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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2. 22:16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22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서울에 오게 된 것은, 아버지의 출장을 따라 나선 것이 계기였다. 고향인 경남 마산에서 서울까지는 지금도 4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다. 이도 차가 막히지 않았을 경우다. 조수석에 타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 가는 설렘도 갖기 전 비가 억수 같이 내렸다. 비가 온 탓인지, 왜인지 모르게 고속도로는 막힐대로 막혔다. 시간을 계산하는 것도 포기할 무렵, 잠이 든 채 나는 서울에 왔다. 고속도로 위에서 화물차를 운전하는 아저씨께서 창문 너머로 건네주신 과자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서울에 대한 설렘을 깨끗이 씻어 내렸던 비가, 참 싫었다. 지금은, 비가 좋다. 특히 지금 글을 적고 있는 오늘 같이 봄비가 많이 내리면 올해 모내기는 잘되겠구나, 하는 농부의 기쁨도 생각해본다. 하늘이 들려주는 음악은 규칙과 불규칙을 반복하며, 우산 아래 연인의 심장 박동을 요동치게 하기도 하고 또 정처없이 길 가던 사람을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묘한 음정을 갖는다. 토독토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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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2. 22:15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21


생각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어디선가 들은 것이거나 읽은 것에서 벗어나 자기자신만의 생각을 구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이전의 나는, 생각이란 누구나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다 보면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또 논쟁이 붙거나 토론이 형성되었을 때, 내가 말했던 내용은 사실상 내 생각이 아니라 유명학자나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은 내용들을 내 입과 시간을 빌어 전하는 것 뿐이었다. 누군가의 생각을 읊는 것과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갖고 그것을 밝히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표절과 창작이 가지는 사회적 입장과 유사하다. 바쁘게 보내게 되는 일상 속에서든,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의 시공간 속에서든 자신만의 생각을 갖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차에 멍하니 앉아 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달았다. 비록 투박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갖겠다는 노력으로, 한 명의 사람은 타인과 다른 존재가 된다. 특별하지 않을지 몰라도 독립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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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 00:28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20 
모교에 있는 영화관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앉을 수 있었다. 몇 역을 지난 뒤 내 건너편에 한 여대생이 앉았다. 그를 여대생이라 특정지을 수 있는 이유는 대학과 학과가 적힌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국대 영화과 학생이었다. 최근 영화과와 영상과의 학과 통폐합을 막고자 많은 학생들이 단식을 비롯해 농성을 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던 참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을까 고민하다 수첩에 꺼내 이렇게 적었다. ‪#‎SAVEKUFILM‬ 끝까지 힘내세요! 영화과-영상과 통폐합에 반대합니다! 건대 정외 08 졸업 권현우. 성수역에서 그 여학생이 내리려는 줄 알고 성급히 뛰어가 쪽지를 찢어 건네주었다. 처음엔 놀라던 여학생이 쪽지 내용을 보자 살짝 웃음을 짓는다. 둘 모두 건대입구에서 내렸다. 내리기 전 나는 그 여학생이 우는 것을 보았다. 착각일 수 있으나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닦으며 흐느끼는 어깨를 보았다. 그간 힘들었나 보다. 힘내세요,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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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 00:27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19
새로운 직원을 한 명 뽑을 예정이다. 대표가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 공지를 올렸고, 하루 만에 10명 넘게 지원자가 모였다. 야근 뒤 저녁을 먹기 전 지원자들의 신상과 자기소개서를 프린트해 돌려 보았다. 전문대를 갓 졸업한 나이 어린 사람부터 40대 남성 등 지원자의 분포는 다양했다. 저녁 메뉴인 순대국을 먹기 전 지원서를 보는데 마음 한 켠이 씁쓸했다. 자기소개서에 적힌 지원자들의 글을 읽는데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라는 그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될 사람을 뽑는데, 제대로 된 인사조직도 없는 작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자 적은 글들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대학에 다시 들어오고 난 뒤 들어갔던 국제교류시민단체에서 1년을 보낸 뒤, 후배를 뽑는 면접을 마친 뒤 선배에게 말했다. 새로운 사람을 뽑는 것이란 운명을 바꾸는 것과 같네요. 이전과 이후가 다를테니까요. 운명의 변곡점에서 결정은 생각보다 쉬이 다뤄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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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9. 22:30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18


얼마 전 한 단어가 들어와 박혔다. '적독(積讀)', 책을 쌓아만 둔 채 읽지 않는 하나의 독서법. 중학교 당시 처음으로 책을 읽겠다는 의지를 갖고 읽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이후 종종 독서를, 시간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으로 택해왔지만 최근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 하나를 다 읽고 나면, 왜 좀 더 빨리 읽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내 방 책장에는 읽지 않은 책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제목들을 하나씩 흞어보며 그들이 들려줄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러면서 꿈꾸며 읽어가고 있다. 당장 읽지 않아도 될 때도 있다.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며 그 책의 존재를 잊지 않으면 될 때도 있다. 삶도 그렇다. 정독이나 통독을 하며 나와 남에게 책의 존재를 알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주를 닮은 존재 자체를 가만히 바라봐 주는 것, 적독이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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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9. 22:29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17


