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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7.01.18 노화방지
  2. 2017.01.04 우리 모두, 수수하지만 굉장해
  3. 2016.12.21 “알바 시각표”
  4. 2016.03.30 100쪽
  5. 2015.02.10 현우의500자_55
  6. 2014.02.15 좋은 책이나 영화란 (1)
  7. 2013.10.05 서술할 수 있음이..
  8. 2013.06.22 '읽음'에 고마움을.
2017. 1. 18. 11:22 내 생각

노화 방지

 

흐른 만큼 충분히 흐른 시간.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20대가 접어들자 마자 죽어갔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것은, 역사책에서나 잠시 등장할 뿐이다. 수명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20대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게 된 것은, 10대 이전부터 받기 시작한 노화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지금의 시점에서의 노화란, 20대가 된 후부터 다시 8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그 시작이었다. 실제로 노화가 진행되지도 않은 시점에서부터 노화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된 것은 반어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10대를 지나며, 20대 이후부터의 삶이 나머지 80년을 좌우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이 20대 이후 죽어버린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별다른 건 없었다. 그저 10대가 된 순간부터 앞으로 남은 10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내고 또 알차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 숭고하고도 또 긍정적인 고민이 결국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80대 노인을 발견한 이가 있었다. 많은 신문과 방송에서는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 발표했고, 이제 갓 10대가 넘은 전문가들은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 분석을 시작했다. 그 결과로 그 노인이 어린 시절 뽀로로의 노는 게 제일 좋아라는 부분을 보지 않았고, 터닝 메카드의 과학적인 변신 장면을 보지 못했던 것이라는 매우 심각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노인을 직접 인터뷰한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죽음을 얼마 남지 않은 17세 여자였다-는 노인과의 만남을 이렇게 술회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 80대 노인은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10대 때에도, 20대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별 생각도 그리고 감정도 갖지 않았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데 집중했을 뿐이었다. 많은 10대의 사람들 그리고 10대를 준비하는 10살 미만의 어른들은 그 노인의 삶에 공포와 경의를 동시에 느꼈다. 삶을 살아가는데, 그리고 저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감정과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가능한 것이라는 놀라움과 저 때까지도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공포. 아무도 살아보지 못한 30대의 삶을 그는 겪었던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는 끈질기게도 살아남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노인의 피에 특별한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경찰청은 조사팀을 꾸려 그 노인을 체포했고, 혈액 검사를 실시했다. 노인의 혈액을 검사해 본 경력 10, 19세의 의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상 없음.”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자, 다시 방송과 신문에는 그 노인의 전혀 특별하지 않은 것이 특별한 것이라며 특종을 방송했다. 혈액형은 O, 특징적인 것은 낙천적. 이 정도가 특징이었다. 이 노인에 대한 종합적인 소견을 발표하는 경찰청장, 나이 20, 곧 사망 예정은 이 남자가 특별한 위험성은 없으나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위험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노인처럼 별 일 없이, 별 탈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감정 없이, 아무 계획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알게 되면 그들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불안이 위험했던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문구는 이 사회에서는, 금기어가 된 것처럼 청춘의 시기는 아프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노인은 아프지도 않았고 그 아픔의 원인이 되었던 고민, 갈등, 성장 등에 대한 걱정들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경찰청장은 검찰에 공식적으로 기소 의견으로 수사를 의뢰했다. 검찰은 이미 이 노인에 대해서 명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 명확한 정보란 앞서 말한 아무런 생각 없음이다, 사형 구형 의견으로 법원에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마치 검찰의 기소를 기다린 것처럼 기소 의견을 받자 마자 판결했다. ‘사형.’ 판사(19, 경력 12, 7세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나 매우 늦은 나이에 합격한 것으로 유명, 평균 사법고시 합격 나이 5.)는 선고문에 이렇게 밝혔다. “고민이 없이 사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10대의 고민은 평생을 좌우한다. 이 노인이 태어났을 당시, 2010년대에는 10대의 고민을 통해 20대에 일반적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30대에 결혼했을지 모르나 이런 사례는 매우 평범하고 또 몰지각하며 또한 지나치게 평범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화되었고, 10대 이전의 고민을 통해 10대에 무엇인가를 이루지 않으면 그 인간은 쓸모 없는 인간이다. 따라서 이 노인은(노인이라는 표현 역시 사회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으므로, 이 판결 이후 모든 사회에서 노인이라는 표현은 불가토록 한다.) 사회에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고, 이미 지난 60년 간 그 죄를 저질렀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본 법원은 이 피의자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이 선고되고 나자 그 재판정에 있었던 10대 방청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고민 없이 사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당장 사형에 처하라! 라며 외치기 시작했고, 재판정 안은 무법지대처럼 변했다. 젊음은 혼란을 뜻한다는 이 시대의 직언에 매우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다 10대의 방청객들 중 8명이 노인에게 뛰어 들어 몰래 숨겨 들고 왔던 칼로 노인의 등과 배와 목과 허벅지와 팔목과 눈과 그리고 발등을 찍었다. 수 십 차례 난자가 이뤄지고 난 뒤 노인은 목숨을 잃었다. 그 목숨을 잃게 되는 눈 앞에 노인이 알아본 유일한 이가 있었으니, 노인을 살해한 한 19세 국회의원이었다. 나라를 운영하는데 자신의 노후를 다 바치고 있었던 그 국회의원은, 노인의 목을 찔렀고 그것이 노인의 죽음에 주효했다. 하지만 이 국회의원, 이 노인의 후손이었다. 자신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낳은 아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후손은 노인은 이렇게 말을 하며 죽었다. “브루투스, 너마저.” 노인의 후손의 이름은 브루투스, 19세 국회의원이었고 그는 이 말을 듣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 내가 행한 이 행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야겠다. 그것이 내가 살아갈 길이다.” 그리고 이 브루투스는 20세가 되어서도 죽지 않았다. 멍하니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감정 없는 표정으로, 눈물샘은 스스로 말려버렸으며 그 어떤 이와도 생각을 나눌 수 없게 깊은 산 속, 자신의 손으로 죽인 노인이 숨어 살 던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평생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다 2010년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죽었던 나이 100살이 되어서야,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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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4. 21:25 내 생각

