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_62 #현우의500자 _62 고모들은 울고 계셨다. 한번도 그런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낮게 깔린 슬픔과 그것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큰 울음소리 사이로 빗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려 슬픈걸까. 할아버지의 얼굴은 무언가가 덮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앉은 자리 앞에 할아버지의 오른쪽 다리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일부러 내어 놓은 것은 아니었을테다. 가까이 다가가 할아버지 다리를 매만져 본다. 차가웠다. 불룩 튀어나온 정강이 뼈를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려 본다. 할아버지의 고함소리도,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온 가족이 울고 있었지만, 나는 혈기왕성하셨던 할아버지가 가만히 계신 것이 더 신경이 쓰였다.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그것이 죽음이라 생각했.. 더보기
현우의500자_61 #현우의500자 _61 공약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학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일은, 내가 바라는 학교의 모습을 생각하는 시도였다. 고민 끝에 대표 공약으로 '성평책'을 내세우기로 했다. 국사 시간에 배운 탕평책이 공약의 사상적 그리고 역사적 기반을 제공했다. 영조와 정조가 시행했다는 탕평책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일종의 대타협 정책이었다. 그렇다면 성평책은? 학생들이 선생님과 학교로부터 성적에 따라 차별을 받는 것을 없애 나가겠다는 의미에서, 성평책이라 이름 붙였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는 해를 마지막으로 고향에선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연합고사가 치러졌다. 앞으로 있을 수많은 모의고사와 수험 생활에 중3 친구들의 기는 이미 죽은 듯 했다. 내 .. 더보기
현우의500자_60 #현우의500자 _60 다음 참가자 나오세요. 안녕하십니까. 권현우입니다. 네. 노래하세요. 아, 예. 외로운 가슴에 꽃씨를 뿌려요. 사랑이 싹틀 수 있게. 수고하셨습니다. 예? 다음 참가자. 다음 참가자요. 관객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20살 때 고향에서 있었던 전국 노래자랑 예선이었다. 시청에서 열린 예선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당시 나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기에, 잠시 시간을 내어 예선을 다녀 왔다. 마이크를 든 손에는 휘발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어릴 적부터 노래 잘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다시는 없을 것 같은 기회라 생각해서 나가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바쁘게 진행되는 예선에서 하얀 무대 위에 꽃씨만을 뿌리고 거두지도 못한 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주유소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 더보기
현우의500자_59 #현우의500자 _59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방향의 쪽문 앞에는 조그마한 담배 가게가 있었다. 가게에 가서 내가 평소 피우던 담배를 달라고 말하며 동전을 꺼내는 척 안을 둘러보면 가게 안은 집이다. 좁아 보이지도 넓어 보이지도 않지만 다소 어두운 느낌의 일본식 집이 보였다. 나는 길가에 서 있고 담배를 파는 할머니께서는 가게 안에 앉아 담배를 건네 주신다. 평범한 날의 하교길이었다. 담배가 떨어져 가게를 들렀다. 할머니와 함께 한 보지 못했던 여성의 모습이 같이 보인다. 가게 안이 평소보다 환해 보였다. 담배 이름을 말하니, 젊은 여성이 담배를 건네준다. 고맙습니다. 몇 발자국을 걷다 멈추길 반복하다, 다시 담배 가게로 갔다. 가슴은 담배를 많이 핀 탓일테지만, 쿵쾅거린다. 할머니께서 나를 올려다 보신다.. 더보기
현우의500자_58 #현우의500자 _58 한 여인의 목놓아 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울음 소리는 도림천을 휘감아 흐르는 물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다. 추적추적 비도 내린다. 여인은 도림천의 중간에 옷을 입은 채로 하반신을 담그고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녀를 위로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 남자 역시 흐르는 물에 자신의 다리를 내맡긴 듯 허리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왜 저렇게 구슬피 울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하필 도림천 가운데 앉아서 저렇게 울고 있었던 걸까. 저녁 산책을 하던 나를 사로 잡았던 슬픔의 무게는 옷을 적시는 비의 무게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허락된 장소가 아닌 곳에서의 슬픔은 다른 사람에게 공감의 대상이 되기 보다 호기.. 더보기
