸의 대상이 되는 벌레도 있을 것이다. 이런 벌레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어떻게 확인하는 것일까. 누구의 사랑을 받으면서 짧은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바퀴벌레는 공룡이 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는데, 그 근원을 따지면 인류보다 먼저 이 지구에서 살아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조상이 바퀴벌레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조상을 발로 뭉개고 살충제로 죽이고 있는 것이라면, 인류의 윤리는 '살상'의 윤리인 것일까. 


좁은 방 하나에, 에어컨 소리가 쉬쉬 나는 내 방 안에 이 벌레는 분주히도 내 앞과 뒤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 어디에 앉으려는 목적은 보이지도 않고 공중에 계속 떠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하다. 무엇을 찾아 헤매이는 것일까. 내가 지금 자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그리고 벌레 한 마리에 관련된 글을 이렇게 길게 적고 있는 사람과 또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이 글을 읽고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내 동거충은 과연 알까. 알고 있다면 나에게 격려나 위로라도 해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는 않다. 형제인지 자매인지 부모인지 모르는 벌레 몇 마리들이 내가 마시는 물 컵 안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책상 위에 자신의 존재를 나에게 마치 알리려는 듯 배를 드러낸 채 섹시한 자세로 누워있는 벌레를 보거나 하면 이들은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고, 위로를 할 마음조차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한 마리에서 시작한 이 글을 끝맺는데 많은 생각과 표현을 찾아내고 또 써야 한다. 예의 없는 것들에게 예의를 들여 쓰는 글은, 과연 벌레만큼이나 가치가 있을까.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면, 이왕이면 다음 문단도 읽어달라. 


'벌레 한 마리'에 대해서 적고 싶지 않았다. 벌레 한 마리가 어찌되었든, 나는 곤충학자가 아니고 벌레로 인해 큰 병을 앓거나 한 적도 없다. 벌레 한 마리를 글의 제목으로 잡고, 글의 주제로 잡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게되는 생각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생각이 있을 수 있고, 학생에게는 배움에 대한 생각, 가족 내 구성원들에게 가지는 애정의 생각 등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생각들은 우리가 어느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는 없도록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너무나 지엽적이고 또 부차적이고 심지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각들을 하는 시간들이 너무나 많아져버렸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생각하지 않고, 어제와 오늘이 같은 상황,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서도 하는 이야기라고는, 굳이 만나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소모하고 있다. 그런 생각들이 벌레와 무엇이 다르며 그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 생각들은 어디서 왔고 이름은 무엇이며 무엇을 섭취해야먄 그런 생각들이 유지될 수 있는가. 벌레 한 마리라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 글을 써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이것이 자유인양 이것이 사회인양 이것이 권리인양 생각해버리는 것은 우리가 벌레가 되는, '변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중요한 문제들이 수없이 많이 있음에도 오늘 아침 무엇을 먹을지가 중요해지고, 담배를 무엇을 필지를 고민하는 그 상황에서 우리는 결국 벌레가 되는 것은 아닐까. 사소한 문제에 빠져,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들을 내뱉고 생각을 곱씹어보면서 인간이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인권, 이것이 필요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인권이라는 것은 인간다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니, 오호 통재라. 통재라.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3. 6. 25. 19:20 카테고리 없음

어떻게 적어야 하지?. 2013.6.25. 


하루에 한 번씩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고, 가끔 빼먹긴 하지만 꾸준히 글을 적는다. 매일 글 주제를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부여잡고 한참을 앉아 있다보면 주제 하나는 나오는 법이다. 


글을 적다보니, 여러가지 요구사항이 들어온다. 글이 너무 길다느니, 글이 너무 딱딱하다느니, 극단적이라느니.. 이런 반응들이 대부분이다. 글의 길이가 길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읽는 사람을 염두해두고 글을 적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긴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은 내탓이 아니다. 글 자체를 못읽는 것을 난독증이라고 하던데, 그중에서도 요즘 사람들은 긴 글 자체를 혐호하는 난독증에 꽤 걸린 것 같다. 나는 일종의 치료사가 되고 싶다. 


글이 딱딱하다고 하니, 부드럽게 적어보려고 하지만, 더이상 부드러워질 수도 없다. 사실, 더 딱딱하게 적을수도 없기도 하다. 내가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논리학이나 철학의 내용을 적기에는 내공이 부족하고,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해서 글을 적는게 대부분인데 그런 글들에게 더이상 쉬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차라리 읽기를 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극단적이라는 평가는, 달게 받아들이겠다. 내 생각의 편향이 가끔 심해질 때가 있는데 그때 내 머리 속에서 나의 균형을 잡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내가 적는 글들을 공개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내 생각이 극단적인 것을 그대로 두는 사람이다. 나에게 극단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라는 존재와 내 글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어떻게 되든, 나는 니 글에 대해서 아무말하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섭다. 그래서 최대한 내 생각의 극단은 표현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평론이나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분야를 선택해서 글을 쓸 때는, 이런 극단을 회피하려는 노력이 다소 방해가 되기도 한다. 마음껏 내지르고 싶은 순간에도, 읽는 사람들이 이 것을 소설이라고 생각해주지 않기에 나는 표현의 날개를 반쯤만 펼친다. 소설가로서의 지위가 그래서 부러운지도 모르겠다. fiction에 담을 수 있는 상상력의 무한함을 갖고 싶다. 


오늘의 결론은, 내 스타일을 정립해야 한다 정도로 끝날 수 있겠다. 내가 적은 글이니 내가 읽으면, 내 느낌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읽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극단적이든, 딱딱하든, 길게 적든 내 글이 내 글다울 수 있도록 나는 더욱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보고 많이 써야할 것이다. 나는 내 글을 쓰고 싶다. 다른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글이 아니라,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쓴 글 말이다. 


그럼에도, 글로 표현하는게 생각하는 것의 반의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메모장에게만 미안할 뿐이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