독서는 취미랄 것도 없으니, 굳이 최근에 내가 가진 취미를 말한다면 “일본 드라마 시청” 정도다. 드라마 시청이 취미라니 참 별 것 아닌 취미다 싶기도 하지만, ‘영화 감상’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취미에 속하는 것이 드라마 시청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왜 영화는 감상이고, 드라마는 시청이라 부르는 것일까. 이왕 취미라고 적을 거, 멋드러지게 일본 드라마 감상. 이게 내 취미 되시겠다.


최근이라 해도 작년(2016년)의 일인데, 취미의 일환으로 보았던 두 편의 일본 드라마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 편은 2016년 2분기 드라마 “중쇄를 찍자 (원제 : 重版出来)”이고 또 다른 드라마는 2016년 4분기의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원제 : 地味にスゴイ、校閲ガール河野悦子)”이다. 일본은 1년을 4분기로 나누어 드라마를 제작하고, 큰 변동이 없는 이상 한 편의 드라마는 10화 안팎으로 제작된다. 거의 모든 드라마는 사전제작의 형태로 제작되기에 중간에 스토리를 바꾼다거나 또는 불필요한 설정이 없는 것으로 일본드라마는 유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 드라마가 유명한 점은, 다양한 직업에 대한 소개와 그 직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게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것이 작년의 앞서 소개한 두 편의 드라마가 기억에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두 편의 드라마 모두 출판과 관련이 있다.


