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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500자_88 ‪#‎현우의500자‬ _88 공익근무요원이었다. 해군에 입대하고 나서야 내 시력이 군대를 갈 수 없을 만큼의 시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합병원에서 병사용 진단서를 떼어 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공익요원 판정을 받고 4주 간의 훈련 이후 내가 배치된 곳은 아동양육시설이었다. 부모가 버린 아이들이나 학대 받던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차량 운행 및 관리, 학습 지도 그리고 식사 준비가 내 업무 중 하나였다. 그날은 마늘 쫑대 볶음이 반찬으로 나가는 날이었다. 마늘 쫑대를 물에 데쳐 그것을 한 번 씻어 내고, 다시 볶아야 하는 음식이다. 마늘 쫑대를 물에 데치고 그것을 옮기려는데 손잡이 부분이 갑자기 헐거워졌다. 뜨거운 물이 내 왼쪽 허벅지 쪽으로 쏟아진다. 데친 마늘 쫑대를 버리지 않으려.. 더보기
현우의500자_87 ‪#‎현우의500자‬ _87 KBS홀이요. 택시를 타면서 기사님께 행선지를 크게 말한다. 기사님이 나를 돌아 보시고는 너 혼자냐 하고 물으신다. 네. 기사님이 KBS는 왜 가냐고 물으신다. 공연하길래 친구랑 같이 보려구요. 친구 기다렸는데 안와서 택시 탔어요. 기사님께서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 택시에서 내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다시 앞문을 열어 타라고 하신다. 나는 왜 그러시는지 알지 못한 채 시키는 대로 한다. 기사님께서 이야기하신다. 내가 KBS까지 데려다 줄게. 근데 바로는 못가고 다른 손님들도 좀 태워드리면서 갈게. 네. 나는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들떠 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나는 곤히 잠에 빠졌다. 기사님께서 나를 깨우신다. KBS 다왔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보니 웅장한 건물 앞이다... 더보기
현우의500자_86 #‎현우의500자‬ _86 싼타 마리아 살루테 성당 앞 계단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인스부르크에서 출발하여 베네치아까지 침대칸을 타고 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다. 습도 탓인지 바지 안쪽이 쓸리듯 아프다. 침대칸에는 나와 4명의 홍콩인 그리고 피곤했던지 아무 말도 없이 잠이 든 여자가 있었다. 아침에 깨어난 여자는, 내가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아무말 없이 수줍은 미소만을 보일 뿐이다. 그 미소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좁고 복잡한 베네치아는 미로 그 이상이다. 피아짜, 즉 광장에만 있는 우물의 덮개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신기루 속의 오아시스인 듯 마음을 트이는 상쾌함이 있다. 강 같은 바다 건너, 다시 산타 마리아 살루테 성당 앞 계단.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생면부지 백인이다. 혹시 뮌헨 다녀.. 더보기
현우의500자_85 ‪#‎현우의500자‬ _85 흑흑. 당신은 조선인이 아니오. 조선인이 같은 조선인에게 어찌 이럴 수 있소? 나는 조선인이오. 하지만 지금은 황국의 군인이오. 황국의 군인으로서 일본을 지키겠다 목숨 걸고 나온 이상 나에게 조선은 없소. 흑흑. 내 비록 억지로 끌려와 일본군들에게 조리돌리곤 있지만 당신과 같은 조선인이 나를 이렇게 대한다면, 난 정말 내가 가진 것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심정이 될 것이오. 이러지 마오. 정말, 이러지 마오. 난 오늘 꼭 그대와 잠자리를 해야겠소. 내 비록 부모의 나라를 버린 몸이지만 내게는 아직 조선의 피가 흐르오. 조선의 피를 당신에게 남기겠소. 그러니 제발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흑흑. 당신의 그런 말에 내가 고마워나 할 것 같소? 당신은 결국 일본군과 같은 족속이오. 그러.. 더보기
현우의500자_84 ‪#‎현우의500자‬ _84 5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우리가 탄 기차가 우리가 가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부랴 기차에서 내려 원래 가려던 방향의 기차로 옮겨탔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오사카. 기차는 도쿄에서 출발했다. 이미 7시간 이상 기차에, 몸을 순대의 소처럼 꾸역꾸역 넣고 왔는지라 몸은 천근만근이다. '청춘18표'라는 이름의 기차표. 기차 시간만 정확히 맞추면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큰 돈을 들이지 않고 갈아타며 갈 수 있다. 정확히는, 내가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갈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한참을 달리던 기차가 마이바라(米原)역에서 멈춘다. 12시가 가까워 온 시간, 더 이상 오사카행 기차가 없다는 역무원의 말. 결국 역 앞에서 노숙을 하기 위해 맥주를 몇 캔 준비한다. 역 앞에는.. 더보기
