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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봉사활동 후기

성신의 해외봉사단 봉사 후기 - 6

아침이 밝았다. 어제의 꽃 단장을 다시금 정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놀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평소와는 달랐던 것이 이날과 다음 날은 큰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다. 발리에 와서 처음으로 다같이 차를 타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댄스그룹 터보검은 고양이 네로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경주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만큼 즐거웠다는 이야기이다. 즐거웠던 사람은 나뿐 만이 아니었던지, 지난 밤의 과도한 오락으로 인해 버스 뒷좌석에서 잠 드려 노력하고 있었는데, 다른 단원들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길래 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잠시 환전을 하기 위해 환전소에 들렀고, 나도 50불을 환전했다.

공식적으로 관광과 휴식을 위한 날에는, 아무런 생각조차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이 버스는 뒤에도 문이 있을까 부터 시작해, 다양한 질문을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지만, 혼자라도 중얼거렸겠지만, 그 동안의 일에 몸이 지쳤던지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날카로움이 더욱 더 무뎌졌던지 둘 중 하나였다. 처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바닷가. 분명히 해변의 이름이 있겠지만, 이때에는 이 해변의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누사두아 해변으로 추정되는 해변에 도착을 하니, 과연 관광지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해양 스포츠가 중심적인 관광상품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뭐랄까. 관광지가 아니라 해양 스포츠를 훈련하는 군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먼 바다에서는 스노클링을 하기 위한 일단의 배들이 군집해 있었고, 해변에는 파라세일링’, , 패러글라이딩을 위한 낙하산과 같은 것에 배를 연결해 배의 추진력으로 사람을 공중에 띄우는 놀이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마치 공중 강하를 기다리는 신병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또 저 멀리에서는 바나나를 닮았다고 해서 바나나 보트라고 불리는 것이 보트에 매달린 채, 그 위에 보트보다 더 필사적으로 매달린 사람들을 태우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넓고 아름다운 해변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질서한 듯 하면서 질서 있게 개인의 스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원래 파라세일링과 바닥이 보이는 배 타기, 그리고 바나나보트 타기 이 세 가지가 우리가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스포츠였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바나나 보트를 타고 난, 바닷물이 썰물이 되어 파라세일링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스노클링을 하게 되었다. 바나나 보트는 여러 언론 매체에서 소개가 되어 어떤 방법으로 타고, 어떤 느낌이 들지는 얼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빠른 배의 뒤에 달려 있는 바나나 보트 위에서, 바람이 얼굴과 몸을 가르며, 파도가 솔직하게 바나나 보트와 밀접해 있는 탓에 파도의 반동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예상보다 훨씬 즐거운 사실이었다. 해변은 흰색 모래였지만, 바다 속은 암초도 꽤 있고, 해초 등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바나나 보트를 마지막에 뒤집으면서 느끼는 통쾌함은 느끼지 못 했다.