현우의500자_57 #현우의500자 _57 눈길이 잘 가지 않는 곳에 여자 지갑이 떨어져 있다. 검은 바디에 금색 자크가 달린 전형적인 여자 장지갑이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다. 괜히 머쓱하다. 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까. 일단 줍기로 한다.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 조금과 체크카드 몇 장 그리고 주민등록증이 있다. 집으로 들고 와서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가 있을까 보니, 없다. 어떻게 돌려드리지 고민을 하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아파트의 관리소 전화 번호를 찾아 지갑 주인의 호수에 연결해 달라고 해야 겠다 생각한다. 인터넷을 통해 관리소 전화번호를 찾았다. 전화를 해보니 받지 않는다. 모두 퇴근한 것일까. 작년 봄에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캠퍼스 내에서 잃어버린 것임에도 찾지 못했다. 원통스러웠다. 단지 지갑을 잃어버렸기.. 더보기
현우의500자_56 #현우의500자 _56 누구나 신입의 시절을 겪는다. 아기는 신입 인간이다. 유치원이나 초중고대를 다니면서, 적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의 시간은 신입생이 된다. 처음 회사에 들어가서는 신입 사원이다. 누구나 신입을 겪으니 신입의 시기는, 평범하면서 평등하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신입 인간, 신입생, 신입 사원은 각기 다른 모습이 되어 있다. 그 원인은 어떤 선배를 만났는가에 대한 대답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입 아기에게 선배는 부모다. 좋은 부모는 아기를 위해 사랑과 희생을 쏟는다. 신입생에게 좋은 선배는 신입생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신입사원에게 좋은 선배는, 신입사원이 잘하는 것과 관심 있는 것을 알아내어 신입사원이 업무에 흥미를 느끼고, 그를 통해 삶의.. 더보기
현우의500자_55 #현우의500자 _55 책을 읽다, 모든 것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책은 나무가 죽은 뒤의 산물이다. 나무가 죽어 갈기갈기 찢겨진 것을 얇게 펴 만든 것이 종이이고, 그것에 글을 새겨 넣은 것이 책이다. 책에 들어가는 내용 역시 그렇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 적은 책의 내용은 지금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사람들로부터의 직간접의 영향을 받아 적게 된 것이다. 책 뿐만 아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선 식재료의 죽음이 선행된다. 소와 닭과 돼지가, 채소와 곡물이 죽어 지금의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연장의 기회를 준다. 눈에 보이는 것만 그럴까. 지금은 당연히 생각하는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는, 과거의 투사들이 흘린 피의 지도이다. 찢기기도 하고, 죽은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남게 된 최대 혹은 절대.. 더보기
현우의500자_54 #현우의500자 _54 피렌체 대성당 옆 지오토 종탑에 올라가려는 사람들의 줄은 길었다. 붉은 피렌체를 보려는 걸까. 나는 붉은 피렌체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보기로 하고, 피렌체 대성당의 주변을 돌아보았다. 천국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다는 산 죠반니 성당을 에스프레소 한 잔 들고 빼꼼히 바라보기도 하고, 타일로 만들어진 길바닥을 발로 팡팡 소리 내어보기도 했다.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순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마음에 양각으로 남은 하얀 얼굴, 단발의 머리 그리고 가벼운 옷차림의 여인을 보았다. 지오토 종탑에서 들리는 침묵의 종소리가 들리자 내 몸 안팎의 웅성거림은 잦아들었고 나는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갔다. 어떤 사람일까. 질문을 떠올리며 따라가고 있을 때 동행하던.. 더보기
현우의500자_53 ‪#‎현우의500자‬ _53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부랴부랴 이불 밖으로 나와,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께서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보신다. 난 집 밖의 인도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 본다. 아침 태양 빛을 받아 붉게 물든 거리와 하루의 상쾌함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의 상기된 표정들이 보였다. 늦었다는 생각에 가게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어머니께서 부르신다. 어디가노? 나는 나를 깨우지 않은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퉁명하게, 학교를 가야 한다 말한다. 어머니와 가게 손님의 파안대소. 왜 웃으시지? 그제서야 시계를 보니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다. 거리의 붉은 빛들은 아침의 열정이 아니라 저녁놀의 희롱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쑥스러운 경험이었기에 다시 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