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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 후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봉사 후기 - 3

다음날 아침의 해가 밝았고, 에어컨을 틀고 잔 것이 조금 춥게 느껴졌던지 몸이 미묘하게 떨렸고, 코는 살짝 막혀 있었다. 반쯤 감긴 눈을 뜨고 아침 식사를 하러 수영장 옆의 식당으로 갔다. 일찍 나와 있던 사람들은 반가운 미소로 나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침 식사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구나.’

역시 그랬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있었고, 또 계란 프라이와 오믈렛 등은 바로 조리해서 주는 코너가 있어서 따뜻하게 먹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일을 하러 가는 날인 만큼, 든든히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확실히 배를 채웠다. 하지만 기름진 음식과 빵이 주요 메뉴였기에, 배는 채웠지만 과식할 수는 없었다. 과일로써 입가심을 하고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 방에 돌아갔고, 마치 전투에 나가는 군인 마냥 전투화 끈을 조여 메고 다시 모였다.

전투화를 들고 가자는 아이디어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전투화의 존재가 얼마나 큰 긍정적 효과를 일으켰는지 이루 설명하기가 힘들다. 전투화를 신고 일을 하면 처음에는 발은 좀 아프지만 아스팔트나 잘 포장된 길이 아닌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발과 전투화가 밀착해서 매우 편한 상태가 된다. 그 상태가 되면 전투화의 무게도 잊을 만큼 편한 상태가 되는데, 그런 상태에서 남아 있는 기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다. 발이 아프지 않았던 이유는 발리에 들어가는 날에, 기숙사에서부터 발리 도착할 때까지 전투화를 신고 있어서 미리 발 아픈 것을 충분히 느껴봤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내 발의 설명이다.

첫 일은 기왓장 옮기기. 다들 한 줄로 늘어서서 기왓장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리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에서 해비타트 직원이 와서 하게 될 일에 대한 자료를 보여줄 때, ‘전달을 통해서 벽돌이나 기왓장을 옮기는 것이 참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한 명씩 10장씩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했는데, 사실은 그와 달랐다. 자신의 위치에서 앞사람에서 뒷사람으로 기왓장을 옮기면서 내가 잘 받기 위해서는 나에게 기왓장을 주는 사람을 생각해야 하고, 내가 잘 주기 위해서는 받는 사람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나를 제외한 2명에 대한 배려심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에서 조정이 일어났고, 위치는 미묘하게 바뀌었지만 빠른 속도로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처음 한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충분히 몸을 풀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을 시작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다음 할 일이나, 점심은 무엇을 먹기로 되어 있는가 등, 매우 실용적인 대화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화 중에서 계급제와 비슷한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계급제역시 차를 탔다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번 발리 봉사단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단어이다. 나이가 다양하게 모여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동생의 관계나 오빠-동생, 누나-동생의 관계 등이 형성되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김영한 군, 그 밑으로 오승식, 권현우, 전재하가 두 번째 레벨을 형성했고, 그 밑으로 정윤성, 이창선, 박규병, 김성환이 3번째 레벨을, 정기연 군이 4번째, 박태건 군이 실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5번째 막내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남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 했던 이번 봉사단에서 남자 중 2명 만이 국방의 의무를 마치지 않은 사람이어서, 자연스럽게 군대와 비슷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나는 2번째 레벨이 속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크게 어려움은 없었지만, 3레벨 이하의 단원들은 학교에서의 선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많이 힘들었으리라 예상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 중에 군대 문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고, 그런 문화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창조성을 해치고, 평등이라는 가치를 기본 가치로 명명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나도 그 속에서 편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했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을 맡기거나 부탁을 하거나 할 때 나이를 이용해서 밀어 붙인 적은 없다고 믿고 있고,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고계급제를 사용했다기 보다는 재미가 우선적이었다고 언급해 두고 싶다. ‘없어져야 하는 것재미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 자체가 일정 부분 타협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죄송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기왓장 나르기가 모두 끝이 난 뒤, 이제는 각자의 일을 찾아서 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몇 가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현지 코디네이터가 정해준 일이 있었기에 일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남자 단원 거의 대부분이 이틀을 꼬박 들여 만들어야 했던, 구덩이의 이야기가 시작한다.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물이 들어갈 공간이 필요했다. 그 곳에 정화조를 넣어야만이 화장실이 화장실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는 곡괭이 한 자루, 삽 두 자루 그리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만 쓸 것 같았던 괭이를 사용해 1미터 50센티미터의 깊이로 가로 1미터 새로 1미터 20센티미터의 구덩이를 파야 했다. 평균적인 여자 키보다 작은 깊이를 파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느냐 라는 것이 우리의 처음 반응이었지만, 아무도 숙달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곡괭이와 삽 만으로 구덩이를 파는 것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역경이었다. 우리가 파야 하는 땅은 농사를 지었던 땅도 아니고, 평범한 땅이었던 만큼, 처음에는 파는 것이 힘들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땅을 곡괭이로 솎아내고, 삽으로 흙을 들어내고 하기를 반복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속도보다는 훨씬 뒤떨어졌다. 남자 단원들이 힘을 내어서 팠지만 생각보다 곡괭이 질이 체력소모가 격심해서 한 번 곡괭이 질을 하고 나면 10분 정도를 쉬어줘야만 다시 일을 할 수 있었다. 처음은 한 명이 곡괭이로 땅을 파면, 다음 사람이 파여진 흙을 퍼 내는 것으로 순환 시켰다. 이러한 형태는 깊이가 깊어져 다음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 자체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지속되었다. 내리쬐는 햇빛이 우리들을 힘들게 했지만, 단원들은 힘든 얼굴을 지으면서도, 다른 단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소한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았다. 중간 중간에 여자 단원들도 삽질이나 곡괭이 질이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뒤, 남자 단원들은 낄낄거리며 쉬었다.