앞서 설명 했듯이, 공교롭게도 바닷물이 바다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선택으로 스노클링을 하러 조금 먼 바다로 나갔다. 스노클링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하면, 스킨 스쿠바 다이빙을 할 때, 일반 수영장에서 쓰는 수경보다는 큰, 눈과 코가 같이 들어가는 수경을 낀다. 그리고 그 옆에 바다 위에 떠 있을 때, 쓸 수 있도록 긴 대롱을 달아 놓는데, 이것을 이용해서 머리는 바닷속에 있으면서 호흡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마우스 피스라는 것을 입에 물고 스노클이라는 것을 차고, 오리발로 바다 속을 저어 다니는 것이 스노클링이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아버지께서 스킨 스쿠바 용품점을 하신 적이 있다. 스킨 스쿠바를 배우기 위해 교육생들이 오면, 나는 아버지, 교육생과 함께 고향 마산 인근의 물이 맑은 도만이라는 곳에 가서 스노클링스노클링인지도 모른 채, 나의 몸에 맞춘 수트를 입고 헤엄을 치고 다녔다. 그 당시, 스노클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즐거웠던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다녔었는데, 물 위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내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스노클링을 하던 모습을 귀여워하셨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바닷가에 놀러 가시면 내 어릴 적 콧노래 하면서 능숙하게 스노클링을 했던 이야기를 하신다. 다시 발리로 돌아와서 이런 추억이 있는 스노클링을 약 13년 만에 하게 된 나로서는 매우 감회가 새로웠다. 누군가 스노클링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겠지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도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바다 중간이라고는 해도 수심이 깊지 않아, 내가 서면 설 수 있을만한 수심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리발을 껴 보고, 처음 스노클을 입에 물어본 사람에게는 꽤 많은 심리적인 부담과 실질적 사용에 있어서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해, 나와 같이 배를 타고 간 사람들에게 내가 스노클링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수경을 낄 때는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라, 머리가 들어가면 수경 안으로 물이 들어온다. 수경에 습기가 낄 때에는 자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유리 부분에 바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시야가 확보가 된다등을 알려 주었다. 분명히 배에서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되는데, 아무도 스노클을 입에 문 채로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스노클에 물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숨을 참고 바다에 들어가서 다시 나올 때 짧고 강하게 하고 불어주면, 스노클 안에 찼던 물이 다 빠져 나오기 때문에, 물고기가 된 듯한 기분을 충분히 느껴보라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그러지는 않았던 듯 하다. 바다에 적응이 되지 않은 여자 단원들은 허우적허우적을 계속했지만, 허리를 세우고 발을 앞뒤로 저으라는 이야기를 듣자, 그들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확인하였다. 바다 속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있었다. 배에서 식빵을 주길래, 이게 점심인가 하는 순간의 어이 없는 예상을 조롱하듯, 바다에 들어가면 물고기에게 식빵을 주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뭉치의 식빵을 들고 들어갔지만 물고기가 식빵을 먹기 전에, 식빵은 흩어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난 그냥 다른 단원들 위치를 이탈하지는 않는지를 한참을 살핀 뒤, 다들 적응이 된 것을 확인하고 돌고래가 되어서 놀았다. 오랜만의 바다 수영은 꽤 상쾌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지금도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혼자 바닷가에 앉아서 바다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적인 일인데, ‘바다라는 것이 때로는 너무 무서워 가까이 다가가기 조차 무서울 때가 있고, 때로는 나와 너무나 가까워, 또 너무나 아름다워 빠져들고 싶을 때가 있다. 발리의 바다는 파도는 꽤 있었지만, 관광지라고는 해도 바다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무서움을 숨겨 놓은 아름다운 바다였다.

처음에는 구명 조끼를 입고 스노클링을 했지만, 바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수영복만 입고 바다 수영을 즐겼다.

다시 우리가 타고 온 배에 승선했다. 여기서 또 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 세상의 배의 종류는 함선, 유조선.. 이런 이야기들이 아니라, 우리가 타고 왔던 배와 다른 배, 즉 남자단원들만이 타고 있던 배가 모양과 달릴 수 있는 속도가 달랐던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가 탄 배는 야마하 85마력을 2개를 달고 있었다. 합쳐서 170마력의 힘을 낼 수 있는 배였다. ‘마력이란 hp로 표시되며, ‘말이 끄는 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탄 배는 육지에서 말 170마리가 끌어 당기는 힘으로 바다 위에서 달려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 단원들이 탄 배의 엔진을 아무리 유심히 살펴보아도, 마력이 보이지 않았다. 뚜껑에 도색을 했는지 녹색만이 보였고, 한 눈에 보기에도 큰 마력을 낼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스킨 스쿠바 용품점을 정리하시고, 선박 판매 사업을 내가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시작하셨다. 배 이야기를 하다가 왜 뜬금없이 아버지의 사업 전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느냐. 나도 공식적으로 스킨 스쿠바를 접게 되고, 바다와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들을 찾게 되었고, 새로 찾은 놀이가 바로 배 타기였다. ‘배 타기가 무슨 놀이냐 하고 반문할 수 있지만, 선박 판매 및 선박용 엔진 판매를 하시기 위해서는, 손님에게 배를 태워 주거나, 엔진 설치 후 시운전이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거의 주말에는 학교를 마치자 마자, 2시간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의 사업장에 가서, 손님과 함께 배를 타거나 시운전에 참여하는 것이 오락이었다. 특히 선두에 서서 바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마치 타이타닉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난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치는 느낌으로 바다 위를 뛰어 다녔다. 이런 느낌을 발리에서도 받았다. 어느 쪽을 봐도 그림과 같은 풍경 속에서 바다 바람을 가르며 시원한 공기를 마시는 느낌은, 언제나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나 스스로에게 넌 역시 바다 사나이다.’라는 확신이 들 만큼 상쾌했다.