우선 “중쇄를 찍자”라는 드라마는, 출판업계 중에서도 만화잡지를 만드는 편집하는 부서에서 일어나는 일을 배경으로 한다. 유도선수로서 체육대학을 나왔지만 부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된 신입직원(주인공)이 만화잡지를 만들어 나가고 편집자로서의 역량을 쌓아가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주된 내용은 아니지만 기성 만화가 및 신입 만화가가 느끼는 고충, 잡지를 통해 내어야만 하는 이익과 그와 동시에 담아야만 하는 독창성 간의 미묘한 갈등 그리고 영업사원이 느낄 수 있는 보람 등에 대한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다. 글로 적으니 드라마의 내용이 중구난방인 듯 보이지만, 드라마를 본다면 앞선 내용들이 주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본 드라마는 교훈을 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드라마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만화가와 만화잡지를 편집하는 편집자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만화가보다는 ‘만화잡지 편집자’라는 직업이 가진 어려운 점과 그런 어려운 점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보람을 간접적으로라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만화잡지의 편집자는 결코 우리가 직접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역시 출판업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드라마지만, 여기에서는 편집부서가 아닌 ‘교열’ 부서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로 다룬다는 것이 앞선 드라마와는 차이가 있다. 제목에서 이름이 드러나 있는 주인공, 코노 에츠코는 패션잡지의 편집자가 되기를 원해 ‘케이본샤’라는 출판사에 입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입사 후 알게 된 그녀의 부서는 책의 오탈자나 내용 상의 잘못된 점을 찾아내는 ‘교열부’. 패션잡지라면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보는 그녀이지만, 책을 내기 전에 교열을 한다는 사실 조차 몰랐던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책을 교열해 나가며 교열부의 다른 직원들 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직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책상에 앉아 모든 교열을 했던 직원들이 사실관계 확인이나 지명 확인들을 위해 현장조사를 나가기도 하고, 평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담당하며 팬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교열까지 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단순히 작가가 적은 글을 수동적으로 교열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열의 범위 내에서 교열자로의 의견을 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이런 변화를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이끌어 냈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데 까지가 그 범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교열부 혹은 교열담당 직원들은 일반 독자들은 앞선 만화잡지 편집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그 존재를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취미’로써 갖고 있는 일본 드라마 ‘감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과 몇 일 전 새해가 되어 내게 들려온 한 가지 뉴스 때문이다. 그 뉴스란 국회에서 일을 하시는 청소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협력업체 직원의 지위에서 정규직인 국회 직원으로 전환되었다는 뉴스였다. 몇 해 전부터 국회 청소노동자의 지위와 대우에 대하여 국회 안팎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쉽게 사람들의 기억이나 관심에서 잊혀졌고, 그렇게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2016년 작년의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의 여야 구성이 변경되었고, (역시 나는 모르는 사이) 청소노동자의 지위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는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딜 가나 쉽게 청소노동자를 만날 수 있다. 그곳이 도서관일 수도 있고, 빌딩의 로비나 공항 등 어디든지 청소를 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잘 찾으면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나 업무를 보느라 혹은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는 청소노동자의 모습은 쉽게 눈 앞에서 사라진다. 분명 존재하는 사람들이지만, 당연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나 처우는 망각되고 만다. 그리고 깨끗해진 화장실 거울과 비워진 쓰레기통,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건물의 로비를 걸으며 누군가 이곳을 청소를 하고 있겠거니- 정도의 판단만 한다.


나는 이번 국회의 청소노동자들의 정규직 국회직원으로서의 전환에 대하여 찬성의 입장이다. 하지만 국회가 끝은 아니다. 그리고 시작도 아니다. 당연한 것을 그 시작과 끝을 나눌 수 필요는 없다. 우리 사회에는 남들이 하지 않으려 하거나,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중 정확히 몇 퍼센트가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나뉘어져 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갖고 그 보람에 상응하는 직업적 안정성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


그 성과나 결과물에 대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내걸거나 표시를 필요로 하는 직업이란, 사실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그 일 속에 자신의 삶을 맡기고 있다. 굳이 티를 내어야 할 필요성도 또 그것이 그들의 삶에,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정성과 삶에의 필요성을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더욱 건강하게 되는 또 하나의 필요충분조건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 수수하지만 굉장한 일을 하고 살고 있다. 어떠한 직업이든 자신이 언제 그 굉장한 일을 그만두게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나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면, 그것은 목적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고 직업이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존재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일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든 각자의 생계와 삶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직업을 통해 행복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글을 마무리 한다. 우리 모두, 별 볼일을 하는 듯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굉장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길 바라며. (아, 그리고 소개한 두 편의 드라마는 꽤 재미난 드라마이니 한 번 나와 같은 ‘일본 드라마 감상’을 취미로 가진 분이라면 감상해보시길.)


