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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_39 #현우의500자 _39 선인장은 참 말이 없다. 아무 말 없이 그리고 아무런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다. 관심을 언제 주었는지도 까먹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도 선인장은 여전히 가만히 있다. 다가가 자세히 보면 가시가 보인다. 선인장에게 가시가 있는 이유가 뭘까. 지킬 것도 없어 보이는 이것에게 가시가 돋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져 선인장의 어원을 찾아보니 하늘에서 천하태평의 표시로서 내려 보내준 감로(단 맛의 이슬)를 받는 그릇이고, 신선이 손바닥으로 쟁반을 받치고 있는 모습을 닮았기에 선인장(仙人掌)이란다. 그럼 선인장은 천하태평을 상징하는 것일까. 가만히 서서 언제 여물지도 모르는 감로를 기다리는 것일까. 감히 말해보건대 선인장은 청춘과 닮아 있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푸르고 .. 더보기
현우의500자_38 #현우의500자 _38 소풍 전날에는 슈퍼를 갔다. 소풍날 먹을 과자를 사기 위해서인데, 내가 가는 슈퍼는 정해져 있었다. 바구니에 먹고 싶은 과자를 사서 카운터에 들고 가면 슈퍼 사장님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내일 소풍가는가베?" 나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답한다. 예! 사장님은 바구니를 다시 드시곤 가게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내가 살 수 없는 가격의 과자를 바구니 잔뜩 담아 오신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과자를 봉투에 담아 주시며 "내일 소풍가서 재밌게 놀다와라."고 말하신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양손에 과자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과자를 차곡차곡 가방에 넣으며 몇 봉지의 과자는 그 자리에서 까서 먹는다. 다음날 소풍에서 나의 과자는 언제나 인기가 있었다. 집에 오는 길, 과자를 .. 더보기
현우의500자 _37 #현우의500자 _37 외가에 놀러 가면 빠지지 않고 찾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부엌이다. 현대식 부엌이 아니라 아궁이가 있고 그 위에는 어릴 적의 내가 몸을 잘 포개어 들어가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큰 솥이 있었다. 솥 안에는 뜨거운 물이나 숭늉이, 정신이 아찔할 정도의 향을 내며 끓고 있었다. 부엌 안을 보면 아궁이만 붉었다. 벽과 찬장, 그리고 그 아궁이의 불을 떼고 있는 외숙모의 얼굴에도 그을음이 끼였다. 그을음이 끼여 원래 어떤 색깔이었는지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벽과 찬장에는 외숙모의 손길에 의해 그을음을 지우고자 한 흔적들이 보였다. 키가 작은 외숙모께서는 손이 닿는 곳까지 열심히 그 흔적을 남겼지만, 정작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을음은 닦아내지 않으셨다. 그 그을음은 더럽지 않았기에 그럴지도.. 더보기
현우의500자_36 #현우의500자 _36 여간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도 아니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탓도 아니다. 단지 손에 잡히는 어떤 것을 들고 조용히 그것과 대면을 하는 것일 뿐임에도 여간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필요하다면 말을 해도 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을 읽어내려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어색하고 그 시도 자체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러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지겹고도 또 지겨운 독서다. 과거에는 시간을 보낼 일이 없어 책을 읽거나 썼다고 하는 낯 뜨거운 이야기는, 사랑방의 할아버지 담배 곰방대처럼 낡았다. 눈을 뜨면 우리를 부르는 0과 1의 합창 속에서, 그 사이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두꺼운 책 한 권은 마음의 불편함을 준.. 더보기
현우의500자_35 #현우의500자 _35 술과 담배의 가치가 폄훼되는 데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에 살면서 이 둘은 우리의 삶을 망치는 대표적인 해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을 나아지게 하는 두 가지를 꼽는다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그것은 정치와 섹스다. 현대 뿐만 아니라 인류가 탄생할 때부터 우리는 이 둘에 의해 더 나은 하루를 꿈꾸고 살아왔다. 유일한 조건은 이것들의 건강함이다. 정치는 사회 속의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서로 다른 의미의 미래는 제도와 타협이라는 오르가즘을 통해 일치된다. 섹스는 일부 문화권에 따라 언급되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동물의 마음 속의 섹스는 끝을 모르는 동굴이다. 섹스와 유사 섹스는 종교 혹은.. 더보기