스노클링을 마친 뒤, 수영복 위에 해군 바지를 하나 입은 채, 그대로 거북섬으로 출발했다. 앞서 서술한 좋은 배를 타고 가니, 그 기분 상쾌했다. 우리가 휴양했던 발리 남부의 바다가 그러하다고 생각되는데, 수심이 깊지가 않아 배가 해변 가까이까지 다가가지 못했다. 거북섬으로 향하던 중, 바다 중간에 서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해변과 거리는 꽤 멀어져 있었지만, 사람이 섰을 때 설 수 있을 만큼의 깊이였다. 그래서 우리가 거북섬에 도착했을 때, 섬과 멀찍이서 내려주면서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하길래 배에서 내렸다. 보기에는 흰 모래사장이었으나, 바다 안의 상황은 해초도 많았고, 해초가 많은 것은 간질간질하다지만, 돌과 조개의 껍질이 지뢰처럼 우리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생각 같아서는 성큼성큼 바다로 뛰어가고 싶을 만큼 좋은 풍경이었지만, 당장 발 밑에 있는 돌과 조개에 신경을 쓰느라, 주변 풍경을 마음에 담을 때에는 잠시 멈춰 서야만 했다. 다른 단원들에게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지만, 안전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거북섬으로 갔다. 바다 중간에서 내려, 거북섬으로 향하는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으므로, 나도 고통스럽긴 하지만 다른 여러 사람들도 손에 옷자락을 붙잡고 아래만 바라보면서 걸어오던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또 안쓰럽기도 했다.

거북섬은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육지에 올라와서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데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천연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북이가 있었기 때문에 거북섬이라고 불릴 만은 하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뱀도 있고, 사향 고양이도 있고, 심지어 박쥐도 있었는데, ‘뱀섬도 아니고 사향고양이섬도 아닌 것이 별 이유 없이 재미있기도 하였다. 확실히 내가 재미를 느끼는 코드는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른 듯한 것을 발리의 조그만 섬에 와서 느낄 줄이야.

이렇게 가까이서 거북을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거북이를 들어 본 적은 물론 없었기 때문에 거북이가 유유히 헤엄을 치며 놀고 있는 물 속에 들어가 거북이의 등을 들어 나와 사진을 찍도록 하였다. 생각보다 무거웠고 등 껍질은 딱딱하기는 했지만,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딱딱함이었다.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것은 그 안에 거북이의 삶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혈기 때문에 부드럽게 느껴진 것은 아닐까 한다. 거북이 구경을 끝내고, 그곳에 있었던 다른 동물들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쓰면서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계투, 닭싸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돈을 나눈 뒤,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더 이상 판돈이 올라가지 않게 해 놓고, 닭을 발만 잡은 채 상대의 닭에게 가까이 다가가 화를 돋구었다. 닭싸움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의 놀이로서 즐기고 있지만, 진짜 닭싸움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심을 이야기 하자면 닭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 아니라, 거북섬이라는 관광지에 와서, 그것도 거북이가 알을 낳기 위해, 종족의 번식을 하기 위해 올라오는 성스러운 섬에서, 사람의 감정을 강제로 대변시켜 닭들에게 싸움을 시키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단지 재미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시기와 장소가 적절하지 않아 보였고, 패배한 닭의 꽁무니를 좇아 가던 닭을 보면서 환호하던 사람과 돈을 잃었다는 것에 잠시 동안 슬퍼하고, 다시 돈을 꺼내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거북이와의 충분한 시간을 보낸 뒤, 뒤편에 마련된 여러 우리들로 향했다. 열대의 섬에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박쥐도 있었고 도 있었고 코피 루왁을 만든다는 사향 고양이도 있었지만 우리가 잠들어 있는 이 동물들의 잠을 깨워서, 우리의 목적, 즉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용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거북섬에서도 이런 목적을 위해서 아무런 관련 없는 동물들은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이리라. 내가 다시 삐딱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동물원에 가서도 가끔씩은 느끼지만, 우리가 우리속에 들어 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느끼는 신기함기쁨이 저 동물들이 자신들의 서식지를 떠나 와서, 자유를 잃은 채 살아가는 것에서 겪어야만 하는 고통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어떤 것이 계량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다. ‘계량적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우나, 측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해 보고 싶다.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어린이들은 오지 탐험가가 될 꿈을 접게 되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을 잃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어딘가에서, 우리의 안전을 확보함과 동시에 우리 손에 들려 있는 먹이로 그들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괜히 흥분한 것 같다.