이미지 출처 : http://channel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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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21. 00:50 내 생각

“알바 시각표” 


‘이러다가 분명, 또 내가 일한 만큼 돈을 받지 못 할거야. 어떻게 하지? 내가 얼마만큼 일을 했는지, 시각표를 적어놔야겠다.’ 


2004년 겨울, 아직 11월임에도 더 이상 추울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추위가 이어졌다. 내가 일했던 주유소는 바다를 메워 만든 매립지에 세워져 있어 바다와 상당히 가까웠다. 바다는 다른 건물들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의 비린 냄새와 함께 차가운 겨울 바람은 주유소 곳곳을 파고 들었다. 나는 몇 번이고 주유소 소장님께 아르바이트를 위한 대피장소, 그러니까 주유소에 들어가면 흔히 보이는 조그마한 부스를 하나 사서 설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번번히 실패했고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아 벌벌 떨며 손님을 기다려야만 했다.


10월에 시작한 주유소 주유원 아르바이트도 이제 손에 익을 무렵, 10월 달의 급여를 처음 받았을 때 생각했다. ‘내가 일한 시간보다 적은 금액이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 시간을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라고 정해두긴 했지만, 매번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른 손님들의 차에 기름을 넣는 일이 많았고, 추가 근무에 대한 것은 으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추가 근무에 대한 급여를 달라고 해도 소장님은 가끔 저녁을 사주는 것으로 몇 일 간의 추가근무에 대한 급여를 지불하는 것이라 여기시는 듯 했다. 


11월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집에 있던 A4 용지 한 장에 11월의 달력을 한 장 그려갔다. 토, 일요일도 없이 일을 했으므로 11월 한 달의 달력은 딱 내가 일을 할 날을 의미했다. 그리고 달력 위에 내 이름을 적어 소장님께 매우 친절한 목소리로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하며 드렸다. 


“소장님, 제가 이런 걸 한 번 만들어 봤습니다. 이번 달 말에 알바비 계산하실 때 편하게 하시라구요.” 


소장님은 그 종이를 받아 드시더니, ‘이게 뭘까?’ 하는 눈빛으로 내가 내민 종이와 내 얼굴을 몇 번 번갈아 보셨다. 그리고 이윽고 “그래, 내가 일일이 못 챙길 수도 있으니까 월말에 다 적으면 나한테 다시 보여줘.”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소장님께서 화를 내시거나 혹은 내게 지난 달 급료가 적었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내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아마도 지난 한 달 간 내 근무 중, 주유 실수도 없고 또 청소나 단골 관리 등을 솔선하여 하는 모습들을 보시며 칭찬을 하셨던 것을 떠올리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날부터 퇴근하기 전 내가 몇 시에 출근을 했고 또 퇴근을 했는지를 정확히 계산해 표에 적어 넣기 시작했다. 월말이 되면, 총 몇 시간을 근무했는지를 모두 더한 값을 적어서 소장님께 드렸고 그렇게 나는 내가 일한 정확한 시간에 맞는 시급을 받았다. 그 당시 내가 한 달을 꼬박 일하고 받은 돈은 약 8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표는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왔을 때도, 같은 표를 만들어 올 것을 소장님께서 요구했고 그것을 적어 채워줄 것을 요구했다.) 


