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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500자

현우의500자 _33 #현우의500자 _33 잇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한다. 어제의 내가 몇 시에 일어났는지 기억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어제의 기상 시각을 잊는다. 습관이 되어 버린 시간이라면 기억의 노력조차 필요 없겠지만 습관이 되기 전 잊은 것들은 많다. 매일 아침 어제와 다른 하루가 시작되지만 내가 어제 무엇을 했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하루가 시작된다. 어떻게 눈을 뜨는지 부터 시작하여, 어떤 곳에서 내가 잠들어 있는지, 아침 인사는 어떻게 하는지 아니, 그 전에 말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 기억해야 할 일들은 많다. 하지만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을 살고, 오늘에 이어 내일을 사는데 익숙해 있.. 더보기
현우의500자 _32 #현우의500자 _32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헛소리는, 자주 듣다보니 익숙해진 말 중 대표적인 말이다. 누군가는 인간이 가진 '자유 의지' 때문에 우리 스스로에게 왕관을 씌울 수 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이성'의 존재와 '지성'의 발휘가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머리 속에 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화학 작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육체만을 보면 아직 진화의 길은 멀기만 하다. 사람은 잠을 자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리고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리고 물도 마셔야 한다. 이런 신체 활동 중 가장 진화가 덜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배설'이다. 어찌나 인간의 몸은 비효율적인지, 먹은 것을 다 소화시키지 못한다. 찌꺼기는 남고 남아 다리 위와 배 .. 더보기
현우의500자 _31 #현우의500자 _31 성냥불을 붙인다. 가벼운 마찰음이 난 뒤 그 끝에서 불길이 인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불꽃은 천천히 타오르며 어떤 형체를 갖춘다. 간단히 그릴 수는 없는 형체다. 불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에게 그 설명은 너무 어렵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여유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냥의 불꽃은 어딘가에 불씨를 옮기거나 계기가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장난이다. 라이터는 느끼지 못하는 존재의 소멸을 눈 앞에서 보고 있노라면 다음의 것, 다음의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한 시인은 연탄재 발로 차지 말라 했지만, 나는 연탄재에 불을 붙이는 성냥 한 개비를 입으로 불지 말라 말하고 싶다. 내 손으로 훌훌 털어 보내주길. 성냥을 털어 끄면 소리가 난다. 화르락화르락. 불꽃이 새가 되어.. 더보기
현우의500자 _30 #현우의500자 _30 그렇게 외로웠니.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다 나를 만나러 바쁜 걸음으로 뛰어오는 너의 모습은 반가워. 나도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가끔 네가 귀찮게 느껴지기도 해. 넌 너무 욕심쟁이야. 나에게만 손길을 주는 줄 알았는데 내 옆의 그 여자에게도 넌 손길을 주고 있어. 너의 존재를 느끼고 있어. 내 이마에 땀이 흐르기도 전에, 내가 커피를 후후 불기도 전에 너는 나를 와락 껴안고 휘감고 내 몸 곳곳을 너는 희롱하곤 하지. 그만하라고, 사람들이 많으니 그만하라 해도 너는 포기할 줄 몰라.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으니 이젠 너를 사랑해볼까 해. 여름에 태풍처럼 밀려와선 가을에는 스산함을 남겨주고, 겨울에는 네가 없이 잠 한 숨 잘 수 없는 밤을 만드니 나는 너와 헤어지고 싶.. 더보기
현우의500자 _29 #현우의500자 _29 2학기가 끝나고 겨울 방학을 보내고 돌아오면 친구들은 조금씩 성장해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제법 골격이 갖춰지기 시작했고, 여자아이들은 볼에서 피어오르는 수줍음과 가슴에 솟아나는 여성다움을 숨기려 애써 표정을 굳히고 어깨를 수그리곤 했다.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힘이 세 보이는 남자아이 몇 명을 교무실로 보내셨다. 아이들이 들고 오는 것은 새 학기의 교과서다. 박스를 일렬로 세워놓고 열어젖힌 박스에는 새 책의 냄새가 가득 베어있다. 아이들은 한 줄로 서서 한 권씩 책을 집어가며 다음 학기에는 익숙해질 책을 익숙하지 않은 손짓과 눈빛으로 챙겨갔다. 모든 아이가 자리에 앉으면 선생님은 흰 종이 하나를 꺼내셨다. 새 학년의 반 편성이 적혀 있는 종이다. 아이들의 이름과 몇 반인지를 부르는 .. 더보기