우리가 구덩이를 파고 있을 때, 다른 단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보지는 않았지만, 몇몇은 벽을 쌓기 위한 토대를 만들 기본 벽돌을 건물에 접착시키고 있었고, 여학우 두 명은 철근 골조를 만들 때 철근을 고정하기 위한 쇠 고랑을 만들고 있었다. 벽돌을 쌓는 작업을 하는 단원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벽돌을 쌓는다기 보다 시멘트를 예쁘게 만들고 그 위에 벽돌을 올려 놓고 있었다. 시멘트의 접착성은 벽돌과 닿는 면적에서 서로서로의 거친 면이 맞닿아 접착력이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 벽돌 작업을 하는 단원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벽돌 작업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실을 고정을 시켜서 그 실에 높이, 배열 등을 확인해 가면서 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난 뒤 한쪽 벽의 기초가 완성 된 것을 보니 파도가 치고 벽이 앞뒤로 돌출되어 있었다. 내가 볼 때 그렇게 만족스러운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현지 인부들은 아무런 일도 아닌 듯, 그 상태 그대로 놓여져 있는 것을 다음날 아침에 왔을 때 확인했을 때, 내가 라오스에서 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공사가 진행이 되는 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현지 인부가 그 상태 그대로 놔 둔 것은 크게 높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시멘트와 자갈을 섞은 것을 넣고 기반을 만들면 벽돌 부분은 완전히 덮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걱정하였던 내가 오히려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부분은 에 대한 것이다. 작년 라오스에서도 느꼈던 일인데, 건축관련 일을 할 때는 항상 실을 사용한다. 요즘에 아파트를 짓거나 할 때는 벽을 만들 때, 큰 틀을 이용해서 만들지만, 크지 않은 건물을 지을 때는 아직도 사람이 직접 벽돌을 이용해 벽을 쌓거나 미장을 할 때에는 실을 이용해서 건물을 짓는다. 벽돌을 한 개씩 쌓다 보면 그 순간에는 옆의 벽돌과 높이가 맞고 또 밑의 것과 맞아 떨어져 보여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지만 그냥 그대로 쌓다 보면, 울퉁불퉁하고 높이도 맞지 않아 전체적으로 망쳐버린 건물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는 않을까. 당장의 편의를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이 편한 것을 즐기기 위해서 자신이 설정한 일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않은 채 일을 마쳐 버린다면, 나중에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그것을 고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되어, 결국은 후회하기 마련인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높이의 실의 높이와 벽의 두께는 각자가 다를지 모르지만, 그 실의 높이에 맞도록 시멘트를 더 넣고 벽돌을 높이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우리는 그 실에 맞게 우리의 삶을 높이고 있을까.