최근 대기업의 한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생의 시간을 쪼개고 뭉개는 형식으로 약 4만 명이 넘는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84억에 달하는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은 것이 뉴스가 되었다. 깊은 화가 났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이 더러운 옛말을 아직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기업이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몇몇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식으로 어딘가에 취업하기 전, 아르바이트는 간접적으로 사회를 배우고 또 자신의 경험을 쌓는 좋은 기회이지 않냐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못한다. 지금 현재의 한국에서는 아르바이트는 결코 젊은 사람만이 하는 것도 아닐 뿐 더러, 젊은 사람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더욱 보호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찬란한 시절의 가치인 ‘젊음’이라는 시간을 써서 최저시급을 받아가며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경험이 되기 때문도 아니고, 사회를 배우기 위해서도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계를 위해 단기적으로 나마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 따위가 아니다. 삶의 유지에 필요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 돈이다. 


봉사는, ‘돈을 벌지 않는 일’이 아니다. 돈이 아닌 또 다른 가치를 벌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 봉사다. 그렇기에 결코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하여 자신의 시간을 소비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마치 ‘봉사’나 ‘의무’와 같이 강요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아르바이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자신의 시간을 들이는 모든 경제관계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심지어 연인 사이에서도 스스로가 원하지 않은 것을 해달라며 요청하곤 그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결코 서로에게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자신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임에도,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설명하진 못해도 느낄 수 있다. 


사람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글을 정리하며, 일본에서 유학했을 때의 이야기를 남기고자 한다. 당시 여자친구가 없었던 나는 일본인 친구들 중 한 명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하기 전, 한국과 일본에 연애에는 다른 점이 있을까 해서 일본인 남자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일본인 여자친구와 가까워질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우선 밥을 같이 먹어라. 그리고 밥을 같이 먹을 정도의 사이가 되면, 술을 함께 마셔라. 그러면 그 여자는 너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고백을 해도 된다’ 따위의 어이 없는 대답을 내게 해주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나는, 왜 그런 순서로 이어지냐 물었다. 그 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해.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들여서 밥을 함께 먹자고 한 이야기를 듣고 같이 밥을 먹고, 또 술을 마실 정도라면 그 여자는 너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소중한 자신의 시간을 들일 만큼.’ 


나는 시간이 소중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것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소중하기에 그 사람이 가진 시간 역시 소중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과연 사람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두고 있을까? 한 명의 아르바이트가 어떤 일에서 그만둔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언제나 대체가 가능한 사람으로 여겨지는지, 아니면 그 한 명이 소중하고 또 관계에 있어서도 유지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지 궁금해진다. 궁금해지기도 전에 우리 사회는 그 답을 이미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틀린 답을 정답이라고 우기며. 


한 명의 아르바이트라 할지라도 소중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일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시간은 결코 스스로가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지켜 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 모두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사람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지켜주기 위하여 발전해 온 역사가 우리 인류의 역사이자 자유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아, 너무 멀리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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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30. 12:28 내 생각

"100쪽"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고전이라는 이름 말고 또 다르게 불리기도 한다. '누구나 제목은 들어보았지만,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드문 책'. 맞는 말인 듯 하면서도 또 누군가 지속적으로 사서 읽으니까 출판되는 것일테니 반쯤 맞는 말이라고 해두어도 될 것 같다.


나 역시도 제목을 들어본 고전을 사서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세 번 이상 어떤 책의 제목을 듣게 되면 그 책은 꼭 읽는 편인데,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세 번은 훌쩍 넘게 들었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고전들을 죽 읽다보니, 한 가지 법칙이 자연스레 생겼다. 그것은 바로 '100쪽 까지만 읽자' 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100쪽 까지만 읽고 읽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고전은 시간적으로 오래된 책들이기도 하고, 또 다양한 국가에서 적힌 책들인 만큼 시대나 배경을 이해하기 힘든 측면들이 많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정말 어려운 책들을 만나도 우선 '100쪽' 까지만 읽자고 마음 먹는다.


보통 책이 300쪽 전후라고 한다면 100쪽은 3분의 1은 읽은 셈이다. 500쪽의 책이라 할지라도 100쪽은 5분의 1.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다.


왜 꼭 100쪽 까지 일까?


