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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_72 #현우의500자 _72 나는 너와 밥을 먹을 수 없다. 밥 한 끼 먹는 것,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너와 먹는 한 끼 식사의 즐거움보다 그 한 끼의 가격이 더 신경이 쓰인다. 그러지 말라고, 편하게 보자는 너의 그 말에 더욱 너와의 거리는 멀어져 간다. 식사 후, 커피라도 한 잔 하려면 그 커피 한 잔 값이 나의 3일 간 저녁값이 된다는 건 말할 수 없다.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마음이야 산타클로스가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장작이 가득 찬 굴뚝 같지만, 그래도 나는 너의 이름 언저리에 손가락이 머물다 다시 휴대전화를 끄고 만다. 나는 너와 사랑을 할 수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일종의 죄다. 영화 방자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방자에게 유혹을 받는 춘향이 "우리끼리 이러면 안되잖아." 라고 이.. 더보기
현우의500자_71 #현우의500자 _71 어디로 가실 건가요? 크로아티아요. 등기 서류를 붙이러 늦은 오후 우체국을 다녀왔다. 우체국 안은 그날 보내야 하는 서류나 소포를 잔뜩 안고 있는 앳된 여자들이 몇몇 있었고 거의 매일 만나지만 내 눈을 보는 일은 드문 직원분들이 창구 안에 앉아 계셨다. 내 차례가 되어 서류를 하나씩 올려놓고 있는데, 내 옆 창구에서 한 남자가 흰 소포를 전자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슬쩍 곁눈질을 하여 배송 주소를 읽었다. 소포는 내가 읽을 수 있는 방향과 반대로 올려져 있어 영어로 적힌 주소를 쉽게 읽어내려 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로 보내실 건가요? 크로아티아요. 하루 동안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몸과 마음 모두 기진맥진해 있는 내가 한 순간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을.. 더보기
현우의500자_70 #현우의500자 _70 이봐들, 음식이랑 물은 다 싣었나? 아직 타지 않은 선원은 없는거지? 그럼, 닻을 올리게. 오랫동안 닻을 내려 놓았으니 올리기 쉽지 않을걸세. 그래도 천천히 힘을 합쳐 올려 봅세. 닻을 다 올리면 항해사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한 번 다시 점검해보게. 이번에 우리가 가야할 곳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이어야 하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말이야. 내가 선원들에게는 확실히 이야기해두겠네. 이번 항해가 마지막 항해가 될 수도 있다고 말이지.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미련도 없지 않은가. 큰 바다에 나가 무엇을 만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겐 바다보다 넓은 마음이 있지 않나. 만선을 바라지는 말자구. 만선은 곧 욕심의 배네. 굶을 지언.. 더보기
현우의500자_69 #현우의500자 _69 리듬을 붙여,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졌다. 내가 벽 쪽에 자야한다. 자기 전에 마신 소주 덕에 몸은 다소 열을 내고 있다. 집이라는 공간 안에 있었지만 입김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잠을 자기 위한 준비를 위해 더러운 양말과 빨래는 한쪽 구석으로 밀어넣는다. 주인만이 판단할 수 있는 저것들은, 발 밑에 뭉쳐있는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불을 턱끝까지 당기고 각자가 획득한 자리에 눕는다. 좁은 옥탑방에 남자 4명이 어깨를 붙이고 누웠다. 불을 끄고 누워있으면 숨소리만 들린다. 어둠 속에서도, 용이 된 입김이나 램프에서 튀어나온 시간탐험대 바바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하하하하하. 한참을 자던 중, 나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다. 벽에 .. 더보기
현우의500자_68 #현우의500자 _68 4층의 교실에는 자판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린다. 규칙적인 웅웅거림이 사라지면, 다시 고요의 시간이 다가왔다. 12시가 가까워질 즈음 경비 아저씨께서 앞문을 여신다. 스드륵. 아직 집에 안갔나? 예. 쫌만 더 하고 갈라꼬예. 얼른 집에 가라. 집에 갈 때 밑에 불도 다 끄고 가라이. 예. 알겠심니더 12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 교실의 불을 모두 끄고 한 층 한 층 내려가며 복도의 불을 다 끄면 어둠이 공포보다 진하게 밀려온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가끔 열린 창문틈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본관의 문을 나와 운동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학교 음악실이었다가 지금은 전교에서 20등 안에 들어있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기숙사가 된 건물의 불빛이 비친다. 친구들이.. 더보기
