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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_22 #현우의500자 _22 "그대는 가진 것이 무엇이냐?" "저는 가진 것이 없사옵니다." "정녕 그대는 가진 것이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껏 살면서 무엇하나 가진 적이 없었사옵니다." "그럼, 다시 묻겠다. 그대가 가지지 못한 것은 무엇이냐?" "첫째로, 재물이었고 둘째로, 애정이었고 셋째로, 건강이었습니다." "그 세 가지 모두를 가지지 못한 그대는 지금 어찌 살아가고 있는가?" "부모의 등에 붙어 기생하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 아비의 젖을 빠는 동물이며 어미의 피를 빠는 동물이라 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부모는 가진 것이 무엇이냐?" "저의 부모는 재물과 상호 간의 사랑과 건강 모두를 가졌습니다." "하나가 빠졌다." "하나가 빠졌다니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대의 부모는 그대.. 더보기
현우의500자 _21 #현우의500자 _21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났다. 어릴 적 동지 즈음이 되면 놀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여름에는 7시 반이 되어도 환했기에 밖에서 놀아도 혼이 나지 않았지만 겨울에 접어들면 6시만 되어도 깜깜해지니 누구를 탓해야할지 몰랐다. 시간은 그대로임에도 내가 볼 수 있는 친구의 얼굴들은 사라져갔다. 억울했다. 야단을 맞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가 내게 장난을 거는 듯 했다. 중고등학교에 올라가서 태양과 지구의 거리와 각도에 의해 여름과 겨울이 생긴다는 것을 배웠기에 망정이지 배우지 않고 살았다면 평생 누군가 형체도 없는 것을 원망했을 것이다.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추운 것. 여름과 겨울의 낮 길이가 다른 것은 결국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조금 멀어지고 토라졌다고 쌀쌀한.. 더보기
현우의500자 _20 #현우의500자 _20 오른쪽, 왼쪽이 없는 슬리퍼가 있다. 찾아보아도 어느 쪽이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알 수 없을 때는 오른발이 들어가는 쪽이 오른쪽이다. 한참을 신다가 벗어두었다. 벗어둘 때 잘못 벗어둔 탓인지 집에 돌아와 신으려고 해보니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엄지발가락 옆을 누르는 미묘한 힘의 변화를 느껴 발을 보면 슬리퍼는 멀뚱멀뚱 왜 나를 쳐다보냐는 식으로 나를 올려보고 있다. 처음부터 네가 나에게 오른쪽, 왼쪽이라는 것을 정해주지 않았냐고, 네 상황이 바뀌었다고 나한테 왜 책임을 물으려 하냐고 따질 듯 하다. 정치적 입장은 그런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터 좌니 우니 하는 것이 정해져 있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익숙해진 것에 좌와 우가 맞춰지는 것이다. 정해지지 않은 것에 우리.. 더보기
현우의500자 _19 ‪#‎현우의500자‬ _19 사람 한 명이 내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크고 생각보다 작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목소리도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해할 정도로 큰 목소리를 가진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작디 작아 자기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사람들은 어느 샌가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감을 잃고 만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더욱 이상한 것은 우리는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확성기나 마이크를 건넨다. 충분히 큰 목소리는 가진 사람에게 확성기를 대어주며 더욱 크게 말하라고 한다. 그 결과 작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진다. 확성기나 마이크는, 처음 만들어질.. 더보기
현우의500자_18 ‪#‎현우의500자‬ _18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믿음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바보', 헛된 기대 속에서 사는 '이상주의자', 때론 '일확천금을 꿈꾸는 왜곡된 천재'라고도 한다. 그들은 지금도 골방 같은 연구실에서 여러 금속과 화학 약품을 이용해 금을 만들고 있다. 연금술사. 금이 아닌 금속으로 금을 만들어 보이겠다고 생각하는 집착은 1천 년 이상 이어져 오고 있으나 그들에게 포기는 없어보인다. 천 년전에도 실패했고, 지금도 실패할 줄 알면서도 그들은 왜 연금술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다. 실패할 줄 모르는 것이다. 결코 실패를 모르는 것이다. 그들에게 연금술은 자기 바로 앞에 있는 어떤 목표이지 저어 멀리 떨어진 이상이 아니다. '한 발자국만 더.. 더보기