다른 작업은 철근 골조를 연결할 철사 고랑을 만들고 있었다. 작업이 힘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도를 맞춰야 하는 등 정교함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여학우 두 명이 담당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에도 땡볕에 앉아서 허리를 숙이고 일을 하고 있었던 김경희 양과 손지혜 양께 수고했다는 한 마디를 남겨두고 싶다.

일을 열심히 한 덕일까.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점심은 무엇이 나올까.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고민을 발리에서의 9일 동안 하지 않은 적이 없는 나였기에, 점심은 항상 기대의 순간이었다. 점심은 주변의 식당에서 만들어 온 도시락이었다. 다양한 반찬이 있었지만 우리의 입맛에 맞는 반찬은 개중의 한 개 정도였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고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지만, 반찬이 입에 맞지 않을 뿐이지 양은 그렇게 적은 것이 아니었기에, 한 개의 도시락을 먹고 일을 하면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크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사실 배가 고프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밥을 잘 먹어서가 아니라, 날씨가 덥고 고된 일을 하는 만큼 계속 물이나 이온 음료를 마셨기 때문에 배 속은 항상 무엇인가로 차 있었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리라.

점심을 먹고 나면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다시 일을 하러 갔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다들 일을 하기 싫어서 쉬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한껏 좋아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 그 기분을 더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던 것이리라. 남자 단원들 중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담당(?)하고 있었던 이창선 군과 정기연 군은 점심을 다 먹어 갈 즈음이 되면 조금씩은 불안함을 느꼈으리라. 저 두 단원보다 나이가 많은 몇몇 단원(나를 포함해서)은 점심 식사가 끝나면 노래 일발 장전이라는 구호를 외쳤고, 보통은 이창선 군이 먼저 일발 장전, 장전 끝이라고 대답을 한 뒤, 우리가 발사라고 외치면 다시 발사라고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는 노래를 부르면 웅성거림과 동시에 비난이 이어졌기 때문에 즐거운 노래를 찾는데 그 둘은 꽤 고민했으리라.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무슨 일을 했었는가 하고 반추해 봐도, 딱히 새로운 일은 없었기 때문에 오전부터 파고 있던 구덩이를 계속 팠다. 일을 하기 시작한 뒤 첫째 날에 비가 왔는지 둘째 날에 비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첫째 날이구나. 왜냐하면 이틀 만에 구덩이를 완성했으니, 첫째 날에 비가 오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 구덩이를 완성했다는 말이 되는가. 한참 남자 단원들이 돌아가며 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왼쪽 하늘에 어두운 구름들이 맑은 하늘을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른쪽 하늘은 청명한데, 왼쪽 하늘은 당장 천둥 번개가 쳐도 이상하지 않을 듯 구름이 밀려 왔다. 우리들은 다소 당황해서-사실 당황한 면보다는 비가 오면 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잡고 있던 장비들을 손에만 쥔 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지 인부들은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이 비 금방 그치는 거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20분 정도 비가 내렸을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려 우리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도 물이 흘러갈 정도의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릴 때의 시원함은 잠시, 다시 쨍쨍한 날씨로 변하는 발리 섬의 날씨는, 다시 우리를 한번 더 독려하는 의미인지 일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 신발에는 흙과 엉킨 풀들이 들어 붙어 키는 어느덧 3센티미터 이상은 자라 있는 듯 하였고, 움직일 때는 무거워서 중력의 크기가 늘어난 듯 하였다. 다시 일하던 곳, 구덩이에 들어가 곡괭이 질을 해보니 비가 와서 흙에 무게가 더 실려 있었다. 곡괭이 질 자체는 크게 문제가 아니었지만, 삽으로 떠 내는 무게가 무거워지고, 그것을 옮기기 위한 수레가 지나다니는 길이 빗물에 뭉개져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래도 꾸준히 계속한 결과 우리 단원들의 다리가 들어갈 정도의 깊이는 확보를 하고 이날의 작업은 마쳤다.