여러 동물들과의 사진 촬영을 마치고, 한쪽 구석에 마련된 식당 비스무리한 곳에서, 우리 보다 늦게 거북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사진을 다 찍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발리에서는 더운 날씨였던 만큼, 물을 많이 마셔야 했지만, 생각해보면 물을 마신 비율과 비슷하게 빈탕맥주를 마셨던 듯 하다. 기다리는 동안에 또 한병의 맥주를 마셨고, 언제나 그렇듯이 맥주는 나를 기분 좋게 했다. 김경희 양이 매번 내가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하는 한 구절을 옮기겠다.

오빠한테는 왜 맨날 맥주 빈 병이 와요?’

다른 단원들이 다들 돌아왔길래, 이제 늦은 점심을 하기 위해 다시 우리가 해양 스포츠를 했던 해변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멀고 먼 가시밭길과 같은 해변을 걸어서 배에 당도했고, 돌아갈 때는 배의 위에 서서 바람을 한껏 받으면서 돌아갔다.

해변에 도착을 해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아침보다 더 많은 왁스를 머리에 발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찌르는 머리를 만들었고, 스스로 꽤 만족한 머리 모양을 만들었다. 예전에는 머리나 옷 전체의 스타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나였지만, 최근에 들어서 이미지 변신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꽤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잠시 옆길로 빠져서 이야기를 하면, ‘학생 이미지에 맞는 옷을 입고 머리 스타일을 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늦게 대학을 들어와 26세라는 나이에 대학3학년이지만, 아직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가질 수 있는 자유분방함과 창의적 발상을 을 통해서나 학문을 통해서도 발휘를 해야 하지만,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젊은 내 몸을 가꾸는 것도 큰 기쁨의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다. 대신, 기준을 이것이 유행하니까’.’남들이 이것을 많이 쓰니까가 아니라 나랑 어울리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남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다소 어리석어 보이고 황당해 보이지 않는 범위의 것이라면 충분히 그 개성을 살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젊음의 가치는 남과 같음을 추구하는 곳에 있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면서,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기준을 삼을 수 있을 정도의 과정을 형성하는 것이 개인의 역사속에서 아름다웠던 청춘의 한 장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또 괜히 흥분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점심식사를 하는 곳은 GWK라는, 공원이라기 보다는 힌두신의 흉상이나 구조물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중국 음식이라고는 했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국음식이었던지 우리들의 입맛에는 썩 맞지 않았지만, 배가 고팠던 나는 과일과 더불어 꽤 많은 양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GWK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흉상과 구조물을 보기 위해 나섰다. GWK라는 의미는 GARUDA WISNU KENCANA라는 의미였고, 하나씩 설명을 하면, 가루다는 인도의 전설 속의 새 이름이다. ‘가루다, 가루다, 가루다… ‘ 어디선가 많이 들은 기억이 있다 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몇 단원들은 오고 갈 때 비행편이 대한한공이 아닌 인도네시아 항공을 통해 예약을 한 것이라 했다. 바로 그 인도네시아 항공사 이름이 가루다 항공이었다. 나도 가루다 항공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 항공 회사의 이름을 전설 속의 새의 이름으로 지었다라. 150년 전만 해도 하늘에 떠 다니면서 사람들을 싣고 다니는 새가 비행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없었다고 생각되기에, 나름대로 전설 속의 새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듯. 