현우의500자_17 ‪#‎현우의500자‬ _17 얼마 전 무릎을 다쳤다. 버스를 타기 위해 뛴 것이 화근이었다. 무릎을 다쳤다라고 적긴 했지만 외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 연골이나 인대 쪽에 다소 무리가 간 듯 했다. 파스를 붙였고 지금은 떼어냈지만 아직 무릎이 시큰거리기도 하고 뚝뚝 소리도 난다. 아직 원 상태로 돌아오지는 못한 듯 하다. 무릎이 아프니 걷는 것이 조금 불편하다. 티나지 않게 걷긴 하지만 걸을 땐 아주 조심스레 한걸음 한걸음을 걷는다. 평지는 괜찮은데 계단이 많은 곳이나 언덕을 오르내릴 때는 고통이 있다. 평지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난감할 때가 많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 세상은 계단 천지다. 누구나 오르내릴 수 있지만 자신은 결코 내려 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계단. 그 중 하나는 장애다. 사소하고.. 더보기
현우의500자 _16 #‎현우의500자‬ 한국에서 태어난 게 죄다. 너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 못만나는게 네 탓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거다. 다른게 아니라 틀린거다. 너는 결코 너의 뜻에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아무도 너의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넌 한국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너의 아이디어는 미국에서 했었어야 주목을 받았다. 아무리 너의 사소한 아이디어라도 아이폰 하나를 들고 있는 미국 친구를 사귀었어야 했다. 그 친구가 아이비리그 학생이거나 실리콘 밸리에 사는 학생이면 더욱 좋겠다. 근데 넌 한국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만든 사람에게 돈 10원 주면서 아까워하는 나라이며, 책값 1만원도 아까워 복사해서 보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반갑다. 아이디어 백날 천날 이야기해봐야 어차피 묻힌다. 묻.. 더보기
현우의500자 _15 ‪#‎현우의500자‬ _15 초등학교 1학년 때다. 50세는 훌쩍 넘었을 남자선생님이 담임이다. 왼손에는 짧은 회초리를 들고 계셨고 오른손에 분필을 쥐고 칠판에 판서를 하고 계신 선생님 뒷모습을 보며 숨소리와 발소리를 죽이고 살글살금 걸어간다. 교탁을 지나 선생님이 올라계신 단상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의 엉덩이에다 대고 이렇게 외친다. "똥치미!" 양손을 모으로 검지손가락을 펴 권총모양으로 만들어 선생님의 엉덩이에 꽂아 넣는다. 선생님이 놀라시며 그리고 돌아보시며 '현우 이놈!'하고 분필을 내려놓으시고 회초리를 나에게 휘두르신다. 나는 기다린다. 회초리가 나에게 다가오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회초리가 내게 오는 속도에 맞춰 교실 끝으로 달려나가며 외친다. "홈런!" 칠판 반대편으로 달려가보면 친구 한 명이 .. 더보기
현우의500자 _14 ‪#‎현우의500자‬ _14 손톱발톱은 빨리 자란다. 매번 귀찮아 하루이틀 미루다 보면 어느덧 꽤 자라 일상에 불편함을 주거나 때론 불필요한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이럴 때는 왜 빨리 손톱을 자르지 않았지 하며 손톱깎이를 찾아 자르려 하면 손톱은 나를 빼꼼히 흰 자만 내어놓고 보고 있다. 비겁하게 손가락에 눈동자를 가린 채 흰 자만 보이다니. 나를 째려보고 있는 것일까. 내 몸의 일부이면서 나를 유일하게 째려보고 있는 손톱발톱을 보고 있노라면 난 나쁜 마음이 든다. 손톱깎이로 짧고 강한 고통을 주기보다 치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통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물어 뜯다보면 어느 샌가 만족한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손톱은 검은 눈동자를 보이지 않는다. 붉은 눈시울을 열 손가락 치켜뜨고 나를 노려볼.. 더보기
현우의500자 _13 #‎현우의500자‬ _13 큰 바다에 나가 모비딕을 잡겠다는 소년이 있다. 소년은 태평양을 본 적이 없다. 지도를 펼쳐 푸르게 펼쳐진 바다를 보고 반드시 모비딕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고 확신하는 것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소년은 자신이 모비딕을 잡으러 나갈 때 필요한 배와 같이 바다로 나갈 선원들을 찾아 헤메이는데 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청년이 된 소년은 번듯한 배 한 척도, 자신과 같이 큰 바다에 나가겠다는 선원도 만나지 못했다. 소년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모비딕을 잡아 온 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겠다는 생각을 결코 버릴 수 없다.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아무런 소득이 없이 돌아오던 소년은 가끔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올 때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