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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 후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봉사 후기 - 4

다시 아침이 밝았고, 이제는 조금 익숙해는 일하는 준비를 무의식 중에 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같이 방을 썼던 김영한 군은 직업병이라고 언급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다시 준비된 차를 타고 일터를 향해 갔다. 어제 구덩이를 파면서 우리가 조금 파놓고 가면 현지 인부들이 마무리를 지어 놓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찾아가서 보니 그대로였다. 아무런 변화는 없었지만 어제 꽤 깊이 파 놓았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화장실을 위한 구덩이를 파고 나서 느끼는 뿌듯함이라니. 일터에 도착하자마자 구덩이를 보는 것은 이 이후에도 계속 처음 하는 일과가 되었다. ‘깊군.’ 이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다른 일을 하고 가면, 성취감이 주는 기쁨에 다른 일도 같은 기분을 할 수 있었다. 옛 전설에 사과나무 묘목을 심어서 그 나무가 자라나기 전에 그 나무를 넘기 시작해, 매일 그 나무를 넘는다면 시간이 흐른 뒤 그 나무가 매우 높은 나무가 되어도 그것을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가 실제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심을 하고 있지만, 어떤 것을 성취하고 난 뒤에, 그 성취가 기반이 되어 다른 일, 더욱 큰 일도 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나에게 구덩이가 사과 나무였다.

구덩이 파는 것이 마무리 되지 않았으므로 구덩이를 계속 팠다. 이제 깊이가 꽤 되었으므로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으나 곡괭이 질을 한 번 할 때 마다 깊이의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해 오히려 일은 재미있었다. 우리나라의 흙과는 다르게 깊이 판다고 하더라도 돌맹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흙이 나왔으므로 일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전날에는 남자 단원 대부분이 구덩이를 파는데 투입이 되었으나, 무리한 단원과 손에 상처를 입은 단원들은 다른 곳에 투입되어 다양한 업무를 하게 되었다. 오전 중에 구덩이를 완성하자는 의지를 갖고 있었고, 조금씩 쉬고 열심히 땅 속으로 내려갔다. 보기에는 상당히 깊어 보였는데, 줄자를 들고 와 깊이를 재어 보면 1미터 50센티미터에는 턱 없이 모자란 높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에 서서 깊은 땅을 바라보면 우리의 키에다가 그 깊이가 더해져서 더 깊어 보였던 것 같다.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갈 때, 마지막으로 내가 내려가 깊게 한번 팠고, 줄자로 가장 깊은 곳을 재어보니 충분한 깊이가 되어 벽면을 정리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한 구덩이는 완성이 되었고, 그 구덩이 안에서 다같이 사진을 찍었다.