그리고 WISNU는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비쉬뉴인데, 비쉬뉴는 브라마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신이라고 했다. 토르소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흉상이 있었는데, 눈을 감고 있는 듯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눈을 뜨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죄송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으로 KENCANA인데, 정확히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정보의 물결 속에 물어보니, ‘0순위라는 설이 유력하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No.1’ 이런 느낌이나 !’이런 느낌일까. 전체를 붙여서 말하면 가루다와 비쉬뉴는 짱!’ 이런 의미의 테마 공원이다. 검색을 해보니, 원래 이곳은 채석장인데 어느 인도네시아의 부자가 테마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 투자를 하고 있으나, 지속적인 자금 공급이 되지 않아 조금씩 조성을 해 나가고 있다는 글을 읽게 되었다. 가루다와 비쉬뉴 흉상도 지금은 분리되어 있지만, 돈이 더 생기면 최종적으로 합친 것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완성되지 않은 것을 본 나에게 다시 발리에 오도록 만드는 충분한 유인은 제공한 듯하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나에게 발리를 설명하라고 하였을 때, 가장 인상 깊었고 또 다시 가게 된다면 또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이곳!’이라고 대답할, 울루와뚜 사원이었다. 울루와뚜 사원은 절벽 위에 지어져 있는 사원으로, ‘인도양을 바라보는 절경이 좋은 곳이라고 하도 많은 블로그나 여행기에 써 놓아서 그런 줄 알았지, 발리에서 지도를 보면서 관광을 다닌 것이 아니라서 바다 예쁘다가 내 공식 의견이다. 바다 예쁘다는 것이 내 공식 의견이었던 만큼, 내가 얻은 정보에 의해서 울루와뚜 사원을 설명하도록 하자. 원숭이가 많았다. 원숭이의 마리 수가 많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원숭이가 사람을 희롱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인상에 남는다고 하는 편이 더욱 적절한 표현일 수 있겠다. 사람들의 물건, 예를 들면, 안경이나 귀걸이, 목걸이 등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하라는 현지 가이드의 말에 따라 나는 원숭이가 없는 절벽으로 가기 전까지는 안경을 벗고 있었다. 과연 그럴 것이, 울루와뚜 사원에 들어와 바다에 흠뻑 젖어 있을 무렵, 우리 앞을 지나가던 중국인 관광객의 무리 중 여자 한 명의 안경을 원숭이가 빼앗아 가는 것을 보았다. 원숭이가 그 안경을 빼앗아 가서 무엇을 할까 가만히 지켜 보니, 먹는 것이었다. 먹는다기 보다는 입이 심심했던 모양인데, 그것을 잘근잘근 씹어가며 그 상황을 즐기는 듯 하였다. 중국인 관광객이 당황하자, 그 옆에 서 있던 현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봉지에 든 무엇인가를 중국인 관광객에게 구입을 권했고, 그것은 원숭이가 먹을 만한 것이 들어있는 봉지였다. 중국인이 그것에 대한 값을 지불하자, 현지인은 그것을 원숭이에게 주는 듯한 행동과 동시에 원숭이의 침이 흥건히 묻기 시작한 안경을 뺏으려는 준비를 하였다. 원숭이가 봉지를 집으려 할 때, 순간적으로 안경을 손에서 놓았고, 그때 현지인은 그 안경을 낚아 채 중국인 관광객에게 주었다. 보는 우리로서는 신기한 경험이라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인 관광객은 원숭이의 침이 묻어 있는 안경을 받아 다시 쓸 때 그 기분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단원 몇몇이 해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좋은 사진기를 들고 있는 정기연 군이 앞에 있길래, 사진을 좀 찍어 달라 부탁을 하였다. 단원들은 포즈를 취하고, 정 군은 사진을 찍기 위해 하나, .. ‘ 을 외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담벼락에 앉아 있던 원숭이가 이 끝나자 마자 정기연 군의 머리를 밟고 건물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기연 군은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친 줄 알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모든 사건의 추이를 보고 있었던 단원들은, 말 그대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상황과 타이밍이 어찌나 웃기던지,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도 웃고 있다.

