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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_54 ‪#‎현우의500자‬ _54 피렌체 대성당 옆 지오토 종탑에 올라가려는 사람들의 줄은 길었다. 붉은 피렌체를 보려는 걸까. 나는 붉은 피렌체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보기로 하고, 피렌체 대성당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천국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다는 산 죠반니 성당을 에스프레소 한 잔 들고 빼꼼히 바라보기도 하고, 타일로 만들어진 길바닥을 발로 팡팡 소리 내어보기도 했다.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순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마음에 양각으로 남은 하얀 얼굴, 단발의 머리 그리고 가벼운 옷차림의 여인을 보았다. 지오토 종탑에서 들리는 침묵의 종소리가 들리자 내 몸 안팎의 웅성거림은 잦아들었고 나는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갔다. 어떤 사람일까. 질문을 떠올리며 따라가고 있을 때 동.. 더보기
현우의500자_52 #현우의500자 _52 생계를 위한 글감을 받고 저녁과 함께 소주 한 잔을 나누었다. 돌아가는 길, 담배를 한 대 피워보자며 주머니를 뒤졌지만 라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집에 있는 라이터가 이산가족만큼 그립다. 10시가 넘은 시각 을지로에는 사람 그림자가 없다. 도심공동화란 이런 것인가 하며 사람을 찾아 기웃거리다가 허름한 맥주집을 발견했다. 유레카. 저곳에는 라이터가 있겠지. 실례합니다. 혹시 라이터가 있을까요? 초로의 남자와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 라이터는 없고 이거라도. 하며 쥐포를 굽는 불판으로 나를 안내한다.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이 내게 다가왔다. 다가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찰나, 뭔가 타는 냄새가 났다. 내 앞머리의 극소부가 고슬거리며 타버렸다.. 더보기
현우의500자_51 #현우의500자 _51 1960년. 우리가 헤어진 때는. 그로부터 50년이 더 흘렀지만 아직 우리는 만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이며 둘이 되어 버린 우리는 아직 서로에 대한 서먹함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둘 사이를 막고 있었던 것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멀게 느껴진다. 누구는 자유를 이야기했고, 누구는 우리의 안전을 이야기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기에 지금은 헤어져야 한다며, 헤어짐을 그리고 그리움을 남겼다. 우리 사이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여전히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설국의 바람이 건너갈 적, 그 바람이 부러운 이유는 조약으로 가로막지 못한 하늘에겐 등록이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종전의 회한과 패.. 더보기
현우의500자_50 #현우의500자 _50 돌고래들이 섬 뒤에 나란히 서 있다. 서로의 몸을 끈으로 묶은 듯 가로로 줄지어 있다. 섬은 고향 바다에 떠있는 돝섬이다. 맷돼지의 전설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옆에서 보면 꼭 거북이 같다. 목을 주욱 뺀 거북이가, 넓은 바다를 향해 누워 있다. 대양을 갈망하는 거북이 옆으로 돌고래들이 마산항을 향해 엉덩이를 삐죽이 내밀고 있다. 빨아도 나오지 않는 거북이의 젖을 대하듯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아래위로 출렁이는 돌고래들의 모습은 내가 좋아하는 여름 날 태풍 전야의 풍경이다. 진해에 있는 해군 함대는 태풍이 오기 전 날, 항상 함선들을 고향 바다 앞으로 보냈다. 돝섬에 가리어 합포만은 높은 파도가 일지 않았다. 육중한 회색 몸뚱이 위에 적힌 검은 숫자들이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전함이.. 더보기
현우의500자_49 #현우의500자 _49 지하철 객차에 앉아 있다. 한 량은 바쁠 틈도 붐빌 틈도 없다. 책은 덮고 일상 속 소설을 보고 싶다. 그래서 열심히 몰래 주변을 응시하고 있다. 내 자리는 문 쪽에서 세 번째 자리다. 내 옆으로 2명이 더 앉을 수 있다. 첫 자리에는 미술도구인지 마술도구인지를 잔뜩 들고 있는 여자가 졸고 있다. 그리고 빈 자리. 그리고 나. 한 역을 지나 고등학생 두 명이 탔다. 그 중 여학생은 내 옆 빈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남학생은 자리를 찾지 못해 다른 방향으로 간다. 내 왼쪽 좌석의 승객이 자리를 뜬다. 나는 자리를 스슥 옮긴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같이 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학생의 고맙습니다. 고맙긴. 몇 역을 지나 미술을 하는지 마술을 하는지 모를 여자가 가방끈을 바닥에 질.. 더보기