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서서,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 들어가 사진 한 장을 남길 것이라고 미소를 지었던 것을 보면, 힘들기는 했어도 보람 차고 즐거웠던 작업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점심을 먹었는지, 점심 먹기 전에 벽돌 쌓기를 시작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벽돌을 쌓았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나는데, 점심은 크게 적을 내용이 없으니 벽돌을 쌓았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벽돌을 쌓는 것은 라오스에서 거의 2주간 내내, 도서관 건설 담당을 하면서 하였던 일이었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시멘트 삽을 손에 쥐고 무거운 벽돌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입구 쪽에 있는 벽을 쌓다가 뒷면을 먼저 쌓아 창문을 다는 것이 좋겠다는 현지 코디네이터의 의견을 들어 혼자서 뒷면의 벽을 쌓기 시작했다. 다른 단원들이 보면 대충한다고 욕을 듣기 딱 좋을 만큼 대충대충 벽을 쌓기 시작했다. 라오스에서 같이 일을 하던 ’(‘붉은의 의미)이 가르쳐 준 방법으로 오므라이스 모양으로 시멘트 반죽을 만든 뒤, 그것을 벽돌을 올릴 위치에 철푸덕 하고 올려 놓는다. 그러한 것을 몇 개를 연결 시킨 뒤, 그 위에 수직으로 벽돌을 잡고 좌우 위치를 맞춰가며 높이도 맞춰가며 놓는다. 확실히 시멘트와 벽돌을 접착시키고 난 뒤, 시멘트 손삽의 뒷부분을 이용해 높이와 평행을 맞추고 실과의 높이도 다시 한번 맞춘다. 이것이 기본적인 시멘트 쌓는 것의 순서이다. 다른 단원들은 밖에서 보기에 만화에 나오는 벽돌 쌓기처럼 보이도록 시멘트 반죽을 평평하게 만든 뒤 그 위에 벽돌을 올려놓는 작업을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해도 붙기는 하지만 확실히 접착이 되지 않으면 벽돌을 나중에 수평으로 치면 그대로 나올 수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크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시멘트를 많이 올려서 벽돌을 위에서 올려 누르면 옆 부분은 벽돌의 무게 때문에 자연스럽게 눌려져 보기 좋게 되고,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사후에 채워 넣는 것이 작업의 효율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더욱 낫다고 알려주었다. 벽이 좁았던 것도 있지만, 나름대로 요령을 알고 있었던 나는 빠른 속도로 벽면 한쪽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현지 인부들이 가끔씩 와서 내가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여주었던 것이 더욱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엄지손가락만 들어 보여주었던 것이 아니라, 나와 멀리 쌓여 있던 벽돌들을 계속 내 가까이로 들어 올려주었고, 시멘트도 항상 부족하지않게 공급해 주었다.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벽돌을 올렸다.’라는 말로 요약이 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참 길게도 적었다. 벽돌을 올리는 것은 라오스에서의 추억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이번 발리에서도 내가 쌓았던 벽면에 내 이니셜을 새겨 놓고 왔기 때문에 애정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고 있는 내용이 많고, 생각했던 양이 많은 경우에는 길게 쓰고 싶지 않아도 길게 적는 것을 보니 나는 아직 문학적 수준이나 자아 비평적 관점을 가지기에는 부족한 사람인가 보다. 