저녁 즈음 다시 돌아온 도서관, 과제 준비를 하기 위해 책들을 펼쳐놓은 채다. 교환학생 신분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4월의 어느날이었다. 검은 건 칠판이요, 하얀 건 교수가 적어놓은 글씨라는 것 정도는 이해했다. 나이 든 교수의 판서는 일본인 친구들도 이해하기 어렵다 한다. 생면부지 친구들의 노트를 복사하는 것도 모자라 매 수업 시간마다 녹음을 한 뒤 복습하는 하루가 계속됐다. 과제도 피할 수는 없었다. 도서관에서 과제 준비를 이러저러쿵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서관에 불이 꺼진다. 당황하는 학생들. 하지만 학교 노트북의 불빛이 그대로인 것을 보니 정전은 아닌 듯 했다. 이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지구의 날입니다. 지구를 위해 10분 간 소등하도록 하겠습니다. 10분 동안 생각했다. 전기는 지구의 몸을 파헤쳐 캐낸 어떤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10분 뒤 다시 불이 들어온 뒤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들이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그 10분 동안, 나는 지구와 이전보다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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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9. 22:29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16


소풍날이다. 머리맡에 잠들기 전 싸놓은 가방에는 과자가 가득했고, 음료수는 시원하도록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온 뒤 부엌으로 향했다. 가게 뒷편에 집이 있었고 겉보기에는 현대식 빌딩이었음에도 부엌은 묘하게 재래식 부엌의 느낌을 풍겼다. 어두운 부엌 조명 아래서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일어났나. 어머니께서는 김밥을 싸고 계신다. 눈을 부비며 김밥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마주 앉는다. 대발에 김과 조미된 밥을 놓고 고명이 들어가자 어느새 김밥이 되어 나온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슥슥 썰어 나의 입에 하나를 쏙 넣어주신다. 어머니께서는 김밥의 꼭다리를 드시며, 큰 일 할 사람은 이런 거 먹으면 안된다 하신다. 김밥은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선생님께 드릴 것 그리고 혹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친구를 위한 것까지 준비하시는 어머니. 깨소금 흩뿌린 김밥 도시락은 나의 자랑이자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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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9. 22:28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15


화려하게 꾸며진 꽃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꽃꽂이에는 꽃 뿐만 아니라 뭉털이실이 흐느트러져 있다. 봉사활동을 시작하기 전의 오전, 나는 합장을 한 채 마을 사람들을 기다린다. 라오스의 수도 위앙짠 근교의 한적한 마을의 학교 운동장이다. 마을 어른들께서 모두 모이자 바시 의식은 시작된다. 마을 이장 쯤 되시는 분이 의식을 진행한다. 나는 가만히 엄숙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시간을 흘리듯이 손에 담고 있다. 그리고 꽃에서 이어진 실의 끝을 잡은 채다. 의식이 끝나자 현지 어른들께서 실을 내 왼쪽 손목에 묶어주신다. 적은 금액이지만 지폐와 함께 묶는다. 헐거우면서도 끊지 않는 이상 풀리지 않게 실을 묶어 주시며 눈을 마주친 뒤,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 나도 여러 사람들에게 실을 묶어주었다. 2009년 1월에 맨 바시의 실은 2011년 여름이 되어서야 끊어졌다. 실이 끊겨 버렸을 때 아쉽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게 되니 더이상 집착하지 않고 변치 않는 모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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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9. 22:27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14


10시 반 퇴근을 하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시계에는 아침과 저녁 뿐이다. 오전오후의 태엽은 누군가 잘못 감은 듯 빠르게 돌아갔다. 여러 은행을 다녔고 한 군데의 등기소에 다녀왔다. 하는 일이야 단순 반복 업무이지만 반복되는 것에도 절차가 있고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 중 하나라도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모든 업무를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생각을 하며 일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매일 깨닫는다. 어제 했던 일이 익숙해지면 불편함이 보인다. 불편의 개선은 나만의 과제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이 퍽 기분 좋다. 나는 스스로 다짐한다.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자. 아주 작은 성장이라도 내가 다시 잠자리에 들었을 때, 더 필요한 사람, 더 가치 있는 사람 그리고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걸로 족하다. 지난 달 첫 월급을 받고 적잖이 실망을 했다. 실망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그간 갖추지 않은 척 했던 성실함을 앙다물어 연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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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9. 22:26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113


한 신문사 소속의 출판사에서 주최한 북콘서트를 다녀온 적이 있다. 중년의 심리학을 다룬 책이었음에도 젊은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취미도 없이 먹고 사는데에 삶을 바쳐야 했던 수많은 중년들이 겪는 여러 심리적 고충들은 부모님 세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북콘서트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저자들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나는 그 줄에 서지 않기로 했다. 대신 책의 맨 뒷 장에 작게 적힌 출판사의 직원들을 찾아갔다. 사인 좀 해주세요. 사인을 해달라는 나의 요구에 출판사 직원들은 난색을 비춘다. 손사레를 치다 계속된 나의 요청에 머뭇거리며 자신의 이름을 평소 글씨체로 조심스레 하나둘 책의 뒷면에 줄지어 적는다.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 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담긴다. 그 책을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을 한 사람들 역시 그 책의 저자라 할 수 있다. 뛰어난 화가는 그림의 배경도 결코 허투루 그리지 않는다. 배경이든 주된 사물이든 사람은 주인공이다. 언제나 어떤 역할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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