 

원숭이가 우리들을 살짝 긴장시키긴 하였지만, 원숭이의 기억은 단편적인 추억으로 남을 만큼 바다의 모습은 좋았다. 사원의 울타리를 나와, 바다 가까이 가보니, 절벽 바로 앞까지 나갈 수 있는 풀밭이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어느 곳이든, 아무 카메라가 찍어도 엽서가 되었다. 절벽 바로 앞까지 나아가 보았다. 파도 소리가 지금 이 세상 어느 스피커를 쓰고, 아무리 좋은 영화관에서 쓰는 앰프라 할지라도 이 음량과 청량함은 담아낼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큰 파도가 치고 난 뒤, 잘게 부서지는 파도는, 벨벳 같이 파도가 한번 스윽 하고 쓸어가자 흰 바다로 변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정신이 팔려 절벽에 빠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황홀한 상태가 되었다. 마구 눌러대던 셔터에 잠시 손을 땐 채, 가만히 앉아 그 순간을 느꼈다. 이 글의 처음에 적었지만, 모두 다 가지고 오고 싶었지만 가져올 수 없었던 추억이 된다는 것이 슬플 만큼 좋았다. 바다를 어릴 적부터 좋아하고 또 사랑하고 있지만,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바다는 참 고마운 친구라 생각했다.

 

울루와뚜 사원에 대해서 계속 적고 싶지만, 감상에 빠져 감정만을 서술하는 것보다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발리의 울루와뚜 사원은 0순위의 관광지가 될 것임을 감히 추천하면서 울루와뚜에 관한 내용은 여기서 그만.

점심을 현지 시간으로 3시 정도에 먹었고, 울루와뚜 사원에서 다시 차로 돌아오니 시간은 7시 정도가 되어 있었다. 4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지만, GWK파크에서 사진을 찍느라 많이 돌아 다니고, 울루와뚜 사원에서의 산책이 우리에게 소화제가 되었던지 또 배가 고파 오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해변으로 갔다. 해변의 이름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의 해변이었는데, 식당들이 해변을 따라 이어져 있고 테이블은 해변 위에 있었다.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맨발로 식사를 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영화에 나오는 듯한 느낌의 식당이었다고 설명하려니 어느 영화?’라고 질문이 들어올지 몰라서 그냥 조용히 넘긴다. 좌석의 약 5미터 앞에서 전통공연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다른 레스토랑을 보아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하나의 정형화된 서비스인 듯 하였다. 식사 주문을 개인적으로 하게 되면, 상상 이상의 가격이 나오기에, 선생님과 팀장 정윤성 군이 주문을 하러 간 뒤, 조용히 앉아서 공연을 보거나 파도 소리를 듣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신 없이 하루가 지나갔고, 휴양지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하루였다며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고, 힘이 빠진 것은 아니지만 활발하게 움직이는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왜 그랬었는지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겠다. 맥주를 한 병만 마셔서 그런가.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한 그릇씩의 밥이 나왔고, 4명이 먹을 양의 생선 2마리, 오징어 튀김 그리고 조개 구이가 나왔다. 처음에는 양이 좀 적은 것이 아닌가 했지만, 먹다 보니 배가 부를 정도였다. 특히 생선구이가 맛있었다. 꽤 큰 생선이었는데 어떤 생선인지도 모른 채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었다.