100쪽을 지나서야 고전들은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100쪽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어떤 배경인지, 어떤 인물들이 나오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설명이 100쪽 정도가 되면 거의 마치게 되고, 내가 그때까지 책을 다시 책장에 꽂지 않는다면 이제 재미가 생긴다. 또 100쪽까지 읽었는데 억울해서라도 더 읽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고전에서(고전 소설이라 한정지어도 되겠다) 이 법칙은 지켜졌다. 100쪽을 넘게 읽은 책들은 그 결말까지 읽었고, 또 한 권의 책이 나의 책이 될 수 있었다.


책이 이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 20년이 된 책도 있고, 50년 된 책도 있다. 이런 책과 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역시도 고전과 같이 100쪽의 법칙이 적용되는 듯 하다.


처음 만났는데, 뿅! 하고 마음이 가거나 '이 사람과는 무조건 친해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친구는,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이라고 영화 '친구'에서는 설명해주고 있듯이 친구는 고전의 전형이라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서 나아가 그 사람의 진실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100쪽이 필요하다. 시간적으로 몇 년이라던지 물리적으로 몇 번 만난다는 것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도록 기다려줄 수 있는 태도가 최근에 들어서는 더욱 필요해진 듯 하다.


읽다가 포기하는 책도 있고, 다 읽고 나서 혹평을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책에 대한, 그 사람에 대한 이해의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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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0. 20:14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55


책을 읽다, 모든 것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책은 나무가 죽은 뒤의 산물이다. 나무가 죽어 갈기갈기 찢겨진 것을 얇게 펴 만든 것이 종이이고, 그것에 글을 새겨 넣은 것이 책이다. 책에 들어가는 내용 역시 그렇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 적은 책의 내용은 지금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사람들로부터의 직간접의 영향을 받아 적게 된 것이다. 책 뿐만 아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선 식재료의 죽음이 선행된다. 소와 닭과 돼지가, 채소와 곡물이 죽어 지금의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연장의 기회를 준다. 눈에 보이는 것만 그럴까. 지금은 당연히 생각하는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는, 과거의 투사들이 흘린 피의 지도이다. 찢기기도 하고, 죽은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남게 된 최대 혹은 절대 다수의 행복을 위한 길이다. 사람의 삶이란, 정자와 난자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의 죽음으로 유지된다. 모든 것을 죽여야만 살아가는 인간은 무엇을 살릴까. 사람은 목적일까, 수단일까. 대답은 섣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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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15. 17:36 카테고리 없음

좋은 책이나 영화란. 2014.2.15 (글을 적은 날짜는 그 이전) 


좋은 책이나 영화란, 멋진 문장으로 적힌 책도 아니고 화려한 화면으로 가득 채워진 영화도 아니다. 나에게 있어 좋은 책이나 영화란, 내가 무엇인가를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표현에서 내가 글을 쓰고 싶어지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 대답하고 싶다. 이 문장 뒤에, 이 장면 속에 내가 이런 말을 이 사람들에게 해줬으면 좋겠다 라 생각이 나는 그런 느낌.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내가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해서 일수도 있고 음악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림이나 음악에 재능이 없어서 가 아니라 단지 내가 글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무엇인가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글을 읽으면서, 같이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읽은 책을 통해서는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언젠가 내 글만으로 이뤄진 책을 적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한 마음. 세상을 바꾼다거나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그런 거창한 이야기 말고 단지 누군가와 함께 생각을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딱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확신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없는 세상이다. 자신의 상식이 세상의 상식과 맞지 않다면 과감히 자신의 상식을 선택해도 문제될 것이 없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상식이 다른 사람의 상식과 다르고,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며 궁금해 하는 것 또한 가능한 세상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삶에 연결되어 있고 또 그것을 확인해보고 싶어 한다. 그런 생각들은 지금 기술로 표현되거나 거리로 표현되거나 또는 새로운 만남을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해보고 또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 시대는 없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는 없었다고 확신한다.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 이것 역시도 누군가와의 연결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하지 못한 생각이면 그 생각을 받아들이고 싶고 또 반대로 내 생각은 어떤지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 수단으로 나는 글을 쓰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큰 사건에 대한 사소한 농담일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감히, 전망을 해볼 수도 있고 가끔은 시크하게 가끔은 대담하게 누군가에게 비판을 가해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이며 나는 그 생각을 글로 옮기려 한다.