현우의500자 _34 #현우의500자 _34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흔히 그리고 편하게 쓰는 표현 중 '우월한 유전자'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외모가 출중하거나 키가 다른 형제들보다 크거나 사회에서 요구되는 재능들(어학 실력, 노래 실력 혹은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붙이는 수식어이다. 일상 생활 나아가 이미 방송에서도 사용할 정도로 일반화된 표현이다. 하지만 난 이 단어를 보거나 들을 때마다 차가운 바람을 맞는 듯하다. 왜냐하면 우월함은 열등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음을 뜻하면서 나아가 그것이 하나의 차별의 근거로써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차별했던 근거는 그들의 민족, 즉 다른 유전자를 가졌다는 것에서 연유했고 흑인 차별 역시도 그랬었다는 것은 .. 더보기
현우의500자 _33 #현우의500자 _33 잇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한다. 어제의 내가 몇 시에 일어났는지 기억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어제의 기상 시각을 잊는다. 습관이 되어 버린 시간이라면 기억의 노력조차 필요 없겠지만 습관이 되기 전 잊은 것들은 많다. 매일 아침 어제와 다른 하루가 시작되지만 내가 어제 무엇을 했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하루가 시작된다. 어떻게 눈을 뜨는지 부터 시작하여, 어떤 곳에서 내가 잠들어 있는지, 아침 인사는 어떻게 하는지 아니, 그 전에 말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 기억해야 할 일들은 많다. 하지만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을 살고, 오늘에 이어 내일을 사는데 익숙해 있.. 더보기
현우의500자 _32 #현우의500자 _32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헛소리는, 자주 듣다보니 익숙해진 말 중 대표적인 말이다. 누군가는 인간이 가진 '자유 의지' 때문에 우리 스스로에게 왕관을 씌울 수 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이성'의 존재와 '지성'의 발휘가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머리 속에 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화학 작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육체만을 보면 아직 진화의 길은 멀기만 하다. 사람은 잠을 자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리고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리고 물도 마셔야 한다. 이런 신체 활동 중 가장 진화가 덜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배설'이다. 어찌나 인간의 몸은 비효율적인지, 먹은 것을 다 소화시키지 못한다. 찌꺼기는 남고 남아 다리 위와 배 .. 더보기
현우의500자 _30 #현우의500자 _30 그렇게 외로웠니.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다 나를 만나러 바쁜 걸음으로 뛰어오는 너의 모습은 반가워. 나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가끔 네가 귀찮게 느껴지기도 해. 넌 너무 욕심쟁이야. 나에게만 손길을 주는 줄 알았는데 내 옆의 그 여자에게도 넌 손길을 주고 있어. 너의 존재를 느끼고 있어. 내 이마에 땀이 흐르기도 전에, 내가 커피를 후후 불기도 전에 너는 나를 와락 껴안고 휘감고 내 몸 곳곳을 너는 희롱하곤 하지. 그만하라고, 사람들이 많으니 그만하라 해도 너는 포기할 줄 몰라.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으니 이젠 너를 사랑해볼까 해. 여름에 태풍처럼 밀려와선 가을에는 스산함을 남겨주고, 겨울에는 네가 없이 잠 한 숨 잘 수 없는 밤을 만드니 나는 너와 헤어지고 싶.. 더보기
현우의500자 _29 #현우의500자 _29 2학기가 끝나고 겨울 방학을 보내고 돌아오면 친구들은 조금씩 성장해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제법 골격이 갖춰지기 시작했고, 여자아이들은 볼에서 피어오르는 수줍음과 가슴에 솟아나는 여성다움을 숨기려 애써 표정을 굳히고 어깨를 수그리곤 했다.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힘이 세 보이는 남자아이 몇 명을 교무실로 보내셨다. 아이들이 들고 오는 것은 새 학기의 교과서다. 박스를 일렬로 세워놓고 열어젖힌 박스에는 새 책의 냄새가 가득 베어있다.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한 권씩 책을 집어가며 다음 학기에는 익숙해질 책을 익숙하지 않은 손짓과 눈빛으로 챙겨갔다. 모든 아이가 자리에 앉으면 선생님은 흰 종이 하나를 꺼내셨다. 새 학년의 반 편성이 적혀 있는 종이다. 아이들의 이름과 몇 반인지를 부르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