발리에 와서 처음으로 연장이나 도구를 들고 직접 일을 해보니, 단원들의 얼굴에 일종의 기쁨의 기색이 보였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는 발리까지 온 이상 휴양의 의미를 담아서 오기는 하였지만, 실제 일정이 시작한지 3일이 지나서야 땀다운 땀을 흘려 보는 것이, 마냥 놀고 있는 것이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일도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앞으로 일을 할 날들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 역시 우리들의 일을 할 때 더욱 열심히 일을 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일을 너무 열심히 한 탓에 몸에 힘이 다 빠져 버린 날에는 아무도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돌아오던 차에서 잠만 잤다. 그래도 일의 시작이 크게 어렵지 않았고, 발리의 날씨도 우리에게 너무 무리 하지 말라는 의미로 시원한 비를 내려주었으니, 이날, 오늘 하루는 좋은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3시 반쯤에 오늘 작업을 마무리 하고 발리 타만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은 오늘 하루 흘린 땀과 모래 등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우리들이 풍기는 냄새로, 참지 못할 지경은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청결하지 못함에 괴로움을 느끼는 정도까지는 되었다. 얼른 호텔로 돌아가 시원한 수영장에 몸을 담궈야지. 호텔에 도착해 차에 내리자 마자, 언제까지 저녁 식사를 위해서 모이세요 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수영장에 뛰어 들었다. 일을 할 때는 수영할 체력도 모두 소모해 버린 것 같았던 사람들이 수영장 안에서는, 중력의 크기를 적게 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수영을 할 체력은 남겨 두었던 것인지 다들 즐겁게 놀았다.

우리가 수영을 할 때, 꽤 많은 외국인들도 발리 타만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항상 책을 읽고 있었다. 왜 그들은 휴양지에 와서 책을 읽는 것일까? 평소에 책을 읽지 않아서 쉬는 동안에 책을 읽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몸만 태우기 적적하니까 책이라도 읽으면서 몸을 태우는 것일까? 등등의 생각을 했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1년에 제대로 된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따로 시간을 내어서 책을 읽지 않으면 을 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발리 타만 호텔에서는 계속 일을 했던 지라 수영을 하기 전에 을 읽는 흉내를 내지 못했지만, 주말 휴양을 마치고 다시 북부에 돌아왔을 때 머물렀던 퓨리 살롱 호텔에서는 잠시라도 내가 들고 갔던 책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읽어보려는 노력을 했었다. 푸른 바다 옆에서 읽는 고전의 재미란. 이런 느낌에 여기까지 와서도 책을 읽는 가 보다 하고 생각을 했지만, 책을 읽은 시간보다는 수영장에서 논 시간이 확실히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제의 다소 실망감이 있었던 저녁을 만회하기 위해서, 이날 밤은 다른 식당으로 가보기로 했다. ‘밤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식당이었는데, 대나무가 많은 곳에 있다기 보다 대나무로 만든 식탁 등이 신경을 써서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었지만, 어쨌든 대나무는 있었다. 꽤 분위기가 좋은 식당이었고, 우리가 오기 전부터 외국인 몇몇이 앉아 있는 것을 봐서 외국인들의 순회 코스 정도가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단체 예약인 만큼 연결 된 긴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음식을 우리가 오기 전에 주문을 해 놓았다고 해서 앉으면 바로 음식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아서, 음식이 약 40분이 지난 뒤 나오기 시작하자, 음식이 늦게 나오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음식이 늦게 나오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음식이 나오기 전에 이미 발리 맥주 빈탕큰 병을 한 병 비우고, 다른 곳에서는 마셔 본 적이 없었던 스톰이라는 이름의 발리에서 생산되는 맥주를 다시 주문해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 곳의 맥주를 마셔 보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지의 맥주는, 일부 외국인에게 팔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 할지라도, 현지인들도 그 맥주를 마시면서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한번 돌아보게 하고, 같은 맛을 느끼면서 동일한 곳을 바라보는 추억을 만들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내가 발리에서 마셨던 맥주에 대해서 언급을 하자면, ‘빈탕맥주는 흔히 마실 수 있는 맥주였던 듯 하다. 첫 맛은 부드러워 계속 마시게 되지만, 돌아오기 전날 밤에 꽤 많은 양을 마셨더니 다음날 머리가 아픈 것으로 봐서는, 약간의 알코올을 첨가했거나 아니면 좋지 않은 보리를 사용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스톰 맥주는 밤부가 들어가 있는 가게에서는 3 가지 종류만 판매하고 있어서, 그 것들만 마실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골든 에일이었다. 이 맥주는 살짝 시큰한 맛이 도는 것이, ‘호가든과 비슷한 맛을 내었다. 향이 꽤 깊다고 해야 하나. 입 안에 남는 맛이 좋았다. 두 번째는 브론즈 에일이었는데, 골든 에일의 시큰한 맛은 빠지고 일반 맥주의 부드러움이 좋았다. 딱히 논평할 것이 있는 맥주는 아니었는데, 마지막 맥주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맥주는 아이론 스타우트였는데, 이름으로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흑맥주였다. ‘기네스와 비견해보면 맛의 농도는 확실히 낮았다고 생각되는데, 그래도 꽤 흑맥주의 검은 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어 마시면서 맛있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이 식당에서만 4가지의 맥주를 마셨으니, 나 혼자만으로 꽤 많은 돈이 나왔으리라 예상되지만, 금액 확인을 하지 않은 쿨한 나(?)는 기분 좋게 호텔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맥주 이야기만 해서, 여기서 밥은 먹지 않고 맥주만 마시고 왔나 라는 비난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날 먹었던 이야기를 하자면, 다들 너무 맛있었던 음식들이었고, 특히 우리들은 사테’, 즉 꼬치를 계속 주문해서 마치 일본의 선술집에 온 양, 술 안주로 삼았던 기억이 난다. 음식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아서 어떤 음식은 맛있었고, 다른 것은 어땠다 라는 정도의 서술이 되지 않는 것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먹는 순간 인도네시아를 위시한 동남아시아 특유의 향신료의 풍미가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음식들은 한국인의 입맛의 범위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실 시장이 반찬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시장뿐만이 아니라 음식점의 도 꽤 좋은 요소였다고 생각이 된다.