 

자판 소리가 땅을 울릴 듯이 크게 나는 내 방 한구석에 앉아 담배 한 대를 꼬나 물고 글을 쓰면서도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글을 적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누군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 이렇게 길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글이 공개되든 공개되지 않든 관계는 없다. 이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글이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하다고 해서 내 글을 그 사람들에게 읽히는 폭력을 행사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누군가가 억지로 글을 읽게 만든다면 얼굴에 침을 탁, 뱉고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읽는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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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포 2014.02.19 06:32 신고  Addr  Edit/Del  Reply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2013. 10. 5. 04:47 카테고리 없음

서술할 수 있음이.. 2013.10.5. 


최근 글이 뜸했던 것이 사실이다. 내 개인의 사정 변화가 있엇던 것은 아니지만, 심경의 변화가 다소 있었다고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변명일 듯하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매일 똑같을 순 없듯이 원하는 것만 이루면서 살 수도 없는 것이란 것을, 하루 하루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런 중에도, 한 가지 놓지 않고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독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어느샌가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알량한 지식인 짓거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본인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사정이지, 독서를 하는 내 사정은 아니다. 책을 읽는 것이 '꼴보기' 싫은 행동이라면, 그 행동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더욱 꼴보기 싫게 만드는 나름의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독서를 하는 것이 취미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취미란에 독서를 적는 것이란, 취미란에 '밥 먹기' 또는 '숨 쉬기'라고 적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 이것이 내 개인적인 지론이다. 지론이랄꺼 까지 없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책을 읽고 더 깊은 생각을 하며 자신의 삶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라는 사소하고도 소심한 바람이지만, 항상 그 효과는 봄바람에 민들레요, 가을날의 오리떼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해야하는 일이 쌓여있고, 적어야 하는 글들이 쌓여 있음에도, 또 치뤄야 하는 시험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나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우선, 나는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쓸 만큼의 글 실력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읽기를 지속할 뿐이다. 마치 소가 여물이 몇 번째 위에 들어있는지도 모른채 끊임없이 우선 씹어 삼키는 것처럼 나는 글을, 책을 그렇게 꾸역꾸역 내 머리 속과 가슴 속에 쟁여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고기가 될지 우유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두 번째로, 도피다. 책을 읽으면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책 속의 상황이 주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이나 반전 등에 내 스스로를 이입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유희는 없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수는 있으나, 영화는 우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없이 거의 모든 것이 시각과 청각으로 주어져 있으므로 나의 역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천만 관객을 넘기도 하는가 보다. 음악은, 개인적으로 문외한인지라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감정을 가져야하는지 정확한 판단이나 감정의 기준이 생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은 도둑이 담장 넘듯이 훌쩍훌쩍 지나다니고만 있다. 반면 책은 그렇지 않다. 책은, 주인공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작가가 묘사하는 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어떤 음악이 흐를 것이고 주인공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지를 상상해보면 그것은 오감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 내 꿈까지 지배해버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보다 더 좋은 도피처는 없다. 

하지만 영원한 도피처는 없다.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이면, 그것은 해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해결할 수 없는 막연함에 가끔 홀로 눈물짓기도 하고, 또 혼자 마시는 술에 취해보기도 한다. 결국 책은 도피의 시간을 주었지만 도피처를 제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어내야 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나는 나의 글을 쓰고 싶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의 권리를 얻은 것이다. 내가 내 이야기를 적거나 내가 생각한 이야기를 적거나 내가 상상한 이야기를 적는 권리는 나는 글을 읽음으로써 얻게 되었다. 그 이전의 한글을 깨우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이 권리에 대해서 나는 만끽하려한다. 그렇기에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읽어야만 한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서술할 수 있음에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죽더라도 남는 것은, 내 이름이 아니라 내 글이고 내 생각일 것이다. 나는 내 글을 통해서 사람들이 이 시대를 읽고, 이 사회를 이해하고 그리고 미래를 예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게 내가 글을 쓰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하고 또 영원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누구도 나에게 시킨 적 없는 이 일을 나는 꾸준히 해나가야만 한다. 

