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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_82 ‪#‎현우의500자‬ _82 가족이란, 같은 치약을 쓰는 사람들이다. 무엇을 먹고 마셨든 같은 치약을 쓴다. 그래서 양치를 마치고 나온 가족의 입에서는 같은 향이 난다.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때도, 또 미움과 시기를 드러낼 때도 같은 향을 내는 입으로 말한다. 누군가가 치약을 다 썼다고 여겨 버리려고 하면, 어머니는 그 치약의 몸통을 무지막지하게 비틀어 버리고는 '앞으로 몇 번의 양치'라는 승전보를 가족에게 알린다. 그리고 어느샌가 누구의 취향인지도 모를 새 치약이 있으면 가족은 또 같은 향을 내는 입으로 가족임을 확인한다. 가족이란, 같이 밥을 먹는 사이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집 밖에서든 집 안에서든 무엇인가를 자신 안에 받아 들이게 되었을 때, 온전히 그것을 가족의 것으로 인정해주는 사이이다. 남자친.. 더보기
현우의500자_81 #현우의500자 _81 이른 새벽이다. 어제의 작업에 고단했던 나는, 10시 경 침낭에 들어가 얼굴 만을 내어 놓은 채 잠이 들었다. 잠을 자야겠다, 는 생각도 없이 잠이 들어버리고는 아침이 어슴푸레 밝아오면 눈꺼풀 위로 새로운 빛이 들었다. 동남아라고는 해도 1월 라오스의 새벽은 스치는 바람이 시기하듯 춥다. 얼굴에 간 밤의 추위가 서리 내려, 바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눈썹을 한 번 으쓱하곤 침낭의 지퍼를 내린다. 피로는 가셨지만 여전히 어제 도서관을 짓기 위해 들었던 벽돌의 무게가 근육 곳곳에 남아 있다. 으, 짧게 신음소리를 내고 1층으로 내려 간다. 라오스인 아저씨와 부인 그리고 학교를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난 첫째 아들이 바짝 모은 모닥불가에 앉아 있다. 모닥불 위에는 검게 그을린 .. 더보기
현우의500자_80 #현우의500자 _80 할매, 오데 가노? 행님하고 내 데꼬 오데 가노? 시장가나? 시장 가서 뭐하는데? 시장가면 맛있는 거 사주끼가? 시장이 오덴데? 할매, 내 팔 아프다. 내 다리 아프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 빨리 가야 되나? 와 그리 빨리 가는데? 빨리 시장가서 맛있는 거 무끼가? 알았다. 할매, 내 손 잡고 가자. 행님아, 내 손 잡고 가자. 시장 아직 안왔나? 요가 시장이가? 할매, 내 저거 사도. 할매, 내 이거 사도. 와 앉노? 할매, 와 갑자기 앉노? 일어나라. 뭐하노? 할매. 뭐 꺼내노? 할매. 우리 밭에 있던 기네. 우리 밭에 있던 것도 같이 시장 왔나? 상추도 왔나? 고추도 왔나? 같이 있으니까 반갑네. 억수로 반갑네. 할매, 뭐하노? 뭐하는기고? 안됩니더. 야들은 내 친굽니더. 가.. 더보기
현우의500자_79 #현우의500자 _79 할머니를 모시러 갔다 오는 길이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는 길,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내가 익숙하다고 해서 그가 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나지막이 형, 안녕이라 외쳤다. 차의 창문은 닫힌 채였고 속도 또한 늦지 않았기에 그에게 내 목소리가 닿았을 리 없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형이다. 그는 항상 우리에게 침을 뱉었다. 왜 침을 뱉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누군가 먼저 바보라고 놀리고 나서야 형이 침을 뱉기 위해 입을 오물거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바보라고 놀리지 않고 형에게 다가가면 오물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어 준다. 친구들에게도 바보라 놀리지 않으면 침을 맞지 않는다고 알려주었지만, 친구들은 꾸준히 .. 더보기
현우의500자_78 #현우의500자 _78 골프를 치는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담장보다 높은 라운드는, 내가 타고 있던 버스와는 다른 세계인 듯 했다. 표정 하나 하나를 살펴보기는 힘든 거리였음에도 그들의 얼굴에 슬픔 따위 없었다. 그 바로 옆의 또다른 입구에는 새로이 입대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보였다. 짧게 자른 머리 그리고 그 뒤와 옆을 따르는 가족들의 모습도. 나는 생각했다. 저들 중 몇몇은 내가 타고 있는 버스를 누워 타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친구의 영혼 없는 몸을 싣고 가는 버스에 타 있었다. 뇌출혈이라 했다. 픽, 하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선 또 다시 쓰러진 친구를 해군은 3시간 동안 부대에 머물게 뒀다고 한다. 마산으로 나와 큰 병원으로 옮겨진 친구의 머리를 열어본 의사는 피범벅, 이라 했다며 친구의 어머.. 더보기