벽돌을 쌓고, 쌓고, 쌓고 회색 벽돌을 쌓고, 빨간 벽돌을 쌓고를 계속 하다 보니 어느새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이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늘이 없는 곳에서 지속되는 작업이다 보니 땀이 많이 났다. 구름이 지나가면서 해를 가려주면 어찌나 그 구름이 고맙던지. 또 살랑살랑 불어 오던 바람이 그토록 시원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나무꾼의 땀을 훔치는 산바람이 고마움이 이런 느낌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회색 벽돌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문단 적고 가야지. 회색 벽돌을 옮길 때였다. 처음에는 옮겨주기로 벽돌을 옮겼지만 시간이 지나자 단원들이 힘들어 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나는 벽돌을 일정한 속도로 던지고 그것을 받는 것으로 작업을 하면 5명이 서 있어야 하는 거리를 3명 만으로도 충분히 옮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남자 단원 중 오승식 군과 박규병 군과 함께 벽돌이 쌓여 있는 곳으로 갔다. 벽돌을 오승식 군(상황에 따라 바뀌었다)이 나에게 일정한 속도로 던져 주면, 나는 그것을 받아 다시 일정한 속도로 박규병 군에게 던져 주었다. 시간은 단축되었고 들고 있는 시간이 적으니 무거운 것을 드는 것으로 인한 피로감은 없었다. 다만 허리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일을 마치고 나면 허리 쪽 통증이 격심했고, 날아오는 벽돌을 손으로 잡아야 했으므로 손 주변에 몇 개의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받는 행위와 던지는 행위는 꽤 재미있었기 때문에 즐겁게 일했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워 보였던지, 돌아오기 전날에 현지 코디네이터가 나에게 준 활동 인증서에 들어있는 사진 중 한 장이 벽돌을 던지고 있는 사진이라니, 즐거워 보이긴 즐거워 보였나 보다. 내가 가끔 잘못 던져서 회전이 들어간 것을 받는다고 고생한 박규병 군에게 미안했다는 말을 전한다. 다같이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벽돌 옮기기는 빠른 시간에 마쳤다. 허리의 고통과 함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내 시계는 어느덧 4시 반-현지 시간으로 바꾸지 않았다-이 되어 있었고, 현지 시간으로는 3시 반이 되어 있었다. 이날은 돌아가기 전에 덴파사에서 싱아라자로 오는 길에 운전기사가 이야기 해주었던, 발리 섬에서 가장 큰 폭포로 잠시 놀러 갔다. 일을 한 뒤라, 땀에 절어 있고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보면 피로도 풀릴 것이라 생각되어 찝찝한 몸을 이끌고 갔다. 저녁이 되었기 때문에 날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구름이 끼어서 주변 환경은 짙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 깃깃 폭포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우리들은 차에서 내려 깃깃 폭포로 출발했다. 차 안에서 현지 운전기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15분을 내려가고 15분을 올라가면 폭포가 나온다고 했다. 그리고 폭포에서 수영을 할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맑은 호수를 상상하면서 무거운 발걸음도 가볍게 올라가며 내려갔다. 한참을 오르내린 뒤, 20분쯤 지났을까. 꽤 큰 물살의 소리가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발리 섬에서 가장 큰 폭포라는 기대감을 충분히 만족시켜주지는 못했지만, 그 소리와 웅대함은 충분히 그 명성에는 어울리는 것이었다. 오전 오후의 일을 하고 난 뒤의 피곤함은 어느 사이엔가 잊고 있었고, 휘몰아 치는 물방울들 앞에서 우리는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안경에는 물방울들이 끼여, 세상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고 그러한 사이사이에서도 우리 단원들의 웃는 얼굴은 해맑았다. 바지와 상의, 그리고 신발은 물에 젖어 질퍽거렸지만, 그렇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랑비에 옷이 젖었지만, 흘러내린 땀을 잊게 해주어 되려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덴파사에서 상아라자로 이동할 때, 차를 타고 산을 넘으면 산의 고도가 꽤 높았던지 귀가 멍멍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꽤 높은 산을 넘는구나.’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높은 산에는 반드시 폭포나 자연이 만들어 주는 경이로운 것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었다. 산에는 물이 있기 마련이고 그 물은 반드시 조용조용하게 흐르지는 않은 터인데, 나는 왜 폭포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발리라는 것에 너무 마음을 열고 있어 날카로운 생각보다는 푸둥푸둥한 생각들로 모든 사물들을 바라보니,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요,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며, 심지어 이성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물가마저도 싸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발리기를 쓰고 있는 이 시점에 생각을 쥐어 짜 내느라고 힘이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깃깃 폭포에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잠시의 휴식 따위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사치였다. 아침에 널어 놓고 나왔던 수영복이 바짝 말라서 나를 좀 입고 저 수영장에 뛰어 들어 주세요라고 말을 하길래,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손에는 수경을, 한 손에는 수건을 든 채 수영장으로 뛰어갔다. 한참을 첨벙첨벙 한 뒤, 오늘 저녁은 호텔에서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저녁 식사를 호텔에서 주는 평범한 뷔페와 함께 했고 또 저녁에는 맥주를 마셨다.