상황이 바뀌고, 내가 글을 쓸 수 없는 시대가 오더라도 나는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글을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시점에는 글을 읽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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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2. 00:47 카테고리 없음

'읽음'에 고마움을. 2013.6.22. 


오늘 오후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책을 읽는 것을 즐기는 본인이지만, 도서전이라는 것을 올해 처음 알게 되었고 어떤 행사인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삼성역에 위치한 코엑스 행사장으로 가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단체로 관람을 온 듯한 고등학생들이 보였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한 궁금증이나 관심으로 도서전의 입구를 들어갔다. 그 중 나도 한 명이었다. 


도서전은 상당히 넓었다. 코엑스 전시장 자체의 크기가 넓다는 것은 과거 몇 번 가본 적이 있기에 알고 있었지만, '책'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그 넓은 공간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이름을 들어본 출판사들이 각각의 부스를 설치해서 많은 책을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었다. 출판사의 이름만으로도 그 책의 가치를 어느 정도 매길 수 있었기에, 출판사 별 특징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본인이지만, 출판사들이 꽁꽁 숨겨놓은 좋은 책들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쉽게 출판사의 출판 성향이나 작가 선정에 대해서 예단하면 안된다는 가르침 역시 얻었다. 


수많은 책들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책들이 그 사람의 수보다는 몇 배는 많은 듯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책을 읽고 또 사고 있었다. 그 책들은 어떤 의미로든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책을 자신의 책으로 만들 것이었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작가라는 한자어를 사용해서 말하고는 하지만, 아직 나는 정식으로 출판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시간이 지나, 내 글이 나무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알려질 만큼이 되면 책을 쓸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이 책을 사고 읽는 사람들이 쉬이 보이지 않았다. 


세계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작가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대문호'라는 칭호를 얻은 작가도 있고 이름 모를 작가들 역시 존재했다. 앞으로 자신이 작가라는 직업을 얻기 위한 노력들을 하는 사람을 태어날 것이고, 아마도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영원히 그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런 책들 중, 그런 작가들 중, 내가 그 한 권의 작가가 된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일 것이다. 내가 적은 책을 누군가가 읽어준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마운 일이다. 


책을 읽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아니라, 취미나 시간을 내어서 해야하는 일종의 지식 노동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 책을 읽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읽는 것보다는 더욱 쉽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더 많고 넓은 지식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책을 읽는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 책이 나오고 난 뒤, 누군가 내 책을 읽어주는 것을 발견하거나 내 책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매우 기쁘고 고마울 것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주제들이나 분야가 있는 책들 중에서 내 책을 선택해서 읽어준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러기에 내가 쓴 글이나 내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또 비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은 한 번 내뱉으면 그 공간에서 사라지는 것이지만 책은 한 번 출판이 되고 나면 그것의 수정을 가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형태로 남아있는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수많은 책들의 작가들은 그만큼의 자신감과 비판에 대한 수용정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책은 쓸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읽을 것이다. 책 만큼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없을 뿐더러, 어느 공간에서든 읽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책이라는 네모난 지식 상자인 것이다. 


내가 글을 적는 이 블로그를 읽어주시는 분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다른 생각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문체로 글을 쓰고 싶지만 아직 필력의 졸렬함으로 인해 읽기에도 피곤한 글들을,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국제도서전을 다녀오니, 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수많은 작가와 그 작가들의 책들이 있음에도, 어느 누군가의 책을 신뢰하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내가 적는 표현 하나 하나 생각 한 방울 한 방울이 더 없는 책임감을 느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한번, '읽음'이라는 행위에 고마움을 느낀 하루였다. 




posted by 맥스(Max) 가고파라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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