현우의500자_83 ‪#‎현우의500자‬ _83 14년 설이다. 온가족이 과일을 먹으며 둘러 앉았다. 어린 조카들의 재롱을 보며, 근황이나 향후 계획 등을 두런두런 나눈다. 습관처럼 켜놓은 티비에 한라장사 결승전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전통가요를 부르는 가수가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티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러다 티비에서 아는 이름이 들렸다. 박정진 선수 입장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일요일마다 절에서 같이 놀았던 동생이다. 서로의 부모님들도 젊은 시절을 같이 보내셨다. 씨름선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라장사 결승전에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 모두가 티비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한 판 한 판 시합이 끝날 때마다 정진이가 우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았다. 결과는 패. 한라장사가 된 다른 선수가.. 더보기
현우의500자_82 ‪#‎현우의500자‬ _82 가족이란, 같은 치약을 쓰는 사람들이다. 무엇을 먹고 마셨든 같은 치약을 쓴다. 그래서 양치를 마치고 나온 가족의 입에서는 같은 향이 난다.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때도, 또 미움과 시기를 드러낼 때도 같은 향을 내는 입으로 말한다. 누군가가 치약을 다 썼다고 여겨 버리려고 하면, 어머니는 그 치약의 몸통을 무지막지하게 비틀어 버리고는 '앞으로 몇 번의 양치'라는 승전보를 가족에게 알린다. 그리고 어느샌가 누구의 취향인지도 모를 새 치약이 있으면 가족은 또 같은 향을 내는 입으로 가족임을 확인한다. 가족이란, 같이 밥을 먹는 사이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집 밖에서든 집 안에서든 무엇인가를 자신 안에 받아 들이게 되었을 때, 온전히 그것을 가족의 것으로 인정해주는 사이이다. 남자친.. 더보기
현우의500자_81 #현우의500자 _81 이른 새벽이다. 어제의 작업에 고단했던 나는, 10시 경 침낭에 들어가 얼굴 만을 내어 놓은 채 잠이 들었다. 잠을 자야겠다, 는 생각도 없이 잠이 들어버리고는 아침이 어슴푸레 밝아오면 눈꺼풀 위로 새로운 빛이 들었다. 동남아라고는 해도 1월 라오스의 새벽은 스치는 바람이 시기하듯 춥다. 얼굴에 간 밤의 추위가 서리 내려, 바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눈썹을 한 번 으쓱하곤 침낭의 지퍼를 내린다. 피로는 가셨지만 여전히 어제 도서관을 짓기 위해 들었던 벽돌의 무게가 근육 곳곳에 남아 있다. 으, 짧게 신음소리를 내고 1층으로 내려 간다. 라오스인 아저씨와 부인 그리고 학교를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난 첫째 아들이 바짝 모은 모닥불가에 앉아 있다. 모닥불 위에는 검게 그을린 .. 더보기
현우의500자_80 #현우의500자 _80 할매, 오데 가노? 행님하고 내 데꼬 오데 가노? 시장가나? 시장 가서 뭐하는데? 시장가면 맛있는 거 사주끼가? 시장이 오덴데? 할매, 내 팔 아프다. 내 다리 아프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 빨리 가야 되나? 와 그리 빨리 가는데? 빨리 시장가서 맛있는 거 무끼가? 알았다. 할매, 내 손 잡고 가자. 행님아, 내 손 잡고 가자. 시장 아직 안왔나? 요가 시장이가? 할매, 내 저거 사도. 할매, 내 이거 사도. 와 앉노? 할매, 와 갑자기 앉노? 일어나라. 뭐하노? 할매. 뭐 꺼내노? 할매. 우리 밭에 있던 기네. 우리 밭에 있던 것도 같이 시장 왔나? 상추도 왔나? 고추도 왔나? 같이 있으니까 반갑네. 억수로 반갑네. 할매, 뭐하노? 뭐하는기고? 안됩니더. 야들은 내 친굽니더. 가.. 더보기
현우의500자_79 #현우의500자 _79 할머니를 모시러 갔다 오는 길이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는 길,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내가 익숙하다고 해서 그가 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나지막이 형, 안녕이라 외쳤다. 차의 창문은 닫힌 채였고 속도 또한 늦지 않았기에 그에게 내 목소리가 닿았을 리 없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형이다. 그는 항상 우리에게 침을 뱉었다. 왜 침을 뱉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누군가 먼저 바보라고 놀리고 나서야 형이 침을 뱉기 위해 입을 오물거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바보라고 놀리지 않고 형에게 다가가면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어 준다. 친구들에게도 바보라 놀리지 않으면 침을 맞지 않는다고 알려주었지만, 친구들은 꾸준히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