발리 타만 호텔에 있을 때는 거의 매일을 차를 타고 10분 거리의 하디스 마켓에 갔었다. 각자가 필요한 물품들을 사기 위해서 돈을 조금씩 들고 왔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것은 초콜렛이나 기념품, 아니면 그날 밤에 마실 맥주나 과자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하디스 마켓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꽤 큰 규모의 건물에 일층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형태의 대형 마트가 있었다. 혼자 조용히 산책하는 느낌으로 빙글빙글 돌았던 적이 있는데, 꽤 큰 넓이에 맞게 전자 제품도 판매하고 있었고, 발리의 기념품들도 꽤 많은 수가 진열되어 있었다. 이때 본 발리의기념품들은 돌아오는 공항에서도 보았는데, 확실히 공항의 물건들이 가격이 비싸게 책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마트는 마트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층에는 다양한 종류의 옷을 팔고 있었는데, 너무나 많은 옷이 창고처럼 쌓여 있어, 그 많은 옷들 중에서 자신과 어울리고 싸고 좋은 옷을 찾는 것은, 꽤 수준 높은 안목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는 여러 브랜드의 옷을 만드는 공장들이 산적해 있어서 옷 가격은 매우 싼 편이었다. 너무 많은 옷을 만들어 팔다 보니 옷을 진열하는 방법이라든지 고객들에게 상품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법들이 부족했다. 인도에서는 여러 과일들을 노점이나 상점에서 팔 때, 그 과일이 썩게 되면 그것을 그냥 버리고 다시 새 물건을 가져다 놓는 방법으로, 크게 유통이나 진열방식의 개선 등에 신경을 쓰지 않고 충분한 물자가 있으니, 굳이 아낄 필요와 상품에 대한 연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많은 옷이 있으니 그 옷들을 굳이 깨끗이 진열하지 않아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사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두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간단한 경영 기법만 들어가도 충분히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을, 그 어느 누구도 개선 방안을 제기하지 않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신선하게 충격적이었다. 여담이지만, 내가 꽤 마음에 들어, 내가 맞는 사이즈가 있냐고 표정과 손짓으로 이야기를 하면, 내게 맞는 옷을 없다는 것이 대답의 대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발리에서 나와 몸집이 비슷한 사람을 만난 기억이 서구 사회의 외국인들을 제외하고 없는 것을 보니, 옷 사이즈가 작은 것도 이해는 될 만 했다. 내게 옷 사이즈는 작던지, 아니면 확실히 크던지 둘 중 하나였다.