현우의500자 _47 #현우의500자 _47 푹 잤다. 나에게 조선을 준다고 해도, 아니 고구려를 준다고 해도 나는 이 잠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세브란스 병원 앞을 지나, 두 정거장만 더 가면 내가 내릴 곳이다. 하지만 나는 잠들어버렸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한 손에는 책과 장갑을 들고, 한 손은 코트 주머니에 이러쿵저러쿵 쑤셔 넣은 채 잠들었다.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한 정거장이 더 지나 눈을 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스스로 민망해 한숨과 한웃음을 짓는다. 아무런 꿈도 없이 5분의 시간 동안 푹 자고 난 뒤 나는 말똥해졌다. 피곤했던 것도 아닌데, 버스에서 나는 잠에 빠졌다. 종종 이런 일이 있지만 오늘은 내일보다 새롭다. 버스에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편히 잠들었다. 잠들어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 더보기
현우의500자_48 #현우의500자 _48 눈 앞이 까맣게 보였다가 다시 하얗게 변했다. 숨을 제대로 쉬어보려 해도 등과 가슴을 누군가 꽉 누르고 있는 듯 하다. 친구들이 모여든다. 괜찮냐는 말 한 마디가 내 귀를 스쳐 지나간다. 쿨럭임도 없이 멍하니 몸을 바닥에 늘인 채 누워있다. 엄마한테 옷 더럽혀졌다고 혼 나겠구나.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옷 걱정을 하고 있다. 빨래는 세탁기가 한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전보처럼 들려온다. 코 끝에서 눈물 맛이 났다. 시큰하면서도 달콤한 맛이다. 눈물이 방울방울 흐른다. 눈물이 흐르니 죽은 것은 아닌가 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친구들의 얼굴과 하얀 하늘과 코끼리 코다. 코끼리 코 4개가 보인다. 내가 이렇게 누워 있기 직전에 나는 저 위에 서 있었다. 손을 놓고 타보.. 더보기
현우의500자_46 #현우의500자 _46 이것은 소설이다. 그리고 짧다. 선잠을 잔 탓인지 어슴푸레 새벽이 온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는 모두 잠들어 있다. 옆집의 신혼부부는 어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거지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들 특유의 비릿한 냄새도 벽에 스며들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 불빛에 눈이 부시다. 얇게 뜬 눈 사이 검은 눈동자가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찬물로 세수를 하니 얼굴에 열이 훅 돈다. 발그레 해진 얼굴을 거울로 다시 본다. 다소 커진 눈이지만 아직 눈꺼풀의 영토는 넓다. 출근을 위해 옷을 주삼주삼 집어 입는다. 속옷부터 양복 바지 그리고 와이 셔츠, 허리띠까지. 가슴에서 허리로 내려오는 경사가 둥그렇게 보인다. 장농을 열어 넥타이를 골라 깃을 세우고 .. 더보기
현우의500자 _45 #현우의500자 _45 우연히 시계를 본다.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이 시계는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해진다. 투명한 유리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 시계는 누구의 손을 통해 만들어져, 누구의 손을 통해 옮겨져 나에게 온 것일까. 4시24분이다. 내 생일과 같은 숫자다. 하루에 2번 내 생일과 같은 시간에 시계가 60초 간 멈춰 있다. 초침은 60번을 아무런 생각 없이 움직이지만 나에게는 그 60초의 시간이 내가 살아온 30년의 인생처럼 느껴진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60살이 되었을 때는 1년에 1초 씩 내 삶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 사이 많은 일들은 어떤 형태로 기억으로 남을까. 태어남이란, 결국 우연인 듯 하다. 부모가 없는 사람이 없듯, 배꼽이 없는 사람이 없듯 누.. 더보기
현우의500자 _44 #현우의500자 _44 얼마 전 시내 버스를 탔다. 10시간이 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만사가 귀찮았다. 버스 안의 승객들도 추위가 피부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며,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열정이 흘러나가는 것을 막으며 기댈 곳을 찾고 있었다. 뒷문 앞에 서 있는 나는 멍하니 서서, '내 장갑의 색깔이 왜 이렇게 파랗지?' 따위를 생각하며 주억거리고 있었다. 동교동 삼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렸고, 이윽고 신호가 바뀌었다. 그때 서서히 출발하는 버스의 운전석 쪽에서 여자의 앳된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네. 정말요? 고맙습니다. 진짜 고맙습니다. 야, 나 합격했어. 진짜 포기하고 있었는데 합격했어. 어디에 합격한 것일까. 대학일까. 직장일까. 그곳이 어떤 곳이든 그의 목소리는 버스 안에 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