현우의500자_77 #현우의500자 _77 체육복으로 갈아 입고 화장실을 갔다. 비둘기색 체육복을 입고 작은 것을 보려는데 친구들이 화장실을 들어온다. 당시만 해도 친구의 크기가 궁금하던 시절이다. 한 친구가 내 옆에 바지도 내리지 않은 채 서서 내 것(?)을 가만히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것을 가린다. 그 친구가 내 것을 보았는지 보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봤다, 봤다 하며 외치며 양손을 높이 쳐드는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다. 다시 내 것에 집중해서 해결할 일을 하려는데 한 친구가 내 다리 가랑이 사이로 들어온다. 림보를 하는 자세로 내 다리 사이로 들어온 친구의 얼굴이 내게 보였다. 이때다 싶어 나는 나의 그것을 아래로 꺾었다. 그리고 친구의 외침, 봤다 하며 뛰쳐나가는 친구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 더보기
현우의500자_76 #현우의500자 _76 넌 오동동 똥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오동동 아케이드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특히 월급날이면 닭을 통째로 튀겨 내는 기름 냄새와 탁주에서 올라오는 거품들이 푝푝거리며 터지는 소리가 작업복을 입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의 얼굴을 상기시켰다. 몇 만 명은 족히 될 만한 젊은이들의 검은 머리는 파도보다 검게, 파도보다 무섭게 밀려들어왔다. 무엇을 위해 아침을 나서고, 다시 무엇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지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부진 어깨와 조그마한 손 위에 가족의 미래가 중력처럼 올려져 있었다. 너는 그런 오동동 똥다리 밑에서 태어났고, 내가 너를 주워왔다. 지금도 너를 기다리는 엄마가 있다. 얼굴은 다소 흉측하게 생겼을지 모르지만, 미래를 담보로 현재의 답보를 참아내는 젊은 사람들의.. 더보기
현우의500자_75 #현우의500자 _75 당장 브레이크를 잡지 않으면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 순간 앞의 문장이 떠올랐다. 앞바퀴를 오른쪽으로 힘껏 틀며 브레이크를 꽉 잡았다. 여고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비명 소리 사이로 내 옷에서 나는 알싸한 탄 냄새와 머리를 크게 울리는 크크크 소리가 화염처럼 나를 감쌌다. 몇 미터나 미끌린 것일까. 순간 정신을 잃었던지, 눈을 질끈 감아버린 탓에 동공에 압력이 가해졌던 것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앞을 볼 수 있었다. 내 눈 앞에는 여고생들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지도 않은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내 앞으로 갑자기 튀어나왔던 학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나에게 미안하다며 슬픈 얼굴을 짓고 있다. 팔과 다리에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걸을 수 .. 더보기
현우의500자_74 #현우의500자 _74 안녕하세요. 고객님.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흐르네요. 고객님. 어떤 업무로 오셨나요? 고객님. 통장 발급이요. 알겠습니다. 고객님. 여기를 기입해 주시면 됩니다. 고객님. 적으시면서 들어주세요. 고객님. 뒤에 있는 티비에 연예인들과 아이들이 나옵니다. 고객님. 제가 사는 집과 많이 다른 집들입니다. 고객님.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도 다르구요. 고객님. 저도 아이들이 있습니다. 고객님. 우리 애기들 자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고객님. 새벽에 깨워 씻기고 밥 한 술을 떠먹이는데, 오물거리는 그 입에 제 배가 부릅니다. 고객님. 제가 출근을 할 때 아이들이 저를 안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고객님. 엄마, 가지말라며 울며 말합니다. 고객님. 그런 아이를.. 더보기
현우의500자_73 #현우의500자 _73 운전을 할 때 습관적으로 라듸오를 틀어놓는다. 라듸오가 들려 주는 음악이나 이야기 소리에 흔들리는 귓볼을 느끼고 있으면 어두운 방 하나가 떠오른다. 라듸오 디제이는 좁고 어두운 방에 앉아 스탠드 하나만을 켜 놓은 채 원고를 읽고 있다. 원고가 적힌 흰 종이에 반사된 빛이 디제이의 얼굴에 그을음 하나를 남기지 않는다. 디제이는 글자 하나하나를 자신의 목소리로 옮겨 가며 마이크 앞에서 침을 몰래 삼킨다. 왜 라듸오를 들을 때 마다 어두운 방과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하이얀 디제이의 얼굴이 떠오를까. 그건 내가 가졌던 첫 라듸오가 검은 색 금성인 탓이다. 라듸오 뒷면에는 건전지가 들어갔고, 건전지를 빼기 위해 붙여 놓은 붉은 셀로판 테이프가 삐죽이 튀어 나와 있었다. 원하는 방송의 주파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