나도 꽤 많은 선물들을 샀고, 그 선물들은 나의 기숙사 방에 잘 보관 중이다. ‘누구를 위해서산 선물은 몇 되지 않고, ‘선물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줘야겠다고 생각을 해, 아직 주지 못한 선물들이 많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 내가 나름대로 고심해서 사온 발리 선물을 받고 싶은 분들은 제게 연락을 해 주세요. 이 글의 페이지 수가 16장이 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 여기까지 과연 몇몇이 읽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문단을 읽고 제게 연락을 해주시는 분은, 뭐랄까 제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의 열정에 보답하는 의미의 선물과 같은 의미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에어컨을 켜놓고 잔 것이 조금 내 체온을 떨어지게 했던 것 일까. 간밤에 잠시 깨었다가 에어컨 온도를 높이고 다시 잤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이불을 꽁꽁 안고 자고 있는 내 모습이, 인도네시아라는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추워서 이불을 덮고 자는 내 모습이 어찌나 이상하기도 하던지. 아침을 먹기 위해 수영장 옆 식당을 갔고, 매일 아침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바다는 여전히 넓어 보였다.

시간은 흘러, 금요일이 되어 있었다. 금요일은 오전에만 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토요일, 일요일의 휴양과 휴식을 위해 다시 덴파사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오전의 작업을 위해 출발하기 전에 모든 짐을 싸서 로비로 가져다 놓아야 했다. 이제 다시 발리 타만에 머무르지 않고, 덴파사에서 다른 호텔에 지내고, 다시 싱아라자로 돌아와도, 우리가 묵었던 최고의 호텔이었던 퓨리 살롱에서 머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침을 일찍 챙겨먹고 짐을 챙겼다. 3일 정도 머무르고 나니 꽤 짐도 흩어져 있는 상태였고, 그 동안 사 놓았던 선물들이 있어서 꽤 짐의 양도 늘어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을 하러 가기 전에는 멋지게, 군화를 신고 바지를 정리하고 조끼를 갖춰 입고 선글라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밀집 모자를 썼다. 오늘 입고 또 몇 일 동안 일을 하지 않을 것임을 생각하고 이번 주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더 옷의 에 신경을 썼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군대 경험이라는 것은, 2004 9월의 해군에서의 5일간의 생활과 2005 3월부터 4월까지의 39사단에서의 공익근무요원이 되기 전의 훈련이 전부였다. 그래서 매번 군복을 입을 때 마다, 아침마다 군복을 자신의 몸의 일부분인양 생활을 했어야 했던 군인들의 심정을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을 입으면, 이상하게 나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사실을 인정했다. 군대라는 곳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은 없지만, 그 내부에서의 문제와 국가 방위의 효율성 등의 문제점 때문에 항상 비판의 각을 낮추지 않는 나로서는 군복이 어울린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또 느낄 때마다 위화감을 느끼는 말이었다.

짐은 짐 트럭으로 바로 덴파사의 숙소로 이동되었고, 우리는 일터로 가서 일을 하고, 일하던 옷을 입은 채로 덴파사로 가야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가는 지역은 덴파사가 아니라, 르기안이라는 지역이었다. 차를 타고 일터로 이동하는 중간에, 일을 하면 땀이 날 것이고, 일을 하고 갈아 입을 깨끗한 티셔츠를 하나 챙겨둘 걸 하는 후회를 했다. 일터로 가는 차 안에서 생각해 냈으니, 어찌나 스스로가 바보스럽게 느껴지던지. 오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봐도 무엇을 했을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구덩이는 팠고, 벽은 쌓여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나는 분명히 벽은 쌓지 않았고.. . 구덩이를 팔 때 생겼던 흙을, 건물의 바닥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흩뿌리기라고 말은 했지만, 파놓은 흙은 다시 파서 건물의 바닥의 높이에 맞게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흩뿌리는 것처럼 여기 저기 옮기는 것이 우리의 일이었다. 흙을 파고, 옮기고, 흙을 파고 옮기고.

9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일을 했으니 약 3시간 정도의 일을 했던 듯 하나,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은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람을 그룹으로 나눠서, 미묘한 경쟁심을 느낄 수 있게 일을 했기 때문에 다들 즐겁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가끔 여자 단원들이 와서 곡괭이 질이나 삽 질을 해보고 싶다는 말에, 우리는 단 일초의 망설임 없이 곡괭이를 넘겨 주었고 그 잠시 동안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쉴 수 있었다.

점심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선가 배달이 되어 온 도시락이었다. 매번 올 때마다 내용물은 조금씩 달랐으나, 가운데 밥이 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반찬들은 조금씩 변했다. 우리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있기도 했지만, 특유의 향이 강한 음식은 내가 먹기도 전에 다른 단원들이 먼저 먹어보고, ‘, 그거 드시지 마세요.’라고 말해주는 바람에 선입견을 가져 버려, 더욱 사소한 도전을 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도전에 성공해서 한입 먹어보면, 먹지 말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 하고 혼자 쓸쓸한 위로를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군화를 털털 털고, 다들 자신의 차라고 생각하는 차에 앉아, 자신의 좌석이라고 생각되는 좌석에 앉아서 덴파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올 때와는 다르게 가는 길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날과 그 다음날이었던 일요일을 계속 놀 것이라는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어서 가깝게 느껴졌는지, 아니면 지름길을 왔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잠시 잠을 잤을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조용한 북부의 모습은 사라지고, 외국인 많고, 외국인의 수보다 더 많은 오토바이가 있는 덴파사, 르기안에 와 있었다.