식사를 하던 중에, 식당들을 돌아 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우리 테이블에도 왔는데, 바로 내 뒤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통에, 매우 흥겨운 기분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 얼굴을 올려보니,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눈이 풀려 있다고 해야 할까. 노래를 부를 때에는 이상하지 않았는데, 말을 할 때,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의미의 이상함이 아니라, 발음이 좀 풀려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선생님께서 얼마의 팁을 주셨고, 음악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들 즐겁게 식사를 하였는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표정들은 행복을 증명하고 있었고,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에, 발리에서 먹었던 식사들 중에서 항상 1위를 차지 하는 것을 보면 좋긴 좋았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해변가에 잠시 내려와 파도와 함께 놀고, 사진을 찍었다. 울루와뚜 사원에서부터 내가 단원들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사진사와 같은 말투를 계속 쓰고 있었는데, 단원들은 그 말투가 재미가 있었던지 흉내를 내고 있었고, 나는 바닷가에서도 이 말투를 계속 썼다.

, 사진 찍습니다-‘ ‘여기 봅니다-‘ ‘다른 데 보지 않습니다-‘ ‘찍습니다-‘ ‘고맙습니다-‘ ‘- 또 아무도 날 찍어주지 않습니다-‘ ‘- 또 나는 혼자 셀카 찍습니다-‘ 등등의 말을 하였다. 글로 적으려니 느낌이 잘 살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언제 듣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언제든 이야기해 주세요.

저녁식사를 하러 가던 길의 이야기가 빠진 듯해 채워 넣는다. 앞서도 이야기했었지만, 버스 안에서 단원들이 다같이 90년대 노래나 최신 가요 등을 부르면서 이동했다. 맨 뒷좌석에 앉아있는 단원들 말고는 단지, 우리들이 내는 소음을 감내하는 인내심만을 보여주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서는, 모든 단원들이 한 곡씩 노래를 불렀다. 아마 첫 시작의 운은, 현지 가이드가 발리에서 꽤 유명한 가수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노래를 시켜 보자고 나랑 마음이 맞은, 이창선 군이 분위기를 만들었고, 마침 그때 저녁식사 하러 가는 장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던 가이드는 마이크를 든 채로, 노사연의 애모를 불렀다. 한국인의 겸양을 가진 듯, 한 번은 웃으면서 거절하였으나, 계속 우리들이 요구하자 마지못해 부르는 듯, 노래를 신나게 불러주었다. 과연 노래를 잘 부르기로 소문이 날 수 있을 실력이라 생각했다. 한번 마이크 홀더를 떠난 마이크는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장학주임 이미숙 선생님을 포함해서 모두다 한 곡씩 불렀다. 나는 꽃을 든 남자를 불렀다. 2004년 숭실대학교 정외과에 들어가서부터 계속 이 곡만 부르고 있다. 처음 부를 때는 높은 음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는다거나, ‘꺾임이 자연스럽지 못했지만, 6년 째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 같다. 이미숙 선생님께서 그때 한국 가면 노래방 쏠게라고 하셨던 이야기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선생님, 약속은 지키시는 분이시죠?