현우의500자_67 #현우의500자 _67 울음이 그친 뒤, 우주를 만났다. 눈물로 범벅이 된 손등에 두 눈을 파묻은 채로, 코에 시큰함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가온 우주는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도 잊을 만큼 넓은 세계를 보여주었다. 붉은 선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방사형의 은하수에서 빠르게 도는 작은 별들을 보았을 때 다물어진 입 사이로 와, 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났다. 모든 것을 빨아당긴다는 블랙홀을 몰랐을 때였지만 내가 가진 슬픔과 친구들과의 다툼과 잠을 깨운 사람에게 내는 사소한 짜증들이 내 눈 앞의 우주에서 사라져갔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우주 안에서 삶의 무중력을 느끼며 둥둥 떠다니는 나를 보았다. 귀는 열려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과 그리고 또 적막. 빛과 그리고 또 빛. 단 한 순간.. 더보기
현우의500자_66 #현우의500자 _66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다. 그것이 일본식 오무라이스인 줄을. 토요일 저녁이 되면 형과 나는 할머니집으로 갔다. 그리고 하룻밤을 보냇다. 디낄댁이라고 불리우던 할머니께서는 일본에서 태어나셨다. 광복이 되던 해 한국으로 돌아오시곤 마산에 터를 잡으신 할머니께서는, 내가 기억하는 고향과는 다른 마산을 기억하고 계셨다.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던 동네가 지금은 벚꽃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몇몇 집은 그 모습 그대로, 지금을 잊은 채 과거를 살고 있다. 그런 할머니께서 해주시는 오무라이스는 정말 맛있었다. 햄이 가득 들어가고, 얇게 편 달걀 지단 위 케첩을 뿌린 오무라이스는 할머니께서 해주시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일주일이 마치 그것을 통해 마감되는 느낌이었다. 베개를 말처럼 타고.. 더보기
현우의500자_65 #현우의500자 _65 퇴근시간이라 버스가 만석이다. 버스 안은 따뜻했고 아늑했다. 사람들의 숨에 창문에는 김이 서렸다. 누구의 숨이랄 것도 없이 모두의 숨이 만들어 놓은 스케치북이다. 버스는 또 다른 정류장에 섰다. 앞문이 치이익거리며 열린다. 아기를 앞에 안은, 앳되어 보이는 여자가 탄다. 내 자리에서는 조금 먼 거리다. 엄마는 아기의 엉덩이에 한 손을 받치고, 한 손으로는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어깨를 톡톡 친다. 저기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나는 뒷문 앞에 가 섰다. 그리고 몇 정류장이 지나 내렸다. 나도 아기였던 적이 있다. 누구나 아기였던 적이 있고, 그 아기를 안고서 어딘가 가야할 곳이 있었을 엄마가 있다. 내가 아기와 아기 엄마에게 해줄 것은 없다. 자리를 비켜.. 더보기
현우의500자_64 #현우의500자 _64 잘지내나요여전히그모습그대로잘지내나요한번은만날거라고생각했는데아직은아닌가봐요내리던승강장에서마주잡고있던그손을놓치지말아야했을걸하는생각을전지금도가끔해요은은히풍겨오던그샴푸냄새에손을파묻고아기가살기위해젖을찾듯그대와함께하기위해그대의입술을찾았던내입술은지금도가끔그대이름을힘주어소리내기도하고그대가살던동네를뭇사람들과다르게구슬프게불어보기도해요늦은밤거리를걷던그시간은지금도돌아와어둑한길을걷다보면아무도내옆에없다는시실에소스라치게놀라다시물어보았어요잘지내나요잘지냈나요그모습그대로여전히잘지내나요시를적을감수성따위없어서노래를부를감정따위없어서어딘지어디에있는지모를그리움에슬픔에코끝한편과마음끝한편이아파오지만잘지냈나요어리지는않았지만처음이었던그느낌은이미사라졌나요나만사라진건가요오늘도생각이났어요내가힘든하루를보내고내리던버스에내가내리고난뒤라도좋.. 더보기
현우의500자_63 #현우의500자 _63 슬픔을 동정할 자격 따위 없다. 그렇다고 행복을 가져야만 한다는 값싼 권리도 물론 없다. 마음대로 저 사람은 불행할 것이고 슬플 것이라는, 그런 식의 선입견을 갖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슬픔이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다. 성인 남자의 상체만한 박스를 들고 오는 한 명의 남자를 보았다. 해에 그을린 것인지, 자신을 숨기려는 것인지 온통 검은 옷에 검은 신발이다. 상자만이 자신은 원래 나무였다는 듯, 연한 갈색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위의 얼굴이 있다. 상자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생각해 순간 아래를 보았다. 신발이다. 상자가 트위스트를 추는 것은 신발 때문이다. 아니, 신발이 아니라 다리 때문이다. 다리 길이가 다른 아저씨가 그 길이를 맞추기 위해 한 쪽 신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