인도네시아도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2차 대전 기간 동안에는 일본군의 점령을 받았지만,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우리와 같이 독립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던 만큼, 그들에게도 독립기념일은 의미 있는 날이리라. 우리와는 다르게 8 17일이 독립기념일이었다. 내가 왜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왜냐하면 우리가 발리에 있었던 기간이 독립기념일 전의 약 2주일이었고, 심심찮게 길거리에서 행진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독립기념일을 기념해 각 학교에서 행진대회를 열고, 그것으로 상을 수여한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의 도로사정을 설명하지 않고는, 왜 행진대회 연습이 나에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본 가장 큰 도로가 왕복 4차선 도로였으니, 일반적인 시내의 도로나 산을 넘어가는 도로는 왕복 2차선이었다. 즉 한 쪽 차선에서 학생들이 행진대회를 연습하고 있으면, 그 도로를 이용해서 통행을 해야 하는 차량은, 아무런 일도 아닌 듯이 중앙선-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중앙선이 점선으로 되어있다. 실선으로 되어 있는 중앙선도 있었는데, 운전기사의 행동패턴으로 미루어 보건대, 실선에서는 중앙선을 넘는 추월은 하지 않았다. 점선일 때만 추월을 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을 넘어가며 통행하고 있었다. 행진 연습을 하고 있는 학생들은 매우 절도 있게 행진했고 그 모습을 주민들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8 17일이 다가갈수록 학생들의 실력은 높아지는 듯 했고, 돌아오기 거의 직전에 학생들을 보았을 때는, 옷도 맞춰 입고 화장도 한 뒤 행진을 했다. 북한의 어린이들의 행진이나 가끔 조선중앙통신의 화면을 한국 방송에서 보여 줄 때, ‘무섭다라고 느꼈던 행진의 느낌이 살짝 들기도 하였지만, 인도네시아 학생들의 표정에서는 즐거움과 당당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을 보고는, 북한의 주민과 학생들의 표정이 궁금해지기도 하였다.

시내에 들어오자 이런 행렬들을 해치며, 운전기사가 자카르타 출신이라 발리의 길을 잘 몰랐기 때문에 내가 탄 차는 다른 차보다 약 1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신촌쯤 될까?’라는 여행관련 블로그를 적는 사람이 남긴 말이, 유행어가 되어 있었던 우리에게, 르기안은 과연 그러한 곳이었다. 많은 외국인이 보였다. 물론 우리도 발리 현지인이 보기에 외국인이겠지만. 하모니 호텔에 짐을 풀었다. 같이 방을 쓰게 된 경영정보학과 김성환 군도 같이 짐을 풀었는데, 신기한 붉은 상자가 보이길래,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내가 물었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한 장 찍어줄 수 있을까 하고 부탁을 했고, 나는 도착하자 마자 옷을 거의 다 벗고 있는 상태에서 팬티 한 장만을 입은 채 침대에 걸쳐 앉아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필름을 생산하지 않는 기종이 되었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오래되었던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 것 모르겠지만 화면이 붉게 나왔다. 그 붉게 나온 사진 속에서도 내가 얼마나 땀을 흘렸던지, 속옷에 땀이 묻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하모니 호텔은 우리가 묵었던 다른 호텔과 비교했을 때, 가장 평범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발리의 풍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비교적좁은 방과 그리고 비교적좁은 수영장이 있었다. 하지만 시내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첫날 밤 잠시 머물렀던 플로라 호텔이 하모니 호텔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비행기를 타기 전날 오후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플로라 호텔 역시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2일 간 이 호텔에서 잠을 자야 했기 때문에, 짐은 적당히 풀어 놓기로 하였다. 각방에 공용 짐이 분배되었고, 우리 방에 왔던 상자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열어보지 조차 않아서 알 수가 없다. ‘공용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에게 관련이 있는 물건이지만, 다시 말해서 와 관련성이 가장 먼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같이 방을 지내게 된 단원은 첫날 플로라 호텔에서의 정윤성 군과 김성환 군 중 김성환 군과 다시 지내게 되었다. 형과 지내는 것이 꽤 힘들었으리라 사려되는데, 아무 말 않고 잘 지내준 김성환 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