현우의500자 _28 #현우의500자 _28 중학교 1학년이었음에도 몸무게는 70kg을 육박하고 있었다. 내가 등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과 동시에 올라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졌다. 혼자 하기 힘들 듯 하여 몸무게가 가벼운 친구 한 명을 꼬셨다. 서로 의지하며 등나무에 올라갔고, 발 밑에서 우둑투둑 등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무서웠다. 하지만 종이비행기는 등나무 곳곳에 있었기에 등나무 위를 걸으며 종이비행기를 줍기 시작했다. 교실 창문에서 친구들은 비행기들의 위치를 친절히도 알려준다. 한참을 줍던 중 잠시 고개를 들어 등나무 중간에 섰다. 이때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 푸른 구름이었고 종이비행기가 날았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는 푸른 구름 위에 서서 친구와 선생님과 시간과 나를 잊었다... 더보기
현우의500자 _27 #현우의500자 _27 학교 전체 방송으로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등나무 위는 하얀 종이비행기에게 점령당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본관을 쓰던 2,3학년 선배들이 창문에 새로운 수복지를 관찰하는 척후병처럼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나는 내가 그런 것이 아닌 것처럼 멀뚱히 서서 내심 뿌듯해 하며 있었다. 교실 앞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오늘 처음으로 종이비행기 던진 놈 누구고?" 처음에 누가 던졌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있을 수 없었다. 우리반 아이들 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아이들까지 가세했던 지라 어느 반에서 시작했는지 선생님들도 모를 수 밖에. 그러니 담임선생님들이 각자의 반에 가서 주범을 색출(?)해 내야만 했다. 우리반 친구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나를 지목했다. "현우가 처음에 했는데요." 그.. 더보기
현우의500자 _26 #현우의500자 _26 중학교 1학년 때다. 당시 학교의 정문에서는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연습장을 나누어 주었다. 학교 인근의 학원이나 교복점의 광고가 앞뒤로 꽉 채워져 있는 꽤나 쓸만한 연습장이었다. 많이 받아올 때는 몇 권씩 받아왔으니 당시 영어 단어는 그 연습장들 속에서 '빽빽이'가 되어 선생님의 손에 넘겨졌다. 빽빽이도 지겨워질 즈음, 창가의 자리에 앉았던 나는 연습장을 한 장 씩 찢어 종이 비행기를 만들었다. 교실 밖으로 고이 접은 종이 비행기를 날리니 멀리 날아갔다. 한 두 장 던지던 것이 한 권을 넘길 정도로 날리고 있을 즈음, 다른 친구들도 가세했다. 오전에 시작한 종이 비행기 날리기가 점심시간과 오후가 되자 후관을 사용하던 1학년들 전부가 창 밖을 향해 종이 비행기를 날렸다. 쉬는 시간만 .. 더보기
현우의500자_24 #현우의500자 _24 아직 부부가 되어보지 않아서 모른다. 부부로 지내는 모습은 언제까지나 간접 경험이다. 그런 와중에도 나에게 직접 경험과 같은 체험을 하게 하는 부부도 있고, 간접 경험을 넘어 호러나 SF영화를 한 편 본 듯한 느낌을 주는 부부도 있다. 언젠가 나도 부부가 되어 실제의 생활 속에서 만나고 사랑하며 둘이 하나가 되는 일을 겪을 수도 있고, 서약의 효약은 죽음의 묘약인 듯하여 서로 죽일 듯한 견원의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 것, 만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 이런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시를 같이 적는 일이다. 답이 없는 것은 결국 시다. 이 시를 적어 내려가는 사람은 두 사람, 그런 의미에서 공동의 시다. 다음.. 더보기
현우의500자_23 #현우의500자 _23_2014크리스마스특집이랄까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저렇게 많은 물질들이 아직도 지구에는 많이 남아 있구나.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것을 파괴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구나. 이 시대가 끝난 이후 지금 '새로움'이 미래에는 새롭지 않은 것이 될 때, 저것들은 다시 새로움의 시작이 될지도. 어떤 사람들은 파괴를 하며 살고, 어떤 사람들은 창조를 하며 산다. 파괴에 힘을 실어주는 시대가 있고, 창조에 힘을 실어주는 때도 있다. 하지만 창조와 파괴는 떨어질 수 없다. 사람에게도 그렇듯이 물질에게도 그렇다. 파괴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끊임없이 분산되고 흩어지고 있다. 그.. 더보기