다시 저녁을 먹은 뒤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나니 현지시간으로 9시가 넘어 있었다. 바로 하모니 호텔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내가 순간적으로 생각한 것은 어제 폴로 매장에서 보았던 보라색 티, 사이즈 맞는 것을 찾아야 해!’ 였다. 결국 찾지 못하고 폴로는 빨간 티 하나를 손에 쥐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이때는 무언가 보물찾기와 같은 느낌으로 보라색 사이즈 맞는 티 찾기놀이를 즐겼다. 호텔에 도착하면서 번화가를 지나오니, 이미 폴로 매장은 폐점 상태였고, 실망을 했다기 보다 즐거움을 잃었다. 인도네시아에 관광을 오는 사람들은 폴로 쇼핑을 하나의 관광코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지만, 한국 국내의 이상적으로 높은 가격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 인도네시아라는 폴로 공장이 있는 곳에서의 쇼핑으로 이어지는 듯 하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 폴로 티셔츠, 티는 인도네시아에서 싸게 주고 산 거야.’ 라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도 스스로 이야기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한국에서 보이는 폴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이미 안중에 없었고, 단지 그 생산지가 인도네시아라면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폴로 매장은 방문하지 못했다. 그 대신, 호텔 주변에 마사지를 할 수 있는 가게들이 많이 있어, 다시는 오지 못할 이곳에서 마사지를 한번 받아보자고 마음 먹고, 단원 몇몇이랑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영업을 주로 하는 마사지 시술소이다 보니, 영어로 적혀 있는 마사지의 종류가 적힌 메뉴를 볼 수 있었고, 실제로 가게 안에 눈이 파란 여자들이 몇몇 있었다. 나는 한 시간 반 동안 전신 마사지를 받는 것을 선택했고, 비용은 75000루피아였으니, 한국 원으로 환산하면 1만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마사지를 시술해주는 사람들이 여자 마사지사 밖에 있지 않아, 다른 선택의 여지가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현지 마사지사에게 나의 뭉친 근육을 부탁했다.

천장이 뚫려 있고, 각 방의 입구는 어두운 핑크색의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전체적인 조명은 어두워서, 졸리는 분위기를 만드는 듯 했다. 정확히 10시 반에 마사지를 시작하였는데, 한숨 푹 자다가 몸을 한 번 뒤집고, 다시 푹 자고 일어나니 11 50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 마사지 강도를 어느 정도에 맞출 것인가를 묻길래, 처음 했던 것보다 조금 강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 뒤, 팔도 힘을 빼고, 머리에도 힘을 빼고 뇌에도 힘을 뺀 상태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마사지사였는데, 악력이 내 뭉친 몸을 풀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특히 뭉친 곳을 누를 때면, 다소 고통스러웠지만 손길이 지나고 나면, 다시 그리워지기도 했다. 오일을 바르면서 마사지를 진행했는데, 그 오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어떤 오일인지 궁금했지만, 때로는 모르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또 좋은 추억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오일 뿐만 아니라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마사지사는 얼마의 임금을 받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신 이명박 대통령은, 경남대학교 산업대학원 초청으로 경남대 본관에서 강연을 했을 때, 어릴 적 그의 고향 포항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던 시절 이야기를 했다. 뻥튀기를 도매상에서 많이 떼어 와 가득 어깨에 매고 돌아다니다 보면, 꼭 어떤 사람들이 와서 이거 팔면 얼마를 버니? 일이 힘들지는 않니? 몇 살이니?’라고 물으면서 뻥튀기는 하나도 사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했다. 어린 이명박에게는 그런 말들 보다, 이거 전부 얼마냐, 라고 물으며 전부 사 가는 사람들이 훨씬 고맙게 느껴졌다고 했다. 내가 이곳 마사지사에게 한 달에 얼마를 버냐, 잠은 어디에서 자냐 등을 물어서 그들과 친밀감을 느끼고 싶은 생각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사지가 끝나고 난 뒤, 팁을 주면서 뜨리 마카시(감사합니다)’라고 웃음을 지어주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어제 오승식 군이 매우 피곤한 모습으로 호텔에 돌아왔길래, 도대체 밖에서 무엇을 했길래.. 라고 물었다. 그 대답이 마사지였다. ‘무슨 마사지를 받았길래, 진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냐?’라고 되물었고, ‘받아 보라라는 대답을 들었다. 마사지를 받고 나니,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았다. 나와 함께 같이 마사지를 받았던 4, 나를 포함해 5명의 표정이 발리는 천국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눈은 충혈되어 있고, 몸 전체에 힘은 빠져서 걷는 것 조차 힘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제대로 된 마사지였기 때문에, 몸이 가벼워 진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또 언제 전문 마사지사에게 마사지를 받아 볼지, 표현이 조금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다.

확실히 정신을 놓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마사지를 하고 난 뒤 호텔에 돌아와서 다같이 모여서 술을 마셨는지, 일찍 잠들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지상 마지막 낙원에서 혼자 그날 밤을 보냈었던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