가득 맥주를 마신 뒤, 호텔에 돌아와서 연습을 했었던가. 연습을 하기 위해서 발리 타만 호텔에서 공간을 빌려서 연습을 했다. 7월 중순 즈음에 고향에 내려가서 열흘 동안 쉬고 올라 온 뒤, 연습다운 연습을 다시 해본 적이 없는 나는, 몸이 굳어 버렸는지 여러 동작들이 잘 되지 않았다.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의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권도 부분을 연습할 때는 의지와는 다르게 다소 엄한 사람이 되어서 단원들을 다그쳤던 것 같다. 연습을 처음 할 때, 많은 단원들이 생애 처음으로 태권도라는 것을 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습을 통해서 실력이 쌓여가는 것을 보면서,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운동 신경이 다른 사람보다 떨어져서 운동을 못하는 것이라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가 떨어진다고 생각될 때는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뛰어난 사람과 동일한 수준까지는 오르지 못할 지라도 자신의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누구나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해 보았던 적이 없던 것을 해 봄으로 써 자신 속에 숨어 있었던 기능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인 듯 하다.

태권도뿐만 아니라, ‘도 춰야 했고, ‘응원도 해야 했다. 춤은 많은 연습을 통해서 충분히 몸에 익은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응원은 미묘한 동작의 차이가 전체의 느낌에 큰 차이를 주었기 때문에 응원을 담당했던 강민혜 양이 꽤 많은 수고를 하였다.

연습을 약 2시간 정도 하고 나니, 다들 땀에 흠뻑 젖어, 또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 한 가지 단어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수영장

연습을 마치자 마자 다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채 마르기도 전의 수영복을 입고 다시 수영장에서 만났다. 거의 매일이 이러한 패턴이었다. 일을 하고 돌아와서 수영, 저녁을 먹고 수영. 어느 호텔에 가서도 이런 패턴은 변하지 않았고, 지금 내가 한국에 돌아와서 거울을 보면 살이 좀 빠진 듯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수영의 덕인 듯 하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수영하는 맛이란.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수영하는 맛이란. 수영장 바닥에 발은 대고 있었지만 은하수 사이를 헤엄쳐서 어디론가로 날아갈 수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매일 밤, 충분히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잠을 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 역시 동시에 들었다. 젊은이의 열정이라기 보다는, 아직은 육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믿고 더 놀고 싶다는 생각에 매일 밤 2시까지는 누군가의 방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서로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눈빛이나 서신 등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서로의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눈빛이나 억양 등을 보면서 듣는 것 자체가 좋은 시간은 아닐까. 발리의 자연이 주는 맑음과 비교해도 함께 갔던 단원들의 순수한 마음은 결코 뒤지지 않고, 뜨거운 태양 아래 탔던 우리의 피부가 기억하는 여름보다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가 기억하는 여름이 더욱 진하게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